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57화 (158/261)

#157화. 여우주연상

“그 까칠한 요구를 완벽히 연기했다고요? NG도 없이요?”

“예. 한 번에 성공했습니다.”

서이렌의 자신감 있는 한마디에 모두가 그녀를 바라봤다.

오늘 나비와 구원의 밤. 두 개의 영화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서이렌.

배우가 된 지 이제 고작 삼 년 차인 어린 배우의 당당함에 그곳에 모인 배우와 영화계 관계자들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여우주연상은 서이렌 씨가 타겠는걸.’

모두 서로를 보며 은근한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스태프가 다가왔다.

“이제 곧 시상식이 시작됩니다. 이제 각자 배정된 좌석으로 가 주시죠.”

우리에게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떠나고 나는 서이렌을 그녀의 자리로 에스코트했다.

주최 측에서는 오늘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배우들에게 나란히 좌석을 배정했다.

서이렌은 그중에서도 한가운데 자리를 받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서이렌을 바라봤다.

서이렌도 내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잘하고 와요. 난 스타탄생 식구들과 함께 대기실에서 기다릴게요.”

“대표님. 이따 여우주연상 할 때요.”

“예. 말해요.”

“그때 내가 뭐라고 소감을 발표할지 기대하고 있어요.”

“안 떨려요? 안 탈 수도 있잖아요.”

“에이. 나 이번에 인생 연기했다니까요. 날 안 주면 뭔가 비리가 있는 거죠.”

자신만만하게 웃는 서이렌이었지만 밉지 않았다.

“그럼, 난 이만 갈게요.”

나는 마지막까지 서이렌과 눈을 마주치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스태프 대기실로 가 보니 스타탄생 식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스타탄생의 한 기둥을 맡은 강진석과 예비 신부 빈선예, 서이렌의 로드 매니저 장우재.

그리고 오늘 시상을 하러 참석한 김이솔과 윤서혁까지.

“시상식장 분위기 어때? 다운되진 않았고?”

“다운이요? 전혀요. 분위기 좋습니다.”

“그래? 의외네.”

“왜 다운됐을 거라고 생각하셨는데요?”

“왜긴. 김기하. 그 미친 새끼 때문이지.”

“다들 김기하 감독에게 당한 게 있었는지 통쾌해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럼, 다행이다. 그 자식이 영화진흥협회 이사라서 그래. 영화계 전방위로 해악을 부리고 다녀서 말이야.”

“그런데 오늘 보니 오아시스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을 다 알고 계시더라고요.”

“그래?”

뒤에 앉아 있던 장우재가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게 영화 스태프들 단톡방에서 그 이야기가 연일 화제였대요.”

“하긴 천하의 독불장군 김기하가 촬영장에서 개쪽을 당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일이 터지면 이제 김기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세강아. 어떻게 될 거 같냐?”

내가 시작한 싸움은 나의 은밀한 조력자 박동식이 거들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김기하는 아마 다시는 이 바닥에서 일하지 못할 거다.

“이제 영화계에서는 다시 발붙이지 못할 거 같습니다.”

반대편에서 우리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김이솔이 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러들었다.

강진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까? 하지만 배우도 아니고. 감독이니 다시 재기하지 않을까?”

“아뇨. 그럴 일은 없습니다.”

“하긴 해 먹어도 너무 많이 해 먹었어.”

강진석은 김기하가 그렇게 된 게 고소한지 웃음을 참지 못했다.

* * *

영화제가 시작하기 직전, 나는 김이솔을 따로 불러냈다.

김이솔은 극단 마루에서 처음 봤을 때처럼 긴장한 모습이었다.

“괜찮아요? 이솔 씨?”

“제가 안 괜찮아 보이나요?”

“예.”

김이솔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내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드레스 자락으로 보이는 구두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대기실에서 이야기 들었죠? 김기하 감독은 영원히 영화계에 발을 못 붙일 겁니다. 다시는 촬영장에 찾아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내 말을 들은 김이솔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대표님은 뭔가 알고 계시는가요?”

“김기하 감독 때문에 고생한 배우들이 많아요. 그래서 그냥 짐작하는 거죠.”

김이솔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왜 이렌이처럼 그렇게 당당하게 맞서지 못했을까요? 그게 너무 슬퍼요. 이번에도 이겨 내지 못한 게.”

“그때 그러셨죠? 오아시스를 해야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 같다고.”

“예. 그랬죠.”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김이솔 배우님은 지금도 완벽합니다. 굳이 왜 힘들었던 과거를 이겨 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예?”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힘든 건 힘든 거고 아픈 건 아픈 겁니다. 일부러 고생을 찾아서 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아프지 않아도 청춘은 청춘입니다. 오아시스는 좋은 작품이라 이솔 씨가 한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까 이겨 내지 못했다, 잘못했다, 그런 생각은 마세요. 그냥 우리 연기만 생각해요.”

김이솔은 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웃어요?”

“사실은 지난밤에 이렌이도 제게 같은 말을 해 줬거든요.”

“그런 말도 주고받나요?”

“요즘 이렌이와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요.”

김이솔은 내 말에 진심으로 위로를 받았는지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고마워요. 대표님. 이제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어요.”

“내가 더 고마워요. 우리 이제 들어갈까요?”

“예. 대표님.”

나는 김이솔과 함께 대기실로 걸음을 옮겼다.

대기실 입구에는 윤서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나와 있어요? 윤 감독님.”

“그냥. 답답해서요. 빨리 들어가요. 광고 끝나 가요.”

* * *

한울 영화상의 막이 올랐다.

작품상 후보로 구원의 밤과 나비가 모두 올랐다.

두 작품이 올해의 가장 큰 화제였으므로 주요 부분에 모두 후보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박선호는 신인남우상 후보였다.

- 작품상은 구원의 밤이 타겠지?

- 황금나무상도 탔는데 당연한 거 아니겠냐?

- 서이렌은 왜 신인상 후보에 없냐? 박선호도 있는데??

- 대신 나비랑 구원의 밤으로 여우주연상 후보잖아.

- 서이렌은 신인상 거르고 바로 여우주연상으로 가네. 커리어보소 ㄷㄷㄷ- 287일 때 안젤라 수녀님으로 신인상 탔어야 했어. ㅠㅠ- 그땐 배역이 너무 작았잖아.

- 서이렌 오늘 너무 이쁘다.

- 서이렌은 항상 존예. 안 예쁜 적이 없었음.

시상식이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의 예상대로 나비와 구원의 밤이 모든 상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여우주연상 발표가 시작됐다.

오랜만에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김이솔과 윤서혁 감독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 김이솔이다!!!

- 김이솔 여전히 예쁘다.

- 난 저 차분한 김이솔 목소리가 진짜 좋더라.

- 오늘 윤서혁 감독은 왜 저렇게 뚝딱거리냐?

- 시상은 처음이라 긴장됐나 보지.

- MT 안 봄? 윤서혁 긴장하고 떠는 캐릭터 아니야. 엄청 웃기는 사람이라고.

- 윤서혁이 감독이었어???

- 몰랐냐?

- 난 MT만 보고 스타탄생이 예능인도 키우나 했지.

- 윤서혁 감독 졸지에 예능인행. ㅋㅋ

긴장한 윤서혁이 입을 열었다.

“김이솔 배우님. 오랜만에 뵙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잘 지냈습니다. 영국에 있을 때 윤서혁 감독님의 영화인 287일이 제가 살고 있던 런던의 극장에 걸린 적이 있습니다.”

“정말요?”

“고단한 유학 생활 중에 한국 영화를 극장에서 보니 너무 반가웠습니다. 오늘 이렇게 그 작품을 만드신 윤서혁 감독님과 시상을 하게 돼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저야말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김이솔 배우님과 함께 시상하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 윤서혁 얼굴 빨개진 거 봐라. 너무 떠는데???

- 떠는 게 아니라 좋아서 그런 거 아님? 진짜 김이솔 팬인가 보네.

- 그러네. 김이솔 눈을 못 쳐다보네. ㅋㅋㅋ

- 근데 김이솔도 스타탄생 아님?

- 맞아. 영국에서 돌아와서 스본이랑 계약함.

- 윤서혁도 스본이잖아.

- MT 다시 찍으면 두 사람 투 샷도 볼 수 있겠네.

- MT 또 함?

- 그거 NGB랑 정식으로 계약했다고 기사 떴어. 연말에 2탄 할 거라고 했음.

- ㅅㅂㅅㅂ 벌써 존잼필이다.

윤서혁이 봉투를 열고 입을 열었다.

“그럼, 여우주연상 후보부터 보시죠.”

무대 뒤의 커다란 LED 스크린에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배우들의 영화가 짧게 플레이됐다.

제일 먼저 플레이된 것은 나비였다.

발레리나이자 여전사 J(제이)로 분한 서이렌의 연기 장면이 나오자 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 다시 봐도 존멋.

- 서이렌 액션 짱이야.

- 미친. 짧은 영상인데도 존나 멋있어.

다른 후보들의 연기 영상이 지나가고 마지막으로 구원의 밤이 떴다.

재생된 영상은 다름 아닌 개기일식 장면.

개기일식과 함께 각성하는 최진의 얼굴이 커다란 화면에 가득 차자 시상식장 분위기가 바뀔 정도였다.

- 압도적이네.

- 제발 서이렌이 타게 해 주세요.

- 와. 짧은 소개 영상만으로도 소름 돋았음.

- 서이렌 여우주연상 타자!

봉투를 받아 든 윤서혁이 그것을 김이솔에게 건넸다.

“그럼, 김이솔 배우님이 발표해 주시죠.”

봉투를 받아 든 김이솔은 조심스럽게 수상자 이름이 적혀 있는 카드를 꺼냈다.

카드에 적힌 이름을 본 김이솔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김이솔은 배우들이 앉아 있는 객석을 바라보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수상자는 구원의 밤의 서이렌 씨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합니다. 서이렌 씨.”

서이렌의 이름이 호명되자 객석을 가득 메운 서이렌의 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강진석이 나를 붙들고 외쳤다.

“와! 세강아. 탔어. 여우주연상이라고.”

“그러네요. 여우주연상입니다.”

대기실은 축제 분위기였다.

“조용. 조용. 이제 소감 발표하려나 봅니다.”

들떠 있던 대기실이 내 말에 일순 고요해졌다.

트로피와 꽃다발을 받아 든 서이렌이 소감을 발표하기 위해 무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빈선예가 준비해 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서이렌은 오늘따라 더욱 여신 같아 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누군가를 따라 하며 연기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구원의 밤은 그간 흉내만 내왔던 저의 얕은 연기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치열하게 고민했고 그 성과가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든 것 같아서 배우로서 너무 값진 작품입니다. 제가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많은 분이 계십니다.

이 자리를 빌려 그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우선 진설 배우님, 감사합니다. 처음 연기를 배우는 학생처럼 모든 것이 새롭고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진설 배우님은 제 마음속의 스타이자 영원한 스승님이십니다.”

“그리고 최병철 감독님께 영화에 대한 열정을 배웠습니다. 현장에서의 감독님의 카리스마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감독님께 영화에 임하는 마음가짐과 자세에 대해 배웠습니다. 감독님, 이제 은퇴하지 않기로 하셨으니 다음 작품에도 저를 꼭 불러 주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불러만 주시면 감독님 작품을 꼭 하겠습니다.”

- 와. 진설이 서이렌 연기 가르쳐 줬나 봐.

- 대박이네. 진설이면 레전드급 배우 아니냐?

- 어쩐지 서이렌이 원래 연기 잘했는데 구원의 밤은 넘사벽이더라니.

- 영화계에서 진설 라인 되게 유명하지 않나? 서이렌도 그 라인 타나?

- 스본 원세강 대표가 이미 진설이 운영하는 레전드 필름 공동 대표야. 진짜 진설의 후계자는 스본 원세강이라고.

- 와. 쩐다.

서이렌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붙였다.

“마지막으로 우리 원세강 대표님.”

대기실에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서이렌의 수상 소감을 시청하던 나는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자 긴장해서 몸이 굳었다.

서이렌이 마치 화면 너머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까지 들었다.

“대표님, 제가 일전에 직진할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이제 앞만 보고 달릴 겁니다. 그러니까 대표님이 제가 달릴 수 있도록 더 많은 도움을 주셔야 합니다. 아시죠? 앞으로 저를 위해 힘써 주실 원세강 대표님을 위해 이 영광을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서이렌이 방금 말한 직진은 일이 아닌 나에 대한 직진인가?

소감으로 직접적인 고백을 받은 내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 와. 서이렌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열일한다고 하네.

- 서이렌은 일 욕심 진짜 많아.

- 팬들은 좋겠다. 배우가 저렇게 열심히 한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어.

- 스본 대표가 진짜 잘해야 한다.

- 내가 스본 대표라면 서이렌 맨날 업고 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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