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59화 (160/261)
  • #159화. 이웃사촌

    임준학과 임지형은 밴에서 내려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혹시 여기 사는 건가?

    설기획의 박동식 대표와는 이제 안면을 튼 사이였지만 임준학은 그렇지 않다.

    아는 척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임준학이 나를 먼저 알아보고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임준학이라고 합니다. 스타탄생 원세강 대표님이시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임준학 배우님.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혹시 여기에 사세요?”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나는 굳이 서이렌이 이곳에 산다고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말을 아꼈다.

    임준학도 내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더는 캐묻지 않았다.

    “저는 배우로 데뷔한 뒤로는 줄곧 이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럼, 동생분도 함께 사시는 건가요?”

    “제 동생을 아시나요?”

    “지난번에 갤러리스 백화점 VIP 파티에서 한번 뵌 적이 있습니다.”

    “동생은 잠깐 놀러 온 겁니다. 그렇게 오라고 할 때는 안 오더니, 영화 엎어지고 나니까 제가 불쌍했는지 놀러 오겠다고 하더라고요. 참! 그 영화는 안 하기로 했습니다. 들으셨죠?”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조만간 더 좋은 작품을 만나게 되실 겁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임준학은 박동식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었는지 내게 감사의 눈빛을 전하고 있었다.

    임준학의 뒤에서 멀뚱멀뚱 서 있던 임지형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그는 나와 장우재를 보고 놀라 소리쳤다.

    “스타탄생 대표님?? 어라? 이렌 님 매니저까지??”

    임지형은 나뿐만 아니라 장우재까지 알아봤다.

    “혹시 서이렌 님이 여기에 사시는 거예요?”

    “…….”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임준학은 한껏 들뜬 동생을 말렸다.

    “지형아. 우리는 방해하지 말고 그만 올라가 보자.”

    “형. 이분이 스타탄생 대표님이셔.”

    “알아.”

    “서이렌 배우님의 회사 대표시라고.”

    “안다고. 그만하고 가자니까.”

    임지형은 못내 아쉬운지 임준학을 보며 끙끙댔다.

    그때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서이렌과 빈선예 그리고 이락까지 함께 나타났다.

    이락이 나를 보자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하도 안 올라오셔서 저희가 직접 내려왔습니다. 이사하는 날인데 짜장면 먹어야죠. 두 분 이 오면 시키려고 기다리고 있다고요.”

    “언제 왔어요?”

    “방금이요.”

    나는 빈선예와 이락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궁금했지만, 임지형이 신경 쓰여서 곧 잊었다.

    장우재가 다가와 빈선예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빈 팀장님. 임준학 배우님과 그 동생이래요.”

    “알아.”

    “예?”

    “안다고.”

    내 곁으로 다가온 빈선예가 임지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다.”

    “누구신지? 혹시 저를 아시나요?”

    “나 몰라? 성문 고등학교 바둑 동아리 8기.”

    “8기요? 저는 13기인데요.”

    “선배님도 몰라보냐? 그때 VIP 파티에서도 그러더니만. 섭섭하다. 내가 축제 때 몇 번이나 성문고에 다녀간 적 있잖아.”

    임지형은 그제야 빈선예를 알아보고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그때 눈 돌아가게 잘 꾸미고 다니시던 패셔니스타 선배님이요?”

    “패셔니스타는 또 뭐니? 암튼 오랜만이다. 너 여기에 살아?”

    “아. 기억났어요. 선예 누나 맞죠?”

    “그래. 나다. 근데 내 질문에 답이나 해. 여기 사냐고?”

    “아뇨. 형네 집에 놀러 왔어요.”

    “네 형이 임준학 배우님이셨어? 몰랐다 얘.”

    빈선예는 VIP 파티에서 임지형을 보자마자 임준학의 동생인 걸 알아챘지만 지금은 모른 척을 했다.

    임지형은 빈선예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면서도 눈은 뒤에 서 있는 서이렌을 향해 있었다.

    “누나. 혹시 여기 사세요?”

    “아니. 이렌 씨가 오늘 여기로 이사 와서 짐 정리하러 도와주러 왔어.”

    “그렇구나. 이렌 님이 여기로 이사 오셨구나.”

    임지형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이렌은 가만히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지켜 보고 있다가 임지형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제 팬이시죠?”

    “저를 기억하세요?”

    “그럼요. 프리허그. 맞죠?”

    “와. 가문의 영광입니다. 저를 기억하고 계시다니요.”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그때 주셨던 곰 인형도 이사 올 때 챙겨 왔는걸요.”

    “정말요?”

    임지형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두 손을 꼭 쥐고 서이렌을 쳐다봤다.

    지하 주차장에서 이게 뭐 하는 짓거리인지.

    다른 팬들은 괜찮은데 임지형은 왜 저렇게 꼴 보기가 싫은지 모르겠다.

    “자자. 그만하고 이만 헤어질까요? 임준학 배우님은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저희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네요. 어서 들어가 보세요.”

    “그럼, 조만간 다시 뵙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대표님.”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열린 문으로 스타탄생 식구들을 먼저 들여보냈다.

    “이제 올라갑시다. 짜장면 시켜 먹는다면서요. 늦었어요.”

    “예. 대표님.”

    엘리베이터로 장우재와 이락이 먼저 들어와 탔다.

    “지형아. 나 내년 봄에 결혼하는 거 알지? 청첩장 보내 줄게.”

    “알아요. 누나. 꼭 갈게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행복하세요.”

    서이렌이 팬과 헤어질 때 항상 하는 마지막 인사말인 ‘행복하세요’를 내뱉자 임지형의 얼굴이 환희로 차올랐다.

    빈선예와 서이렌까지 엘리베이터 안에 다 들어가자 마지막으로 내가 탔다.

    나는 엘리베이터의 한가운데 서서 닫힘 버튼을 누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나는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대표님. 너무 앞을 가리고 계신 거 아닌가요?”

    “제가요?”

    “이렌 님 앞에 딱하고 버티고 계시잖아요. 너무 좁아요.”

    뒤돌아보니 정말로 나는 서이렌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짐 때문에 바로 뒤에 이렌 씨가 서 있는 걸 미처 못 봤네요. 미안해요.”

    나는 한 발짝 앞으로 물러났다.

    엘리베이터의 제일 구석에 서 있는 빈선예와 이락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오아시스 촬영은 마지막 회차를 남겨 두고 있다.

    올해 안에 모든 촬영을 마치고 내년 상반기나 여름에 극장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스타탄생의 제일 큰 이슈는 이락의 KBC 연기대상 신인상 축하 무대였다.

    나만의 마돈나로 KBC 남자 신인상 후보에 오른 이락은 매일 연습실로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

    우리는 12월 31일 마지막 날에 모두 KBC로 몰려가 이락의 축하 무대를 실시간으로 감상하겠다고 벼르고 있었고 이락은 제발 그러지 말라고 사정했다.

    오전에 레전드 필름에서 회의를 진행한 나는 곧바로 강남으로 넘어왔다.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운전하던 강진석이 말했다.

    “세강아.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뭘요.”

    “우리 합치자.”

    “갑자기 생뚱맞게 무슨 고백이십니까?”

    “야. 내가 너랑 합치자는 말이 아니잖아. 레전드랑 스타탄생 합치자고. 길거리에서 버리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

    “그렇긴 하죠.”

    나도 최근에 같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내년 봄에 빈선예가 결혼하기 전까지 스타탄생은 다른 건물을 구해서 나갈 생각이다.

    그동안 빈선예의 건물에서 편히 지냈지만, 이제는 스타탄생도 규모가 커져서 더는 이곳에 있을 수가 없다.

    “레전드 필름과 스타탄생이 같은 건물에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렇지? 너도 같은 생각이지?”

    “그렇지 않아도 우리가 모두 들어갈 건물을 알아보고 있어요. 이제 드라마 제작팀도 꾸릴 거잖아요. 그럼, 꽤 넓은 곳이 필요할 겁니다.”

    “근데 염려되는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우리 자금은 충분하냐?”

    “걱정하지 마세요. 작년에 투자했던 영화들이 다 잘돼서 보유금이 꽤 됩니다.”

    “영화 투자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넌 어떻게 그렇게 흥작만 골라서 투자를 하냐? 신기하다. 너 정말 신기 있는 거 아니냐?”

    그 약발도 이제 다 떨어졌습니다.

    이제 더는 흥행할 작품을 몰라요. 형님.

    나는 지난 삼 년간 꿈에서 봤던 흥행 영화에 투자하면서 쏠쏠하게 자금을 모았다.

    원래는 내가 죽어도 스타탄생이 굳건하게 버틸 수 있도록 돈을 모으자는 생각에 투자를 한 거였는데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은 나도 몰랐다.

    게다가 서이렌과 이락, 윤이슬, 김이솔까지 모두 제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서이렌의 개런티는 이미 이자현 수준에 근접했다.

    스타탄생의 자금력은 충분하다.

    레전드 필름도 작품 활동이 없었던 지난 오 년 동안 진설이 투자했던 영화의 반 이상이 흥행에 성공해서 재정은 튼튼했다.

    “제가 진설 대표님과 상의해서 위치를 먼저 정할게요.”

    “그래. 레전드도 함께 갈 거니까 그게 좋겠다.”

    우리가 탄 차가 청담동의 스타탄생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강진석의 핸드폰이 울렸다.

    “세강아. 문자 좀 확인해 줘.”

    “제가 막 봐도 돼요?”

    “보나 마나 윤서혁 감독한테 온 거야. 신작 때문이니까 네가 확인해 줘.”

    “핸드폰이 잠겨 있는데요?”

    “너도 아는 패턴이야. 그냥 열어.”

    “혹시 LOK에서 사용하는 공용 잠금 패턴인가요?”

    “응. 그거야.”

    “바꾸셔야죠.”

    “너무 익숙해서 못 바꾸겠어. 내가 원래는 법인 핸드폰만 썼잖아.”

    나는 웃으며 거치대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뭐야? 뭐라고 보냈어?”

    “차기작 결정했대요.”

    “뭐야? 좀비 영화? 아니면 그 한국형 판타지?”

    “좀비 영화요.”

    “결국 그렇게 됐구나. 윤 감독이 고민이 많아 보이던데 결국엔 좀비 영화를 골랐네.”

    “한 달 안에 시나리오도 다시 다듬을 거래요. 이제 시작이네요.”

    “첫 작으로 대박을 터트린 감독들이 두 번째 작품 할 때 여간 힘든 게 아니라더라.”

    “저희가 잘 지원해 줘야죠.”

    “그래. 빨리 레전드랑 살림 합쳐서 잘해 보자.”

    강진석은 웃으며 액셀러레이터를 더 세게 밟았다.

    * * *

    12월 31일.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오늘 하루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내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늘은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일 뿐만 아니라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는 날이 됐을 거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망의 카운트다운.

    나는 눈앞에 놓인 신약을 입 안에 털어 넣으며 내게 일어난 기적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전 내내 밀린 집안일을 한 나는 오후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왔다.

    이번에 뽑은 고급 세단에 몸을 실은 나는 스타탄생이 아닌 KBC로 이동했다.

    12월 31일의 거리는 메마른 겨울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훈훈함이 감돌았다.

    일찍 퇴근하는 직장인이 즐거워하는 것이 보였고, 연말 휴가를 받아 가족과 함께 거리에 나온 사람들의 행복함이 느껴졌다.

    나는 그들과 함께 웃으며 연기대상이 열리는 KBC 공개홀에 도착했다.

    아직 6시도 되지 않았지만 겨울 하늘은 이미 까맣게 어두워져 있었다.

    입구에는 벌써 레드카펫이 깔려 있었고 팬들이 몰려 있었다.

    강진석이 빨리 와서 축하 무대 리허설을 보라며 문자를 보냈다.

    나는 웃으며 KBC 공개홀로 걸음을 옮겼다.

    * * *

    KBC 공개홀에 들어와 보니 이미 스타탄생 식구들이 객석 한구석에 모여 있었다.

    “대표님.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재미있는 거 다 지나갔는데.”

    편한 차림으로 이곳에 온 서이렌이 내게 달려와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스타탄생 식구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벌써 끝났어요? 뭐가 그렇게 웃긴 건데요?”

    강진석은 배를 잡고 웃으며 말했다.

    “내가 설명해도 몰라. 라이브로 봐야 해. 너 어디 가지 말고 꼭 이 자리에서 봐라.”

    강진석뿐만 아니라 빈선예, 서유림도 너무 웃어서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 조금만 더 일찍 올걸.

    괜히 센티해져서 노을을 구경하다가 늦었다.

    내가 자책하고 있는데 서이렌의 핸드폰이 울렸다.

    서이렌의 전화번호는 연예계에서도 톱 시크릿이다.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타탄생 식구들이나 그녀와 친한 연예계 인맥 말고는 아무도 그녀의 전화번호를 모른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이렌의 전화 통화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빈선예가 은근한 미소로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 친해졌나 보네요.”

    “누구랑 친해져요?”

    “누구긴요. 이웃사촌이죠.”

    이웃사촌?

    서이렌의 이웃사촌이 누가 있지?

    “혹시 임준학 배우님을 말하는 겁니까?”

    “아뇨. 임 배우님이랑은 그냥 인사만 하는 사이래요.”

    “그럼, 누구요?”

    “임지형이요.”

    “예?”

    “모르셨어요? 지형이가 임준학 배우님 집으로 이사 왔잖아요.”

    “언제요?”

    “일주일 전에요?”

    미친 건가?

    재벌 3세가 왜 남의 집에 얹혀사는데!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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