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61화 (162/261)
  • #161화. 1월 1일

    KBC 연기대상 1부가 끝났다.

    2부 시상식이 열리는 사이, 서이렌은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모자와 안경을 쓰고 왔는데도 카메라에 너무 많이 잡혀서 이대로 객석에 앉아 있기 불편했다.

    “제가 직접 집에 바래다주고 올게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장우재가 놀라 외쳤다.

    “아뇨.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장우재가 따라서 일어서자 빈선예가 장우재의 옷을 잡아당겼다.

    “로드장. 그럼, 우리는 어떻게 가라고? 그냥 대표님 차 타고 가라고 해.”

    “하지만……. 제가 모셔야 하는데.”

    빈선예는 눈을 부릅뜨며 장우재를 바라봤다.

    “로드장. 우리가 몇 명이야? 이 인원이 다 택시 타고 가라고? 1월 1일 새벽에?”

    “아. 아뇨. 그건 아니죠.”

    “그렇지? 그러니까 대표님보고 가시라고 해. 난 밴 타고 갈 거야.”

    마침 트로피를 손에 들고 객석으로 달려온 이락이 빈선예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트로피가 생각보다 너무 무겁네요. 저도 밴 타고 편하게 갈래요.”

    이락이 말을 보내는데 예상치 못하게 강진석이 합세했다.

    “그래. 우재야. 이렌 씨는 세강이 편에 보내 드리자.”

    장우재는 그제야 알았다며 자리에 앉았다.

    나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저희는 먼저 가 볼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대표님이랑 이렌 씨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모두 해피 뉴이어!”

    나와 서이렌은 사람들과 새해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무대 앞, 나만의 마돈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자현을 힐끔 쳐다봤다.

    오늘 같은 날 인사라도 하고 가면 좋겠지만 내가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 오해하는 사람이 생길 거다.

    나는 서이렌을 챙겨 밖으로 나오며 이자현에게 간단히 문자로 새해 인사를 보냈다.

    * * *

    서이렌이 앞 좌석 문을 열고 냉큼 자리에 앉았다.

    “뒤로 가요.”

    “싫은데요?”

    “나도 싫어요. 배우는 뒤에 타야 합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방송국에서 만나는 매니저를 붙들고 물어봐요. 백이면 백. 배우는 뒤에 타야 한다고 할 거니까.”

    “쳇.”

    서이렌은 입술을 삐죽거리더니 이내 뒷자리로 옮겨 탔다.

    “벨트도 꽉 매요.”

    “알았어요. 내가 어린아인 줄 아세요?”

    서이렌은 뿌루퉁해진 얼굴로 안전띠를 맸다.

    예전에 앞 좌석에 탔던 배우가 교통사고로 얼굴을 다친 적이 있다.

    내가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의 옛날 일이지만 그런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

    배우는 무조건 뒷자리다.

    나는 운전을 하며 백미러로 서이렌을 힐끔 쳐다봤다.

    서이렌은 언제 그랬냐는 듯 편안한 미소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정적을 깨트리는 톡 알람 소리가 들렸다.

    서이렌의 핸드폰에서 울리는 알람이었다.

    “어. 지형이네.”

    서이렌은 임지형이 보낸 톡을 보며 웃고 있었다.

    백미러로 그걸 보는데 갑자기 기분이 확 상했다.

    “뭐라고 보냈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요. 우리 집에 꽃도 보냈다는데요? 빨리 가 봐요.”

    “이렌 씨.”

    “예. 대표님.”

    “임지형 씨랑 너무 친한 거 같아요.”

    “친한 거 맞아요. 저를 얼마나 잘 챙겨 주는데요?”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아요. 팬이랑 사적으로 만나는 건 아닌 거 같습니다. 스캔들이 날 수도 있잖아요.”

    “괜찮아요. 지형이 애인 있어요.”

    “애인이 있다고요? 정말요?”

    “예.”

    애인이 있는데 이렌 씨를 그렇게 따라다닌다고?

    더 미친놈이었네.

    나는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

    “대표님. 왜 그러세요? 왜 그렇게 화가 나셨는데요?”

    “저 화 안 났습니다.”

    “화 난 거 같은데요.”

    “아니에요.”

    그때 내 머릿속에 갑자기 아샤가 떠올랐다.

    나는 화제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아샤 이야기를 꺼냈다.

    패션위크 때 공항의 광고판에서 본 그녀와 칼레 영화제에 온 그녀까지 모두 말해 주자 서이렌이 웃으며 답했다.

    “알아요.”

    “안다고요?”

    “칼레 영화제에서는 직접 만나기도 했어요.”

    “언제요?”

    “대표님은 필름 마켓에 가셨을 때요.”

    아샤와 만났다니 나는 너무 놀라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별일 없었어요?”

    “그럼요. 별일 있을 게 뭐가 있어요? 오히려 저와 같은 존재가 세상에 있다는 게 힘이 되고 든든하죠.”

    “그렇군요.”

    서이렌이 이미 모든 걸 알고 있고 저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다.

    나 혼자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

    어느덧 우리는 서이렌이 사는 빌라에 도착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는데 다시 서이렌의 핸드폰에서 ‘띠링’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또 임지형 씨인가요? 야심한 밤인데 너무 자주 톡을 보내는 거 같은데요.”

    “왜 그러세요? 빈 팀장님이에요.”

    나는 소리를 지른 것이 미안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서이렌은 그런 나를 보며 가까이 다가왔다.

    “대표님. 혹시 지금 질투하시는 건가요?”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우리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깨트리는 톡 알람이 다시 들려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진짜 임지형이었다.

    서이렌의 핸드폰에 뜬 미리 보기 톡을 본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래요. 나 질투해요. 그러니까 임지형이랑 만나지 마요.”

    * * *

    KBC 연기대상 2부 시상식에 앞서 이자현이 그녀의 스태프 현미와 함께 화장을 손보고 있었다.

    “언니. 이것 좀 보세요.”

    거울을 보던 이자현이 고개를 돌렸다.

    현미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이자현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연말에 오는 문자나 전화는 내일 한꺼번에 안부 인사를 보낼 거잖아.”

    “이건 보셔야 할 거 같아요.”

    “뭔데 그래?”

    “원 대표님이 문자를 보내셨어요.”

    머리를 매만지던 이자현의 손길이 그대로 멈췄다.

    이자현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핸드폰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보낸 새로운 문자가 와 있었다.

    이자현은 심호흡을 하고 문자를 열었다.

    [이자현 배우님.

    올 한 해 많은 일이 있으셨죠.

    모두 잘 이겨 내고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잘 적응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나만의 마돈나로 훌륭하게 연기 변신에 성공하신 것도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하시는 일마다 번창하시길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원세강 드림]

    원세강이 보낸 새해 인사를 보던 이자현은 들릴 듯 말 듯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왜 그래요? 뭐라고 적혀 있어요?”

    “그냥 안부 인사야.”

    “아까 보니까 객석에 스타탄생 직원들이랑 함께 계시던데…….”

    핸드폰을 현미에게 돌려주려던 이자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이자현은 핸드폰을 가져와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현미는 혹시 이자현이 원세강의 안부 인사에 답장이라도 보내는 것은 아닐까? 궁금해서 옆으로 다가섰다.

    그런데 이자현은 답 문자를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핸드폰에 저장된 대표님 이름을 바꿨어.”

    “뭐라고 바꾸셨는데요?”

    이자현은 그녀의 핸드폰을 현미에게 건넸다.

    현미는 방금 온 문자를 열었다.

    분명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에게 온 문자였는데 지금은 [원세강 대표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현미는 놀란 눈으로 이자현을 응시했다.

    “언니!”

    “이제 가자. 들어가야지.”

    “포기하기로 한 거예요?”

    “어차피 대표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배우로만 보셨잖아.”

    “그래도요. 절대 포기하지 않으실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이자현은 지병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 년 동안 밤낮없이 일에만 매진하는 원세강을 떠올렸다.

    “지금 대표님한테는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이렌이야.”

    “서이렌 씨도 언니랑 같은 입장이라면서요. 두 분 다 짝사랑이지. 원 대표님은 관심도 없는.”

    “그래도 이렌이가 나보다는 대표님께 힘이 되는 사람이야.”

    “어째서요?”

    이자현은 원세강이 아프다는 걸 모르는 현미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너도 그 소문 들었지? 김기하 감독과 이렌이 사이에서 있었던 일?”

    “서이렌 씨가 김기하 감독님 코를 납작하게 해 준 거요? 그건 갑자기 왜요?”

    “이렌이는 정말 대단해. 내 동생이지만 이렌이처럼 멋진 여자를 본 적이 없어.”

    이자현은 최근 방송가에 도는 소문을 떠올렸다.

    서이렌과 함께 육 개월 동안 동고동락하며 두 여자를 촬영했던 이자현은 서이렌이 어떤 성격인지 잘 알고 있다.

    서이렌과 김기하가 촬영장에서 맞붙었다면 분명 김기하가 큰 잘못을 저질렀을 거다.

    ‘지금 대표님한테는 서이렌처럼 완벽한 아군이 필요해. 내가 덜 사랑해서 포기하는 게 아니야. 그만큼 사랑하니까 보내 주는 거야.’

    팔 년간의 짝사랑을 끝내려고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자현은 거울 앞에 놓인 미니 선풍기를 들어 얼굴을 식혔다.

    “화장 수정한 거 잘됐다. 파우더 가루 좀 날리고 들어가자.”

    차가운 선풍기 바람이 빨갛게 충혈된 이자현의 눈을 식혀 줬다.

    현미와 함께 대기실을 나와 복도를 걷는 이자현은 생각했다.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 길고 긴 내 짝사랑을 끝내기에는 딱 좋은 날이야. 그래. 잘했어. 이제 된 거야.’

    어느덧 시상식장 입구에 도착한 이자현은 고개를 들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던 이자현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슬픔이 사라졌다.

    이자현은 당당한 미소로 환하게 웃으며 시상식장으로 걸어갔다.

    * * *

    나는 시동을 끄는 것도 잊은 채 방금 내가 뱉은 말을 떠올렸다.

    내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나 정말로 미친 건가?

    그때 뒷자리에 앉은 서이렌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 할게요.”

    나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서이렌은 상기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임지형 씨랑 이제 안 만날게요. 그러니까 그만 질투해요.”

    서이렌의 입에서 나온 질투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내 얼굴이 새빨갛게 불타올랐다.

    나는 다시 고개를 획 돌리고 전방을 주시했다.

    “방금 그거요. 내가 실수한 겁니다.”

    “그럼, 계속 만날까요? 내일 집에 놀러 온다고 하던데요?”

    “아, 뭐 그런 미친놈이 다 있습니까? 혼자 사는 여자 집에 뭐 하러 온다는 겁니까? 그래서 그러라고 했어요?”

    나는 다시 획 고개를 돌려 서이렌을 쳐다봤다.

    서이렌의 장난기 어린 눈과 마주친 나는 그녀가 나를 놀렸음을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나 놀린 건가요? 그러지 마요.”

    “방금 질투한 거 맞죠? 인정하면 안 그럴게요.”

    “질투 아닙니다. 그냥 대표로서 말한 거예요.”

    “쳇. 다 알지만 봐줄게요. 오늘은 12월 31일이니까.”

    “이제 1월 1일입니다.”

    “벌써 새해가 밝았어요?”

    차에 달린 시계는 정확히 0시 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이렌은 나를 향해 웃으며 외쳤다.

    “대표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 한 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핸드폰을 보니 날짜도 바뀌어 있었다.

    드디어 삼 년이 됐구나.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지 삼 년이 지났다.

    삼 년을 넘기지 못할 거라 했던 의사의 말과 달리 나는 지금도 살아 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직 완치되지도 않았고 언제 어떻게 고꾸라질지 모르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나는 족하다.

    이 모든 것이 축복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제야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뒷좌석으로 가서 서이렌의 차 문을 열고 그녀에게 말했다.

    “내리시죠. 집에 들어가셔야죠.”

    다시 대표님으로 돌아온 나를 보며 서이렌이 입을 앙다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빨리 내려요.”

    “알았어요. 내리면 되잖아요.”

    서이렌은 두꺼운 패딩을 챙겨 들고 차에서 내렸다.

    나는 옷을 건네받아 그녀의 뒤로 가서 말했다.

    “추워요. 빨리 옷 입어요.”

    서이렌이 두 팔을 내밀었고 나는 그녀에게 패딩을 입혀 줬다.

    서이렌과 함께 걷다 보니 허공에서 우리의 손이 맞부딪혔다.

    서이렌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내 손을 바라봤다.

    “왜요?”

    “손이 너무 차네요. 여름엔 냉장고인데 겨울엔 냉동고인가요?”

    “차에 타면 괜찮아질…….”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서이렌이 내 손을 잡더니 그녀의 패딩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따뜻하죠?”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로맨스 영화 찍어요?”

    “아뇨. 얼음 녹이고 있는데요. 빨리 가요. 피곤해요.”

    서이렌은 주머니 속에서 내 손을 꽉 잡고 총총걸음으로 걸어갔다.

    나는 어느새 그녀에게 이끌려 따라 걷고 있었다.

    손을 확 잡아 뺄까 고민도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지 삼 년이 지나고 다시 시작된 새해 첫날.

    나는 잠시 감정적인 고민에 휩싸였다.

    내게도 서이렌과 나란히 걸을 수 있는 미래가 있지 않을까?

    정말로 원하면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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