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기다리던 소식
대광그룹 광고 촬영이 끝났다.
현장에 팬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통제하느라 꽤 고생했다.
장우재가 난감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왜 그래요? 우재 씨?”
“바깥에 팬들이 너무 많아서요. 오늘 여기서 촬영한다는 게 낮에 SNS에 다 퍼져서 팬들이 몰려왔다고 하네요. 어쩌죠? 가뜩이나 퇴근 시간이라서 막히는데 잘못하면 도로에 갇힐 거 같습니다.”
장우재의 말대로 대광그룹 본사 앞에는 서이렌을 보겠다고 찾아온 팬들로 인산인해였다.
그때 뒤에서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임지형이 끼어들었다.
“그럼, 제 차를 타고 가실래요? 저도 청운 빌라에 살았던 적이 있어서 어딘지 알고 방문자 등록도 되어 있는데요? 그리고 저 아시죠? 저 임준학 배우님 매니저잖아요. 매니저끼리 서로 상부상조해야죠.”
개소리를 저렇게 정성스럽게 늘어놓다니.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장우재는 눈을 크게 뜨더니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주실래요?”
장우재가 웃으며 고개를 돌리자 내가 그의 어깨를 잡아서 다시 나를 바라보게 했다.
“우재 씨. 나도 방문자 등록증은 있어요. 내가 갈게요.”
“대표님이 직접요?”
“우재 씨가 밴을 몰고 먼저 나가요. 팬들이 따라오면 중간에 차창을 다 열어서 차에 아무도 없다는 걸 보여 주면 됩니다. 그럼, 팬들이 알아서 떨어져 나갈 거예요.”
“그런데 대표님이 직접 가시려고요? 저기 임준학 씨 매니저한테 부탁해 볼까요?”
“그럴 수는 없죠. 이렌 씨를 다른 회사 매니저 손에 맡길 수는 없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자 장우재는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요.”
“지금 바로 떠납시다. 차는 지하 주차장에 있죠?”
“예.”
“이렌 씨는 지금 메이크업 팀이랑 같이 있다고 하니까 내가 가서 데리고 갈게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장우재가 떠나는 걸 보고 고개를 돌리자 화난 얼굴로 나를 째려보고 있는 임지형이 보였다.
네가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건데?
나는 피식 웃으며 그를 지나쳐 갔다.
“작은 아씨들 촬영장에서 봅시다. 임지형 씨.”
* * *
서이렌은 지금 내 차의 뒷자리에 앉아 있다.
광고 촬영 때 입은 의상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화장도 지우지 못한 상태다.
“대표님. 요즘 가는 곳마다 난리네요. 제 인기가 더 많아진 것 같아요.”
“작은 아씨들 촬영장도 힘들어졌죠?”
서이렌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귀에 걸린 귀고리가 반짝거리며 흔들거렸다.
백미러로 서이렌을 힐끔 쳐다본 나는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었다.
“오늘 예쁘네요.”
서이렌은 놀라서 입술을 내밀고 나를 쳐다봤다.
“오???”
“오는 또 뭡니까?”
“감탄사잖아요. 웬일로 저한테 예쁘다고 해 주시는 거죠? 대표님 원래 그런 남자 아니잖아요.”
서이렌에게 지금까지 예쁘다고 말해 준 적이 없던가?
그럴 수도 있겠다.
그동안은 그녀가 내게 너무 다가와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대했으니까.
하지만 속으로는 천 번, 만 번도 더 떠올린 말이다.
서이렌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
“대표님. 이솔 언니한테 온 시나리오 보셨어요?”
“봤습니다. 최병철 감독님의 신작이더군요.”
구원의 밤으로 제2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최병철 감독은 이번에 UPC 엔터테인먼트와 손잡고 신작에 들어간다.
지난번 UPC 엔터테인먼트 공한섭 본부장이 왔을 때 들었는데 서이렌이 계약서에 사인했다면 바로 이 작품으로 스타트를 끊었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서이렌이 거절하고, 결국엔 김이솔에게 주인공 역이 돌아갔다.
스타탄생으로서는 잘된 일이다.
한창 주가가 최고에 오른 최병철 감독님의 신작에 UPC 엔터테인먼트가 밀어주는 신작 영화니 믿을 만하다.
드디어 서이렌이 사는 빌라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 시동을 끄는데 익숙한 알람 소리가 들렸다.
순간 내 눈이 번뜩 떠졌다.
내가 봤던 미래는 이제 완전히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지만 요즘 이상하게 촉이 좋다.
나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내 예상대로 대니 라모로가 보낸 메일이었다.
“이렌 씨. 드디어 미국에서 메일이 왔어요.”
“그래요?”
그녀도 대니 라모로의 연락을 기다렸는지 얼굴이 환해졌다.
나는 여기서 읽을까 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이렌 씨 집에 가서 같이 볼래요?”
“정말요? 우리 집에 오시려고요? 지금 이 시각에?”
“안 되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서이렌은 당장 차에서 내려 앞으로 달려왔다.
내가 탄 쪽의 차 문을 열어 준 서이렌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리실까요?”
“뭐 하는 겁니까? 내가 열어 줘야 하는 거잖아요.”
“누가 하면 어때요? 빨리 내리세요. 시간 없어요.”
서이렌은 내게 훅 다가와 안전띠까지 풀어 줬다.
“포옹 아니에요. 벨트 빼 주는 겁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오해 안 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차에서 내리자 서이렌은 내 손을 잡고 달렸다.
* * *
[원세강 대표님.
너무 늦게 연락을 드렸네요. 대니 라모로입니다.
오늘 드디어 트로이 임원진들과 서이렌 씨의 캐스팅 이야기가 확실히 끝났습니다.
조만간 트로이에서 정식으로 계약서와 함께 캐스팅 제안서가 한국으로 갈 겁니다.
예상하셨겠지만 저의 의지만으로는 생각보다 캐스팅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루나라는 캐릭터가 철저히 비밀이 보장되어야 하는 인물이기에 대중들이 전혀 모르는 신인을 캐스팅해야 한다고 트로이 임원들을 설득했고 결국엔 제가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됐습니다.
영화 촬영은 지난번 말씀드렸던 것처럼 올해 8월 이후부터가 될 것 같습니다.
서이렌 씨는 촬영이 시작하기 전에 미국으로 오셔야 합니다.
미국에 에이전시가 없을 텐데 필요하면 제가 트로이에 이야기해서 좋은 곳을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미국 땅에서 서이렌 씨를 다시 만날 그날을 기다리며.
대니 라모로 드림.]
예상했던 대로 서이렌이 미국에 알려진 스타가 아니라서 캐스팅에 어려움이 있었구나.
그동안 두 번의 패션위크와 칼레 영화제 황금나무상에 빛나는 구원의 밤으로 어느 정도 세계 시장을 두드릴 수 있는 입지는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내 오산이었다.
“하도 연락이 안 와서 잘 안 된 건가 싶었어요.”
“걱정했어요?”
“걱정보다는 트로이의 높으신 분들이 되게 보는 눈이 없다는 생각은 들었죠. 내 연기 영상을 한 번이라도 봤다면 당장 한국으로 달려와서 저를 모셔 가야죠.”
너무 당연하게 말하는 서이렌을 보며 어이가 없기도 하고 맞는 말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습기도 했다.
나는 서이렌을 돌아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작은 아씨들 촬영이 끝나고 5월에 빈 팀장님 결혼식 후에 그때 미국으로 떠납시다. 미국에서 살 곳은 내가 마련해 놓을게요.”
서이렌은 얼굴이 빨개지더니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방금 그 말이요.”
“예.”
“같이 살자는 이야기 같았던 거 아세요?”
“오해가 깊네요. 그런 뜻이 아닌데요?”
“어차피 미국에 단둘이 가면 같이 사는 거 아닌가요?”
“그럴 리가요? 집을 따로 얻을 거예요.”
“예? 진짜요?”
“그럼요. 당연히 그래야죠.”
나는 대니 라모로에게 연락이 오지도 않았는데 어디에서 묵어야 할지 이미 다 검색해 놨다.
캘리포니아 촬영장 근처에 한국과 비슷한 아파트가 있었다.
나는 함께 붙어 있는 아파트 두 채를 빌려서 서이렌과 각각 다른 집에서 지낼 생각이다.
서이렌은 짜증이 났는지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먼저 챙겼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내일 촬영장에서 봐요.”
“이렇게 가는 법이 어디에 있어요?”
서이렌이 따라 일어서자 나는 황급히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보니 서이렌에게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미국에서 두고 봐요. 대표님 생각했던 대로 일이 되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웃으며 핸드폰을 닫았다.
‘내 모든 걸 쏟아부어서 할리우드에서도 최고로 빛나게 만들어 줄게요.’
* * *
육 개월 만에 보는 내 주치의는 미국으로 간다는 내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체류 기간이 얼마나 됩니까?”
“못해도 반년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반년이라…….”
“그래서 약을 좀 많이 타 가려고 하는데요. 대신 정기 검진 때는 한국에 잠시 들어와서 검사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괜찮겠죠?”
“걱정이 되긴 하네요. 지금까지는 문제가 없었는데 앞으로가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거든요. 소위 말하는 약빨이라는 게 있습니다. 처음에는 약이 잘 듣다가 내성이 생기면 약이 잘 안 듣는 경우가 생기거든요.”
“그런가요? 하지만 저는 지난 일 년간 잘 지내 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원세강 환자분은 워낙에 신약이 잘 받는 특이 케이스니까요.”
고민에 빠져 있던 의사가 눈을 크게 뜨더니 말했다.
“혹시 젠셀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아뇨. 처음 들어봅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제약 회사입니다. 원세강 환자께서 복용하고 계시는 신약을 만든 회사이기도 하구요. 그렇지 않아도 그쪽에서 원세강 환자님이 워낙에 특이 케이스라서 연구하고 싶다고 몇 차례 요청하기도 했고요.”
“예. 그랬죠. 제가 너무 바빠서 거절했지만 말입니다.”
“미국에 계시는 동안 젠셀에서 검사를 받으시면 어떨까요? 아마 원세강 환자님을 위해 주치의를 보내 줄지도 모릅니다.”
“저 하나를 위해 주치의를 보내 준다고요?”
“젠셀이 지금까지 끈질기게 연락하는 걸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겁니다. 제가 연락을 해 볼게요.”
“괜찮을까요? 괜히 번거롭게 하는 거 같아서 저는 좀 그런데요.”
“아닙니다. 젠셀에서 분명히 좋아할 테니 제 말대로 하세요. 의사 말을 따라야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가 박사님 말씀을 잘 들어서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거니까요.”
주치의는 내가 미국에서 먹을 약, 육 개월 분량을 처방해 줬다.
진료실 밖으로 나온 나는 고민했다.
젠셀이라.
나를 무슨 실험체로 사용하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인지.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떨쳐 버리고 병원에서 나왔다.
* * *
작은 아씨들 촬영 종료 일주일을 앞두고 캐스팅 기사가 떴다.
[천재 배우 김이솔, UPC 엔터테인먼트 신작 캐스팅]
[구원의 밤 거장 ‘최병철’ 감독. 천재 배우 김이솔과 협업]
[UPC 엔터테인먼트가 제작하는 대작에 최병철과 김이솔이 탑승]
김이솔의 캐스팅 소식에 인터넷이 술렁거렸다.
- 대박이다. 김이솔에 최병철까지.
- 김이솔 언니 팬은 울어요. 언니 기다리고 있는 작품만 이걸로 세 개다. ㅠㅠㅠㅠㅠ- 오아시스도 티저 예고편 떴던데. 김이솔 열일한다. ㅠㅠㅠㅠ- 김이솔이면 믿고 보는 배우잖아.
- 이거 진짜 기대작인데. 대박.
- 최병철 감독님 또 영화제 휩쓰시는 건가?
- 근데 이 작품이 그때 서이렌이 백지 수표 받았다는 그 작품 아닌가?
└그거 아니라니까.
└아닌가?
└UPC에서 아니라고 했음. 그리고 이 작품 아니겠지. 서이렌도 곧 신작 들어간다던데?
- 서이렌도 신작 들어감? 와 완전 소다. 진짜 서이렌은 한 번도 쉬는 걸 못 봄.
- 다른 건 모르겠고 작은 아씨들 때문에 인터뷰한 거 보니까 다음 작품이 있긴 한 거 같은데 그게 뭔지는 모름.
- 뭐지? 드라마인가? 하긴 서이렌이 다시 드라마 할 때가 됐긴 했다.
- 작은 아씨들도 드라마인데?
- 그건 OTT 드라마잖아.
김이솔의 캐스팅 소식에 신나서 떠들던 사람들은 어느새 서이렌의 신작으로 댓글을 달궜다.
스타탄생은 김이솔의 캐스팅 소식과 함께 준비했던 기사를 풀었다.
[서이렌 할리우드 진출, 칼레 영화제 감독상에 빛나는 대니 라모로 신작에 캐스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