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62화 (163/261)
  • #162화. 업그레이드

    새해 첫날부터 ‘리얼리티:MT’의 정규 방송이 편성됐다.

    연말에 방송하기로 했던 기존 편성을 뒤집고 새해 첫날, 프라임 타임 시간에 MT를 편성하는 강수를 둔 것이다.

    총 4부작으로 편성된 리얼리티:MT는 첫 방송부터 시청률 고공행진을 기록했다.

    - 어제 MT 첫방 봤음?

    - 파일럿이랑 확실히 다르더라. 자본이 빵빵하게 들어가니까 확 달라졌어. ㅋㅋㅋ- 근데 이번엔 윤서혁 감독이 안 했나? 파일럿이랑 편집 점도 다르고 완전 다른 프로던데?

    - 스메 만든 최 피디가 했대. 난 파일럿이 재미있긴 했는데 그건 너무 날 것이었고. 이번이 더 좋더라.

    - 난 파일럿이 조금 더 내 취향.

    - 윤서혁이 계속해 주면 안 되나?

    - 윤서혁 지금 영화 준비 중이라 바쁘다.

    - 윤 감독 새 영화 나옴? 287일 이후로 삼 년 만인가?

    └좀비 영화라는데?

    └재능 살려서 코미디 영화 한 편만 찍자. 윤 감독 ㅠㅠㅠㅠ? 287일 생각하면 좀비 영화인데 밝은 느낌일 거 같지 않음???

    - 이번에는 원세강 너무 쪼금 나왔어. ㅠㅠㅠㅠㅠ

    - 대표님. 요즘 방송에 너무 안 나오심.

    - SNS에 스님cut 돌아다니던데 분량 다 합쳐도 5분이 안 됨 ㅠㅠㅠㅠㅠ- 대표님이 너무 바쁘셔. 스본이 열일한다? 그럼 스님이 열일하는 거거든.

    - 서이렌은 대체 얼굴이 몇 개임? 구원의 밤 최진이 맞는 거냐고???

    - 진짜 서이렌 갭 때문에 미쳐 버려.

    └그래서 서이렌 별명이 갭모에임. ㅋㅋㅋ

    └ㅋㅋㅋㅋ

    └별명 도랏네. ㅋㅋㅋ

    - 예고편에서 포도 농장에 간 거 봤음? 윤이슬 존멋임. 포도주 통을 그렇게 안정감 있게 드는 사람 처음 봤다고 ㅠㅠㅠㅠㅠ- 윤 언니 사랑해요. ㅠㅠㅠㅠ- 김이솔도 ㅈㄴ웃기더라. 원래 그런 캐릭터였나? 제일 놀라운데???

    - 원래 엉뚱한 캐릭터임. 내가 사막 무대 인사에 가봐서 알아.

    - 은근 김이솔이랑 이락이랑 잘 맞아. 신기해.

    - 둘 다 장난기 많은 막냉이 재질.

    - 김이솔 팬 됐어. 너무 좋아.

    - 칼레 ㅈㄴ뽐뿌 오더라. 여행 너무 가고 싶어.

    - 진짜 너무 예쁘더라.

    MT 시즌 2가 절찬리에 방송 중임에도 불구하고 고 시청률에 신이 난 최욱환 피디는 벌써 스타탄생에 세 번째 MT의 기획안을 보내왔다.

    이번에는 외국이 아닌 한국에서 진행해 보자고 하는데 나는 시즌 2나 끝나고 이야기하자고 기획안을 서랍에 넣어 놨다.

    지금 레전드 필름에서는 한창 윤서혁의 신작 ‘블랙 마치(Black March)’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영화는 서울과 경기도 인접 지역의 낡은 아파트에서 시작된다.

    육십 년대에 지어져 언제 철거할지 모르는 이 낡은 아파트에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뜨내기밖에 살지 않는다.

    국군정보사령부 특임대 장교 출신인 주인공 차성원은 임무 수행 중에 발생한 사고의 PTSD를 이기지 못하고 퇴직하고 이 아파트의 건물 관리인으로 들어온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문제가 발생하는 아파트를 수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어느 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다.

    서울에 의문의 바이러스가 퍼진 것이다.

    바이러스에 노출된 모든 생명체는 이지를 잃고 좀비가 되어 사람들을 해치고 다닌다.

    서울과 경기도가 봉쇄된다는 소식에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짐을 챙겨서 피난 행렬에 동참한다.

    하지만 아파트를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두 사람이 있다.

    106호에 사는 할머니와 404호에 사는 히키코모리 여고생.

    차성원은 그들을 데리고 떠나기로 한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연로한 노인과 빛을 두려워해 밖에 나가기 꺼리는 히키코모리 여고생을 이끌고 서울을 탈출하는 것이 영화의 주요 내용이다.

    이 작품 속의 좀비는 빛을 싫어해서 밤에만 활동한다.

    폐허가 된 서울로 진입한 군대도 이를 이용하여 낮에만 작전을 수행한다.

    하지만 빛을 두려워하는 404호 여고생 때문에 밤에 이동할 수밖에 없기에 영화의 제목이 ‘블랙 마치’다.

    원래 시나리오의 가제는 ‘어둠 속의 행진’이었다.

    영화의 거의 모든 캐스팅이 이미 완료된 상황이다.

    PTSD에 시달리는 전직 국군정보사령부 장교인 차성원은 287일의 주인공이자 윤서혁이 가장 사랑하는 배우. 하경민이 맡았다.

    106호 할머니 역은 한국의 어머니라 불리는 윤희자에게 돌아갔다.

    문제는 404호 히키코모리 여고생 역이다.

    이미지가 일치하는 배우가 없어서 지금 윤서혁과 강진석이 적임자를 찾고 있다.

    404호 캐스팅만 끝나면 바로 촬영에 들어갈 거 같다.

    나는 블랙 마치의 일정을 미뤄 놓고 노트북에 스타탄생의 배우들의 프로필을 띄웠다.

    이제 스타탄생이 관리하는 배우들이 꽤 많아졌다.

    서이렌, 김이솔, 윤이슬 그리고 이락이다.

    얼마 전에 나만의 마돈나를 끝낸 이락은 당분간 작품을 기다리며 쉴 테고 문제는 스타탄생의 여신들이다.

    서이렌과 윤이슬 그리고 김이솔의 신작을 찾는 것이 문제였다.

    요즘은 로맨스가 아니라도 여성이 주체가 되는 작품이 많이 나오지만 그래도 아직은 부족한 게 사실이다.

    나는 최대한 로맨스는 배제하고 새 작품을 고르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로맨스도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들어온 로맨스 대본이 모두 남자 배역 위주로 돌아가는 작품밖에 없었다.

    굳이 내 배우들이 남주를 받쳐 주는 역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예전부터 꿈꾸던 일을 떠올렸다.

    역시 내가 직접 제작에 손을 대야 하나?

    영화는 레전드 필름과 함께하면 되지만 드라마는 다르다.

    아직도 영화만 하는 배우도 있긴 하지만 요즘은 그 경계가 많이 무너졌다고 생각한다.

    영화만 하는 톱스타들이 드라마에 출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문제는 내 배우들을 위한 시나리오가 없다는 거다.

    내가 산더미처럼 쌓인 대본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이 층으로 누군가 올라왔다.

    “대표님.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나는 고개를 들어 갑작스럽게 찾아온 방문자를 확인했다.

    그는 다름 아닌 서유림이었다.

    “서 매니저님. 갑자기 웬일이세요?”

    서유림은 불안한 얼굴을 하고 멀찌감치 서 있었다.

    “왜 그렇게 서 있어요?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예. 대표님.”

    서유림이 쭈뼛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나는 보고 있던 대본을 멀리 치워 놓고 그녀의 앞에 가서 앉았다.

    “무슨 일이에요? 이락 배우님도 휴식기라서 서 매니저님도 휴가를 받아서 고향에 갔다고 들었는데요?”

    “맞아요. 그랬죠.”

    서유림은 눈에 띄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생수를 따라 주며 물었다.

    “말씀하세요. 집에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사실은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걱정하지 말고 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울게요.”

    내가 살갑게 답하자 서유림은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고 가방을 열어 종이 뭉치를 꺼냈다.

    한 권씩 정리된 종이 한 무더기가 탁자 위에 쏟아졌다.

    그것이 인쇄한 대본이라는 것을 눈치챈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죠?”

    “사실은 제 친언니가 드라마 작가예요.”

    “그랬나요? 전혀 몰랐는데요?”

    “일부러 비밀로 했어요. 언니가 드라마 작가라는 게 밝혀지면 캐스팅 관련해서 청탁이 들어올까 봐요.”

    “그렇다는 건 꽤 이름 있는 작가란 말이겠네요. 지망생이 아니라?”

    “유명합니다. 언니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요. 그런데…….”

    말끝을 흐린 서유림이 씁쓸하게 웃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나는 어두워진 서유림의 얼굴을 보며 긴장했다.

    저렇게 말한다는 건 최근에는 흥행작을 못 내고 있다는 건가?

    “이게 언니가 쓴 대본인가 봐요? 한번 봐도 될까요?”

    “보시라고 가져온 겁니다.”

    “그럼, 좀 볼게요.”

    나는 제일 위에 올려진 대본을 들고 앞장을 펼쳤다.

    A4 용지에 출력한 대본에는 제목만 쓰여 있을 뿐 작가의 이름이 없었다.

    [작은 아씨들]

    제목을 본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작은 아씨들은 미국의 소설로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가족 네 자매의 성장을 그려 낸 작품이다.

    이미 할리우드에서도 몇 번이나 영화화된 작품이고 한국에도 같은 제목의 드라마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본 미래에서 봤던 드라마고 아직까진 실제로 제작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가 미래에서 봤던 드라마를 떠올렸다.

    누가 쓴 작품이었지?

    분명히 히트했던 작품이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수연에게도 대본이 왔었는데…….

    순간 내 눈이 커졌다.

    설마? 그분 작품인가?

    나는 놀란 눈으로 서유림을 쳐다봤다.

    서유림은 내가 빤히 쳐다보자 놀라서 움찔했다.

    “혹시 언니라는 분이요.”

    “예.”

    “서주희 작가님인가요? 보그를 쓰신 서주희 작가님 말입니다.”

    서유림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어떻게 아셨어요?”

    역시 그렇구나. 서주희 작가님의 쓰신 작은 아씨들이 맞아.

    나는 다시 대본으로 시선을 돌렸다.

    원래는 보그가 정상적으로 방영이 되고 난 뒤, 일 년 후에 세상에 나왔어야 할 작품이다.

    지금 이게 내 손 안에 들어온 이유가 있을 거다.

    나는 조심스럽게 서유림에서 물었다.

    “서 작가님은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내가 서주희의 안부를 묻자 서유림의 표정이 부쩍 어두워졌다.

    “언니는 지금 고향에 있어요. 밖에도 안 나가고 집에 틀어박혀서 글만 써요.”

    “대본 양을 보면 거의 다 쓰신 거 같은데 계약이 된 건가요?”

    “아뇨. 그랬다면 제가 이걸 원 대표님께 가져오지 않았겠죠. 계약이 어려운가 봐요.”

    “그건 왜죠? 서주희 작가님이라면 검증된 작가님이시잖아요.”

    서주희라면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글을 써서 마니아가 많은 작가다.

    그런 그녀가 계약이 어렵다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언니가 지난번 일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나 봐요.”

    “보그 집필 도중에 잠적한 것 때문에 그런 겁니까? 그건 명백한 KBC와 박호중 감독의 잘못인데 왜 서 작가님이 블랙리스트인 거죠?”

    “그때 KBC와 전속 계약 상태였는데 언니가 계약 파기 소송을 냈고 승소했거든요.”

    “맞아요. 그랬다는 기사를 본 것도 같네요.”

    “그것 때문인가 봐요. KBC는 물론 다른 제작사에서도 언니 작품을 안 하려고 한대요. 대본을 아예 보지도 않으려고 한다나 봐요.”

    “...”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서주희 작가가 펜을 꺾고 잠적을 한 것은 박호중 감독이 서 작가의 대본을 자기 마음대로 수정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그 일로 박호중은 KBC를 나왔지만, TOP 미디어에서 지금도 일만 잘하는데 서주희 작가는 아직도 복귀를 못 하고 있었다니.

    전속 계약 파기도 KBC가 잘못한 거니까 서주희 작가 탓이 아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서유림이 굳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염치없지만 부탁할게요. 언니가 지난 일 년 동안 고생고생하면서 쓴 작품이에요.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대표님 말고는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나는 떨리는 서유림의 눈동자를 보며 가슴이 아팠다.

    서주희는 좋은 작가다.

    나는 인간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좋다.

    서주희 작가의 잘못도 아닌데 이렇게 블랙리스트에 올라 기피 작가가 되었다니 서주희의 팬인 내가 다 울컥했다.

    “제가 한번 볼게요. 서주희 작가님이시라면 분명히 좋은 글을 쓰셨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정말 감사해요.”

    나는 서유림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는 탁자 위에 쌓인 ‘작은 아씨들’ 대본의 1화를 찾아 손에 들었다.

    이미 이 드라마의 내용은 잘 알고 있다.

    네 자매 사이에서 벌어지는 청춘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린 수작이었다.

    이런 좋은 작품이 방송을 못 탄다면 절대 안 될 일이다.

    나는 웃으며 대본의 첫 장을 열었다.

    그런데 몇 장을 넘기지도 않았는데 내 눈에 물음표가 떴다.

    그런데 이게 뭐지?

    왜 갑자기 사람이 죽는 걸까?

    내가 알고 있는 작은 아씨들이 아닌데?

    대본을 넘길수록 나는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작은 아씨들은 내가 알고 있는 파스텔 톤의 청춘물이 아니라 가족의 살인사건을 뒤쫓는 자매들의 미스터리 스릴러물이었다.

    섬세한 터치로 청춘을 노래하던 서주희 작가가 흑화했다.

    아니 흑화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지독하게 어둡고 잔인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따뜻한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감정이 살아 숨 쉬는 멋진 작품으로 그녀는 업그레이드돼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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