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60화 (161/261)

#160화. 질투는 나의 힘

전화 통화를 끝낸 서이렌이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요? 대표님? 무슨 일 있어요?”

“방금 통화한 사람이 임지형인가요?”

“맞아요.”

“전화 통화도 하는 사이예요? 이렌 씨, 남들한테는 핸드폰 번호 잘 안 알려 주잖아요.”

“친한 사람들한테는 알려 줘요. 저도 사회생활이란 걸 해야 하니까요. 자현 언니랑 진아 언니도 제 번호를 알고 있어요.”

그럼, 임지형과도 친하다는 이야기인가?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빡하고 들어갔다.

“임지형 씨와는 어떻게 친해진 건데요?”

“형이랑 사이가 좋은 거 같더라고요. 하루가 멀다 하고 임준학 배우님 집에 놀러 오더니, 이제는 아예 이사를 왔어요. 우리 집에도 먹을 거 들고 자주 놀러 왔고요. 베이킹이 취미래요.”

“나도 요리 잘하는데…….”

“방금 뭐라고 하셨죠?”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라는 거야. 이 멍청한 놈.

나는 혹시나 남들이 들었을까 봐 뒤를 돌아봤다.

마침 리허설이 끝나서 옷을 갈아입고 나타난 이락이 스타탄생 식구들과 대화 중이었다.

웃음을 참지 못한 강진석이 킥킥대며 말했다.

“야. 너네 미친 거냐? 축하 무대의 신기원이다.”

“음악방송 피디님이 ‘플나’의 열혈 팬이라서 그래요.”

“플나는 또 뭐야?”

“모르세요? ‘플로우 나이트’라고 요즘 엄청 인기 있는 예능이잖아요. 래퍼들이 나오는 오디션 프로요.”

“아. 그거. 얘기 들어 본 적 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배우들은 평범한 일반인일 건데. 랩을 시키면 어떡하냐? 학예회 보는 줄 알았다. 랩 학예회. 크크큭.”

“그래도 제가 제일 잘하지 않아요?”

자신만만한 이락의 말에 모두가 시선을 회피했다.

사실 배우들이라서 그런지 모두 발음도 좋고 들어 줄 만했다.

그들이 힙합 의상을 입고 있는 것이 너무 언밸런스했을 뿐이지.

그런데 이락은 의상과 스타일은 너무 잘 어울리는데 박자감을 상실했다.

‘정말 모르는 건가? 자신의 진짜 실력을?’

* * *

멋있는 슈트로 갈아입은 이락이 대기실을 나오며 빈선예의 곁으로 붙었다.

“대표님이 아셨다면서요. 어땠어요?”

“말도 마. 막 흥분해서 이렌 씨한테 어떻게 된 일이냐며 따져 묻더라.”

“와. 정말요? 이런 게 진짜로 먹히는구나.”

“당연하지. 질투는 절대불변의 클리셰라고. 너도 나만의 마돈나 찍으면서 질투 많이 했잖아.”

“그렇긴 하죠.”

“이제 시작이야. 두 사람을 가만히 놔두면 죽도 밥도 안 돼. 우리가 최대한 옆에서 두 사람은 모르게 도와줘야 해.”

“저도 연애는 한 번도 해 본 적도 없는데. 제가 뭘 도울 수 있겠어요?”

“넌 그래도 눈치가 있잖니. 우리 대표님은 박선호 배우가 이렌 씨 좋아하는 것도 몰라.”

“예? 그걸 어떻게 몰라요? 윤서혁 감독님이 구원의 밤 촬영장에 소문이 다 났다고 하시던데요?”

“말도 마. 대표님은 눈치가 없어도 어쩜 저렇게 없을 수가 있지? 일하는 뇌랑 연애하는 뇌랑 다른가 봐. 이해가 안 돼.”

“그럼, 이다음은 뭔가요?”

“넌 모르겠지만 지형이가 은근 집요한 애야. 바둑부에서 처음 봤을 때도 독한 놈이라고 생각했었거든. 지형이가 앞으로 대표님한테 계속 자극을 줄 테니까 염려하지 마.”

“그럼, 우리가 임지형 씨를 이용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뭘 이용해? 걔는 우리가 말리든 말든 자기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있잖아. 우리는 그냥 방관자야. 지켜보기만 하자고.”

“흠. 연애는 정말 어렵네요.”

“너도 이제 곧 시련이 닥칠 것이다. 기다려라.”

“저는 사랑이 이런 거라면 감당이 안 되네요. 기 빨려요.”

“어린놈이 사랑은 무슨.”

“또 놀리신다.”

빈선예와 이락이 공개홀로 가는 복도를 함께 걸었다.

“참! 그런데 빈 팀장님.”

공개홀로 들어가려던 빈선예가 고개를 돌려 이락을 쳐다봤다.

“왜?”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요. 왜 바둑부에 가입하셨어요? 빈 팀장님이랑 전혀 안 어울리는데요? 지금은 바둑도 안 두신 다면서요?”

“거기가 낮잠 자기 제일 편한 동아리거든.”

빈선예는 지난날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불면증이 싹 나을 정도였는데. 참 좋았어.”

* * *

희진과 우석이네 백반집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락의 이모부 정호택은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했고 주방에서 맛있는 음식이 쉴 새 없이 나왔다.

홀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다름 아닌 최용팔과 골목 식구들이었다.

그들은 이락의 이모부 식구들과 함께 연말 송년회를 하고 있었다.

“아빠. 그만하고 빨리 나와요. 연기대상 시작했어. 락이 오빠 나온다고.”

“알았어. 이것만 담으면 돼.”

정호택은 대접에 방금 요리한 갈비를 담아서 주방에서 나왔다.

갈비가 푸짐하게 올라간 대접을 탁자 위에 올리자 최용팔의 부하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엄마랑 이모도 앉아. 지금 오빠 나와.”

정희진은 텔레비전 볼륨을 키웠다.

나만의 마돈나 테이블은 시상식장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멋지게 차려입은 이락의 옆에는 나만의 마돈나의 주인공이자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이자현이 앉아 있었다.

“와. 오늘 이자현 너무 예쁘다.”

“난 락이가 더 예쁜데?”

“그거야 엄마 눈에만 그런거고.”

정희진은 옆자리에 앉아 계신 이락의 어머니께 음료수를 챙겨 드렸다.

“이모가 보기엔 누가 더 예뻐요? 저 언니가 더 예쁘죠?”

이락의 어머니 지영숙은 사이다를 마시고는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서 락이가 제일 예쁘다.”

“에이. 괜히 물어봤네.”

정희진은 믿을 수가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드디어 KBC 연기대상의 연례행사, 신인 배우들이 꾸미는 축하 무대가 시작됐다.

정희진은 기대하라고 했던 이락의 말을 떠올리며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나 해맑게 웃던 정희진의 미소는 곧 사라졌다.

“저게 뭐야? 생뚱맞게 웬 랩이야?”

정희진은 래퍼처럼 입고 나와서 랩을 하는 신인 배우들을 보며 고개를 돌렸다.

차마 손발이 오글거려서 끝까지 봐줄 수가 없었다.

최용팔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입에는 고기를 한가득 물고 두 눈을 크게 뜬 채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었다.

“요즘은 별걸 다 시키네.”

“그러게요. 보스. 연예인도 먹고사는 게 만만치가 않네요.”

어울리지 않는 복장에 힙한 척하는 이락을 보며 모두 시선을 회피했으나 오직 한 사람. 이락의 어머니 지영숙 여사만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아이고. 잘한다. 예쁘다.”

정희진은 그런 그녀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뭐, 이모만 좋아하시면 되죠. 그럼요. 그럼, 된 거예요.’

* * *

- KBC 미친 건가? 배우들한테 랩을 시켰어.

- 담당자 시말서각. ㅋㅋㅋㅋ

- 최진규는 잘하네.

└그의 손에 쥐어지는 합격 목걸이. ㅋㅋㅋ

└사실 잘하지는 않는데 워낙 다른 사람들이 지뢰라서 잘해 보이는 것임.

└선녀 효과. ㅋㅋㅋ

- 그래도 다들 배우라서 그런지 발음이 쏙쏙 들어오고요.

- 다들 스웨그는 없는데 기본기가 됨. ㅋㅋㅋㅋ

- 보지 말고 듣기만 해라. 그럼, 들어 줄 만함.

- 기획한 사람 나와!

- 서이렌이 나왔던 축하 무대 이후에 심심하다 했더니 이런 폭탄을 안겨 주네.

- 이락은 왜 저렇게 열심히 하냐?

- 이락이 제일 웃겨. 노래만 안 하면 제일 잘 어울리고 힙해 보이는데 입만 열면. ㅋㅋㅋ- 이락은 박자의 신이네. 박자를 새롭게 만들어 내고 있어. ㅋㅋㅋㅋㅋ축하 무대가 끝나고 조연상의 시상이 끝나자 드디어 신인 배우상의 시상 시간이 다가왔다.

객석에서 웃고 떠들던 우리도 긴장하며 무대 위의 스크린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럼, KBC 남자 신인 배우를 먼저 만나 보시죠.”

시상자의 소개와 함께 신인 배우들의 이름이 차례차례 호명됐다.

스크린에 올 한해 KBC 드라마를 빛낸 신인 배우들의 연기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드디어 마지막으로 이락의 이름이 호명됐다.

“나만의 마돈나의 이락 씨입니다.”

풋내기 매니저로 분한 이락의 연기 장면이 흐르자 객석에서 큰 환호성이 들렸다.

이락의 팬들이 제일 많이 온 것 같았다.

후보 발표가 끝나자 시상자가 봉투를 열었다.

“그럼, 발표하겠습니다. KBC 연기대상. 올해의 남자 신인 배우상은…….”

“……이락 씨. 축하드립니다.”

조용했던 공개홀에 큰 환호성이 들렸다.

객석에 나란히 앉아 있던 우리도 서로 얼싸안으며 좋아했다.

- 이락 축하해.

- 대박. 신인상이다 ㅠㅠㅠㅠㅠㅠㅠ

- ㅊㅋㅊㅋ

- 짜래따.

- 이락 진짜 잘했음. ㅊㅋㅊㅋㅊㅋ

- 방금 객석 본 사람? 스본 식구들 나왔는데?

- 미친. 서이렌도 왔어. 모자 쓰고 있는 사람 서이렌 맞지?

- 대박 서이렌 옆은 원세강이다.

- 스본 귀염둥이들. 사랑해.

스본이 짱이다. 완전 가족이잖아. ㅠㅠㅠㅠ

같은 시각, 백반집도 난리가 났다.

골목 식구들은 마치 그들이 상이라도 탄 것처럼 서로 일어나서 얼싸안고 춤을 췄다.

이락의 이모인 지혜숙은 이락의 어머니 지영숙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언니. 좋지?”

“락이 예쁘다.”

지영숙은 아직은 온전치 못한 정신이었으나 텔레비전 속에서 꽃다발을 들고 환하게 웃는 이락을 보며 함께 미소를 지었다.

신인상을 손에 든 이락이 무대 앞으로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방실방실 웃으며 수치심을 모르고 축하 무대를 했던 이락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락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너무 떨어서 신인상 트로피가 떨어질 것만 같았다.

“감사합니…….”

이락은 감사하다는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눈물을 왈칵 쏟아 냈다.

이락은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마이크를 잡았다.

처음에는 힘들었던 지난날이 떠올라서 눈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슬픔은 잠시였고 이내 모든 것이 감사하고 행복하기만 했다.

심호흡한 이락이 간신히 입을 뗐다.

“너무 행복해서…… 행복해서 눈물이 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 이 순간 제 머릿속이 터질 것만 같아요. 감사한 분들이 너무 많아서요. 우선 저를 양지로 데려와 주신 원세강 대표님.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직도 해가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가족들과도 못 만나고 갇혀서 살았을 겁니다. 정말 감사해요.”

객석에서 이락의 소감을 듣던 나도 울컥했다.

눈가가 시큰해지는 걸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 살았다고 했는데. 사실은 저도 좋은 날도 많았습니다. 제가 훌륭히 클 수 있도록 제 가족이 돼 주셨던 우리 골목 식구들. 다들 감사합니다.”

백반집에서 이락의 수상 소감을 듣고 있던 최용팔이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뗐다.

“저 자식은 왜 저렇게 말이 많아. 자고로 소감이란 깔끔하게 빨리 끝내야지.”

최용팔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입은 웃고 있었다.

뒷골목 식구들도 눈물이 나오는 걸 억지로 참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엄마.”

이락은 빨간불이 켜진 카메라를 응시했다.

카메라 너머로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고 계실 거라는 생각을 하니 세상을 모두 가진 것만 같았다.

이락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랑합니다. 영원히 엄마의 아들로 살아갈게요.”

모든 수상 소감을 마친 이락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객석에 모인 이들은 감동적인 이락의 수상 소감에 열렬한 성원을 보냈다.

- 나만 우냐? ㅠㅠㅠㅠㅠㅠ

- 우리 집도 지금 난리 났다. ㅠㅠㅠ

- 락아. 이제 시작이야. 우리 영원히 오래오래 행복하자. ㅠㅠㅠㅠㅠ- 스타메이커 결승 생각나네.

- 락이 이제 꽃길만 걸을 거야. ㅠㅠㅠㅠ

- 와중에 원세강 대표님 눈물 참는 거 너무 예쁘다.

울음바다가 된 백반집에서 정희진만 홀로 웃고 있었다.

정희진은 아이처럼 웃으며 좋아하는 이모를 보며 작게 속삭였다.

“다행이네. 그나마 이걸로 오늘의 흑역사가 묻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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