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81화 (182/261)
  • #181화. 5월의 신부

    - 뭐냐? 서이렌 미국 진출함?

    - 대니 라모로 감독이래. 미쳤네.

    - 와. 대박.

    - 진짜였네. 흥해라.

    - 할리우드 박살 내자.

    - 역시 할리우드 진출하네.

    - 커리어 미친 것 좀 보소. 이 타이밍에 할리우드 진출이라니.

    - 저 감독 유명해?

    └엄청 유명해.

    └요즘 뜨는 감독임. 칼레 영화제에서 감독상도 탔어.

    - 주인공은 아니겠지?

    └조연이겠지. 미국에서 처음 데뷔하는 동양인 배우가 주연일 리가.

    └조연이라도 좋다. 스쳐 지나가는 단역만 아니면 된다.

    - 서이렌을 어케 단역에 씀? ㅋㅋㅋ

    └ㅇㄱㄹㅇ

    └ㅇㅈ

    └주인공보다 더 튀잖아요. ㅋㅋㅋ

    - 암튼 진짜 대박이다. 서이렌 더욱더 잘됐으면 좋겠다. 더 잘돼서 전 세계에 선한 영향력 행사했으면 좋겠다.

    - 서이렌 미국 진출한다는 소문 때문에 백지 수표 들고 찾아온 건가?

    └그거 아니라니까.

    └백지수표무새 또 등장했네.

    - 언제 미국 가는 거야? 가기 전에 한국에서 열일해. ㅠㅠㅠㅠ- 서이렌이라면 미국에서도 먹힐 거 같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미국인들도 눈은 있잖아.

    * * *

    오랜만에 TOP 미디어에 온 한지욱의 앞에 박상용 실장이 나섰다.

    한지욱은 미간을 찌푸린 채 박상용을 보며 물었다.

    “김선우가 촬영 현장에 불만이 많던데. 왜 그런 겁니까?”

    “아무래도 액션이 많다 보니까 김선우 배우가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좀비 영화인데 당연히 액션이 많죠. 살살 달래 가면서 찍으세요. 김선우가 원래 찡찡대는 스타일이더군요.”

    “압니다. 그래서 김 감독님도 대역을 많이 쓰고 계십니다.”

    “현장에서 김중성 감독은 어때요?”

    “김 감독님이야 워낙에 베테랑이시니까요. 몇 년간 히트작을 못 내고 작품 활동을 못 하셔서 그런지 이번 작품에 열정이 대단하십니다.”

    “그래야죠. 김중성 감독이 액션에 특화된 감독이라고 해서 특별히 모신 분입니다. 잘 좀 찍어 보라고 하세요.”

    한지욱은 좀비 영화 대탈출의 상황을 브리핑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핑이 끝나자 한지욱은 시나리오 한 권을 박상용에게 들이밀었다.

    “대표님. 이게 뭡니까?”

    “대탈출 시나리오의 후반부를 조금 손봤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런데 이번에 김중성 감독이 시나리오를 이미 한번 손을 본 상태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한지욱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걸 왜 시나리오 작가인 제가 모르고 있는 걸까요?”

    “지난번 월례 미팅 때 말씀드렸었는데요.”

    “난 기억이 안 나는데요?”

    박상용은 기억이 안 난다며 버티는 한지욱을 보며 욕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표정을 숨기며 차분히 답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다음번에는 확실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됐고요. 바뀐 시나리오 좀 봅시다.”

    “지금 가서 출력해 오겠습니다.”

    박상용이 나가자 한지욱은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문을 노려봤다.

    “내가 이곳에 상주하지 않으니 일을 제멋대로 하는군. 이럴 바엔 TOP 미디어를 LOK 건물로 옮기는 게 좋겠어.”

    한지욱은 박상용을 기다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빌딩 숲 사이로 멀리 용산 시티타워가 보였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은 초고층 타워를 본 한지욱은 미간을 찌푸렸다.

    “스타탄생이 시티타워 십오 층이라고 했었나? 원세강이 저곳에서 얼마나 잘난 체를 할지 눈에 선하군. 사람 인생 한순간이야. 우리 아버지 밑에서 매니저나 하던 주제에.”

    한지욱은 스타탄생이 있는 시티타워 건물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박상용이 방금 출력한 따끈따끈한 시나리오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있습니다. 제가 수정된 부분에 마킹을 해 놨습니다.”

    “그래요. 한번 봅시다.”

    한지욱은 대본을 한 장씩 펼치며 수정된 부분을 확인했다.

    초반부는 그대로였는데 중후반부는 마킹이 안 된 곳이 없을 정도로 깡그리 뜯어고쳐 있었다.

    한지욱은 대본이 이렇게까지 바뀌었을 줄은 몰랐기에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더 화가 나는 건 자신이 쓴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박상용은 한지욱의 표정이 굳은 것도 모르고 김중성의 칭찬을 쏟아 냈다.

    “김중성 감독이 이번에 제대로 칼을 갈고 있습니다. 시나리오 수정을 저희도 도왔는데 느낌이 좋습니다. 대표님도 그러시죠?”

    “흠. 확실히 재미는 있군요.”

    “특히 후반부를 싹 뜯어고친 게 제일 잘한 일 같습니다.”

    “…….”

    기분이 팍 상한 한지욱은 다 본 시나리오를 대충 책상 위에 던져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표님. 이제 가시려고요?”

    “내가 있어도 소용이 없지 않나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난 가 볼 테니 다음 회의 때 봅시다.”

    한지욱은 냉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박상용은 그제야 한지욱을 삐친 것을 알아채고 당황했다.

    ‘별걸 가지고 그러네. 암튼 속이 좁아요.’

    박상용은 속으로는 한지욱을 욕하면서 그를 배웅하러 엘리베이터까지 따라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한지욱이 여전히 쌀쌀맞은 목소리로 박상용에게 물었다.

    “박호중 감독 작품은 잘되고 있겠죠?”

    “그럼요. 이제 며칠 후면 마지막 촬영입니다.”

    “그래요. 그쪽은 드라마라서 크게 신경 쓸 것도 없고 좋네요.”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한지욱이 타려는데 박상용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에게 새로운 소식을 들려줬다.

    “소식 들으셨죠? 서이렌이 할리우드에 진출한다고 합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한지욱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할리우드라고요?”

    “방금 기사가 뜬 것 같습니다.”

    “갑자기 생뚱맞게 웬 할리우드?”

    한지욱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럼, 다음 회의 때 뵙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대표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놀란 표정의 한지욱의 모습도 사라졌다.

    박상용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사라진 한지욱을 떠올리며 웃었다.

    “스타탄생을 라이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안 될 소리지.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박상용은 서이렌이 할리우드에 진출한다는 소식을 듣고 놀란 한지욱의 표정을 떠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영화 시나리오도 우리가 일부러 고친 건데. 참나. 그러게, 회사에도 잘 나오고 회의도 꼬박꼬박 참석했어야지.”

    * * *

    두 달간의 작은 아씨들 촬영이 끝나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5월이 됐다.

    오늘은 스타탄생의 개국공신이자 영원한 우리의 팀장님, 빈선예의 결혼식이 열리는 날이다.

    빈선예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마지막 촬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블랙마치도 하루 동안 촬영을 접기로 했다.

    빈선예의 결혼식이 열리는 그랜드 호텔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태양제과와 갤러리스 백화점.

    두 집안과 친분이 있어서 찾아온 정·재계 인사들과 스타탄생 식구들과 연예계 종사자들.

    그리고 그들을 찍으러 온 기자와 팬들까지 합세해서 호텔 앞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빈선예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웨딩드레스를 직접 점검하고 있었다.

    얀 필립이 선물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직접 만든 면사포를 썼다.

    드레스와 면사포를 정리한 빈선예가 자리에 앉으려는데, 스타탄생 식구들이 한꺼번에 신부 대기실에 나타났다.

    “빈 팀장님. 저희 왔어요.”

    빈선예는 자신을 위해 촬영도 접고 달려와 준 스타탄생 식구들을 보며 얼굴이 환해졌다.

    “왔어요? 바쁠 텐데.”

    “바쁜 게 대수인가요? 우리 빈 팀장님이 결혼하시는데 당연히 와야죠.”

    서이렌은 5월의 신부인 빈선예를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늘 너무 아름다우세요. 웨딩드레스도 너무 예쁘고 면사포도 예쁘고 화장도 너무 잘됐어요.”

    “신경 좀 썼어요. 괜찮죠?”

    “괜찮은 정도가 아니에요. 정말 아름다우세요.”

    “고마워요. 이렌 씨.”

    이락은 빈선예가 들고 있는 작은 부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 부케는 좀 아닌 거 같아요. 팀장님. 다른 건 다 십 점 만점에 십 점인데 부케만 오 점짜리인데요?”

    “이거?”

    빈선예는 파스텔 톤의 작약꽃으로 만들어진 부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 그렇게 웃을 때가 아니죠. 당장 부케 만들어 온 사람 데리고 와야 할 거 같아요.”

    “이거 우리 이석이가 만들어 준 거야.”

    “예. 1호 팬 님이요?”

    “그 별명은 인제 그만 좀 불러라. 이석이가 이제 나, 빈선예의 1호 팬이래. 이렌 씨 미안해요. 이렌 씨는 이제 내 뒤예요.”

    빈선예가 너스레를 떨며 웃자 서이렌도 따라 웃었다.

    이락은 빈선예의 곁으로 붙어서 놀라 물었다.

    “이 부케를 1호 팬. 아니 석형이 직접 만들었다고요?”

    “응. 나한테 부케를 직접 만들어 주고 싶어서 주말마다 배운 거래. 한 달 배운 것치고는 꽤 예쁘지 않아?”

    “와. 너무 배신감 느껴지는데요? 어쩐지 내가 주말에 만나자고 사정해도 시간이 없다고 하시더니. 이런 걸 준비하느라 그런 거였구나.”

    이락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 빈선예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빈선예의 앞에 섰다.

    “빈 팀장님. 축하드려요.”

    “원 대표님.”

    빈선예는 나를 보며 누구보다 행복한 신부의 미소로 웃어 줬다.

    “대표님. 6월이면 이제 미국으로 가시겠네요?”

    “한 달 동안 처리할 일을 모두 마무리 짓고 미국으로 가야죠.”

    “촬영은 8월 이후라고 하셨죠?”

    “예. 그렇게 될 거 같습니다.”

    “혼자 이렌 씨를 챙겨야 하실 텐데 안 힘드시겠어요?”

    “미국은 정해진 일정대로 정시에 출근, 퇴근하며 촬영을 한다고 하니까 괜찮을 겁니다. 그리고 혼자 하지 않을 겁니다. 가서 현지 에이전시와 계약할 거예요.”

    “에이전시요? 우리 이렌 씨를 아예 미국에서 활동시키시려고요?”

    “우선 가서 보고 결정할 생각입니다.”

    “그러시구나. 이번 역이 그렇게 큰 역이 아니라면서요? 차차 더 좋은 작품이 들어올 테니 미리 미국에 진출할 발판을 마련하는 것도 좋겠네요.”

    서이렌이 조연이 아니라 진 히로인이라는 것은 나와 서이렌 빼고 아무도 모른다.

    이 비밀은 트로이 영화사에서도 관계자 몇몇과 임원들만 알고 있다고 들었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가 볼게요. 이따 식장에서 봅시다.”

    “언니. 결혼 축하드려요.”

    “빈 팀장님. 떨지 마세요. 오늘 정말 아름다우세요.”

    스타탄생 식구들은 마지막까지 덕담하고 신부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서이렌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빈선예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서이렌은 빈선예의 손을 잡고 그녀가 앉아 있는 신부 의자에 이끌려 앉았다.

    “이렌 씨. 미국은 기회의 땅이에요.”

    “저도 알아요. 잘하고 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말이 아니에요.”

    서이렌은 빈선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빈선예는 순진한 얼굴의 서이렌을 보며 말했다.

    “대표님과 이렌 씨 단둘이 몇 달이나 미국에서 함께 있을 겁니다. 이런 기회는 다시는 없을 거예요.”

    “아!”

    “이번 기회를 꼭 잡아요.”

    서이렌은 진지한 빈선예를 보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놓치지 않을게요.”

    “반드시!”

    “예. 반드시.”

    * * *

    기다리고 기다리던 빈선예의 결혼식이 시작됐다.

    5월의 신부 빈선예는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그녀의 신랑 곽이석은 남자가 봐도 멋졌다.

    빈선예와 누구보다 티격태격하며 싸웠던 이락은 곽이석이 빈선예의 손에 결혼반지를 끼워 줄 때 그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

    부케를 던지며 행복해하는 빈선예를 보고 있자니 감회가 남달랐다.

    그동안 아픈 저의 곁에서 서이렌 씨를, 그리고 스타탄생을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하셔야 합니다.

    내가 그녀를 보며 웃는데 언제나 얼음장처럼 차가운 내 손이 따뜻해졌다.

    내 옆자리에 앉은 서이렌의 손이 의자 아래로 들어와 내 손을 잡은 것이다.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그대로 놔뒀다.

    하늘이 내게 다시 살 기회를 준 거라면 그건 서이렌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제야 어렴풋이 내게 찾아온 모든 기적의 한가운데 서이렌이 있음을 알게 됐다.

    세상은 서이렌과 내가 사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이기적인 내 마음은 이미 그렇다고 결론을 지었다.

    나는 이제 서이렌의 사랑을 막지 않을 생각이다.

    왜냐면 내가 그녀를 더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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