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69화 (170/261)

#169화. 촬영장으로 출근하는 대표님

작은 아씨들의 첫 촬영 날이 밝아 왔다.

서주희 작가는 우연미 작가와 함께 16부작을 8부작으로 줄인 작은 아씨들의 대본을 완성했고 촬영 일정은 총 두 달이다.

빡빡한 일정이지만 완전 사전 제작으로 제작비도 충분하다.

유플릭스는 의외로 함께 일하기 좋은 파트너였다.

제작비도 넉넉하게 배정해 줄 뿐만 아니라 작품에 대한 일체의 간섭도 없었다.

작은 아씨들을 다른 공중파나 케이블에서 했다면 아마 대본의 내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작은 아씨들은 네 명의 여배우가 나오지만 로맨스가 없는 흔히 말하는 ‘노맨스’ 작품이다.

동생의 복수를 위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자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연애를 할 시간 따위는 없다.

공중파라면 드라마국의 윗분들이 싫어하는 이야기 천지다.

처음부터 작은 아씨들을 OTT 작품으로 계획한 일은 신의 한 수였다.

촬영장에 도착한 나는 촬영 현장을 둘러봤다.

미리 와서 준비하고 있던 빈선예를 보고 내가 놀라 물었다.

“빈 팀장님이 웬일이세요? 이제 현장은 문선경 씨가 나오는 거 아니었나요?”

“첫 촬영인데 당연히 와야죠. 대표님도 첫 촬영 날이라 오신 거죠?”

“음……. 아뇨.”

“아니라고요?”

“당분간 매일 올 생각입니다.”

“매일 오신다고요? 바쁘시잖아요.”

“드라마 제작은 처음이지 않습니까? 현장에서 이것저것 배워야지요.”

“십 년이 넘게 배우 매니저를 하셨잖아요. 드라마 촬영 현장이라면 눈 감고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아시는 거 아닌가요?”

“유플릭스와 함께 일하는 건 처음이잖아요. 그리고 스태프들도 다 엔진 소속이라서 조율이 필요합니다.”

“그러시구나. 그럼, 그때 회식 때 하신 말씀이 진짜였나 보네.”

“당연히 진짜죠. 제가 언제 거짓말을 하던가요?”

“알죠. 대표님은 정직하시죠.”

빈선예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힐끔 쳐다봤다.

진짜로 일하러 온 건데 왜 저렇게 이상하게 쳐다보지?

나는 빈선예의 눈빛을 피하며 물었다.

“이렌 씨는 촬영 준비는 끝났나요?”

“지금 대기실에서 배우들이랑 대기 중이에요.”

“대기실에 여자들만 있는 거죠?”

“그럼요. 오늘은 자매들만 촬영하잖아요. 남자 배우가 없어요. 당연한 소릴 하시네요. 임준학 배우도 2화부터 분량이 있잖아요.”

“그럼, 됐어요.”

나는 괜히 찔려서 빈선예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 * *

장례식을 마친 자매들이 죽은 나산호의 집으로 갔다.

산호는 유앤필이라는 제약회사의 촉망받는 연구원이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이 들린 것은 지난달이었다.

청주의 공장으로 출장을 갔던 그녀는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녀가 탄 차량은 전소했고 산호는 차량 밖으로 튕겨 나갔다.

차량 폭발로 얼굴이 크게 상한 산호의 시신은 도로 한가운데서 발견됐다.

젊은 연구원의 안타까운 사연일 것만 같던 이 일은 경찰들이 장례식장에 들이닥치며 돌변했다.

산호가 제약회사의 신약을 빼돌렸다는 증거가 발견된 것이다.

경찰들은 산호의 시신을 가져가 부검했고 한 달간의 경찰조사 끝에 처참하게 헤집어진 산호의 시신이 가족에서 돌아왔다.

결론은 그녀가 동료와 함께 신약을 빼돌렸고, 청주에서 함께 탄 동료가 그녀에게 약을 먹여 교통사고를 내고 그는 신약을 갈취해 해외로 달아났다는 것이었다.

한 달 동안 대한민국을 달궜던 이 일은 산호의 남은 가족들에게 큰 상처를 안겨 줬다.

산호의 가족은 일반 가족들과 다르다.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네 자매가 똘똘 뭉쳐 살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 커서 각자의 집에서 혼자 살지만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며 자매의 집에서 잠을 잤다.

야속하게도 오늘은 바로 산호의 집에서 놀기로 한 날이다.

불 꺼진 아파트에 자매들이 들어왔다.

검은 상복을 차려입은 그녀들의 얼굴은 생기를 잃었다.

“뭐라도 좀 먹어야지.”

맏언니 진주가 힘겹게 일어서서 부엌으로 갔다.

막내인 산호는 일이 바빠서 밥을 못 해 먹었는지 찬장 안에는 라면과 레토르트 식품이 가득했고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다.

“됐어. 언니. 배 안 고파.”

둘째 수정이 큰 언니 진주를 데리고 소파에 앉혔다.

한 달 동안 비어 있던 집이라 그런지 먼지가 뭉쳐서 거실에 굴러다녔다.

진주는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일어서서 물티슈로 먼지를 훔쳤다.

“하지 마. 오늘은 좀 가만히 있자.”

“너나 가만히 있어.”

“언니는 지금 청소할 기분이 나?”

“그럼, 산호 집을 이렇게 더럽게 놔두란 거니?”

“누가 뭐래? 그냥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첫째 진주와 둘째 수정은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지만,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내뱉었다.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쓴 셋째 상아가 두 언니는 싸우라고 놔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실에서 나온 상아는 산호의 연구실로 들어갔다.

산호는 드레스룸이었던 작은 방을 이사 올 때 리모델링해서 연구실로 탈바꿈시켰다.

이 작은 연구실에서 산호는 회사에서 할 수 없는 자신만의 연구를 했다.

상아는 주인을 잃은 연구실을 보며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연구실 한쪽 벽에는 연구용 냉장고가 있었고 그 안에는 작은 실험 용기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냉장고 한쪽 구석에 스킨로션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화장품 냉장고 사 준다니까. 기어이 여기에 놓고 같이 썼나 보네.”

상아는 쓴웃음을 삼키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스킨로션을 꺼내려고 손을 집어넣었던 상아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냉장고에서 멀어졌다.

동생의 연구실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상아는 당황한 얼굴로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선 아직도 큰언니 진주와 둘째 언니 수정이 싸우고 있었다.

상아는 소파에 대충 벗어 놓은 그녀의 외투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어 다시 연구실로 달려갔다.

핸드폰 갤러리에서 사진을 찾던 상아의 손이 멈칫했다.

그녀는 두 달 전 산호와 함께 찍었던 사진을 찾아 지금의 연구실과 비교했다.

사진과 대조해 보던 상아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상아는 그길로 거실로 달려갔다.

진주와 수정은 서로를 보지 않고 뒤돌아 서 있었다.

상아는 그들에게 달려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언니.”

“상아야. 우리 가자. 오늘은 여기에 오는 게 아니었어.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오자.”

“언니. 이것 좀 봐.”

“너까지 왜 그래? 언니 지금 너무 힘들어.”

진주와 수정은 진이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산호 연구실이 이상해.”

“무슨 소리야?”

“이것 봐 봐. 실온 배양 중이던 미생물이 몽땅 냉장고에 안에 들어가 있어.”

“그게 왜?”

“그것뿐만이 아니야. 빛을 보면 안 돼서 블랙박스에 넣어 뒀던 미생물도 밖으로 나와 있다고.”

“뭐?”

“생각해 봐. 산호가 이런 걸 실수할 얘야? 아니잖아. 누군가 연구실을 뒤진 거라고.”

집에서 나가려던 진주와 수정이 걸음을 멈추고 상아를 바라봤다.

상아는 핸드폰을 내밀며 말했다.

“이상해. 분명히 누군가 이곳에 와서 산호의 연구실을 뒤졌어.”

“경찰이 그런 걸 수도 있잖아.”

“아냐. 경찰은 아니야. 경찰들이 산호 집을 수색한 다음 날 내가 와서 확인했어. 혹시 산호가 애지중지하는 미생물을 엉망으로 만들어 놨을까 봐 내가 확인했다고.”

“그게 정말이야?”

“뭔가 있어. 산호가 신약 따위를 훔칠 리가 없잖아. 내가 알아. 산호는 도둑질 같은 건 하지 않아.”

“맞아. 우리 산호가 그럴 리가 없어.”

“언니.”

남은 세 자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나 차갑고 냉정하게 굴었던 둘째 수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언니. 우리가 찾자. 누가 산호를 죽였는지 우리가 찾아보자. 나도 뭔가 이번 수사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었어. 내가 이번 수사 담당자를 찾아가서 확인해 볼게.”

수정이 그렇게 이야기하자 상아도 말을 보탰다.

“나는 우선 이 아파트 CCTV부터 확인해 볼게. 분명히 뭔가 있을 거야.”

마지막으로 첫째 진주가 입을 열었다.

“유앤필.”

“뭐라고?”

“유앤필의 연구소장을 내가 알아.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 내가 가서 만나 볼게.”

죽은 사람처럼 생기가 하나도 없이 이곳에 들어왔던 세 자매는 이제 없었다.

동생의 의심쩍은 죽음을 밝히기 위해 그녀들은 의지를 다졌다.

* * *

현장에 이윤기 감독의 컷 소리가 울려 퍼졌다.

“컷입니다. 점심 식사 후에 다시 모입시다.”

점심을 먹는다는 말에 현장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촬영을 하다 보면 식사 시간을 제대로 못 맞출 때가 많지만 이윤기 감독은 웬만하면 식사 때는 맞추려고 하는 주의였다.

나는 스태프들과 섞여서 밥차로 걸음을 옮겼다.

“원 대표님은 진짜로 계속 오시네요.”

“촬영 일정이 고작 두 달인데요. 계속 출근할 겁니다.”

“대표님이 이렇게 출근 도장 찍는 건 처음 보네요.”

“왜요? 싫으세요?”

“싫을 리가요? 대표님이 스태프들 고생한다고 핫팩에 자양강장제에 간식까지 잘 챙겨 주시는데 당연히 좋죠.”

“계속하라는 말로 이해하면 되죠?”

“그런 뜻으로 이야기한 건 아닌데. 그렇게 받아들이셨다면 어쩔 수 없죠. 하하.”

나는 조명팀 스태프와 웃으며 줄을 섰다.

엔진 소속의 드라마 제작팀과도 제법 친해졌다.

말이 엔진 소속이지 프리랜서가 대부분이라서 앞으로 스타탄생이 드라마 제작을 하면 제일 먼저 부를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렇게 현장에서 친분을 쌓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어느새 내 뒤에 줄을 선 임준학과 임지형을 보며 인사를 나눴다.

“오셨네요. 오늘부터 첫 촬영이죠?”

“예. 대표님.”

“이쪽은 임지형 씨인가요? VIP 파티 때 보고 오랜만에 뵙네요.”

“안녕하십니까. 원 대표님.”

임지형은 나와 인사를 하고 고개를 돌려 밥차 주위를 확인했다.

“누굴 찾으시나요?”

“다른 배우님들은 안 계시는가요?”

“우리 주연 배우님들은 다른 곳에서 식사하고 계십니다.”

“다른 곳에서요?”

“우리가 액션 분량이 꽤 되잖아요. 그래서 몸 만드느라고 따로 식단을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분들은 따로 식사하세요.”

나는 일부러 작은 아씨들 여주 네 명의 밥차는 따로 운영하고 있다.

이유는 지금 임지형에게 말한 것 때문이다.

임지형은 현장에 오면 서이렌과 편하게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입술을 쭉 내밀고 인상을 썼다.

“액션은 우리 형도 있는데…….”

나는 그런 임지형을 보며 생각했다.

스토커 팬은 내가 못 보지.

밥을 받아 든 나는 빈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이윤기 앞에 앉은 나는 웃으며 말했다.

“밥이 너무 맛있는데요?”

“하하. 원 대표가 와서 그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밥차 운영하시는 아주머니가 원 대표 팬이시래.”

“그래요? 아직도 제 팬이 남아 있군요. 이미 다들 잊을 줄 알았죠.”

“이거 왜 이래? 아직도 가끔씩 원 대표한테 대본이 들어오던데?”

“누구한테 들으셨어요? 혹시 강 이사님인가요?”

“나도 이제 스타탄생 소속이야. 미디어팀에 들어오는 대본을 내가 제일 먼저 본다고.”

“그렇죠. 하.”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웃었다.

내가 엄청난 발연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윤기 감독은 창피해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나를 보며 웃었다.

한참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는데 메일 알람이 울렸다.

탁자 위에 올려진 핸드폰의 액정이 켜지며 메일의 미리 보기가 떴다.

영어네. 스팸 메일인가?

나는 무시하고 밥을 먹으려고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핸드폰을 바라봤다.

[Daniel Lamoureux]

메일 제목에 보낸 사람의 이름을 밝히고 있었다.

다니엘? 이건 또 어떻게 읽지?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름을 검색해 봤다.

그러자 익숙한 이름이 떴다.

[대니 라모로(Daniel Lamoureux)]는 프랑스의 영화감독, 작가, 극작가, 각본가 영화배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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