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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일의 매니저-182화 (183/261)

#182화. 낯선 땅에서 재회

나와 서이렌은 지금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해 태평양 위를 날아가고 있다.

비즈니스석에 나란히 앉은 우리는 둘 다 쉬지 않았다.

나는 노트북을 보며 일을 했고, 서이렌은 영화를 보고 있었다.

나는 서이렌의 어깨를 톡톡 치며 물었다.

“벌써 몇 편째인가요? 안 피곤해요?”

서이렌은 비행기에 탑승한 이후로 쉬지 않고 영화를 시청하고 있다.

“안 피곤해요. 아시잖아요. 내가 피곤할 리가 있나?”

나는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며 그녀가 보고 있는 태블릿 PC를 확인했다.

“뭐 보고 있었어요?”

“참고할 만한 연기가 없나? 좀 보고 있었어요.”

“그래서 찾았나요?”

내 물음에 서이렌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아뇨. 딱 이거다 싶은 게 없더라고요. 내가 생각한 연기 방향이 있긴 한데 그게 맞는지 확신이 안 서서 다른 작품을 참고하려던 거였어요.”

“도착하면 대니 라모로 감독과 상의해 봐요.”

“그래야죠. 근데 대표님은 뭐 하고 계셨어요?”

“이것저것 한국에서 처리할 일들이요.”

스타탄생과 레전드 필름은 내가 없어도 문제없을 정도로 모두 꼼꼼하게 대안을 마련해 놓고 떠났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한국과 화상 회의를 진행할 생각이다.

“도착하면 일주일간은 호텔에서 묵을 겁니다.”

“이후에는요?”

“아티스틱 에이전시를 찾아갈 겁니다. 그쪽에서도 서이렌 씨에 대해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그럼, 제 매니저가 두 명인 셈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그 회사에 한국인 직원이 있나 봐요. 특별히 우리한테 붙여 준다고 했으니 다행입니다.”

“한국인이라니 신기하네요. 남자예요?”

“이름이 찰리 윤이더군요. 남자 같아요.”

“음. 그렇구나.”

“이제 영화는 그만 보고 쉬어요.”

“나 안 피곤하다니까요.”

서이렌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내게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대표님이 쉬면 나도 쉴게요.”

서이렌이 저럴 때마다 귀여워서 심장이 울렁거렸다.

내 심장의 병이 도진다면 그건 분명 서이렌 때문일 거다.

“알았어요. 끌게요.”

나는 노트북을 끄며 웃었다.

서이렌도 그제야 태블릿 PC의 전원을 끄고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담요에 파묻힌 서이렌이 나를 향해 입을 뻥긋거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기에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대표님. 미국에서도 잘 부탁해요.’

나는 서이렌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수화물을 찾고 출국장으로 나왔다.

우리를 위해 트로이에서 차를 보내 준다고 했다.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워낙에 튀는 존재인 서이렌은 곧바로 검정 선글라스와 모자를 썼다.

“잠시만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연락해 볼게요.”

“예. 대표님.”

나는 곧바로 트로이 영화사의 전화번호를 찾아 눌렀다.

그런데 누군가 내 앞에 나타나더니 내 손에 들린 핸드폰을 빼앗아 갔다.

“어? 대니?”

“일찍 나왔네요. 짐 찾고 뭐 하면 30분은 더 이따 나올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대니 라모로는 나와 서이렌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미국에서 체류한 시간이 길어서 그런지 그새 영어가 더 늘어 있었다.

“저나 이렌 씨나 한국 사람이라 그런지 빨리 나오고 싶었어요.”

“하하. 뭔지 알겠네요. 그런데 안 피곤해요? 장거리 비행이라 피곤하죠?”

대니 라모로는 내 뒤에 서 있는 서이렌을 챙기며 물었다.

서이렌은 선글라스를 벗고 그녀의 다크서클 하나 없는 쌩쌩한 얼굴을 보여 주며 답했다.

“전혀요. 오히려 감독님이 피곤해 보이시네요.”

“저야 요즘 강행군이죠. 촬영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까요.”

대니 라모로는 머리 깎을 시간도 없었는지 그의 파마한 것 같은 머리가 어깨까지 길어 있었다.

역시 잘생긴 남자가 머리를 기니까 대충 빗어 넘겨도 멋있구나.

대니 라모로는 확실히 남자가 봐도 멋진 남자다.

그가 서이렌을 향해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를 감독님으로만 대할 뿐이다.

이렇게 또 자신감을 얻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오는 걸 참으며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 이제 나가죠.”

“밖에 차를 대기시켜 놨어요. 호텔로 바로 가실 거죠?”

“그래야죠.”

“이건 서이렌 씨 건가요? 제가 들게요.”

대니 라모로는 자연스럽게 내가 들고 있는 캐리어를 빼앗아 그가 끌었다.

우리는 대니 라모로 감독을 따라 공항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주차장에 진입했는데 그때 누군가 등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미스터 원?”

원? 나를 부르는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정장을 쫙 빼입은 미국인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누구지? 혹시 아티스틱 에이전시에서 보낸 사람인가?

대니 라모로도 잘생긴 거로는 배우 뺨치는데, 눈앞의 남자도 만만치 않았다.

내가 의아해하는데 그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젠셀의 그렉 루이입니다. 한국에서 오신 원세강 씨 맞죠?”

“젠셀에서 오셨다고요?”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서이렌과 대니 라모로는 나를 찾아온 의문의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물음표가 떠 있었다.

“한국의 정 박사님께 연락 못 받으셨나요? 제가 찾아갈 거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이렇게 공항까지 마중을 나오셨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젠셀에서 오셨으면 그럼, 의사 선생님이신가요?”

“예. 의사 면허도 있으니 의사기도 하죠.”

나는 뒤에 서 있는 서이렌과 대니 라모로의 눈빛을 느끼고 그렉 루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렉이라고 했나요?”

“말씀하시죠.”

“저 뒤에 서 계신 분이 제가 아픈 걸 모릅니다.”

“그런가요?”

“비밀로 해 주실 수 있나요?”

“의사로서 환자의 병을 함부로 밝힐 수는 없죠. 당연한 겁니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이렌과 대니 라모로는 궁금했는지 어느새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대표님. 이분은 누구세요?”

“제 친구예요.”

“대표님께 미국에 사는 친구도 있었어요?”

“그럼요. 제가 발이 좀 넓습니다.”

그렉 루이는 우선 대니 라모로 감독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원세강 씨의 미국 친구인 그렉 루이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대니 라모로라고 합니다.”

대니 라모로는 그리스 남신처럼 깎아 놓은 듯한 외모의 소유자인 그렉 루이를 보며 놀란 듯 보였다.

그렉은 뒤이어 서이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이렌이 까만 선글라스를 벗고 그렉 루이의 손을 맞잡았다.

“안녕하세요. 대표님의 친구분이시면 제가 누군지 아시겠네요. 저는 서이렌입니다.”

서이렌이 손을 내밀자 그렉 루이가 빤히 그녀를 쳐다봤다.

뭐,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니지.

나는 또 시작이라며 아무 생각 없이 그렉을 바라봤다.

그렉의 놀란 표정을 보니 아름다운 서이렌의 얼굴을 보고 꽤 놀란 듯싶었다.

대니 라모로는 연적이라도 나타난 듯 서이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렉 루이를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저는 그렉 루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렉 루이는 다시 평소의 냉정함을 되찾고 그녀에게 시선을 뗐다.

그렉은 나를 보더니, 그의 명함을 건넸다.

[젠셀 연구소 소장. 그렉 루이]

나는 그가 연구소 소장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연구소 소장님이셨나요?”

젠셀에서 내게 의사를 보낼 거라고 했지만 그게 연구소장이었을 줄은 몰랐다.

“다른 분들이 계시니 다음에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미국에서 원세강 씨의 건강은 제가 챙길 테니 염려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별말씀을요. 그럼, 다음에 뵙죠.”

그렉 루이는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나는 그렉이 남기고 간 명함을 안 주머니에 밀어 넣고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 우리도 갈까요?”

* * *

미국에 온 지도 이틀이 지났다.

오늘은 에이전시 아티스틱에 갈 예정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담당자인 찰리 윤과도 만나고 미국에서 살 숙소도 소개받을 예정이다.

택시를 탄 나는 아티스틱이 있는 오렌지카운티로 가자고 말했다.

택시 안에서 창밖으로 내다보고 있는데 문자 알람이 울렸다.

나는 문자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젠셀의 그렉 루이입니다. 제 연구실에 시간 날 때 들려 주십시오. 우선 정밀 검사가 필요합니다. 또한 주에 한 번씩은 직접 보고…….]

연애할 때도 이렇게 문자와 전화를 많이 해 본 적이 없다.

그렉 루이는 시도 때도 없이 내게 전화와 문자를 해서 나를 귀찮게 했다.

그는 미국에서 내 주치의가 되어 내 몸을 관리해 준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내 몸을 확인하며 신약 연구도 함께할 거란 것쯤은 잘 알고 있다.

미국에서 나를 위한 주치의가 생긴 건 좋았지만 그렉 루이는 너무 나한테 치대는 느낌이었다.

이제 곧 촬영을 시작하면 바빠질 텐데.

나는 대충 다음 주에 시간이 날 것 같다고 문자를 보내고는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에이전시 아티스틱은 배우와 모델을 백 명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거대 에이전시다.

그중에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할리우드 톱스타들이 즐비하다.

단지 일 년의 단기 계약이며 미국에서는 아직 인지도라고 할 것이 없는 서이렌이었기에 나는 우리를 맡을 담당자에게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저 한국 사람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아티스틱 에이전시에 도착한 나는 비서의 안내를 받아 칠 층으로 갔다.

그곳에는 카페테리아처럼 꾸며진 공간이 있었다.

회사 내에 이런 곳이 있다니 좋아 보였다.

스타탄생에도 한번 만들어 볼까?

미디어팀 옆의 공간을 활용하면 될 거 같은데?

내가 생각에 빠져 있는데 익숙한 한국말이 들렸다.

찰리 윤인가?

내가 고개를 돌리려는데 격앙된 남자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야! 원세강. 네가 여기에 왜 있어?”

나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짜고짜 내 이름을 부르며 윽박지르는 남자를 마주한 나는 깜짝 놀랐다.

“윤건영 씨?”

“너 뭐야? 여기에 네가 왜 있는데?”

윤건영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앞으로 다가왔다.

카페테리아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안녕하셨어요. 윤건영 씨.”

“내가 지금 안녕하게 생겼어? 미국에 네가 왜 왔어? 혹시 윤조 보러 온 거야?”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여기 왔으면 윤조 보러 온 거잖아.”

“오해세요. 정말로 아닙니다.”

윤건영은 윤조의 막내 오빠다.

윤조가 은퇴하고 미국으로 떠났을 때 가족이 같이 갔다고 들었는데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

그렇구나. 찰리 윤이라는 사람이 윤건영이었어.

윤건영은 그 당시에 나와 회사에 불만이 많았다.

스캔들로 힘들어하는 동생을 제대로 케어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나는 그가 나를 이렇게 미워하는 이유를 알기에 할 말이 없었다.

“……원세강, 너 혹시 찰리 윤을 만나러 온 거야?”

“예. 죄송합니다. 윤건형 씨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럼, 설마 네가 한국 배우인 서이렌 씨 매니저였어?”

“맞습니다.”

“하. 일이 꼬여도 개같이 꼬였네.”

“죄송합니다. 저와 일하기 힘드시다면 담당자를 바꿔 달라고 요청할게요.”

에이전시를 바꾸는 건 힘들고 담당자를 바꿔 달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 등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예요? 담당자를 왜 바꿔요? 서이렌 씨는 내 배우예요.”

나는 그 목소리를 듣고 두 눈이 커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굳은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난 몇 년간은 이 목소리만 떠올려도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던 때가 있었다.

구 년 만이던가?

나와 아픈 사랑을 했던 그녀.

윤조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녀는 당황한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아티스틱 에이전시의 찰리 윤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원세강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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