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들켜 버린 진심
한울 영화상이 끝났다.
나비와 구원의 밤. 두 영화가 모든 상을 싹 쓸어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작품상은 구원의 밤.
감독상은 구원의 밤의 최병철.
각본상은 나비의 윤명현.
촬영상, 음악상은 구원의 밤.
편집상, 기술상은 나비.
그중에서도 여우주연상을 받은 서이렌은 명실상부 톱스타가 되었다.
드라마로는 아직 대상을 받지 못했지만, 그것도 이제는 시간문제라고 생각한다.
대본은 넘치게 들어왔고 서이렌에게 맡는 역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한울 영화상이 끝난 바로 다음 날 바로 오아시스 촬영이 재개됐다.
김이솔 원 톱의 영화라서 서이렌은 촬영 일정이 비교적 한가로운 편이다.
그래서 촬영 중간에 서이렌은 새집으로 이사를 하기로 했다.
약혼한 빈선예는 엊그제 본가로 이사를 나갔다.
서이렌은 걱정이 안 되지만 그녀가 혼자 사는 건 조금 걱정이 된다.
내 차가 서이렌이 이사하기로 한 빌라에 도착했다.
빌라 입구에서 방문자 등록을 하고 나서야 빌라의 주차장에 진입할 수 있었다.
방문자는 몇 번의 복잡한 절차를 더 거쳐야만 빌라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하 주차장에 들어와서도 빌라로 올라가려면 각 동의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야만 했다.
이 정도 보안이면 안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드디어 서이렌이 사는 빌라 동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때 내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장우재 매니저였다.
“예. 접니다.”
[대표님. 이사는 다 끝냈습니다.]
“알아요. 지금 빌라에 도착했어요.”
[벌써 오셨어요?]
“그런데 빌라 앞에 이사 차가 없더라고요.”
[빈 팀장님 짐을 빼고 나니 남는 짐이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금방 끝났습니다.]
“지금 밖인가요? 경적이 들린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지금 밖이에요. 생활에 필요한 가재도구가 하나도 없어서 지금 그거 사러 나왔습니다. 빌라 근처에 있는 마트로 가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빌라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겠네요.”
[예. 대표님 차와 간발의 차이로 엇갈렸나 봐요.]
“그럼, 지금 집에는 이렌 씨 혼자 있나요?”
[지금 혼자 계세요. 빈 팀장님과 이락 배우님이 오시기로 했다던데. 차가 밀려서 조금 늦을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알겠습니다. 제가 위로 올라갔다가 필요한 거 있으면 문자를 보낼게요.”
[그러세요. 제가 뭐 사야 할지 목록을 만들어 놨는데, 지금 대표님께 보내 드릴게요. 보시고 부족한 게 있으면 문자로 알려 주세요.]
“예.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나는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서이렌은 이 빌라의 최상층인 칠 층에 산다.
한 라인에 한 집밖에 없어서 서이렌이 지내기 편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엘리베이터는 칠 층에 도착했고 나는 집에 들어가기에 앞서 집 앞을 확인했다.
옥상과 계단을 모두 확인한 나는 그제야 미소 지었다.
모두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고, 옥상도 출입 카드나 비밀번호를 알아야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방문객용으로 받은 카드를 찍자 옥상 문이 열렸다.
옥상까지 꼼꼼히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칠 층으로 내려왔다.
그때 또다시 내 핸드폰이 울렸다.
그런데 발신자 표시에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설기획의 박동식입니다.]
“아. 박 대표님. 무슨 일로 전화하셨나요?”
[김기하 감독 이야기는 들으셨나요?]
“아뇨. 요즘 바빠서 그 이야기는 통 찾아보지 못했네요.”
[김기하 감독은 협회에서 영구 제명됐습니다. 이제 다시는 영화판으로 못 돌아올 겁니다. 혹시나 다시 이쪽으로 기웃거리면 그땐 제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필름더플랫은 김기하와의 연을 끊어 내고 재정비에 들어섰다.
예전부터 김기하 감독이 골칫거리였었기 때문에 정리하는 데 큰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임준학 배우를 걱정해 주신 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내가 임준학을 이용해 대광그룹을 움직인 거나 다름없으므로 박동식의 감사 인사가 마음에 걸렸다.
“다음에는 좋은 일로 뵀으면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왕이면 작품으로 만났으면 좋겠네요.]
박동식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 알았기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끊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나는 박동식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이번 일로 임준학에 대한 내 인상은 확 달라졌다.
대광그룹이라는 거대한 빽을 믿고 대작에 턱턱 캐스팅되는 금수저 배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그를 서포트해 주는 설기획이 그런 거고 임준학은 연기에 진심인 열정적인 청년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설기획이 아닌 그의 힘으로 배역을 따내야 할 거다.
나는 이상하게도 임준학과 우리가 함께 일하는 날이 이른 시일 안에 올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나는 집 앞으로 돌아와 초인종을 눌렀다.
내가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문이 열렸다.
환한 미소의 서이렌이 편한 차림으로 나를 맞이했다.
“대표님.”
나는 들고 온 금전수 화분을 서이렌에게 건넸다.
“이사 축하해요. 선물입니다.”
“주세요. 무거워요.”
서이렌은 금전수 화분을 받아 들고 그것을 전실로 옮겼다.
예전 집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집과 현관문 사이에 넓은 전실이 있는 구조였다.
“전실이 더 넓어졌네요.”
“맞아요. 여기에 자전거 두는 공간도 있어요. 물론 저는 자전거가 없지만 말이에요.”
“여기가 언덕이라서 자전거 탈 곳이 없습니다. 위험하니까 자전거는 생각하지도 말아요.”
“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전실을 둘러본 나는 서이렌과 함께 문 앞으로 이동했다.
불투명한 유리문이었다.
서이렌이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고 이내 내가 들어가려고 하자 갑자기 서이렌이 나를 막아섰다.
“대표님.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는데요.”
“뭔데요?”
“대표님은 여자 혼자 사는 집에 가 본 적이 있어요?”
서이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에 다 보였다.
장난기 가득한 그녀를 보자 나는 웃음이 나왔다.
“글쎄요. 기억이 안 나는데요?”
서이렌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표님이 그런 걸 까먹을 리가 없잖아요. 머리 좋은 거 다 알고 있어요.”
서이렌은 가자미눈을 하고 나를 흘겨봤다.
“있나 보네. 있으니까 기억 안 난다고 하시는 거잖아요.”
서이렌을 놀려 주고 싶었지만 없는 걸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오해하지 마요. 그런 적 없습니다.”
“진짜요?”
“정말 없습니다. 근데 배우들이 혼자 사는 집은 많이 가 봤어요. 내가 케어했던 배우들이 다 여자였으니까.”
나는 무심결에 던진 말이었는데 서이렌은 내 말을 듣자마자 인상이 확 구겨졌다.
“어. 그러셨구나.”
이런 거로 삐진다고?
나는 화가 나서 입이 잔뜩 나온 서이렌을 보며 어이없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빨리 들어가죠. 다리 아픕니다.”
내가 집 안으로 들어서려고 하자 갑자기 서이렌이 앞을 막아섰다.
“안 돼요.”
“예?”
“여긴 남자만 들어올 수 있어요.”
“이렌 씨. 나도 남자인데요.”
“매니저는 안 돼요. 남자만 들어올 수 있어요. 대표님 본인이 매니저라고 생각하시면 못 들어오는 거고, 남자라고 생각하시면 들어올 수 있어요.”
“뭐 그런 게 있습니까? 아까 장우재 매니저도 들어갔잖아요.”
“집주인 마음이죠. 대표님은 안 돼요. 노선을 확실히 하세요.”
서이렌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길을 막아섰다.
나는 그런 서이렌을 보며 화가 나기보다는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서이렌과 실랑이를 하는 것조차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빨리 결정하세요. 남자예요? 아니면 매니저예요?”
서이렌이 최후통첩하고 나를 노려봤다.
나는 그 순간 인상을 쓰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 귀엽다고 느껴져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은 뭘까?
혼란스러운 와중 구세주처럼 내 핸드폰이 울렸다.
“잠깐만요. 전화 좀 받을게요.”
내가 전화를 받자 서이렌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망할 전화.’
장우재로부터 온 전화였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빌라 앞인데요.]
“일찍 다녀오셨네요. 그런데 왜요?”
[아까 나오면서 깜박하고 방문객 출입 카드를 놓고 가서요. 경비실에서 잡혔어요. 동일인은 재발급이 불가능하다고 누군가 나와야 한다고 해서요.]
“그렇군요. 우재 씨는 앞으로 자주 들릴 거니까 그냥 입주민 등록을 해야겠네요. 지금 내가 내려갈게요. 방문객 카드는 어디에 뒀어요?”
[전실 선반에 올려 뒀어요.]
“아. 여기 있네요. 바로 내려갈게요.”
전화를 끊은 나는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서이렌을 보며 말했다.
“나는 우재 씨한테 이걸 주러 잠시 내려갔다 올게요.”
“그냥 가는 거예요?”
“다시 올 거라니까요.”
“힝.”
서이렌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밖으로 나가던 나는 서이렌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따 장우재 ‘매니저’와 함께 돌아올 겁니다. 그때는 꼭 문 열어 줘요.”
내가 매니저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하자 서이렌은 나를 흘겨봤다.
나는 삐진 서이렌을 두고 밖으로 나왔다.
* * *
서이렌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사를 했지만 집기가 없어서 집은 썰렁했다.
넓은 거실에 러그 한 장만 달랑 깔려 있었다.
그 위에는 놀러 온 빈선예와 이락이 앉아 있었다.
빈선예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이락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빈선예가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이락을 보며 말했다.
“내 말이 맞지? 내가 대표님도 이렌 씨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어……. 이건…….”
이락은 원세강과 서이렌이 전실에서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와. 대박. 이렌 님 이게 사실입니까? 진짜로 두 분이 사귀어요?”
서이렌은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걱정하지 마요. 이렌 씨 말대로 대표님도 이렌 씨 좋아해요. 그렇지 락아? 내 말이 맞지?”
“마음이 없는데 저런 대화를 나누는 건 말이 안 되죠. 그런 거면 완전 날라리 카사노바 개망나니일 텐데. 우리 대표님이 그런 분은 아니시잖아요.”
“그렇지.”
“근데……. 빈 팀장님…….”
이락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빈선예의 얼굴을 살폈다.
빈선예는 이락의 마음을 읽고 바로 답했다.
“대표님. 병 때문에 그래?”
“예.”
이락은 서이렌을 힐끔 쳐다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락아.”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이렌 씨가 말해 줬는데 대표님 건강이 점점 좋아지고 있대.”
“정말요?”
이락이 놀란 눈으로 서이렌을 바라봤다.
“정말이에요. 이렌 님?”
“나만 믿어요. 대표님은 건강해지실 테니까.”
“하지만 그때 의사가……. 치료법이 없다고…….”
“우리 대표님 성격 몰라요? 레전드 필름 대표직을 수락하고 배우들도 계속 영입하고.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그렇게 일을 벌이시겠어요? 걱정하지 마요.”
빈선예도 말을 보탰다.
“락아. 이렌 씨 말대로 대표님 건강이 좋아지고 있는 건 사실인 거 같아. 나도 처음에 들었을 때는 못 믿었는데 요즘 대표님 행보를 보면 먼 미래까지 내다보고 일하는 거 같으셔. 그렇지 않니?”
“그렇긴 하네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렌 씨랑 대표님을 밀어줘야 해.”
“뭘 밀어줘요?”
“방금 봤잖아. 대표님은 분명히 이렌 씨를 좋아하는데 자꾸 철벽을 친다잖아.”
“그거야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잖아요.”
“대표님이라면 병이 깨끗하게 나아도 자기 배우랑은 연애 안 한다고 할걸?”
“맞아요. 대표님은 그러실 게 분명해요.”
“이대로 놔두면 저 두 사람은 계속 이 상태라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우리가 도와줘야 해.”
이락은 어느새 홀린 듯이 빈선예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 * *
“짐이 많네요. 제가 내려오길 잘했네요.”
나는 장우재와 함께 짐을 나눠 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자꾸 덤벙거리죠?”
“아니에요. 우재 씨가 얼마나 든든한데요. 제가 그러니까 마음 편하게 우재 씨께 서이렌 씨를 맡기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우리는 대화를 나누며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걸었다.
그때 시커먼 밴이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밴을 본 나와 장우재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딱 봐도 연예인 차량이었다.
이 빌라에 연예인이 살고 있었나?
밴은 우리 근처에 주차했고 드디어 차 문이 열렸다.
그런데 차에서 아는 사람이 내렸다.
임준학과 그의 동생인 임지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