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73화 (174/261)

#173화. 런웨이의 신

도나텔라 서울점 오픈 기념 패션쇼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패션업계 종사자들뿐만 아니라 셀러브리티, 패션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까지 모여들어 쇼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VIP 표를 받고 어머니 문영란과 함께 프론트 로우에 앉은 빈선예는 사적인 대화를 나눴다.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아직도 웨딩드레스를 못 골랐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문영란의 질책에 빈선예는 입을 쭉 내밀고 말했다.

“마음에 쏙 드는 드레스가 없어. 평생 한 번 입는 건데. 정말로 내가 원하는 드레스를 입어야지.”

“그렇게 따질 거면 네가 직접 디자인해서 입든지.”

“그럴까? 하고 고민도 해 봤는데. 아냐, 엄마. 맘이 바뀌었어.”

“왜?”

“내가 직접 디자인해서 입을 생각을 하니까. 일 같더라고. 그래서 싫어.”

“이것저것 따지는 것도 많네. 암튼, 빨리 골라. 나도 네 드레스에 맞춰서 한복 맞춰야 하니까.”

“알았어. 엄마. 이번 주 안에 고를게.”

“말이나 못 하면.”

빈선예는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때 그들의 뒷자리에 누군가 우르르 들어와 앉았다.

그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도나텔로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무대는 별거 없네.”

“패션쇼장이 다 그렇지. 뭘 기대한 거야?”

“이제 도나텔로 구매하러 홍콩이나 뉴욕에 안 가도 되고 좋다. 한국 명품매장에는 신상이 항상 늦게 들어와서 외국에 나갔어야 했는데.”

“그건 그래.”

빈선예는 뒤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갤러리스 백화점의 단골이자 VIP 고객인 LOK와 숲 엔터의 배우들이었다.

‘배우인데도 앞자리가 아니네. 초대장을 못 받았겠지.’

무리 중의 한 명은 익숙했다.

빈선예가 LOK에서 나올 때 들어온 신인 배우였기 때문이다.

빈선예는 그들과 아는 척은 하고 싶지 않았고 빨리 쇼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빈선예의 귓가로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이번 쇼에 서이렌이 선다는 이야기 들었어?”

“서이렌? 걔가 왜 쇼에 서? 모델도 아니잖아. 어디서 들었어?”

“오늘 쇼에 서는 모델 중에 내 친구가 있어. 오민주라고 요즘 케이블 방송에도 나오고 좀 알려진 친군데. 알아?”

“몰라. 그런 사람을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런데 그 오민주라는 친구가 그래? 오늘 쇼에 서이렌이 나온다고? 우리처럼 관람객이 아니라? 모델로 패션쇼에 선다는 거야?”

“응. 그렇다니까. 무려 피날레 무대에 선다고 하더라고.”

“뭐, 그럴 수도 있지. 원래 배우들이 이벤트성으로 쇼에 자주 서잖아. 그런 거 한두 번 봤나?”

“그렇긴 하지. 근데 난 좀 기대된다. 민주가 그러는데 그동안 한 번도 연습에 안 나타나고 오늘 최종 리허설에도 불참했나 봐.”

“그냥 옷 입고 걷는 건데 연습도 하는구나.”

“모델은 아무나 하니? 저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그래?”

“그래서 요점이 뭐야? 서이렌이 연습도 한번 안 하고 잘하는 게 보고 싶다는 거야? 아니면 그 반대인 거야?”

“글쎄. 내가 뭘 보고 싶을까?”

“암튼, 나쁜 생각을 하고 있단 건 알겠다. 서이렌이 못해서 망신당했으면 하는구나?”

“당연하지.”

빈선예는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뒤로 고개를 획 돌렸다.

빈선예가 쳐다보다 무리를 지어 앉아 있던 여자들이 흠칫 놀랐다.

“좀 조용히 합시다. 여기에 당신들만 있는 거 아니잖아요.”

배우들은 조용히 해 달라는 빈선예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은 빈선예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주위에서 보는 눈이 많아서 말을 아꼈다.

“알았어요. 조용히 하면 되잖아요.”

빈선예는 눈으로는 쌍욕을 하면서 입으로만 미안하다는 배우들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럼, 조용히 해 주시는 걸로 알겠어요.”

배우들은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혼이 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진짜. 자기가 뭐라고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 거야.”

“웃기지도 않아. 프론트 로우에 앉아 있으면 다야?”

배우들은 그들끼리 속삭이며 이제는 빈선예의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한창 빈선예를 씹던 LOK 출신 배우가 놀란 얼굴로 다른 배우들의 입을 막았다.

“왜 그래?”

그녀는 빈선예의 뒤통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갤러리스 상속녀.”

“뭐라고?”

“갤러리스 백화점 상속녀라고.”

“……?”

동료 배우들이 못 알아듣자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지난번에 났던 빈선예와 곽이석의 결혼 기사를 꺼내 보여 줬다.

신나게 빈선예를 씹던 그녀들의 입이 닫히고 동시에 합죽이가 됐다.

* * *

드디어 패션쇼가 시작됐다.

스타탄생 배우들은 지금 쇼장의 프론트 로우에 나란히 앉아 있다.

나는 그들에게 표를 양보하고 강진석과 함께 지금 쇼가 열리는 행사장의 밖에 나와 있다.

밖은 쇼장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그러나 주최 측의 배려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쇼 장 안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있었다.

그때 쇼장의 불이 꺼지고 무대 한가운데 도나텔라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형님. 이제 시작하나 봐요.”

“그러네. 우리 좀 더 가까이 가서 보자.”

나는 강진석과 함께 생중계 스크린 가까이 다가갔다.

스크린 앞은 몰려든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너도 들어가서 보지 그랬어?”

“괜찮아요. 저는 패션쇼는 아무리 봐도 어색하더라고요. 뒷자리면 그래도 보겠는데. 앞줄은 조금 그렇습니다.”

“하하. 무슨 말인 줄 알겠다. 그냥 나랑 여기서 편하게 보자.”

패션쇼를 준비한 도나텔라 한국 대행사 측에서 신경을 많이 썼는지 론칭 패션쇼는 마치 지난날 뉴욕에서 봤던 원래 도나텔라 쇼에 못지않게 환상적이었다.

특히 한복 디자이너와 콜라보한 의상들이 나올 때마다 홀이 들썩일 정도로 화제였다.

패션에 대해 잘 모르는 나지만 한복 의상은 내가 봐도 아름다웠다.

“얀도 알고 보면 한국인의 핏줄이 섞인 거 아니냐? 왜 이렇게 한복을 잘 만들었대?”

강진석의 농담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쇼를 관람했다.

어느덧 쇼의 피날레가 다가오고 있었다.

‘서이렌이 못하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은 전혀 없었다.

마네킹이었던 서이렌이.

오늘 어떤 대단한 무대를 보여 줄지 그게 너무 궁금했다.

* * *

오민주는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서이렌을 힐끔 쳐다봤다.

오민주는 모델 중에서도 장신에 속했다.

183인 그녀보다 서이렌의 키는 작았지만, 서이렌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좋아서 그런지 그녀의 키가 오민주보다 훨씬 커 보였다.

‘체격은 딱 좋네. 모델을 하기에 적합해. 그래도 처음 무대에 서는 거라는데 잘할 수 있겠어? 그것도 내 뒤에서 런웨이를 하는 건데 말이야.’

오민주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무대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는 당당하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워킹은 그녀의 동기인 진서현보다는 떨어지지만, 특유의 무미건조한 표정 연기만은 자신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하이패션에 어울리는 백지 같지만 카리스마 있는 표정으로 무대를 장악한 그녀는 무대의 끝까지 가서 턴을 돌며 생각했다.

‘오늘의 진짜 피날레는 나야. 눈이 있으면 다 그렇게 생각하겠지.’

턴을 돈 오민주가 뒤 돌아 무대 안쪽으로 걸어갔다.

마침 런웨이로 나오고 있는 서이렌이 보였다.

서이렌은 얀 필립이 가장 공들여 만든 한복 의상을 입고 런웨이를 걷기 시작했다.

워킹에도 종류가 다양하고 트렌드가 있다.

요즘 유행하는 워킹은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옷에만 시선을 가게 하는 미니멀한 워킹이 대세다.

오민주도 그 대세를 따르고 있었고, 골반을 흔들면서 발을 교차시키며 움직임이 큰 편인 모델 워킹은 가끔 퍼포먼스가 필요한 쇼장에서만 했다.

하지만 서이렌은 과거의 유산이라 불리는 모델 워킹을 하고 있었다.

카리스마 있는 워킹으로 런웨이를 가로질러 오는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표범을 연상시켰다.

서이렌이 피날레를 서는 것을 몰랐던 관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서이렌은 자신을 향한 환호성을 들으면서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유유히 런웨이를 걸었다.

오민주는 서이렌의 워킹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카리스마에 흠뻑 빠져들고 있었다.

* * *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보는 서이렌의 모습은 남달랐다.

의무감으로 쇼를 지켜보던 내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전까지는 마치 식사를 거른 것 같은 힘 없이 걷는 모델들이 대부분이었다면 서이렌은 달랐다.

그녀가 런웨이를 걷자 주위 공기가 바뀌는 것 같았다.

주위에서 스크린을 함께 보던 관객들도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서이렌은 워킹도 잘하네. 저게 파워 워킹인가?”

“팔구십 년대 슈퍼모델들이 하던 그 워킹이네. 요즘은 저거 촌스럽고 옷보다 모델이 주목받는다고 잘하지 않는데.”

“촌스럽긴. 서이렌이 걸으니까 카리스마 뿜뿜이다.”

어느새 서이렌은 무대의 가장 앞까지 걸어왔다.

서이렌이 턴을 하려는데 갑자기 무대 조명이 번쩍거렸다.

마치 형광등이 나가는 것처럼 조명이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어? 왜 이러지? 조명 사고인가?”

“조명이 왜 저래? 클럽이야?”

사람들이 당황하는데 번쩍이는 무대에서 서이렌이 불안한 조명에 맞춰서 갑자기 액션을 취하기 시작했다.

조명이 암전됐다가 켜질 때마다 무대 끝에 서 있는 서이렌의 포즈가 시시각각 달라졌다.

그녀는 마치 준비해 온 듯 카리스마 있는 포즈를 선보이며 이 모든 것이 쇼의 일환처럼 보이게 했다.

“이거 조명 사고가 아닌가 봐.”

“그러네. 무대 연출이네.”

“와. 서이렌 엄청나다. 카리스마가 미쳤네.”

드디어 조명이 원상 복구되자 서이렌은 갑자기 관객들을 향해 작게 미소를 날리더니 화려하게 턴을 했다.

길게 늘어뜨린 한복 치마가 공중에서 춤을 추듯 날았다가 떨어졌다.

서이렌은 다시 모델 워킹을 시작해서 무대 앞쪽으로 걸어갔다.

스크린 앞에 있는 몇몇 사람들은 손뼉까지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와. 미쳤다. 서이렌 장난 아닌데? 원래 모델이었나?”

“그런가 봐. 나 방금 소름 돋았어.”

“대박이다. 모델이 이렇게 멋진 거였구나. 처음 알았어.”

서이렌은 이미 무대 안쪽으로 사라지고 없었지만, 사람들은 계속 서이렌 이야기만 했다.

드디어 쇼가 끝나고 얀 필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번에 콜라보한 한복을 입고 있었다.

코트를 한복의 도포 자락처럼 휘날리며 나타난 얀 필립은 사람들 앞에 서서 손 키스를 날렸다.

관객들은 환상적인 쇼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와 함께 콜라보를 진행한 한복 디자이너도 무대 위로 올라왔다.

디자이너 이은혜를 에스코트한 얀 필립.

두 사람이 다시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하자 쇼장이 떠나갈 듯이 사람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은혜 디자이너가 들어가고 마지막으로 파이널을 섰던 모델이 등장했다.

서이렌이 모습을 드러내자 쇼장은 다시 한번 달아올랐다.

이은혜 디자이너에게 그랬던 것처럼 얀 필립은 서이렌을 에스코트하고 무대 위를 걸었다.

얀 필립이 서이렌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이렌 씨. 오늘 최고였어요.’

‘아름다운 옷을 입게 해 주셔서 제가 영광입니다.’

얀 필립은 서이렌을 에스코트해서 무대 앞쪽으로 걸어왔다.

서이렌과 함께 오늘 패션쇼를 찾아 준 관객들에게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고 천천히 무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무대 안으로 들어온 얀 필립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렌 씨.”

“얀. 말씀하세요.”

“어쩜 사람이 그래요?”

“제가요?”

“방금 조명 사고 난 거 말입니다. 혹시 오늘 사고가 날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겁니까?”

“그럴 리가요. 몰랐어요. 하지만 패션쇼와 사고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니까요. 사고가 날지 모른다는 생각은 언제나 하고 있었어요.”

“대단해요. 여기서 지켜보면서 내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역시 내 뮤즈 이렌 씨예요.”

“감사해요. 얀.”

“하반기에 할리우드에 온다면서요. 대니한테 들었어요.”

“그렇게 됐어요.”

“하반기 패션위크에는 꼭 와 주세요. 이번처럼 손님이 아니라 모델로요.”

서이렌은 잠시 동공이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럴게요. 얀.”

서이렌이 웃으며 수락하자 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서이렌은 좋아서 어찌할 줄 모르는 얀을 보며 생각했다.

‘드디어 고향의 무대로 돌아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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