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세 가지 비리
강진석은 김진희 실장이 악플러로 고소당한 사건으로 LOK에서 나온 일을 놀라워했다.
악플의 대상이 서이렌이라는 사실을 알면 강진석이 얼마나 황당해할까?
“김진희 실장이 고소당할 만큼 악플을 심하게 달았다니 진짜 믿어지지 않는다. 그렇지 않냐? 세강아?”
“그렇죠. 같은 업계 사람들끼리 그러다니 놀랍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왕 대표님은 누군가요?”
“한성제 대표님이 왕 대표님이시잖아.”
“은퇴하신 거 아니었나요?”
“너 몰랐어? 대표 자리를 한지욱한테 물려줘 놓고 한성제 대표님이 매일 LOK에 출근해서 간섭하신다잖아. 그래서 다들 왕 대표님이라고 부른대.”
“그런가요?”
“나는 뭐 놀랍지도 않다. 한지욱 그 못난 놈이 얼마나 일을 못 하면 한성제 대표님이 매일 출근 도장을 찍으시겠니?”
한성제 대표가 LOK에서 손을 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뒤에서 조정할 줄 알았지.
이렇게 대놓고 출근하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앞으로 LOK가 어떻게 될지 감이 오지 않는다.
내가 본 미래와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그때 핸드폰을 매만지던 강진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요즘 채용 비리 때문에 문제가 많네.”
채용 비리라는 말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무슨 기사라도 떴나요?”
“영화진흥협회에서 대규모 채용 비리가 있었다는데? 전·현직 국회의원의 친인척이 대거로 뽑혔대. 다른 곳도 아니고 영화진흥협회인데 영화는 하나도 모르는 놈들이 비리로 채용됐으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눈에 훤하다. 어쩐지 말이 영화진흥협회지. 영화훼방협회라고 불릴 정도였잖아. 되지도 않는 기준으로 영화인들을 못살게 굴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나.”
나는 흥분하는 강진석을 뒤로하고 방금 뜬 따끈따끈한 기사를 확인했다.
[단독 취재. 영화진흥협회 대규모 채용 비리 사실로… 87명 조사 진행 중]
드디어 떴구나.
내가 봤던 미래보다 정확히 한 달 일찍 기사가 터졌다.
그때 국민 신문고에 글을 올리고 협회에서 왕따를 당하다 퇴직했다던 직원은 이제 안전할 거다.
내가 대신 터트렸으니까.
나는 기사 내용을 꼼꼼히 확인했다.
기사에는 전·현직 국회의원과 협회 관계자가 채용 비리와 연관되었다고만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협회 관계자가 김기하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곧바로 깡기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깡기자님. 지난번에 제보해 드렸던 영화진흥협회 채용 비리 사건이요. 기사가 뜬 것 같습니다.]
깡기자는 전광석화처럼 내 문자에 답장했다.
[저도 봤어요. 우리 기사도 이제 곧 올라갑니다.]
문자를 마친 나는 촬영장을 둘러봤다.
아직은 아무도 이 사건에 관심이 없다.
하지만 기사가 터지면 상황이 달라질 거다.
얼마 후, 인터넷 기사를 확인하던 강진석이 놀라 외쳤다.
“이게 뭐지?”
“왜요? 형님?”
나는 시치미를 떼고 강진석을 쳐다봤다.
강진석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게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영화진흥협회 채용 비리 말이야. 그거 김기하도 연루되어 있대.”
* * *
김기하는 요 며칠 동안 검찰에 출두하고 기자들에게 시달리며 죽을 지경이었다.
“요즘 삼재가 꼈나? 왜 이렇게 안 좋은 일만 연달아 터지지? 송 대표. 나 굿이라도 해야 할까 봐.”
필름더플랫의 송정현 대표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갑자기 무슨 굿입니까?”
“이상하지 않냐? 갑자기 내 방에 불이 나서 그동안 모아 놓은 테이프도 다 사라지고. 또 그 복구 업체는 뭐야? 왜 연락 두절인 건데? 말이 안 되잖아.”
“지금 그까짓 테이프가 문제인가요? 영화진흥협회는 어떻게 하실 건데요? 이대로 가면 형님 혼자 독박 쓰게 되시는 겁니다.”
“고작 고향 후배 한 명 꽂아준 걸로 나만 가지고 물고 늘어지잖아. 분명히 함께 연루된 국회의원들이 손을 쓴 걸 거야. 아니면 이렇게까지 나만 몰리는 게 말이 되냐?”
김기하는 모든 비난의 화살이 그에게 향하자 분노했다.
송정현은 억울해하는 김기하를 보며 손절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이 양반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셨구먼. 그나저나 임준학 소속사는 미리 정보를 들은 거 아니야? 어떻게 기사가 터지기 전에 투자금을 모두 회수했지?’
송정현은 필름더플랫과 김기하 감독의 오랜 인연을 언제 정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김기하의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번호 바꿨는데 또 누가 전화한 거야? 이번에도 기자 아니냐? 진짜 사람 힘들게 하네.”
김기하 감독은 미간을 확 찌푸리며 전화를 들었다.
“김기하입니다. 예? 뭐라고요? 누구시라고요?”
전화를 받던 김기하의 손끝이 떨렸다.
송정현은 김기하의 얼굴이 사색이 되자 뭔가 터졌음을 직감했다.
“아니 갑자기 왜 감사를 받아야 한다는 건가요? 예. 알았습니다. 제가 지금 당장 갈게요.”
전화를 끊은 김기하는 허둥지둥 외투를 챙겼다.
송정현은 기사가 터질 때도 태연했던 김기하를 봤기에 이번에는 정말로 큰 사건이 터졌다고 생각했다.
“왜 그러시는데요? 대체 무슨 일입니까?”
“…….”
김기하는 송정현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표실을 뛰쳐나갔다.
* * *
연달아서 김기하 감독의 기사가 올라왔다.
촬영장에 있던 나와 강진석은 기사를 보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단독 취재. 영화진흥협회 이사 겸 감독 K 씨. 협회 기금 유용한 정황 발각.]
[국제적인 명성의 영화감독 K 씨. 서울국제영화제에서 편파 심사 논란.]
“세강아. 영화진흥협회 이사 겸 감독 K 씨면 한 사람밖에 없잖아. 우리 촬영장에 와서 난리 쳤던 그 K 씨 맞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박이네. 아주 전방위로 해 먹고 다녔구나. 영화진흥협회 역사상 최연소 이사라며 거들먹거리고 다녔다는데. 웃기는 놈이었잖아.”
“그러게요.”
나는 흥분한 강진석을 뒤로하고 기사를 확인했다.
최근에 영화진흥협회로 감사가 들어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역시나 비리가 있었다.
K 씨는 협회의 이사로 있으면서 영화 기금으로 마련된 지원금을 본인 영화에 투자하는 형식으로 돈을 착복했다고 나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년 전 서울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K 씨가 그의 대학 후배가 만든 작품을 독립영화 부분 후보에 넣고, 감독상 수상까지 관여했다는 것이었다.
그때 수상했던 그 감독은 지금 영화진흥협회에서 K 씨와 함께 일하고 있었다.
기사에 최근에 ‘채용 비리로 논란이 있는 K 씨’라고 콕 짚어 줘서 누군지 모를 수가 없었다.
“이거 모두가 알고 있는 적폐잖아. 선배가 후배 이끌어 주는 거 말이야.”
“그렇죠. 그런데 이 기사에 나온 걸 보면 대놓고 밀어줬나 보네요.”
“지원금까지 자기 영화에 쏟아붓고 아주 잘하는 짓이다. 이래서 죄를 짓고 살면 안 돼. 이렇게 한꺼번에 다 터지잖아?”
나중에 터진 두 개의 비리는 나도 몰랐던 거다.
우리의 은밀한 조력자가 찾은 건가?
뭐가 어찌 되었든 과거의 김기하라면 대충 둘러대고 무마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세 개의 비리가 연달아 터졌으니 이제는 강을 건넜다고 봐야 한다.
이렇게 끝이 나는구나.
“세강아. 저기 봐라. 고명수 감독이랑 스태프들도 알았나 보다. 다들 웅성거리네.”
고개를 들어 보니 강진석의 말대로 촬영장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딜 가려고?”
“오늘 촬영 접을 거 같은데요?”
“그래? 필름더플랫도 힘들어지는 거 아니냐?”
“그럴 리가요? 송정현 대표님이 알아서 처리하시겠죠. 다만 며칠간은 촬영을 중단할 거 같습니다.”
“하. 김기하 때문에 이게 대체 무슨 꼴이냐? 짜증 나네.”
고명수 감독이 스태프들에게 뭔가를 말했고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일어서서 어디론가 흩어졌다.
내 예상대로 그날 촬영은 접어야 했다.
* * *
이틀 후, 한울 영화상이 열리는 국제아트센터에 수많은 영화인이 모여들었다.
오아시스 촬영은 오늘 영화 시상식이 끝나고 내일부터 재개될 예정이다.
최근 영화계는 김기하 감독의 비리 사건으로 들썩이고 있다.
나쁜 일로 영화계의 이미지가 안 좋은 와중에 열리는 큰 행사라서 한울 영화상은 대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수많은 기자가 모인 가운데 드디어 한울 영화상이 시작됐다.
레드카펫을 밟고 들어온 서이렌을 맞이한 나는 그녀와 함께 대기실로 향했다.
이곳에서 잠시 대기하고 있다가 오늘 영화상이 열리는 국제아트센터로 입장할 예정이다.
대기실에는 미리 도착한 영화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의 화제는 단연코 김기하 감독의 몰락이었다.
모두가 만나면 그 이야기뿐이었다.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대기실이 일순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서이렌에게 꽂히자 나는 당황했다.
서이렌은 언제나 주변의 시선을 휩쓸고 다니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오늘 이렌 씨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쳐다본다고?
나와 서이렌은 사람들을 향해 간단히 인사를 하고 서이렌의 이름표가 써진 대기석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런데 서이렌이 자리에 앉자마자 배우와 영화계 관계자들이 다가왔다.
영화계의 대선배님들이 다가 오자 자리에 앉았던 서이렌이 벌떡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서이렌입니다.”
“서이렌 씨. 우리 초면이죠? 난 최수연입니다.”
“만나 봬서 영광입니다. 최수연 선배님.”
서이렌은 다른 선배 영화인들에게도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배우뿐만 아니라 감독들까지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내가 당황하고 있는데 최수연 배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아시스 촬영장 이야기는 들었어요. 고생했어요.”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김기하 감독이 얼마나 미친놈인지는 나도 잘 알아요. 그나저나 김기하의 지랄병도 서이렌 씨한테는 하나도 안 먹혔다면서요?”
최수연은 김기하에게 맺힌 것이 많은지 말이 거칠었다.
하지만 감정이 안 좋은 건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동안 하지 못한 속내를 드러내며 김기하를 씹었다.
“나도 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김기하 감독이 촬영장에서 울었다는 소문도 있던데 진짭니까?”
“김기하가 울었다고요? 설마요. 그 악마 같은 김기하가 그랬을 리가 없는데요?”
“오아시스 스태프로 일하는 분께 직접 들은 거예요.”
“저는 다르게 들었는데요? 김기하 감독이 울지 않았는데 대신 촬영장을 뛰쳐나갔다는데요?”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놀라웠다.
천하의 김기하가 촬영장에서 눈물을 보이거나 뛰쳐나가다니.
그것들은 모두 김기하에게 당하던 배우들이 했던 행동이 아닌가?
“그나저나 다들 김기하 감독을 벼르고 있었나 보네요.”
“같이 일했던 배우들한테는 이미 최악의 감독이라고 소문났어요. 스태프들도 마찬가지고요. 심지어 요즘은 영화진흥협회 이사로 있으면서 자기 영향력 행사하려고 얼마나 들이밀었는데요.”
모두 김기하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서이렌 씨가 얘기 좀 해 봐요. 대체 어떻게 했길래 그런 소문이 난 건가요? 정말로 김기하 감독이 울었어요?”
모두의 시선이 서이렌에게 꽂혔다.
서이렌은 이 모든 일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답했다.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그냥 감독님이 지시하신 연기를 백 프로 그대로 재현해 드린 것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