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77화 (178/261)

#177화. 패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형님 때문이라뇨?”

강진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하. 내가 미친놈이다. 네가 패턴을 바꾸라고 했을 때 그랬어야 했는데. 게을러터져서 그걸 안 바꾸고 있다가 이 사달이 났어.]

“형님. 누가 안 따라오니까. 좀 천천히 말씀해 보세요. 패턴이 뭐요?”

강진석이 심호흡하는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강진석은 몇 번이나 자신의 가슴을 치고는 이 일이 왜 일어나게 된 건지 설명했다.

[지난주에 블랙마치 때문에 MBS에 갔었잖아. 기억나지?]

“그럼요. 형님이랑 저랑 같이 갔었잖아요.”

[그때 내가 MBS 회장실에서 내 핸드폰을 깜박하고 놓고 나왔어. 근데 내가 핸드폰으로 마지막으로 보고 있던 게 UPC 공한섭 본부장이 보낸 메일이었거든.]

“공한섭 본부장이요?”

내가 분명히 거절의 의사를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형님께 접근했구나.

“그럼, 그 메일을 누가 본 건가요?”

[내가 핸드폰을 다시 찾으러 화장실에 가 보니 고중기가 거기 있더라고.]

LOK 고중기?

순간 내 두 눈이 커졌다.

LOK에 다니는 동안 법인 핸드폰을 썼던 강진석은 LOK에서 사용하는 법인폰 패턴을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혹시 방금 말씀하신 패턴이 핸드폰 잠금 패턴인가요? 그거 안 바꾸셨어요?”

[미안. 내가 바꾸려고 했는데 익숙지 않아서 돌려놨어. 아무래도 고 매니저가 내 핸드폰 잠금을 풀어서 공한섭 본부장이 보낸 메일을 본 거 같아. 걔가 아니면 이 사실이 새어 나갈 일이 없잖아.]

나는 방금 올라온 기사의 작성자를 확인했다.

팬파라치 신주원.

신주원이라면 몰락한 천재용이 키우던 기레기 후배다.

나는 입술을 깨물러 강진석에게 말했다.

“형님. 저는 홍보팀과 상의해서 이 기사를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해 볼게요.”

[그럼, 나는 뭘 할까?]

“형님은 블랙마치 때문에 현장에 계시잖아요.”

[그래도 내가 벌인 일인데. 내가 수습해야지.]

“아직 형님 핸드폰의 메일이 유출됐다는 증거가 없잖아요.”

[증거가 뭐가 필요해? 정황상 고중기가 확실하다고.]

“그럼, 거기서 하나만 알아봐 주세요.”

[뭘 할까? 뭐든지 말해 봐.]

“팬파라치 신주원 기자가 최근에 고중기 매니저와 만난 적이 있는지? 그것만 확인해 주세요. 형님 고등학교 선배 중에 팬파라치 기자가 있다고 하셨잖아요.”

[맞아. 내 친구 동수가 팬파라치 기자야.]

“소문을 흘린 게 고중기 매니저인지 확인되면 바로 알려 주세요.”

[알았어. 내가 진짜 그 자식이 범인이면 다 조져 놓을 거야.]

강진석은 그제야 전투력이 불타오르는지 씩씩거렸다.

전화를 끊은 나는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백지 수표를 받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함부로 그런 적이 없다는 식으로 언플을 할 수는 없었다.

기사의 반응을 살펴보니 벌써 서이렌이라는 이름이 톱스타 S 씨로 거론되고 있었다.

톱스타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돈으로 입방아에 오르는 것처럼 꼴사나운 것이 없다.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

내가 고민하는 그때 옆에서 이야기를 잘 듣고 있던 서이렌이 말했다.

“제가 백지 수표를 받았나요?”

“이렌 씨.”

나는 몸을 돌려 서이렌을 쳐다봤다.

서이렌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받았는데 거절했어요. 말 안 해 준 거 미안해요. 이렌 씨가 알아 봤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 기사는 바로 내려갈 겁니다. 이렌 씨 활동에는 전혀 문제없도록 내가 다 알아서 할게요. 걱정하지 마요.”

“백지 수표면 제가 원하는 금액을 적는 거죠?”

“그렇죠.”

“아. 너무 아까운데요?”

“아깝다고요?”

“그 돈만 있으면 좀 더 투자할 수 있었을 텐데.”

“방금 투자라고 했나요?”

나는 놀란 눈으로 서이렌을 응시했다.

서이렌의 입에서 투자 같은 현실적인 용어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지금까지 서이렌이 번 돈은 깔끔하게 다 정산을 해 줬다.

그녀가 마네킹이든 뭐든 돈 문제는 완벽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렌 씨. 혹시 지금까지 받은 정산금으로 투자했어요?”

“당연하죠. 그냥 묵혀 둘 수는 없잖아요. 왜요? 이상해요?”

아니라고는 말을 못 하겠다.

“이렌 씨는 그냥 은행에 넣어 두고 신경 쓰지 않고 살 거라고 생각했어요.”

“에이. 돈은 쓰라고 있는 거죠. 은행에 쌓아 두면 뭐 하나요.”

“혹시 어디에 투자했는지 말해 줄 수 있어요?”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진짜로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진지한데 서이렌은 아무것도 아니란 표정으로 웃으며 답했다.

“진설 대표님이 운영하시는 재단에 투자하고 있어요.”

“재단이라고요?”

“거기 말고도 스타탄생에서 후원하는 보육원 있잖아요. 희망 언덕. 거기에도 투자하고 있어요.”

희망 언덕은 두 여자의 아역 촬영을 진행하면서 알게 된 곳이다.

스타탄생은 드라마를 인연으로 촬영이 끝난 후에도 정기적으로 희망 언덕에 후원하고 있다.

진설이 운영하는 재단 ‘키노’ 역시 젊은 영화인들을 위한 비영리 단체다.

영화인들을 도울 뿐만 아니라 불우 청소년들이 무료로 영화를 관람할 수 있도록 영화 티켓을 지원하는 사업도 한다.

“지금 말한 게 투자라고요?”

“그럼요. 투자죠. 사람한테 투자하는 게 제일 좋은 거 아닌가요?”

찰나였지만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하는 서이렌의 모습을 상상했던 내가 너무 싫고, 그녀에게 미안했다.

“그럼, 내가 정산해 준 돈을 모두 그렇게 투자했다는 건가요?”

“제 몫도 남겨는 뒀어요. 저도 원칙이 있어요.”

“무슨 원칙인데요?”

“십일조요. 번 돈의 10분의 1을 남기고 모두 투자한다.”

내가 아는 십일조는 그런 게 아닌데.

서이렌은 완전히 반대로 시행하고 있었다.

웃으며 말하는 서이렌의 뒤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정산금의 10분의 1만 남겼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번 돈이 꽤 될 거다.

지난 삼 년간 워낙에 서이렌의 출연료가 급격하게 올랐으니까.

그래도 그 많은 돈을 저렇게 쉽게 사람들에게 투자한다는 생각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내 배우, 서이렌이니까 가능한 거겠지.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왜 웃어요? 대표님?”

“그냥요. 일이 잘 해결될 거 같아서요.”

“그래요? 어떻게 해결하실 건데요?”

“내가 해결하는 게 아닙니다.”

“???”

서이렌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눈앞에 있는 리얼 엔젤.

당신이 해결하는 거야.

* * *

기사의 파장은 컸다.

사람들은 톱스타 S 씨 기사를 보며 서이렌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갑론을박 싸우고 있었다.

- 백지 수표래. 와. 어나더월드네.

- 시발. 백지 수표가 실제로 발행되는 거였냐?

- 영화 다섯 편 찍고 백지 수표 받는 거면 할 만한데? 망작이든 졸작이든 대충 찍고 은퇴하면 되겠다.

- 서이렌이 그만큼 스타성이 있으니까 백지 수표도 받는 거지.

- 서이렌보다 훨씬 대단한 톱스타들도 뻔뻔하게 백지 수표를 요구하지는 않음.

└서이렌이 요구한 게 아님. 영화사가 준다고 한 거잖아.

└그거나. 그거나.

- 이제 삼 년 차 아닌가? 대단하네. 무슨 서이렌이 월드 스타도 아니고. ㅋㅋㅋ- 뜨자마자 돈 이야기 나오는 스타 중에 오래가는 사람 못 봤음.

└ㅁㅈㅁㅈ

└2222

└33333

- 서이렌 정도면 백지 수표 받을 만하지 않나?

- 서이렌 무시하네. 다들 열폭하냐? ㅋㅋㅋ

- 스본은 뭐 하냐? 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 이니셜 기사인데 스본이 정정 기사 내면 톱스타 S 씨는 서이렌이라고 땅땅하는 거나 다름없잖아.

- 이미 다들 서이렌이라고 확정하고 물어뜯고 있는데? ㅋㅋㅋㅋ

* * *

전화를 끊은 강진석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아. 고중기 그 새끼를 어떻게 하면 좋지?”

강진석은 방금 팬파라치에 다니는 선배와의 전화 통화로 고중기가 얼마 전에 팬파라치의 신주원 기자와 따로 만난 것을 확인받았다.

강진석의 선배가 팬라파치가 있는 여의도 근처 식당에서 직접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강진석은 고중기에게 당장 전화할까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내려놨다.

“전화로 싸워 봤자 무슨 소용이냐.”

강진석은 아까 점심 먹으러 나갔다 오면서 새로 산 핸드폰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지문인식이 풀리면서 잠금이 풀렸다.

강진석은 블라인드 앱에 로그인했다.

LOK를 퇴사하기 전에 가입했기에 LOK 직원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강진석은 당장 블라인드에 새 글을 팠다.

[스타탄생으로 이직하려는 매니저]

간단히 제목을 적은 강진석은 내용은 없이 달랑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두 장을 첨부 파일로 올려놓고 게시글을 올렸다.

“고중기 네가 걸어온 싸움이다. 어디 한번 좆 돼 봐라.”

강진석이 고중기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올리자 게시글에 순식간에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 * *

저녁 8시가 되자 스타탄생의 매니저팀이 모두 모였다.

빈선예도 굳은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다음 달이면 결혼하는 새신부가 너무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있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나는 매니저들을 불러 모으고 이번 사태를 해결할 방안을 설명했다.

“UPC 공한섭 본부장과는 이야기가 잘됐습니다. 백지 수표를 주며 제의한 적도 없고, 우리도 그런 제의는 받아 본 적이 없다고 기사를 내기로 했습니다.”

내 말을 듣자마자 조장훈 팀장이 손을 들었다.

“그런데 소문에 의하면 팬파라치 신주원 기자가 우리가 주고받은 메일을 손에 넣었다고 하던데요?”

“그것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해킹당했다고 할 겁니다.”

“대중이 그런 말에 속을까요? 그냥 백지 수표를 받은 적은 있지만 거절했다고 하면 안 되나요?”

“우리로서는 그게 제일 좋죠. 하지만 UPC에서 거짓말을 해 주길 원합니다. 그쪽과 함께 일한 적은 없지만, 미래를 위해 UPC 의견을 들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이 회의 전에 UPC 엔터테인먼트의 공한섭 본부장과 만났다.

공한섭뿐만 아니라 UPC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인 김주성도 나를 만나러 직접 이곳에 찾아왔다.

UPC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이 일을 해킹으로 인한 해프닝으로 처리해 주길 원했다.

어차피 대책이 있는 나는 그러겠다고 하고 대신에 이번 일은 우리가 손해 보는 거니 UPC 엔터테인먼트에 차차 갚아 달라고 했다.

김주성은 빚을 지는 건 싫지만, 이번 일은 그들의 실책이라며 그러겠다고 했다.

회의 내내 말이 없던 강진석이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이렌 씨가 지금 욕먹고 있는 건 그대로잖아. 지금 백지 수표 문제가 아니라 톱스타 출연료가 너무 높다면서 이렌 씨가 대표로 욕받이가 되고 있다고.”

강진석의 말대로 최근 제작사들은 천정부지로 뛰고 있는 톱스타의 출연료 문제로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그들은 서이렌과 ‘백지 수표’라는 좋은 먹잇감이 생기자 그걸 빌미로 톱스타 고액 출연료와 엮어서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우리가 다른 배우들처럼 지분을 요구한 것도 아니고. 업계 수준에 맞게 받은 것뿐인데. 괜히 우리 이렌 씨만 가지고 욕하고 있어.”

강진석은 화를 내며 생수를 들이켰다.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의 매니저들을 보며 안심하라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대책이 있습니다.”

조장훈 팀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무슨 대책이요? 해킹이라고 기사를 내는 거 말고도 다른 게 있습니까?”

“저도 이런 언플은 해 본 적이 없어서 조금 부끄럽지만, 이렌 씨를 좀 띄워 줘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말에 회의실에 모인 매니저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눈에 물음표가 그려진 그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른바 엔젤 프로젝트.”

* * *

춘천의 요양 병원에 있는 진설은 박찬영 감독과 함께 병원의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확인한 진설이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진설 대표님.]

“그래. 나야. 원 대표. 무슨 일이야?”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괜찮아. 아침 먹고 박 감독님과 산책 중이었어.”

[감독님은 잘 계시죠?]

“그럼, 여기 온 뒤로는 많이 좋아지셨어. 이제는 가끔이지만, 휠체어에서 일어나서 걸으실 때도 있고.”

[다행이네요.]

“말 돌리지 말고. 용건이나 빨리 말해. 이렌이 때문에 도와 달라는거지?”

[예. 맞습니다. 진설 대표님께는 죄송합니다. 진설 대표님이 운영하시는 재단 이름을 좀 팔아야 할 것 같습니다.]

“팔긴 뭘 팔아? 좋은 일을 했으면 자랑해야지. 나도 최근에 우리 재단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너무 잊힌 건 아닌지 걱정했다고.”

진설은 태연하게 웃으며 내 걱정을 덜어 줬다.

“나도 이번에 내 제자인 이렌이 덕 좀 보자고. 제대로 알려. 숨기거나 줄이거나 하지 말고.”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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