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76화 (177/261)
  • #176화. 백지 수표

    나는 백지 수표를 보낸 UPC 엔터테인먼트를 생각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 UPC. 대단하네.

    돈이 많다는 걸 이렇게 증명하는 건가?

    나는 얼빠진 얼굴로 백지 수표를 쳐다보고 있는 강진석의 손에서 그것을 빼앗았다.

    “세강아. 이게 백지 수표라고?”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백지 수표 맞습니다.”

    나는 평온한 표정으로 백지 수표를 다시 제안서 뒷장에 넣어 놨다.

    강진석은 놀란 눈으로 UPC 엔터테인먼트에서 보낸 제안서에 시선을 빼앗겼다.

    “나 한 번만 더 보자.”

    “뭐 하러요. 그냥 돌려보낼 건데요.”

    “백지 수표를 처음 봐서 그래. 난 이런 건 영화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지.”

    강진석이 내 손에 든 제안서를 빼앗아 한 번 더 자세히 확인했다.

    “야. 우리 서이렌 배우도 참 대단하다. 쌍팔년도에나 나왔던 전설 같은 이야기 아니냐? 백지 수표 받고 이적하는 거 말이야. 그걸 내가 직접 보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내가 강진석의 손에서 수표를 빼앗아 제자리로 돌려놓자 강진석은 애 닭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강아. 이거 그냥 돌려보낼 거야?”

    “UPC 엔터테인먼트와 다섯 작품이나 계약하는 조건입니다. 어떤 기획인지도 모르고 계약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UPC잖아. 거기서 만드는 영화나 드라마는 기본은 한다고.”

    “모든 미디어를 대상으로 다섯 편입니다. UPC가 가지고 있는 케이블 채널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찍을 수도 있어요.”

    “아. 그렇구나. 그것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백지 수표든 뭐든 다섯 편이나 장기 계약을 하는 건 너무 과합니다. 그리고 백지 수표를 받으면 역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준대서 받았는데 뭐가 문젠데?”

    “대중이 알면 싫어하죠. 스타와 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지만 그게 수면 위로 드러나면 좋을 리가 없어요. 한류를 등에 업은 몇몇 톱스타들이 작품 제작비의 90% 이상을 출연료로 요구해서 최근에 문제가 된 적이 있었잖아요. 우리는 심지어 백지 수표예요. 이 계약이 알려지면 반드시 문제가 될 겁니다.”

    “비밀 계약서를 쓰면 되지.”

    “그동안은 비밀 계약이 아니었던 게 있었나요? 비밀로 하고 출연료를 올려 받았는데 결국은 다 기사화됐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강진석은 못내 아쉬운지 UPC 엔터테인먼트가 보낸 백지 수표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딴 거 필요 없습니다. 서이렌 배우님은 이미 충분히 많은 돈을 벌고 있고 배우로서도 이제 시작입니다.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을 능력도 충분하고요. 이따위 백지 수표에 공을 몇 개를 그려 넣든 말든 서이렌 배우님이 그만큼 자기 힘으로 벌 수 있습니다.”

    내가 단호하게 선을 긋자 강진석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자식. 자신감이 넘치는데? 하긴 우리 서이렌 씨 정도면 그럴 만도 하지만.’

    나는 제안서를 정리해 내 책상 안에 넣고 열쇠를 잠갔다.

    “내일 UPC 엔터테인먼트 공한섭 본부장에게 전화해야겠습니다.”

    “공한섭 본부장을 만나려고?”

    “다른 것도 아니고 백지 수표를 퀵으로 보낼 수도 없잖아요.”

    “하긴 그렇지.”

    “제가 직접 찾아가는 건 싫습니다. 이걸 보낸 장본인들이 직접 찾아가라고 하죠. 제 책상 열쇠는 이선아 매니저님도 가지고 계시니 알아서 찾아가라고 할 겁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우리가 찾아가는 것도 우습다.”

    모든 걸 정리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님. 그만 일어나시죠. 너무 늦었네요.”

    “그래. 나도 같이 나가자.”

    * * *

    나는 지금 강진석과 함께 MBS 구사옥에 와 있다.

    MBS는 작년 말과 올해 초까지 일산에 있는 신사옥으로 모두 이전했고 구사옥은 지금 아무도 없다.

    MBS가 폐기 처분하려고 남겨 두고 간 집기만 덩그러니 있을 뿐, 서울 한복판에 멀쩡한 건물이 폐허로 남아 있는 신기한 곳이다.

    “와. 네 말대로 블랙마치 촬영장으로 제격인데? 너는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렸나?”

    “도심 속 폐허라고 하니까 바로 생각이 나더라고요. 촬영장으로는 제격이죠?”

    “당연하지. 붕괴 직전의 폐공장보다는 훨씬 좋지.”

    “배경에 보이는 빌딩 숲 때문에 CG 처리하기도 수월할 겁니다. 아예 없는 걸 만드는 것보다 있는 걸 수정하는 게 나으니까요.”

    “바쁘게 스타탄생과 작은 아씨들 촬영장을 오가면서 언제 또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한 거냐? 이걸로 일정이 대폭 단축되겠다고 윤서혁 감독이 진짜 좋아했다고.”

    “제 일이니까요.”

    강진석은 당연하다며 웃는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그 바쁜 와중에도 짬짬이 시간을 내서 블랙마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계속 확인했고, 도심 속 추격 장면을 찍으려고 준비 중이었던 폐공장이 붕괴 위험으로 촬영할 수 없자 바로 이곳을 떠올리고 의견을 내놨다.

    “MBS 구사옥은 어차피 조만간 철거할 건물이고. 폐기하려고 쌓아 놓은 집기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어서 좀비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공간으로도 딱입니다.”

    나는 레전드 필름 직원들과 함께 MBS 구사옥을 꼼꼼히 돌아본 후, 일산의 MBS 신사옥으로 갔다.

    이미 연락을 받고 나온 부장급 인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원세강 대표님. 강진석 이사님도 오셨군요.”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김 부장님. 얼굴이 좋아지셨네요.”

    “얼굴이 좋아지긴요. 그냥 살이 찌고 있는 거죠. 하하하.”

    김용한 부장과는 지난날 MBS에서 두 여자를 찍을 때 함께 일하며 꽤 친해졌다.

    “그래서 철거 전인 구사옥을 빌리고 싶다는 건가요?”

    “예. 지금 레전드 필름에서 찍고 있는 영화 때문에요.”

    “소문은 들었습니다. 좀비 영화라고요?”

    “예. 맞습니다.”

    “사실 거기가 지금 비어 있긴 하죠.”

    “어떻게 영화를 위해 촬영 허가를 내 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김용한 부장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김용한 부장은 은근한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저희야 스타탄생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뿐이죠. 이락 배우의 차기작 소식이 안 들리던데. 혹시 작품 들어가는 거 있나요?”

    캐스팅 이야기가 나오자 강진석은 속으로 웃었다.

    ‘세강이가 말한 그대로네. 장소 대여 때문에 찾아가면 분명히 스타탄생 배우의 캐스팅 이야기가 나올 거라더니.’

    강진석은 나를 힐끔 쳐다보며 웃었다.

    나는 준비한 대로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아직 없습니다. 좋은 작품이 없는지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렇군요. 오신 김에 같이 일 이야기 좀 하실 시간이 되실까요? 두 여자를 찍은 강진완 감독이 이번에 신작을 기획 중이십니다.”

    “들었습니다. 자전거 레이싱 드라마라고요?”

    “어이쿠. 이미 들으신 게 있나 보네요. 그럼, 말이 더 잘 통하겠군요.”

    김용한 부장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나는 이미 지난주에 강진완 감독으로부터 신작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본은 아직 1화밖에 없고 시놉시스만 읽었지만 느낌이 좋다.

    나는 일부러 MBS 구사옥을 빌리는 문제와 함께 이락의 드라마를 함께 논의하기 위해 강진완 감독님과의 만날 일정을 미뤘다.

    “그럼, 함께 가실까요?”

    “예. 그러시죠.”

    우리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진석은 회의실로 가려는 우리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김 부장님. 안타깝지만 저는 일이 있어서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김용한 부장은 강진석이 간다는 말에 놀라지 않고 그러라며 웃으며 답하고는 나와 함께 사라졌다.

    * * *

    MBS 신사옥의 드라마국 화장실에 들른 강진석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는 필요가 없구나. 다들 세강이만 찾는 더러운 현실. 크큭.’

    강진석이 일을 보고 있는데 그의 핸드폰으로 메일 알람이 떴다.

    강진석은 메일 발신자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왜 나한테 메일을 보내?’

    강진석은 UPC 엔터테인먼트 공한섭 본부장이 보낸 메일을 확인했다.

    ‘이선아 매니저가 백지 수표 찾아가라고 연락하니까 똥줄이 탔나? 왜 나한테 연락을 했지? 세강이한테는 씨도 안 먹힐 거 같으니까. 나한테 보내는 건가?’

    강진석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공한섭 본부장이 보낸 메일을 확인했다.

    내용은 만나서 진지하게 작품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뭉뚱그려서 다섯 작품이 아니라 정확한 작품 기획안을 들고 올 거라고 했다.

    심지어 메일에 계약금이 백지 수표라는 말은 빼놓지 않고 써 놨다.

    ‘세강이가 말한 그대로네. 거절하면 상세한 기획안을 들고 찾아올 거라더니.’

    강진석은 쎄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화장실 받침대에 올려놨다.

    일을 보고 나온 강진석은 손을 씻으며 생각했다.

    ‘그런데 작품 기획이 좋으면 해도 되지 않나? 그래도 UPC 엔터테인먼트인데? 백지 수표도 조금 끌리기도 하고.’

    손을 다 씻은 강진석은 거울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다. 됐어. 세강이 말대로 이러다 구설에 휘말리지. 우리가 드라마니, 영화니 다 제작할 수 있는 상황인데 뭐 하러 그래? 남의 작품에 목을 맬 필요는 없지.”

    강진석은 페이퍼 타월로 손을 닦고 그길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에 도착한 강진석은 자신의 메일을 알아내 연락을 한 공한섭 본부장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차단해야 할 거 같은데? 나한테 계속 연락할 거 아냐?’

    강진석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핸드폰을 찾았다.

    그런데 아까까지만 해도 있던 핸드폰이 사라지고 없었다.

    강진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화장실!”

    놀란 강진석은 방문자 키를 들고 냅다 엘리베이터로 뛰었다.

    십삼 층 드라마국에 도착한 강진석은 헐레벌떡 뛰어서 화장실 안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그곳에는 강진석도 잘 아는 사람이 있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고중기 매니저가 강진석의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야. 고중기. 너 지금 내 핸드폰으로 뭐 하는 거야?”

    “…….”

    고중기는 놀란 눈으로 강진석을 쳐다봤다.

    강진석은 달려가 고중기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빼앗았다.

    “당신 핸드폰인 줄 몰랐어. 간수나 잘하고 다닐 것이지. 누구한테 행패야?”

    강진석도 찔리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중기에게 눈을 흘겼다.

    고중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스타탄생 면접에서 굴욕적으로 떨어지고 강진석에게는 이를 갈고 있었다.

    “MBS에는 왜 왔는데? 너 이제 TOP 미디어라며?”

    “강진석. 네가 무슨 상관인데?”

    고중기는 강진석의 어깨를 확 치고는 화난 얼굴로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강진석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가 없는 동안 걸려온 전화도 문자도 아무것도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강진석은 핸드폰을 챙겨 들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 * *

    나는 오늘 작은 아씨들 촬영장에서 일찍 퇴근하려고 일어섰다.

    오후부터 MBS 구사옥에서 블랙마치를 촬영한다.

    우리는 오로지 낮에만 촬영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낮에만 촬영할 수 있으므로 밤이 배경인 우리는 CG로 어두운 밤처럼 덮을 예정이다.

    내가 촬영장을 나서려는데 마침 촬영을 마치고 쉬고 있던 서이렌이 나를 보러 왔다.

    “어디 가시려고요?”

    “블랙마치 촬영장에 가야 해요.”

    “그러시구나.”

    서이렌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서운한 감정을 표현했다.

    얼굴을 가리는 커다란 검정 뿔테 안경을 쓰고 면바지에 빅 사이즈 셔츠를 입은 서이렌을 보고 있으니 진짜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도 공대생이긴 한가 보다.

    나 저런 거 좋아했네.

    나는 광대가 씰룩거리는 걸 서이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내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보니 강진석이었다.

    블랙마치 촬영장에 먼저 가 있을 그였기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들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자마자 강진석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강아. 큰일 났어.]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UPC에서 보낸 백지 수표. 그거 기사로 떴어.]

    “뭐라고요?”

    나는 통화를 스피커로 돌리고 당장 인터넷 포탈에 접속했다.

    연예 기사 메인에 강진석이 말한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톱스타 S. 백지 수표 제안받아. 스타들의 몸값 어디까지 치솟나?]

    우리가 계약을 거절하니까 UPC에서 푼 건가?

    아니야. 그쪽도 기사화되면 좋을 게 없을 텐데?

    누가 이걸 푼 건지 고민하고 있는데 강진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강아. 나 어쩌면 좋냐?]

    나는 강진석의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차분하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오늘 뜬 기사 말이야.]

    “예. 말씀하세요.]

    [아무래도 나 때문인 거 같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