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79화 (180/261)

#179화. 선한 영향력

[저는 작년까지 희망 언덕에서 살다가 올해 스무 살이 되어 정착지원금을 받고 나와서 혼자 살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서이렌 언니한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서입니다.

최근에 서이렌 배우님께서 백지 수표를 받았다고 여론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이렌 언니는 정말 착하고 순수한 사람입니다.

언니는 바쁜 와중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봉사 활동을 하러 우리 희망 언덕에 방문하셨어요.

언니는 언제나 저희에게 진심이셨고 저희도 언니를 많이 따랐습니다.

저는 지금 대학생입니다.

정착금 500만 원으로 서울에서 살 곳을 얻고 대학까지 다니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렌 언니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 대학생이 아니라 아르바이트생일 겁니다.

저뿐만 아니라 희망 언덕 출신의 많은 친구가 언니의 후원을 받아 대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언니가 인터넷에서 욕을 먹는 게 너무 안타까워서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됐습니다.

언니는 제가 본 그 어떤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었어요.

이렌 언니를 사랑해 주세요.

마지막으로 거짓말이라고 하실까 봐 인증사진을 남깁니다.

저와 친구들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를 했어요.

이해해 주세요.]

해당 글은 백지 수표 기사가 터진 다음 날 밤에 연예판에 올라온 글이었다.

글쓴이는 인증한다며 희망 언덕에서 서이렌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려놨다.

그 당시에는 주작이라며 믿지 않았기에 조회 수도 두 자리였고, 주작이라는 댓글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오늘 기사가 뜨고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묻혔던 이 글이 다시 뜨게 된 거다.

강진석은 너무 기뻐서 눈에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자신 때문에 백지 수표 건이 기사화가 됐기 때문에 마음고생이 컸을 거다.

“얘 보니까 누군지 알겠다. 이번에 의대 들어간 영주 맞지?”

“그러네요. 영주네요.”

“이렌 씨가 영주를 후원해 준 건 진짜 몰랐어. 이렌 씨도 너무 멋있고, 이렇게 글까지 써 준 영주도 고마워서 어떡하냐? 다 내 잘못인데. 내가 실수해서 벌어진 일인데. 정말 미안하다.”

“괜찮아요. 잘 해결되고 있잖아요. 사람들의 오해는 다 풀린 거 같죠?”

“당연하지. 사람들이 욕한 거 미안하다고 우리 이렌 씨는 천사가 틀림없단다.”

강진석의 말대로 어제까지만 해도 돈독 오른 서이렌이라는 이미지가 한순간에 역전됐다.

“이렌 씨는 어떻게 사람이 저러지? 그것도 일시적인 보여 주기도 아니고 꾸준히 기부한 거잖아. 난 진짜 이번 일로 이렌 씨가 달리 보인다.”

“저도 처음 그 사실을 알고 정말 놀랐어요.”

“이렌 씨는 진짜 천사인가 봐.”

맞다.

서이렌은 내게 찾아온 천사다.

마음씨도 선한 진짜 천사.

* * *

- 판에 올라온 글 봤냐? ㅠㅠㅠㅠㅠ

- 지금은 다른 인증 글이 몇 개 더 올라옴.

- 서이렌 대체 뭐냐. 진짜 천사인가 봐. ㅠㅠㅠㅠㅠ

- 와이 엠 아이 크라잉. ㅠㅠㅠㅠ

- 진짜 감탄밖에 안 나옴. ㅠㅠㅠ

- 언니 ㅠㅠㅠㅠ 내가 많이 사랑해요. ㅠㅠㅠ

- 진짜 대단하다. 이런 마인드 가지려고 해도 가지기가 쉽지 않은데.

- 언니는 얼굴도 이쁜데 마음씨는 더 이뻐. ㅠㅠㅠㅠ

- 인간적으로 정말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함.

- 이런 걸로 언플 할 수도 있었는데 끝까지 아무런 언플 하지 않은 거 진짜 대단해. ㅠㅠㅠㅠ- 여기 왜 다들 울고 있냐. ㅠㅠㅠㅠㅠ- 앞으로 서이렌 까는 놈들 있으면 다 주겨 버릴 거야.

- 기레기 놈들이 제일 악질임.

- 백지 수표 그것도 다 부풀려진 거라며?

└ㅇㅇ

└UPC에서도 아니라고 기사 냈는데 ㅠㅠ

└팬파라치가 제일 문제야.

- 오늘부터 팬파라치 불매운동 들어간다.

- 팬파라치 모기업이 서울신문이야. 거기로 항의하면 된다.

* * *

LOK에서는 폭풍이 휘몰아친 것 같았다.

며칠 전 LOK 블라인드에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한 장이 올라왔는데 그것 때문에 난리였다.

매니저들은 로비의 카페로 내려와 커피를 시켜 놓고 대화를 시작했다.

“고중기 매니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긴 해고되겠지? 스타탄생으로 이직하려는 게 만천하에 뽀록이 났는데 어떻게 계속 LOK에서 다니냐?”

“야. 근데 이직은 할 수도 있지. 나도 숲 엔터로 갈까? 하고 간 보고 있었는데.”

“그냥 이직하려다 걸린 게 아니잖아. 이력서랑 함께 올라온 자기소개서 못 봤어? 이력서에서 LOK 시스템이랑 한지욱 대표 돌려 까서 이 사달이 난 거잖아.”

“하긴 그건 좀 웃겼다. LOK가 요즘 예전 같지는 않다지만 그래도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를 그렇게 씹냐? 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회의 때 의견을 내든지. 회의 때는 입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하고 뒤에서는 자기소개서에 회사가 문제 있어요, 이 지랄. 그러고 다니면 누가 좋아하냐?”

“고 매니저는 이제 끝이야. 블라인드에 올라온 거 다 퍼졌더라. 다른 회사 매니저들도 다 알던데? 뒤에서 회사 욕하고 다니는데 누가 고 매니저를 데리고 가겠어?”

매니저들은 쓰디쓴 커피를 마시며 고중기를 씹었다.

그를 안쓰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거 대체 누가 올린 거지? 본인이 올리진 않았을 거잖아.”

“뻔하지. 그거 강진석이 올린 거야.”

“강진석 퇴사했는데 블라인드 들어올 수 있나?”

“재직 중에 가입한 계정 살아 있겠지.”

“강진석도 독하네. 그래도 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인데 그걸 다 까발리냐?”

“알아보니까 그럴 만하더라.”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럴 만하다니? 혹시 고 매니저가 강진석이랑 원세강 씹고 다닌 일 때문에 그래?”

“아냐. 수년간 씹고 다녔는데도 아무 일도 없었잖아. 이번엔 고중기 매니저가 큰 사고 친 거 맞아.”

“뭐야. 왜 나만 모르는데. 알려 줘.”

말을 꺼낸 매니저는 주위를 둘러봤다.

로비 카페에는 그들뿐이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입을 열었다.

“서이렌 백지 수표. 그거 고 매니저가 제보한 거래.”

“뭐? 진짜야?”

“응. 블라인드에 이력서 올라온 그날, 고 매니저가 화나서 강진석한테 전화하는 걸 내가 들었어. 고 매니저가 강진석이 잃어버린 핸드폰에서 백지 수표 제의받은 메일 보고 기자한테 뿌린 거래.”

“미친놈 아냐? 그걸 왜 뿌려?”

“그래서 강진석이 빡 돌아서 블라인드에 이력서랑 자기소개서 올린 거잖아. 아무리 봐도 고 매니저가 실수했어. 강진석이랑 원세강이 그렇게 미운데 스타탄생은 왜 가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이해가 안 돼.”

“참나. 사건을 다 알고 보니 신기하네. 결국 고중기만 해고되고 끝나겠네. 기사 터진 서이렌은 오히려 더 잘나가게 생겼는데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러네. 요즘 서이렌은 진짜 난리가 났더라. 전 국민한테 까방권을 받게 생겼어. 서이렌 싫어한다고 글 올리면 비추 테러 받는다며? 미튜브에도 인터넷에 굴러다니는 서이렌 미담이 올라온 채널이 수십 개야. 대충 편집해서 올리기만 하면 백만 뷰래.”

“근데 서이렌은 인정이다. 그렇게 버는 돈을 다 기부하는 스타가 어디에 있냐? 난 진짜 감탄했다.”

“그렇게 많이 기부해도 나보다 돈이 많겠지?”

“당연한 걸 왜 물어? 앞으로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기부하겠지. 들어 보니까 광고가 미친 듯이 밀려든다고 하더라. 스타탄생만 대박 났지.”

“야. 입 다물어.”

“왜?”

“고중기 내려온다.”

카페에 모인 매니저들이 깜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커다란 상자를 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고중기를 쳐다봤다.

고중기의 손에 들린 상자에는 회사에서 사용하던 기물이 들어 있었다.

“드디어 짤린 건가?”

“제 발로 나가는 걸 수도 있지.”

“뭐가 됐든지 이제는 진짜 끝이네.”

고중기는 어깨가 축 늘어진 채 터덜터덜 걸으며 LOK 로비를 가로질렀다.

* * *

나는 지금 CF 촬영장에 와 있다.

대광그룹의 이미지광고 모델로 캐스팅된 서이렌의 CF 촬영 때문이다.

대광그룹의 기존 모델인 이락과 윤이슬의 바통을 서이렌이 이어받은 것이다.

서이렌이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차 안에서 태블릿 PC로 업무 메일을 확인했다.

연달아 좋은 소식이 들렸지만,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대니 라모로가 미국으로 간지 어느덧 삼 주가 지났다.

곧바로 연락한다고 했는데 이렇게 늦어지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제작사인 트로이의 반대에 부딪힌 거 같았다.

루나라는 역을 미국에 진출하지도 않는 동양의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이 염려되긴 할 거다.

하지만 대니 라모로가 반드시 서이렌을 루나로 캐스팅하겠다고 했으니 그를 믿을 수밖에 없다.

내가 메일함을 닫으려는데 누군가 차장을 두드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그의 앞에 서서 물었다.

“임지형 씨가 여기에는 웬일이세요?”

오늘 임준학의 촬영이 있을 텐데 임지형은 매니저임에도 불구하고 형을 버리고 서이렌의 촬영장에 왔다.

임지형은 나를 보며 웃으며 답했다.

“대표님은 제가 왜 여길 찾아왔는지 다 알고 계시잖아요.”

“이젠 숨기지도 않네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걸 숨겨서 뭐 합니까? 그리고 이제는 안 숨겨도 됩니다.”

“그건 무슨 뜻이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우리 이렌 님을 좋아하기 때문에 제가 좋아한다고 나대도 표도 안나요. 저길 보세요.”

임지형은 말을 마치고 고개를 힐끔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사람들이 벌 떼처럼 모여 있었다.

오늘 광고를 대광그룹 로비에서 찍는데 서이렌을 보기 위해 직원들이 내려온 것이다.

얼마나 많이 온 건지 스태프들이 촬영 현장을 정리하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확실히 이번 일로 서이렌을 향한 대중의 사랑이 남달라졌다.

지금까지는 아름답고 연기 잘하는 재능 있는 청춘 배우였다면, 이번 일을 계기로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스타가 됐다고나 할까?

“원 대표님. 그거 아세요? 저도 희망 언덕과 키노에 후원을 하고 있습니다.”

“예. 들었습니다. 워낙에 큰 손이라서 모를 수가 없더군요.”

임지형은 재벌 3세답게 상당한 금액을 기부했다고 들었다.

키노는 드림메이커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한 후원금을 벌써 다 채우고 남았기에 이제 더는 후원을 받지 않고 있다.

희망 언덕도 그쪽으로 들어오는 기부금이 너무 많아져서 한국 아동복지 협회와 연계해서 다른 보육원에 기부금을 나눠 주고 있다고 들었다.

“선한 영향력.”

내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임지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서이렌 님이라는 존재가 선한 영향력 그 자체네요.”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임지형이 갑자기 내게 고개를 돌렸다.

임지형은 나를 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역시 이렌 님을 좋아하길 잘했습니다. 언젠가는 꼭 이렌 님도 제 마음을 받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당황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겁니까?”

“그냥 그렇다고요.”

“내가 누군지 몰라요? 서이렌 배우님이 속한 회사 대표예요. 재벌과의 스캔들. 그거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겁니다.”

“그래서 현장에서도 눈치 보여서 가까이 안 다가가잖아요. 쳇. 형은 내가 어디를 가는지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고 있고 촬영장에는 매일 원 대표님이 출근하셔서 노려보고 계시고. 저도 답답합니다.”

임지형은 입을 쭉 내밀고 불만을 토로했다.

네가 그러라고 현장에 출근하는 거다.

나는 피식 웃으며 토라진 임지형을 봤다.

그때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준비를 마친 서이렌이 촬영을 위해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다.

나와 임지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걸어오는 서이렌을 바라봤다.

장우재와 함께 현장으로 걸어오는 서이렌의 뒤에서 후광이 비추는 듯했다.

사람들은 서이렌이 한번만 이쪽을 봐주길 원하며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완벽한 스타.

그녀는 이제 명실상부 대한민국의 최고 톱스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