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63화 (164/261)
  • #163화. 다시 뭉친 드림팀

    16화 대본을 순식간에 완독한 나는 아무 말 없이 쌓여 있는 대본을 바라봤다.

    한 화, 한 화를 꽉 채운 글자에서 서주희 작가가 그동안 작품 활동을 못 하며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들이 느껴졌다.

    그녀가 업그레이드된 만큼 작은 아씨들은 손에서 땀이 날 만큼 너무나 재미있었다.

    의문의 사고로 죽은 막내의 죽음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뭉친 세 자매의 이야기가 잔혹하지만, 속도감 있게 펼쳐지는 액션 스릴러 장르였다.

    섬세한 대본을 쓰던 서주희는 아마 그 사건 이후로 많은 부침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작품의 느낌이 이렇게 달라졌을 리가 없다.

    작은 아씨들에 나오는 악당들은 자매들에 의해 잔혹한 복수를 당한다.

    서주희는 이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억울함을 글에서라도 풀어내고 싶었을 거다.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기다렸던 서유림 매니저가 용기 내 입을 열었다.

    “대표님.”

    나는 긴장하고 있을 서유림을 먼저 안심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좋은데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진심입니다. 16화나 돼서 언제 다 읽냐 했는데. 보세요. 쉬지 않고 끝까지 다 봤네요. 정말 잘 쓴 글입니다.”

    “아. 다행이네요.”

    서유림은 꽉 쥐고 있던 두 손을 그제야 힘없이 내려놨다.

    “서 작가님은 지금 고향에 계신가요?”

    “예. 본가에 있어요.”

    “서 작가님을 봬야 할 거 같아요.”

    “언니를요?”

    “대본이 마음에 든다니까요. 계약해야죠.”

    “정말로 계약하시려고요?”

    “다른 사람이 채가기 전에 제가 빨리 계약해야겠어요. 서 작가님께 말씀 좀 전해 주세요. 당장 서울로 올라오시라고요.”

    “대표님. 저는 정말…….”

    서유림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서유림에게 티슈와 따뜻한 물 한잔을 건넨 나는 작은 아씨들의 대본을 챙겨 들고 말했다.

    “서 작가님 전화번호도 알려 주세요. 제가 할 말이 많아요.”

    “예. 그럼요. 알려 드릴게요.”

    서유림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내게 서주희 작가의 전화번호를 적어 줬다.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 * *

    KBC 근처의 중국집에 이윤기 감독과 우연미 작가가 나타났다.

    “이윤기 감독님을 찾아왔는데 우 작가님도 계셨네요.”

    “터키 여행을 갔다가 선물 사 온 게 있어서 감독님 드리려고 잠시 들렸어요.”

    우연미는 나만의 마돈나를 마치고 여행을 다니며 쉬고 있었다.

    “이윤기 감독님은 조만간 KBC에서 퇴사하신다면서요?”

    내 질문에 이윤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벌써 소문이 났나?”

    “왜 벌써 그만두시려는 겁니까? 국장까지 하실 거라고 하셨잖습니까?”

    “말만 그런 거지. 어느 세월에 국장을 달겠어? 지금 있는 지영록 국장 체제가 한동안 계속될 거야. 그리고 국장이 되면 현업에서 물러나야 하잖아. 난 계속 현장에 남고 싶더라고.”

    “그럼, 제작사로 들어가시는 겁니까?”

    “응. 그렇게 하려고. 요즘은 프리랜서로 혼자 살아남기는 힘들어서 제작사로 들어가게 될 거야.”

    “생각하신 곳은 있고요?”

    “몇 군데 논의 중인 곳이 있긴 해.”

    조용히 듣고 있던 우연미가 은근슬쩍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감독님. 그러지 마시고 스타탄생으로 오세요.”

    “스타탄생?”

    “우리 회사가 얼마나 좋은데요?”

    “나도 알지. 그런데 거긴 배우 소속사지. 드라마 제작사는 아니잖아.”

    “레전드 필름이 있잖아요.”

    “거긴 영화 제작사고.”

    “하긴 많이 다르긴 하죠.”

    우연미는 이윤기 감독과 일하고 싶었는지 금세 침울해졌다.

    나는 돌아가지 않고 바로 이윤기 감독에게 본론을 꺼냈다.

    “아뇨. 다르지 않습니다. 같이하시죠.”

    “방금 뭐라고 했나?”

    “스타탄생에서 이번에 미디어 제작팀을 신설할 겁니다. 드라마를 직접 제작하려고요.”

    이윤기뿐만 아니라 우연미도 두 눈이 똥그래져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들 앞에 대본을 꺼내 놨다.

    서주희 작가에게 말해서 오픈해도 된다고 허락받은 1화 대본이다.

    “이 작품이 스타탄생이 만들 첫 번째 드라마예요.”

    이윤기는 말없이 대본을 자신의 앞으로 당겼다.

    [작은 아씨들.

    작가: 서주희]

    서주희라는 이름을 발견한 이윤기 감독이 탄식했다.

    “서주희 작가 작품이구나.”

    이윤기는 박호중 감독과의 악연으로 서주희 작가를 빼앗기고 한동안 작품 활동을 못 할 뻔했었다.

    하지만 서주희도 원해서 감독을 갈아탄 것은 아니었다.

    서주희 작가에게도 고충이 있었음을 잘 알고 있는 이윤기는 웃으며 작은 아씨들의 대본을 손에 들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는군.”

    이윤기는 떨리는 손으로 작은 아씨들 대본의 첫 장을 펼쳤다.

    * * *

    서주희가 탄 차량이 스타탄생 앞에 섰다.

    운전석에 앉은 서유림이 서주희의 손을 잡았다.

    “언니, 얼굴이 왜 그래? 그동안 제작사랑 미팅 많이 해 봤잖아.”

    “몰라. 이제는 기억도 안 나.”

    “우리 대표님이 진짜로 좋은 분이셔. 그러니까 너무 떨지 마.”

    서주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아무 말도 못 했다.

    다짜고짜 대본을 가지고 서울에 올라간 동생에게 하루 만에 연락이 왔다.

    작품을 계약하게 됐다고.

    이곳저곳에서 퇴짜를 맞은 터라 자신감이 땅을 파고들어 가던 때였기에 따지지 않고 바로 오케이 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스타탄생 앞에 도착하고 보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나 또 떨어지면 어쩌지? 그럼, 진짜로 끝이야.”

    “언니 걱정하지 마. 우리 대표님이 진짜로 능력 있는 분이야. 계약할 마음도 없는데 언니를 이곳까지 불렀겠어? 이 대본. 반드시 살려 내 주실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어.”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 얼굴 좀 펴고. 들어가자. 언니. 내가 옆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

    “고마워. 네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

    서유림은 자신에게 부쩍 의지하는 언니를 보며 좋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녀는 서주희 작가의 손을 잡고 스타탄생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스타탄생 이 층으로 올라온 서주희 작가는 반가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윤기 감독님…….”

    이윤기는 서주희 앞으로 달려가 그녀를 맞이했다.

    “오랜만이야. 서 작가.”

    “감독님이 어떻게 여기에 계세요? 어? 우연미 작가도 있었네.”

    서주희는 이윤기 뒤를 쫄래쫄래 따라온 우연미를 그제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서 선배님. 저도 따라왔어요. 우리 작가교육원 졸업하고 오랜만에 보는 거죠?”

    서주희는 오늘 여기서 이 사람들과 재회할지 몰랐는지 어쩔 줄 몰라 했다.

    “다들 서서 뭐 하시는 겁니까?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서주희 앞으로 다가온 내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서주희 작가님. 저는 스타탄생 대표인 원세강이라고 합니다.”

    나를 보고 놀란 서주희가 우물쭈물하자 서유림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언니도 인사해야지. 대표님 팔 아프시겠어.”

    “그래.”

    서주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내 손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주희라고 합니다.”

    * * *

    스타탄생 이 층이 감미로운 커피 향기로 꽉 찼다.

    모두 평화로운 분위기였지만, 오직 한 사람 서주희 작가 주위에만 폭풍이 휘몰아친 것 같았다.

    서주희 작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 작품을 이윤기 감독님이 맡아 주신다는 거죠? 그럼, KBC에서 방송하는 건가요? KBC에서 저를 받아 줄 리가 없을 텐데요. 저 블랙리스트래요. 감독님.”

    서주희는 말을 마치고 습관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이윤기는 그런 서주희에게 따뜻한 미소로 답했다.

    “서 작가. 나 KBC에서 퇴사해.”

    “예? 퇴사하신다고요? 드라마국 국장까지 하실 거라고 하셨잖아요.”

    “국장이 되면 드라마를 못 찍어. 현업에서 계속 작품 만들려면 KBC를 나오는 게 더 좋지.”

    “그럼, 어디로 가시는데요? 제작사가 어딘지 물어봐도 될까요?”

    “스타탄생에서 할 거야.”

    서주희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서주희 작가를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스타탄생의 첫 드라마가 작은 아씨들이 될 겁니다.”

    “…….”

    서주희는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스러워 보였다.

    “스타탄생이 드라마 제작은 처음이지만 영화 제작은 깊게 관여한 적이 있어요. 레전드 필름이라고 알죠?”

    “그럼요. 당연히 알죠. 작년에 구원의 밤으로 그렇게 난리였는데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죠. 그런데 스타탄생이 레전드 필름과 대체 무슨 관계인가요?”

    서주희가 궁금해하자 서유림이 그녀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서유림에게 스타탄생과 레전드 필름의 설명을 모두 들은 서주희의 눈이 커졌다.

    “드라마 제작은 처음이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이윤기 감독님에 서주희 작가님의 대본까지 있으니 전혀 문제 될 게 없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원래부터 KBC와 같은 공중파나 케이블에서 이 작품을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럼 어디서 방송하나요?”

    “유플릭스라는 플랫폼을 아시나요?”

    “예? 유플릭스라고요?”

    보그가 그렇게 되고 잠적한 서주희는 일 년 동안은 펜을 들지 못하고 집에 틀어박혀 온종일 드라마와 영화만 보는 폐인 생활을 했었다.

    그때 그녀가 끼고 살았던 것이 유플릭스였다.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희로서는 서주희 작가님이 최대한 빨리 결정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유플릭스와도 이야기를 해 볼 수 있거든요.”

    서주희가 고민하자 우연미가 끼어들었다.

    “선배님. 뭘 고민하세요. 당장 하겠다고 하세요. 우리 대표님이랑 일하면 절대 후회 안 해요.”

    “하지만……. 우 작가.”

    “유플릭스랑 계약하게 되면 아마 편수를 줄이자고 할 거예요. 대본을 수정해야 할 텐데 제가 보조 작가로 들어가서 도울게요.”

    “우 작가가 내 보조 작가를 한다고?”

    “잊으셨어요? 제가 원래 진철한 작가님의 보조 작가 출신이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작가교육원 시절에 선배랑 팀플도 했었잖아요. 기억나시죠?”

    서주희는 이 모든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 써 놓은 작품을 태워 버려야 하나 고민했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떡하니 제작사와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감독님에 친한 작가 동생까지 나타나 자신의 작품을 위해 나서니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서주희에게 내가 준비한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저희가 이미 1차로 캐스팅도 끝냈습니다. 작가님이 마음에 안 들어 하실까 봐 걱정인데, 한번 보실래요?”

    나는 서주희에게 태블릿 PC를 건넸다.

    거기에는 우리가 캐스팅한 작은 아씨들, 네 명의 자매가 있었다.

    제약회사의 연구원으로 일하다 의문의 사고로 사망한 막내 ‘나산호’ 역에는 윤이슬.

    억대 연봉의 게임 개발자이자 게임 폐인인 셋째 ‘나상아’ 역에는 서이렌.

    태권도 국가 대표 출신의 경찰 특수본 소속 경찰 둘째 ‘나수정’ 역에는 김이솔.

    마지막으로 유명 아나운서 첫째 ‘나진주’ 역에는 이자현.

    서주희는 놀란 눈을 비비고 다시 태블릿 PC를 쳐다봤다.

    “이분들이 진짜로 제 작품에 출연하신다고요?”

    서주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보며 물었다.

    “예. 오픈해도 된다고 하셨던 대본을 이분들께 돌렸고 오늘 아침에 모두 하시겠다고 연락해 주셨습니다.”

    “말도 안 돼요.”

    “정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작가님을 만난다고 하니까 오시겠다고 하셨어요. 이제 올 때가 됐는데…….”

    그때 이 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에 인기척이 들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시간을 딱 맞춰서 오셨나 보네요.”

    놀란 서주희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서주희는 지금도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은데 눈앞의 현실은 더욱 믿기 어려웠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핫한 스타들이 나타나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