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75화 (176/261)
  • #175화. 하얀 종이

    빈선예는 얀이 준비한 결혼 선물을 보며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가 그녀만을 위한 웨딩드레스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감격한 빈선예는 이내 눈물을 보였다.

    “말도 안 해 주고 이러기가 어디에 있어.”

    “써니. 진정해. 왜 이래? 친구끼리 옷 선물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냥 옷이 아니잖아. 세계적인 디자이너 얀 필립이 직접 만든 웨딩드레스라고.”

    “결혼 축하해. 써니. 네 결혼식에는 참석 못 할 거 같아. 미안해.”

    “얀. 그런 말 하지 마.”

    빈선예는 미안해하는 얀을 보며 눈을 흘겼다.

    나는 훈훈한 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자, 인제 그만 정리하고 공항으로 출발합시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차에서 마저 이야기합시다.”

    * * *

    얀 필립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로도 서이렌의 도나텔라 패션쇼는 꽤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서이렌의 런웨이 영상이 외국에서 터졌기 때문이다.

    - 도나텔라 신났네. 런웨이 영상을 고화질로 뽑아서 공식 미튜브에 올렸다며?

    - 공계 리트윗 수도 장난 아님. 오천만이래. ㅋㅋㅋ

    - 우리나라 국민 수만큼이네. 미쳤네. ㅋㅋㅋ- 요즘 양웹 돌아다니다 보면 서이렌 짤이 엄청 돌아다닌다. 인기 쩔어.

    - 이러다 미국 가는 거 아니냐? ㅋㅋㅋ

    - 그렇지 않아도 할리우드 진출한다는 소문 돌더라.

    - 서이렌 영어는 잘하나?

    - 미국에서 살다 왔음. 영어야 당연히 잘하지.

    - 영어는 물론이고 불어도 할 줄 알아.

    - 언어 쪽으로 타고났나 보더라.

    - 진짜 해외 진출하는 건가? 불안해지는데???

    - 불안해할 게 뭐 있냐. 할 때 되면 하겠지.

    - 이상한 역할만 아니면 좋겠다. 가끔 동양인 인기배우 캐스팅해서 쩌리 역 주는 경우도 많잖아.

    - 그렇긴 하지.

    - 난 그것보다 동양인 캐스팅하면 항상 보이는 그 스타일링이 개싫어.

    └보라색 브릿지?

    └ㅇㅇ 그거 진짜 싫어. 극혐.

    └ㅅㅂ 나도 몇 장면이 떠오른다.

    └촌스러운 화장까지. 왜 그런지 모르겠음.

    - 비중 없는 역에 홍보용으로 캐스팅되는 거면 아예 해외 진출은 안 하는 게 낫다. 요즘은 전 세계에서 동시 방영되는 OTT 서비스도 있고 굳이 그런 작은 역 하려고 할리우드 진출할 필요가 없음.

    └ㅇㄱㄹㅇ

    - 서이렌이 알아서 잘하겠지.

    * * *

    오전에 작은 아씨들 촬영장으로 출근했던 나는 오후에는 일이 있어서 스타탄생으로 갔다.

    회사에 도착해 보니 미디어팀의 홍미라 팀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홍미라는 이번에 새로 뽑은 인력으로 할리우드 드라마 제작팀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실력파다.

    한국에 들어온 지는 이 년이 됐고,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TVK의 제작국에서 일했다.

    “원 대표님 오셨어요?”

    내가 회의실로 들어서자 홍미라가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그냥 앉아 계세요. 제가 많이 늦었죠? 도로가 꽤 막히더라고요.”

    “종종 이렇게 늦어 주세요. 오후에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시간이 생겨서 좋았습니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홍미라는 준비해 놓은 자료를 보여 주며 물었다.

    “한숨 돌리실래요? 아니면 바로 할까요?”

    “바로 하죠. 저는 괜찮습니다.”

    “예. 그럼, 시작할게요.”

    홍미라는 회의실 TV에 준비한 회의 자료를 띄웠다.

    깔끔하게 정리된 PPT에는 서이렌에게 도착한 대본이 한눈에 보기 편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보시다시피 도나텔로 패션쇼 이후에 해외에서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어요. 작년에 했던 나비와 구원의 밤도 뒤늦게 이슈가 되면서 많은 할리우드 스튜디오에서 이렌 씨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요.”

    서이렌은 원래도 대본을 많이 받았다.

    대한민국의 모든 대본이 서이렌을 거쳐 간다고 보면 될 정도다.

    작년에 나비와 구원의 밤이 해외에서도 소소하게 이슈였기에 할리우드 러브콜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하지만 도나텔로 패션쇼 이후에 상황이 급변했다.

    “여전히 들어오는 대본 대부분은 한국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번 달에만 상당수의 대본이 할리우드 스튜디오로부터 도착했어요.”

    홍미라는 PPT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러나 할리우드에서 보내온 대본 리스트가 떴다.

    총 열두 개.

    저 리스트에 아직 문 씨어터는 보이지 않았다.

    이미 대본은 우리 수중에 있고 대니 라모로가 제작사인 트로이와 캐스팅에 대해 논의 중이라고 했다.

    어제 대니 라모로와 전화 통화를 했는데 원래 반신반의했던 트로이 임원들도 서이렌이 이슈가 되자 관심을 가지며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하지만 백 퍼센트 확실하지도 않은 캐스팅에 목을 맬 수만은 없어서 나는 할리우드에서 날아온 대본의 면면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나는 그래서 해외에서 온 시나리오는 전문가에게 맡기기로 했다.

    나는 대본을 직접 보고 고르는 것을 좋아하지만 영문으로 작성된 대본을 그것도 여러 개나 보는 건 고역이었다.

    “그럼, 작품에 대해 간단히 브리핑해 드릴게요.”

    “그럽시다.”

    “오퍼가 들어온 열두 개 작품 중에 대부분은 거절해야 할 작품입니다.”

    “왜 그렇죠?”

    “역이 너무 작아요. 분량이 없어도 임팩트 있는 역이면 모르겠지만, 분량도 임팩트도 없는 출연진1 수준입니다.”

    “예상은 했죠. 그런데도 괜찮은 작품도 있다는 건가요?”

    “예. 두 작품 정도는 눈여겨볼 만해요.”

    홍미라는 모니터에 다른 PPT를 띄웠다.

    하나는 요즘 유행하는 히어로 무비였다.

    대규모 프랜차이즈 영화라서 출연만 하면 바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문제는 서이렌이 받은 역은 스무 명이 넘는 히어로 군단 중의 한 명일 뿐이라는 거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첩보 액션 영화였다.

    나비에 나온 서이렌의 모습을 보고 캐스팅하려는 것이 느껴졌다.

    서이렌은 의문의 동양인 스파이 역으로 제의가 들어왔다.

    “히어로 무비도 사실은 병풍에 가까워요. 그래도 시리즈물이라서 이 한편의 출연으로 끝나지 않을 테고 이름값을 얻을 수 있을 거라서 골랐습니다.”

    “별로 내키지 않는군요.”

    “저도 그래요. 알아본 바로는 동양권 톱스타들에겐 모두 시나리오를 돌렸다고 하네요.”

    “그럼, 이건 그냥 넘어가죠. 저는 별로 땡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그럼, 나머지 하나. 이 영화는 어떠세요?”

    “그 영화도 마찬가지로 거절합시다. 나비와 너무 이미지가 겹칩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미지가 굳어질 수 있어요. 한국에서도 서이렌 씨의 이미지는 하나가 아닙니다. 그동안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며 다채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놨는데 굳이 미국까지 가서 똑같은 역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모두 거절하도록 할게요.”

    “죄송합니다. 기껏 열심히 준비하셨는데 다 쳐 내 버렸네요.”

    “아니에요. 저도 보면서 대표님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굳이 지금 할리우드 진출에 목을 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문 씨어터 정도의 임팩트가 있는 작품이 아니라면 나는 굳이 서이렌을 할리우드에 진출시키지 않을 생각이다.

    회의를 마친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홍미라가 물었다.

    “대표님이 기다리시는 건 대니 라모로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이신 거죠?”

    “그렇죠.”

    “꽤 큰 역이라고 하던데요?”

    이 대본은 극비이기 때문에 서이렌과 단둘만 내용을 알고 있다.

    홍미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트로이에서 반대할 수도 있어요.”

    “압니다. 하지만 감독님이 직접 한국에 와서 이렌 씨를 캐스팅한 거라서 우선은 기다려 보려고요.”

    “그 전에 다른 좋은 작품이 들어오면요?”

    “그건 그때 가서 봐야겠죠.”

    “대표님의 뜻은 이해했습니다.”

    “제가 요즘 밖으로 많이 싸돌아다니니까 홍 팀장님이 저를 많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어깨가 무거운데요?”

    “그러라고 드린 말씀입니다.”

    * * *

    며칠 후, 한국에서 서이렌의 해외 진출에 관한 기사가 터졌다.

    [서이렌 할리우드 진출 가시화. 대작 시나리오 물밀듯이 들어와]

    [한국의 톱스타 서이렌. 미국행 결정]

    [서이렌 할리우드마저 접수하나? 톱스타의 도전]

    모두 정확한 작품 이야기는 하나도 없이 서이렌이 할리우드에서 러브콜을 많이 받고 있다는 소식밖에 없었다.

    요즘 서이렌의 인기가 해외에서도 체감될 정도로 들썩거리니까 기자들이 사실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설레발을 친 것이다.

    블랙마치 촬영장에 가 있던 강진석이 내게 전화를 했다.

    [세강아. 기사 뜬 거 어떻게 할 거야?]

    “할리우드에서 대본이 밀려드는 건 사실이긴 하니까요. 완전 거짓말은 아니죠.”

    [그냥 놔두려고?]

    “예. 그냥 놔둘 겁니다.”

    [그러다가 대니 라모로 감독한테 연락이 안 오면 어쩌려고 그래?]

    “오겠죠. 올 겁니다.”

    [참. 자식이 되게 편하게 말하네.]

    “어차피 기사가 안 떴어도 커뮤니티에서도 이렌 씨가 할리우드 진출하는 거 아니냔 말이 돌고 있었어요.”

    [그렇긴 하지. 지금이 미국으로 갈 최고의 적기이기도 하고.]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이따 회사에서 만나서 이야기해요.”

    [그래. 알았어. 그렇게 하자.]

    “거기 촬영은 잘되고 있습니까?”

    [여긴 고난의 연속이다. 액션 장면이 너무 많고 촬영도 위험한 게 많아서 다들 고생이다.]

    “안전에 제일 우선입니다. 구급 인력을 촬영장에 상주시키고 있는 거죠?”

    [그럼, 당연하지. 지금까지 큰 문제는 없었어.]

    “작은 아씨들은 이번 달에 촬영이 끝나니까 제가 여기가 정리되는 대로 바로 합류할게요.”

    [괜찮아. 걱정하지 마. 레전드 필름 직원들이 워낙에 꼼꼼해서 사실 나는 여기서 별로 할 것도 없다. 스타탄생은 조장훈 팀장이 지키고 있고 말이야.]

    “그럼, 다행이고요.”

    [참. 너 고중기 소식 들었냐?]

    “LOK 고중기 매니저요?”

    [걔 TOP 미디어로 발령 났대.]

    “그래요?”

    [어쩐지 왜 스타탄생으로 이직하려는 무리수를 뒀나 했더니 TOP 미디어로 가기 싫어서 그런 거더라.]

    “그렇군요. 몰랐네요.”

    고중기 매니저는 내 관심 밖의 사람이라 별 관심이 없었다.

    “형님. 혹시 UPC 엔터테인먼트 공한섭 본부장이라고 들어 보셨어요?”

    [공한섭 본부장이야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지. 그 사람은 갑자기 왜 꺼내는데?]

    UPC 엔터테인먼트는 UPC 그룹에서 야심 차게 만든 엔터 회사다.

    티켓박스와 함께 대한민국의 양대 배급사 중의 하나인 UPC와 같은 이름의 멀티플렉스 극장 체인까지 소유하고 있는 엔터계의 공룡이다.

    “저도 아까 연락을 받았는데 오늘 스타탄생으로 공한섭 본부장이 다녀갔다네요.”

    [그래? 연락도 없이?]

    “예. 이선아 씨 말로는 아무도 없다는 말을 듣고 제 책상에 뭔가를 두고 갔다는데요?”

    [뭘 두고 갔는데?]

    “시나리오인가 봐요?”

    [시나리오? 그걸 왜 공한섭 본부장이 직접 가져와? 신기한 일이네.]

    “어차피 이따 회사로 들어갈 거니까 그때 뭔지 같이 봐요. UPC 엔터테인먼트에서 대작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리던데. 아마도 그 시나리오인 것 같아요.”

    [와! 우리 서이렌 씨가 진짜 떴나 보네. UPC 본부장이 직접 캐스팅하러 왕림하시고 말이야. 암튼, 알았으니 이따 보자.]

    * * *

    저녁 8시가 넘은 늦은 시간, 스타탄생 직원들은 모두 퇴근하고 회사에는 나와 강진석만이 남아 있다.

    나는 UPC 엔터테인먼트의 공한섭 본부장이 두고 간 제안서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세강아. 이 말인즉, 영화가 아니라 총 다섯 작품을 계약하자는 거지?”

    “그러네요.”

    공한섭 본부장이 들고 온 것은 우리가 예상했던 영화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콘텐츠 상관없이 UPC 엔터테인먼트와 총 다섯 개의 작품을 함께 하자는 제안서였다.

    그게 영화든 아니면 UPC 엔터가 가지고 있는 케이블 채널의 드라마든 예능이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제안서와 함께 온 하얀 종이였다.

    강진석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하얀 종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강아. 이게 뭐지? 수표 같은데 인쇄가 덜 된 건가?”

    강진석은 종이를 팔락이며 나를 쳐다봤다.

    “백지 수표네요.”

    “뭐라고?”

    “한국은행에서 발행한 백지 수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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