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78화 (179/261)

#178화. 리얼 엔젤

서이렌의 백지 수표 이니셜 기사를 낸 팬파라치에서는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기사를 작성한 신주원은 데스크 앞에 서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준비하던 기사는 접어.”

국장의 한마디에 신주원이 발끈했다.

“이미 다 썼습니다. 기사를 올리기만 하는데 왜 접으라는 겁니까?”

“접으라면 접어.”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지난번 이니셜 기사는 뷰 수도 대박이 났고, 사람들 관심 끌게 잘 썼다고 하시더니. 갑자기 접으라니요? 혹시 스타탄생에서 고소하겠다고 합니까?”

국장은 인상을 쓰며 신주원에게 말했다.

“우리 모기업인 서울신문에서 연락이 왔어. 대광그룹이 광고를 끊겠다고 했대.”

“대광그룹이요? 거기가 왜요?”

“시끄럽고! 접으라면 그냥 접어.”

잠시 생각에 빠진 신주원의 눈빛이 번뜩였다.

“혹시 서이렌이 대광그룹과 연관이 있습니까? 그런 거죠? 서이렌 스폰서가 대광 사람이군요?”

“말조심해. 대광이 그런 루머에 얄짤없는 거 알잖아.”

“그러니까 더 수상하잖아요.”

“대광그룹 기업 이미지 광고 모델이 서이렌이 될 거래. 그래서 그룹 차원에서 모델 보호에 나섰나 봐.”

“참나. 서이렌은 좋겠네요. UPC 엔터테인먼트에서는 백지 수표를 받고, 대광그룹은 기업 이미지 모델이라고 싸고돌고. 이거 빽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습니까?”

국장은 화가 나서 떠드는 신주원을 보며 심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뭐라고 하는 건가?”

신주원은 그제야 국장의 표정이 굳은 것을 확인하고 입을 닫았다.

“기사는 접어. 그리고 당분간은 나대지 마. 알았어?”

“예. 국장님.”

더는 대들어선 안 된다고 판단한 신주원은 꼬리를 내리고 자리로 돌아왔다.

자신이 처음 쓴 기사는 이미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본 기사로 포털 메인에 올라갔고 대중의 반응도 컸다.

신주원은 커뮤니티에 올라온 대중의 반응을 살피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서이렌? 착한 척은 다 하더니. 뒤에서는 호박씨 까고 다녔나 보네. 대광이 회사 모델이라고 이미지 보호해 줄 게 뭐가 있어? 분명히 스폰이겠지.”

* * *

백지 수표란 단어의 파급력이 컸는지 사람들은 있지도 않은 일을 떠들기 시작했다.

- 서이렌 강남에 건물을 몇 채나 가지고 있다던데?

- 광고도 엄청나게 찍었잖아 그동안 번 돈이 있을 텐데 강남에 건물이 대수냐?

-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서 매입가의 절반을 대출받아서 산 거라는데?

- 그게 문제가 됨?

- 페이퍼 컴퍼니 차린 거면 문제 맞지. 개인 대출보다 회사 대출이 더 나오니까 유령회사 차린 거잖아.

- 잘했네. 대표적인 절세 방법이잖아.

- 절세는 개뿔. 일반인이 그렇게 건물 사도 욕먹는 판국에 공인이 그러면 쓰냐?

- 연예인이 공인은 무슨 공인?

- 페이퍼 컴퍼니는 왜 세웠대 ㅋㅋㅋ 백지 수표에 한 1조 적으면 되겠다.

- 1조면 UPC 엔터 망하는 거 아니냐? ㅋㅋㅋ

- 근데 기사에 나온 페이퍼 컴퍼니 차린 배우는 다른 사람 같은데? 얼마 전에 재벌 드라마 찍은 그분 아님?

- 너 서이렌 팬이지? 갑자기 왜 다른 배우는 끌어들이냐?

- 기사를 봐 봐. 무명으로 보낸 시절이 길어서 힘들었다잖아. 서이렌은 데뷔하자 마다 빵 뜬 거잖아. 서이렌 아니라고.

- 저 기사는 다른 배우를 가리키고 있다고 해도 어차피 서이렌도 마찬가지다. 요즘 배우들이 대출받아서 건물 산 다음에 매각해서 시세차익 챙기는 게 유행이잖아.

서이렌의 팬들은 대중의 반응이 좋지 않자 걱정하기 시작했다.

- 스본은 뭐 하냐? 이상한 말 씨부렁거리는 사람들 다 고소해야지.

- 왜 저러는 거야? 우리 이렌이가 지들 돈을 떼어먹었어? 백지 수표도 아니라는데 왜 자꾸 저렇게 돈 가지고 물고 늘어지냐고.

- 두 여자 아역 촬영했던 보육원에도 시간 날 때마다 봉사활동 다니잖아. 우리 언니 진짜 천사표인데. ㅠㅠㅠㅠ- 스본도 거기에 정기 후원하잖아.

- 개새끼들. 팬파라치는 영원히 아웃이야.

- 언니 지켜. ㅠㅠㅠㅠ

팬들은 기레기의 거짓 기사와 거기에 동조하는 대중의 작태에 분노했다.

그때 누군가 방금 뜬 따끈따끈한 기사를 퍼 왔다.

- 이렌이 오늘 행사장에 왔대.

- 무슨 행사?

- 영화배우 진설이 운영하는 재단 행사라는데?

- 기레기들이 판을 칠 텐데 당분간은 외부 행사는 안 해야지. 스본은 대체 뭐 하는 거임???

- 사진도 떴어. 기레기들이 벌써 잔뜩 몰려갔어. ㅠㅠㅠㅠ- 서이렌 어쩌냐. 멘탈 가루 되겠다. ㅠㅠㅠㅠ

* * *

충무로에 있는 티켓박스 극장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박진숙 이사는 재단 행사에 모인 수십 명의 기자를 보며 마이크를 들었다.

“매해 여는 행사인데 오늘은 유독 많은 분이 오셨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극장을 좀 더 큰 거로 빌릴 걸 그랬나 봐요.”

진설과 박찬영이 운영하는 ‘키노’는 매해 젊은 영화인들을 후원하는 자리를 갖는다.

오늘이 벌써 15회를 맞이하는 영화판에서는 유명한 행사다.

그러나 영화인들이나 알지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행사다.

나도 키노 행사는 오늘 처음 참여해 보는 거다.

나는 박진숙의 뒤에 서서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는 기자들을 확인했다.

모두 하이에나처럼 ‘물어뜯을 게 어디 없을까?’ 하는 굶주린 눈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박진숙은 준비한 대로 행사를 진행했다.

키노가 후원하는 젊은 영화인들이 만들게 될 독립 영화 열 편이 극장 스크린에 하나씩 소개되기 시작했다.

자신이 만들 영화의 소개 문구가 뜰 때마다 앞자리에 나란히 앉은 감독들은 긴장한 채 스크린을 쳐다봤다.

드디어 모든 소개가 끝나고 오늘을 위해 특별히 온 고명수 감독이 단상 위로 올라갔다.

고명수도 키노를 통해 학생 때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고명수는 젊은 영화인들을 불러서 한 사람씩 지원금 봉투를 전달했다.

행사에 관심이 없는 기자들은 서이렌은 언제 나오냐며 불만을 터트렸다.

“서이렌 보려고 온 건데 오늘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가지는 않겠죠?”

“그러게요. 얼굴 한번 보기 되게 힘드네요. 이제 영화판 스타라 이거죠?”

“백지 수표까지 받은 몸이신데요. 크큭.”

기자들은 행사가 방해될 정도로 자기들끼리 사담을 늘어놨다.

젊은 영화인들에게 지원금을 모두 전달하고 난 뒤, 박진숙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키노는 많은 선배 영화인들의 후원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오늘 키노를 후원해 주시는 선배 영화인들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모두 박수로 맞아 주십시오.”

두 번째 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던 사람들이 나란히 일어섰다.

업계의 유명한 영화감독과 배우들이 후원자로 박수를 받았다.

그중에서도 서이렌이 인사를 하자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가장 컸다.

하지만 기자들은 무례하게 사람들의 박수를 끊고 서이렌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서이렌 씨. 기사가 사실입니까? 정말로 백지 수표를 받으셨어요?”

“UPC 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하실 건가요?”

“백지 수표를 돌려보내셨다는데 사실인가요?”

극장에 모인 사람들은 기자들의 무례함에 얼굴이 굳었다.

박진숙은 기자들의 질문 세례가 쏟아지자 당황해 아무 말도 못 했다.

보다 못한 내가 앞으로 나가 그녀에게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이제 내가 알아서 할게요.”

단상 앞으로 나간 나는 기자들을 무시하고 오늘의 행사를 진행했다.

“키노를 후원해 주신 영화인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꾸준한 후원으로 키노가 젊은 영화인들을 도울 수 있도록 해 주신 분들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내가 그들에게 인사를 하자 객석에서 사람들이 손뼉을 쳤다.

그러나 기자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참나. 이런 걸로 무마하려는 거군요. 대중이 바보인 줄 아나? 이런 게 먹힐까요?”

“그러게요. 백지 수표를 받는 대스타께서 딸랑 돈 몇 푼 후원하고 후원자에 이름을 올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렇겠죠. 당연한 거 아닙니까.”

선배 영화인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스크린으로 손을 들었다.

내가 손짓하자 극장의 대형 스크린에 오 층짜리 건물 조감도가 떴다.

[드림메이커 프로젝트]

“키노는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드림메이커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키노를 만드신 진설 배우님과 박찬영 감독님께서는 젊은 영화인들이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영화 스튜디오를 만들고 싶어 하셨습니다.

각자 마음과 뜻이 맞는 영화인들이 이곳에서 만나 영화를 만드는 것이 그분들이 소원하시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뜻하지 않게 기자님들이 많이 오셨으니 드림메이커에 대한 기사를 많이 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자들은 당연하게도 드림메이커는 관심도 없었다.

드림메이커는 진설과 박찬영이 후배들에게 보내는 선물이다.

구원의 밤이 역대급으로 성공하자 오랫동안 책상 안에 고이 간직해 놨던 프로젝트가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서이렌이 백지 수표를 받아 후원하겠다는 것이 바로 이 프로젝트였다.

나는 드림메이커가 뭐냐고 비웃는 무례하고 저급한 기자들에게 내가 준비한 다음 자료를 소개했다.

[드림메이커 후원자 명단]

드림메이커의 첫 삽을 뜨면서 이 프로젝트에 후원해 주신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떴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영화감독과 배우부터 전 문화체육부 장관까지.

이름만 들어도 잘 아는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프로젝트를 후원하신 분들의 이름과 후원금액은 나무에 새겨서 드림메이커 로비에 전시하기로 했다.

수많은 후원자 중에서도 마지막에 이름이 올라간 서이렌의 이름이 가장 눈에 띄었다.

[서이렌: 20억]

기자들은 이십억이라는 후원금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십억이라고?”

“이거 신종 탈세 수법인가? 이십억을 후원한다고?”

행사장에 모인 기자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우리가 준비한 기사가 대중에게 공개됐다.

* * *

[진설 영화인들을 위한 꿈의 스튜디오 만든다…… 서이렌 거액 20억 투척.]

- 뭐냐? 진짜로 20억이라고?

- 저거 믿을 만한 기사 맞아?

- 강유미 기자가 쓴 거잖아. 저 기자는 기레기 아님.

- 대단하다. 20억이래.

- 이거 언플 아님?

- 누가 언플로 20억을 태워?

- 기사 봐 봐. 이미 지금까지 키노 재단에 10억 넘게 후원했대.

- 야. 다른 기사도 떴어. 서이렌이 보육원에도 후원한대.

- 뭐야? 진짜로 언플인가?

- 갑자기 이런 기사가 한꺼번에 터진다고?

- 기사 뜬 거 봐 봐. 언플 아닌 거 같음.

[서이렌. 두 여자를 촬영했던 보육원의 명예 후원자로 올라.]

- 와. 쩐다. 보육원에도 20억 넘게 후원했대.

- 저기 두 여자 나온 곳이잖아. 대박. 지금까지 봉사활동 다니더니.

- 서이렌은 천사인가? 천사가 틀림없다. ㅠㅠㅠㅠㅠ

- 대박. 그러면 오늘까지 총 50억을 기부한 건가? 서이렌이 그만큼 벌었다고?

- 스본이 이 악물고 언플하는 거 같다. 서이렌이 이렇게 천사예요. ㅠㅠㅠㅠ- 강유미 기자 폭주하네. 다른 기사도 떴음. 서이렌이 지금까지 번 돈의 10분의 1만 가지고 나머지는 다 기부했대.

- 착한 십일조네. 인정 ㅋㅋㅋ

└십일조 ㅋㅋㅋ

└ㅋㅋㅋㅋ

- 이거 언플 아니지? 다 사실이지?

- 기사 봐 봐. 언플이라고 뭐라고 할까 봐 명세서까지 다 풀었어.

- 대박이다. 서이렌이 백지 수표 받았으면 그것도 다 기부했을 삘이네.

- UPC는 서이렌이 거절한 걸 고맙게 여겨야 하네. 하마터면 UPC 거덜 났을 뻔. ㅋㅋㅋ? UPC 기둥뿌리 뽑힐 뻔.

└ㅇㄱㄹㅇ

- 서이렌은 진짜로 1조라고 적고 그거 다 기부했을 거 같다. 미친 ㅋㅋㅋㅋ- 어제 백지 수표 처음 올렸던 게시글 들어가 봐라. 지금 댓글이 실시간으로 지워지고 있어. ㅋㅋㅋ? 미안. 내가 지웠다. 난 진짜 서이렌이 돈독 오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회개한다. 나도 오해했어. ㅠㅠㅠㅠ

* * *

행사를 마치고 스타탄생으로 돌아온 나를 강진석이 맞이했다.

내가 행사장에 가 있는 동안 강진석은 깡기자와 함께 기사를 올리고 대중의 반응을 모니터링했다.

“행사는 잘 끝났어?”

“처음에는 기자들이 무례하게 굴고 그랬는데 행사 중간에 기사가 뜨면서 반응이 돌변하더군요.”

“그렇구나. 대중들도 마찬가지야.”

“반응이 어떤가요?”

“장난 아니야. 우리 이렌 씨가 하늘에서 잠깐 지상으로 내려온 천사란다. 어제까지 씹던 댓글이나 게시글도 다 삭제되고 있어.”

“다행이네요.”

“그리고 지금 팬파라치도 난리 났다더라. 내 친구한테 들어보니 대광그룹에서 광고 다 끊겠다고 으름장을 놨나 봐.”

“대광그룹이라고요?”

내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임지형이 손을 쓴 건가?

그가 아니라면 대광그룹이 우리를 위해 나설 일이 없는데.

내가 생각에 빠져 있는데 강진석이 내게 태블릿 PC를 보여 줬다.

“그리고 이것 봐 봐. 이 게시글이 지금 제일 난리가 났어.”

“뭔데요?”

나는 강진석이 건네는 태블릿 PC로 시선을 돌렸다.

연예판에 올라온 게시글이 떠 있었다.

[저는 희망 언덕 출신의 스무 살 대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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