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러브콜
[친애하는 서이렌 씨에게.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작년 가을, 칼레의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니 라모로입니다.
구원의 밤에서 서이렌 씨를 본 이후로 지금까지 당신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저의 첫 번째 할리우드 영화에 서이렌 씨를 캐스팅하고 싶어서입니다.
서이렌 씨의 개인 연락처를 알 길이 없어 스타탄생의 대표 계정으로 이렇게 메일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에이전시를 통해서 연락드리지 않고 직접 연락하게 된 점 이해해 주십시오.
당신과 함께 그날 밤처럼 다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대본을 함께 보내니 부디 제 염원을 이뤄 주시길 간청합니다.
그럼, 항상 건강하시고 언제나처럼 좋은 영화를 만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그대에게 빠져 버린 대니 라모로가.]
애절한 구애의 편지를 다 읽은 나는 곧바로 첨부 파일을 확인했다.
제목은 문 씨어터(Moon Theater).
한국어로 하면 달빛 극장인가?
시나리오 작가의 이름에 대니 라모로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나는 첨부 파일을 내려받아 클릭했다.
영어가 빽빽한 대본이 핸드폰 화면을 가득 채웠다.
내가 회화는 그냥저냥인데 그나마 독해는 봐줄 만하다.
한국식 영어 교육의 산물이라고나 할까?
나는 마치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시나리오를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 * *
촬영이 끝나고 스태프들은 현장을 정리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주차장으로 와 보니 배우들이 탄 차량이 하나둘 떠나고 있었다.
주차장에 스타탄생 소속의 밴만 세 대였다.
서이렌, 김이솔, 윤이슬의 밴이다.
스타탄생은 원래 서이렌을 위한 밴이 한 대였으나 이번에 한 대를 더 사고 나머지 한 대는 대여했다.
세 명의 배우들에게 각자의 밴을 따로 내어 준 것이다.
나는 서이렌이 탄 밴으로 걸어가 차창을 두드렸다.
‘똑똑.’
차창이 내려오고 차 안에 있던 빈선예가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무슨 일이에요? 대표님?”
“내가 좀 타도 될까요?”
빈선예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이렌 씨랑 할 이야기라도 있어요?”
“예.”
“그렇구나. 알았어요.”
빈선예는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차에서 내렸다.
“편하게 이야기하세요. 난 다른 차를 타고 갈 테니까.”
“고마워요. 빈 팀장님.”
빈선예는 차에서 내려 바로 옆의 윤이슬의 밴에 올라탔다.
떠나는 윤이슬과 김이솔의 밴을 확인한 나는 서이렌이 탄 밴의 문을 열었다.
어느새 옷까지 편하게 갈아입은 서이렌이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대표님. 저랑 같이 가려고 오셨어요?”
“아뇨. 할 말이 있어서요.”
“무슨 할 말이 있으실까? 궁금한데요.”
서이렌은 티 나게 좋아하며 얼굴을 붉혔다.
“일 이야기예요. 딴생각하지 말고요.”
“일 이야기면 나중에 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 왜 퇴근 시간에 온 건데요?”
“그렇게 오래 안 걸릴 거예요. 시간 길게 빼앗지 않을게요.”
서이렌은 삐진 얼굴로 나만 들을 수 있게 작게 속삭였다.
‘쳇. 일 이야기만 아니면 밤새워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는데.’
나는 서이렌이 주책없이 떠들까 봐 바로 본론을 꺼냈다.
“대니 라모로 감독을 기억하죠?”
“그럼요. 칼레에서 만났잖아요. 시청 앞 돈키호테 감독님이시잖아요.”
“기억하고 있네요.”
“내가 지금 이렌 씨 계정으로 메일 하나를 포워딩했어요. 대니 라모로 감독님이 보낸 메일입니다.”
서이렌은 태블릿 PC를 집어 들어서 메일을 확인했다.
“감독님이 할리우드에서 영화 찍으시는구나. 제목이 예쁘네요. 문 씨어터.”
“지금 한번 읽어 볼래요?”
“지금이요?”
“제가 보기엔 빨리 답해 주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흠…….”
서이렌은 첨부된 시나리오를 내려받아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내가 사전을 찾아가며 한 시간 동안 힘겹게 읽은 시나리오를 서이렌은 단 이십 분 만에 다 읽고 고개를 들었다.
시나리오를 다 본 서이렌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어때요? 재미있죠?”
“너무 좋은데요? 그런데 SF네요?”
“저도 보고 놀랐습니다. 대니 라모로 감독이 SF라니. 근데 평범한 SF는 아니죠. 어땠어요? 마음에 들어요?”
“대니 라모로 감독님이 배역에 빨간 줄을 쳐 놓으셨던데요. 혹시 제가 할 역이 루나인가요?”
“맞아요.”
서이렌의 눈동자가 잠시 커졌다 돌아왔다.
“이렇게 큰 역을 저를 준다고요?”
“그렇죠? 나도 놀랐어요.”
문 씨어터는 흔히 말하는 떼주물이다.
루나는 그중에서도 분량이 크지 않는 조연 중의 한 명이다.
존재감이 없이 문 씨어터 극단의 배우 중 하나이던 그는 극의 후반부에 들어서 반전의 존재로 쓰이며 주인공이 되는 역이다.
한마디로 히든 히로인이다.
“어때요? 할 마음이 있나요? 대니 라모로 감독이 서이렌 씨를 원하고 있어요. 한다고만 하면 캐스팅은 문제없을 거 같은데요. 그래서 퇴근하는 서이렌 씨를 잡은 겁니다. 저는 당장이라도 오케이 메일을 보내고 싶어요.”
이렇게 좋은 기회는 흔치 않다.
아시아인 배우가 할리우드에 진출하는데, 단박에 주인공이다.
그것도 매력이 철철 넘치는 역이다.
남들은 평생 소원해도 얻지 못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나는 서이렌이 이 역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이렌도 아마 하고 싶을 거다.
구원의 밤으로 연기 인생에 전환점을 맞이한 그녀다.
루나라는 캐릭터는 배우의 매력으로 끌고 가야 하는 어려운 역이다.
서이렌이라면 루나라는 캐릭터를 분명히 하고 싶을 거다.
하지만 내 예상을 깨는 답변이 돌아왔다.
“싫어요.”
나는 놀란 눈으로 서이렌을 바라봤다.
서이렌은 태블릿 PC를 옆으로 치우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시 답했다.
“안 할래요.”
“왜요? 정말 좋은 기회잖아요?”
“미국에서 촬영해야 하잖아요.”
“당연하죠. 할리우드 영화인데.”
“그래서 싫어요.”
“왜요?”
“미국에 가기 싫어요.”
“우리 미국에 두 번이나 다녀왔어요. 왜 가기 싫다는 건데요?”
“그냥 가기 싫어요.”
서이렌은 운전석에 앉아 있는 장우재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아꼈다.
나는 서이렌에게 바로 톡을 보냈다.
[설마 나 때문인가요?]
[당연하죠. 나 혼자 미국에 가서 영화 찍으라고요? 싫은데요.]
[이렌 씨 커리어도 생각해야죠. 진짜 좋은 기회라고요.]
[내 커리어는 한국에서도 충분히 키울 수 있어요. 한국에 좋은 작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대표님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저를 캐스팅해 주실 거잖아요.]
[그래도 할리우드예요. 배우들에겐 꿈같은 곳이라고요. 정말 마음이 없어요?]
[대표님도 미국에 가는 거라면 생각해 볼게요.]
나는 핸드폰을 닫고 서이렌을 흘겨봤다.
서이렌도 내 눈빛을 피하지 않고 입을 앙다물고 나를 쳐다봤다.
나와 서이렌이 눈치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장우재가 헛기침을 했다.
‘쿨럭.’
나는 혹시라도 장우재가 나와 서이렌의 미묘한 관계를 들킨 것은 아닐지 염려되어 장우재를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장우재는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두 분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예. 장우재 씨. 왜 그러죠?”
나는 긴장하며 장우재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쳐다봤다.
장우재는 시뻘게진 얼굴로 실실 웃으며 물었다.
“혹시 이렌 님이 미국에 가시면 저도 따라가야 하나요?”
* * *
작은 아씨들의 촬영이 시작된 지도 어느덧 이 주가 흘렀다.
블랙 마치는 엊그제부터 촬영을 시작했고 스타탄생과 레전드 필름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회사에서 해야 할 업무를 빨리 마치고 작은 아씨들 촬영장에 방문했다.
어느새 내 옆에 붙은 빈선예가 커피를 건넸다.
“정말로 매일 출근하시네요.”
“빈 팀장님도 자주 오시네요. 이제 현장은 문선경 씨에게 다 맡길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려고 했는데 워낙에 우리 회사 배우들이 많이 출연하잖아요. 일손이 모자라서 내가 돕기로 했어요. 그리고 여기에 오면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더 많아서요.”
“구경거리요? 그게 무슨 소리죠?”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빈선예를 응시했다.
“그런 게 있어요.”
빈선예는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내가 촬영장에 매일 출근해서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통에 임지형은 같은 촬영장에 있으면서도 서이렌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없더라도 빈선예가 대신 지켜보고 있었기에 임지형은 서이렌에게 말도 제대로 걸지 못했다.
“그나저나 얀 필립은 언제 한국에 도착하나요?”
“오늘 올 거예요. 우리가 패션위크에 못 가니까 결국 얀이 찾아왔네요.”
“한국에 도나텔라 매장을 오픈하는 것 때문에 방문하는 거라면서요? 그것 때문에 패션쇼도 크게 열고.”
“한국 매장이 크면 얼마나 크겠어요? 원래는 안 오는 건데 이렌 씨 보러 겸사겸사 오는 거죠.”
“그런 거였나요? 갑자기 미안해지는데요? 드라마 촬영 일정 때문에 패션쇼 당일이나 볼 수 있잖아요.”
“그럼, 할리우드에 진출하면 되겠네요. 미국에 있으면 패션위크에 가기도 편하고.”
빈선예는 어디서 들었는지 할리우드에서 러브콜이 왔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게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내가 씁쓸하게 웃자 빈선예는 할 말이 있는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대표님…….”
빈선예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녀의 핸드폰이 두두거리며 진동했다.
“어? 얀 필립이네요. 한국에 도착했나 봐요. 잠시만요.”
빈선예는 핸드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인천 공항에 도착한 얀 필립은 이곳이 마치 신세계 같았다.
함께 따라온 그의 비서는 짐을 들고 인천 공항을 돌아다니는 얀 필립을 따라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와우. 역시 서이렌 씨는 한국에서는 톱스타였어. 여기도 저기도. 모든 곳에서 서이렌 씨가 나를 반기고 있다고.”
얀 필립은 곳곳에 있는 서이렌의 광고판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스타탄생 여신들과 함께 찍은 갤러리스 백화점 광고.
데뷔 때부터 계속해 오고 있는 태양제과의 피치업 음료수 광고.
화장품 광고까지.
인천 공항은 서이렌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얀. 밖에 리무진이 대기 중입니다.”
“알아요. 톰. 하지만 아직 사진을 다 못 찍었다고요. 잠시만 기다려 줘요.”
얀 필립은 비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광고판의 서이렌을 그의 핸드폰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얀의 비서 톰은 한국의 일정에 도나텔로의 부사장인 마크 핸슨이 따라오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얀 필립의 연인인 마크 핸슨은 굳이 한국 매장 오픈 기념 쇼에 참석하겠다는 얀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도 따라오려고 했지만, 업무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비서인 톰을 따려 보낸 것이다.
“그만 가시죠. 얀.”
“알았어요. 이거 한 장만 더 찍고요.”
얀은 사진을 다 찍고는 리무진이 대기 중인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공항버스가 대기 중인 외부 벽면에 시시각각 변하는 홀로그램 광고가 있었다.
홀로그램 광고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서이렌이었다.
최근에 찍은 샴푸 광고의 옥외 광고판이었다.
서이렌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홀로그램 형상으로 보였다.
서이렌이 뒤돌자 그녀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춤을 추며 하늘거렸고 아름다운 배경음악까지 흘러나왔다.
얀 필립뿐만 아니라 공항에서 나온 일반인들도 서이렌의 광고를 보고 넋을 잃고 쳐다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고져스. 뷰티풀!”
얀 필립은 다시 카메라를 들어 서이렌의 모습을 담기 시작했다.
좀 더 아름다운 각도의 사진을 얻기 위해 뒷걸음질 치던 얀 필립은 뒤에 서 있던 누군가와 부딪혔다.
얀은 어설프게 배운 한국말로 말했다.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