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66화 (167/261)
  • #166화. 오디션의 깍두기

    나는 눈앞에서 연기 연습을 하는 이락과 정희진을 보며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내가 연습실에 들어온 것도 모르고 연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이제 어엿한 배우가 된 이락은 그렇다고 치지만 이락의 친척인 정희진은 대체 뭘까?

    정희진은 책상 아래로 몸을 숨기고 404호 여고생 연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건가?

    나는 지난날 나비 촬영장에서 처음 연기를 선보였던 이락을 떠올렸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숨어있는 원석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이락이 어색하게 웃으며 일어섰다.

    정희진도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정희진은 얼굴을 붉히며 내게 인사를 했다.

    “원세강 대표님. 오셨네요.”

    이락은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정희진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야. 너 왜 그래? 집에서처럼 편하게 해. 왜 갑자기 귀여운 척을 하는 건데?”

    “내가 언제 귀여운 척을 했다고 그래?”

    정희진이 눈알을 부라리자 이락은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희진 양도 연기를 했었나요?”

    “저요?”

    “방금 그거 블랙마치의 한 장면이었죠? 정말 잘하던데요?”

    “대정초등학교 5학년 학예회 때 주연도 했어요. 해님 달님에서 호랑이 역이요.”

    “그래요?”

    나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자기 PR을 하는 정희진을 보며 웃었다.

    “호랑이가 무슨 주인공이야? 악당이잖아.”

    “해님 달님 봤어? 호랑이가 대사가 제일 많아. 빌런도 주인공이지.”

    이락과 정희진은 한마디도 지지 않고 내 앞에서 말꼬리를 잡고 싸웠다.

    “희진 양. 혹시 연기해 볼 생각 없어요?”

    “제가요?”

    이락과 싸우던 정희진이 놀란 눈으로 내게 고개를 돌렸다.

    “오늘 보니까 연기에 소질이 있는 거 같은데요. 지금 말 들어 보니 연기에도 관심 있죠?”

    “관심은 많죠. 락이 오빠 때문에 촬영장에 자주 놀러 가기도 했고요.”

    이락은 사뭇 진지해진 정희진을 보며 깜짝 놀랐다.

    ‘뭐야? 진짜로 할 마음이 있나? 그런데 연기라면 혹시……?’

    나는 정희진을 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지금 십사 층에서 영화 오디션이 진행 중인데, 관심 있으면 한번 참가해 볼래요?”

    “지금이요?”

    “이락 배우님과 친척이라는 말은 하지 말고, 몰래 들어가서 오디션을 보는 겁니다. 어때요?”

    “…….”

    정희진은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오히려 이락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게 말했다.

    “대표님. 얘가 무슨 연기를 해요? 얘는 그냥 생각 없는 고등학생이라고요.”

    이락은 걱정이 돼서 말한 거였는데 정희진이 듣고 발끈했다.

    “내가 무슨 생각이 없어? 대표님. 저 할래요. 하게 해 주세요.”

    “야! 정희진!”

    * * *

    오디션을 마친 윤서혁과 박진숙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보였다.

    “역시 오늘도 없네요. 박 이사님.”

    “그냥 2안으로 가시죠. 연기 전공인 대학생 중에 골라 보죠.”

    “그렇게 하시죠. 더는 촬영을 미루기는 어려울 거 같습니다.”

    오디션을 마치고 정리하려는데, 스태프가 들어와 박진숙에게 프로필을 건넸다.

    사진 한 장 없고 이름만 달랑인 프로필 위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제가 괜찮은 후보를 발견했는데요.

    오디션 한번 보실래요?

    제가 보기엔 404호 여고생에 딱입니다.

    깍두기라고 생각하고 받아 주세요.

    원세강 드림.]

    “이거 원 대표님이 쓰신 거네요.”

    “갑자기 어디서 찾은 사람일까요? 이름은 정희진. 나이는 17살. 배역에는 딱 맞긴 하네요.”

    “박 이사님. 한번 불러 보죠. 원 대표님 픽이면 믿을 만할 거 같은데요.”

    죽어 가던 윤서혁의 눈동자가 되살아나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래요. 어차피 마지막인데 연기나 한번 보죠. 들여보내세요”

    스태프가 나가고 윤서혁과 박진숙은 긴장한 채 오디션장의 문을 주시했다.

    ‘똑똑.’ 드디어 문이 열리며 정희진이 쭈뼛거리며 오디션장으로 들어왔다.

    ‘보기엔 그냥 평범한 학생처럼 보이는데……. 근데 낯이 익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윤서혁은 정희진이 얼굴이 익숙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선 자리에 앉아요. 혹시 준비해 온 연기가 있나요?”

    “아뇨. 방금 연락을 받고 내려온 거라서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혹시 오늘 무슨 영화 오디션 보는지도 몰라요?”

    “그건 알아요. 블랙마치라는 영화라고 알고 있습니다.”

    박진숙은 정희진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특히 원세강과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대본 한 장을 줄게요. 이걸 보고 연기할 수 있겠어요?”

    스태프가 정희진에게 다가와 대본을 건넸다.

    그런데 그것은 방금 이락과 함께 연기했던 장면이었다.

    대본을 본 정희진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희진은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지금 바로 할까요?”

    “준비 없이 바로 들어가도 되겠어요?”

    “예. 됩니다.”

    정희진은 씩씩하게 웃으며 일어서더니 외투를 의자에 걸치고 오디션장의 뒤쪽에 있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정희진이 왜 저러는지 모르는 윤서혁과 박진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책상 뒤로 걸어간 정희진은 아까 했던 것처럼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고 외투를 어깨 아래로 내린 뒤, 컨버스 신발을 손에 들었다.

    ‘할 수 있어. 해 보자.’

    심호흡을 마친 정희진은 404호 히키코모리 여고생이 돼서 고개를 내밀었다.

    윤서혁은 갑자기 분위기가 확 바뀐 정희진을 보며 깜짝 놀랐다.

    ‘어?’

    윤서혁은 그제야 정희진을 알아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방금 엘리베이터에서 봤던 락이 사촌 동생?’

    정희진은 윤서혁과 박진숙을 노려보며 아까 이락의 앞에서처럼 대사를 읊었다.

    “필요 없으니까 꺼져.”

    * * *

    LOK 미디어 로비 커피숍에 매니저 두 명이 들어왔다.

    커피를 시켜 손에 든 그들은 로비가 아닌 밖으로 나갔다.

    2월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2팀의 고중기 매니저와 3팀의 강찬성 매니저가 대화를 시작했다.

    강찬성이 보기 싫은 미소를 지으며 고중기에게 물었다.

    “미디어로 발령 났다며?”

    “제기랄. 벌써 너도 아는 거야?”

    “좋겠다.”

    “좋긴 뭘 좋아. 나는 죽을 맛인데.”

    “한지욱이 제일 밀어주는 곳이 미디어잖아. 지금 제작하려는 작품도 한지욱이 쓴 거라잖아. 크크큭.”

    “걔는 대체 왜 그런 거니? 일이나 잘하라고 해. 무슨 회사가 자기 놀이터도 아니고. 자기 하고 싶은 걸 다 하려고 들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고중기는 쓴 커피를 마시며 치를 떨었다.

    “진짜 화났나 보네. 그래도 네가 앞으로 일할 곳이야. 말조심해야지.”

    “시끄러워. 내가 왜 거기서 일해? 나 이직할 거야.”

    “이직? 어디로 가려고? 숲 엔터로 갔던 진 팀장한테 연락해 보려고?”

    “아니. 스타탄생으로 갈 거야.”

    “뭐? 너 미쳤어?”

    강찬성은 하마터면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냐? 거기서 널 뽑아 줄 거 같아? 그렇게 뒤에서 욕을 하고 다녔는데. 너를 잘도 뽑아 주겠다.”

    “조만간 스타탄생이 원톱으로 올라설 거라고. LOK? 웃기지 말라고 해. 언제 적 LOK야? 너도 얼마 전에 기사 뜬 거 봤지? 유플릭스 대표랑 원세강이랑 같이 나온 거.”

    “나도 봤지. 스타탄생이 유플릭스 독점 드라마로 제작까지 한다며? 대단하더라. 캐스팅이 완전 역대급이야.”

    고중기는 엊그제 발표된 ‘작은 아씨들’의 제작 기사를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유플릭스에서 투자하는 한국 드라마 중에는 최고 대우의 투자를 약속받았고, 대표까지 직접 나와서 독점 계약을 맺었다.

    캐스팅은 미친 수준이다.

    이자현, 서이렌, 김이솔 그리고 윤이슬이 동시에 캐스팅됐다.

    감독은 마네킹과 나만의 마돈나의 성공으로 재기하고 이제는 흥행 감독에 이름을 올린 이윤기다.

    “큰물에서 놀아야지. 스타탄생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아가는데. 한지욱이 쓴 대본으로 영화를 만드는 TOP이 웬 말이야? 망해야 정신을 차리지. 영화 제작에 실패하면 손해가 막심한데 말이야. 난 떠날 거다.”

    “스타탄생에서 받아 주기나 한대?”

    “이미 서류 심사는 통과했어.”

    “뭐? 진짜?”

    “강진석은 몰라도 원세강 걔는 얼마나 착하냐? 사실 우리한테 원세강은 호구였잖아. 면접에서 입만 잘 털면 합격은 식은 죽 먹기라고. 내가 또 원세강은 좀 알지.”

    “고 매니저. 나도 좀 데리고 가라.”

    “뭐래? 너는 그냥 LOK나 다녀. 왜 엉겨 붙으려고 그래?”

    “LOK도 불안하다고.”

    “왕 대표님이 계시는데 불안할 게 뭐가 있어?”

    “지금 LOK는 왕 대표님 체제로 돌아가고 있긴 하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너도 될 수 있으면 빨리 이직해라.”

    “그게 말처럼 쉬우냐? 근데 진짜 부럽다. 나중에 스타탄생에서 자리 잡으면 꼭 나 불러라.”

    “걱정하지 마. 스타탄생에 들어가면 내 라인을 만들어야 하니까 내 사람들 데리고 와야지.”

    “크큭. 그거 좋다. 꼭 합격해라. 짜식아.”

    “걱정은 붙들어 매라. 원세강을 어떻게 구워삶을지 이미 다 시나리오를 짜 놨다니까.”

    고중기와 강찬석은 어느새 식어 버린 커피를 원샷하고 웃으며 건물로 들어갔다.

    * * *

    1차 서류 면접을 통과한 매니저들의 이력서를 확인하던 내 눈이 커졌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마침, 내 방에 들어온 강진석에게 물었다.

    “형님. 이 사람은 뭐죠? 제가 분명 서류에서 걸렀는데 왜 여기에 남아 있는 거죠?”

    나는 고중기 매니저의 이력서를 강진석에게 들이밀었다.

    “내가 다시 올려놨어.”

    “형님이요? 왜요? 고중기 매니저 싫어하시잖아요.”

    “싫지. 극혐하지.”

    “근데 뭐 하러요? 제가 이력서를 보자마자 탈락시켰는데요.”

    “괘씸해서 그런다. 이게 아주 너를 물로 보고 이력서 넣은 거잖아. LOK 있을 때 그렇게 너를 호구 취급하고 막 대하더니. 우리가 스타탄생으로 잘 나가니까 이제는 여기로 이직을 하려고 해? 아주 파렴치한 놈이야.”

    “그러게요. 웃기긴 하네요.”

    “야. 너 지금 웃냐?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이구먼. 웃음이 나와?”

    강진석은 고중기 매니저의 이력서를 보며 이를 갈았다.

    “내가 이번에 압박 면접이라는 게 뭔지 제대로 알게 해 주겠어.”

    “면접에도 들어오시려고요?”

    “응. 고중기 이 자식 면접에만 참석할 거야.”

    “그래요. 알아서 하세요. 어차피 제 면접에는 통과 못 할 겁니다.”

    “그래? 떨어뜨리려고?”

    “제가 정한 기준에 미달이면 떨어뜨려야죠. 근데 고중기 매니저라면 그 기준을 못 채울 겁니다. 확신해요.”

    “오케이. 난 어차피 떨어뜨릴 거고 그 자식에게 지옥의 면접을 보여 주려는 거니까. 상관없어.”

    이력서를 정리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왜 오셨어요? 제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던 참인데요.”

    “아. 맞다. 정희진 말이야.”

    “희진 양이 왜요?”

    “연기를 예상보다 훨씬 더 잘해. 윤희자 선생님이 직접 연기 가르치신다고 했는데 그 꼬장꼬장한 분이 칭찬 일색이래.”

    “그래요?”

    윤희자는 106호에 혼자 사시는 할머니로 블랙마치에 일 순위로 캐스팅됐었다.

    연기가 처음인 정희진이 캐스팅되자 윤희자가 직접 정희진을 맡아서 연기 연습을 시키겠다고 나서서 그녀에게 전적으로 맡겨 놓은 상태다.

    정희진은 지금 학교가 끝나면 윤희자의 집으로 가서 연기를 배우고 있다.

    윤희자는 이락보다 정희진이 연기에 소질이 있다며 정희진을 예뻐한다고 했다.

    “윤서혁 감독도 좋아서 죽으려고 한다. 희진이가 익숙해지면 촬영하려고 일정도 이 주 뒤로 미뤄 놨는데, 그냥 원래대로 촬영할 거래.”

    “그거 잘됐네요. 올해 크리스마스에 개봉하려면 일정이 더 늦어지면 안 됩니다. CG가 많이 들어가서 후반 작업에 시간을 많이 빼앗길 겁니다.”

    “그러게, 말이다. 복덩이가 제 발로 아장아장 걸어 들어왔다니까. 하하하. 넌 대체 정희진이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지 어떻게 알아보고 그날 오디션 보게 한 거야?”

    “그냥 운이었습니다.”

    “두리뭉실하게 말하지 말고. 진짜 어떻게 된 거냐?”

    “이제 가시죠? 회의해야죠.”

    “야! 진짜로 말 안 해 줄 거야? 야. 세강아.”

    “영업 비밀입니다. 형님이 직접 알아보세요.”

    “말해 달라니까.”

    나는 강진석과 함께 웃고 떠들며 십사 층으로 내려왔다.

    레전드 필름과 한 건물에 있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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