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은밀한 조력자
강남의 한복판에 있는 배우 임준학의 일인 소속사 설기획은 아침부터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설기획 대표 박동식은 굳은 얼굴로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박동식은 모니터에 보이는 임준학의 연기 연습 영상을 보며 치를 떨었다.
“하. 그 개새끼를 어떻게 하면 좋지?”
답답했던 그는 찬물이 담긴 물병을 원샷하고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 *
나는 갑작스러운 내 방문을 궁금해하는 박동식을 보며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요즘 임준학 배우님이 영화 촬영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필름더플랫의 김기하 감독의 작품에 들어갔다고요?”
“어떻게 다 알고 오셨네요. 왜 그러시죠? 혹시 레전드 필름에서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라도 있나요? 제가 다시 보내 드린 투자 서류를 검토해 보신 건가요?”
박동식은 내가 임준학을 레전드 필름의 신작 영화에 캐스팅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생각했나 보다.
“저는 영화 캐스팅 때문에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그래요?”
박동식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묘한 표정을 짓더니 내게 물었다.
“그럼, 오늘 여기에 오신 이유가 뭔가요? 왜 갑자기 저를 보자고 하신 거죠?”
“요즘 임준학 배우는 어떻습니까?”
“갑자기 우리 임 배우는 왜 물어보시는 거죠?”
“혹시 불면증이 생겼다거나 정신적으로 힘들어 보이지는 않나요?”
“첫 영화예요. 당연히 힘들겠죠.”
박동식은 말을 하면서도 뭔가 석연치 않았다.
임준학 본인이 연기로 인정받고 싶다고 시작한 프로젝트다.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김기하 감독의 작품이라서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임준학이 말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USB를 탁자 위에 올려놓자 박동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뭡니까?”
“서이렌 배우님과 김이솔 배우님이 지금 필름더플랫에서 만들고 있는 신작 영화에 출연하고 계십니다.”
“저도 기사를 봐서 알고 있습니다.”
“필름더플랫에 갔다가 우연히 주운 겁니다.”
“이걸 왜 제게 주시는 건가요? 필름더플랫에서 주웠으면 거기서 주인을 찾아 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이건 임준학 배우님의 것이니까요.”
“우리 임 배우가 흘린 건가요? 하긴 주중에 두 번씩 필름더플랫에 가서 김기하 감독과 함께 연기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김기하 감독이 우리 임 배우 연기를 보면서 시나리오도 실시간으로 수정하고 있고요.”
“임준학 배우님의 연기 연습이 담긴 영상입니다. 여기서 보시고 태워 없애 버리세요.”
“예?”
“그러셨으면 합니다. 박 대표님이 영상을 보시는 동안 제가 옆에서 지키고 서 있겠습니다.”
박동식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USB를 쥔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책상 위로 걸어가 노트북에 USB를 꽂았다.
* * *
박동식은 이를 악물고 세 개의 영상을 끝까지 시청했다.
영상이 끝나고도 박동식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영상은 임준학이 필름더플랫에 가서 김기하와 연기 연습을 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녹화되어 있었다.
영상 하나는 한 시간째 가만히 앉아 있는 임준학이 녹화되어 있었다.
인형 연기를 주문한 김기하는 임준학을 의자에 앉혀 놓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다.
사람이 인형도 아니고, 어떻게 안 움직일 수가 있을까.
임준학이 침을 삼키거나 눈을 깜박일 때마다 김기하는 다시 연기해 보라고 그를 닦달했다.
나는 지금까지 임준학을 오해했었다.
평생을 재벌 3세로 살아왔고, 가문의 지원으로 턱턱 주연을 꿰차 왔기에 연기를 쉽게 생각할 거라고 오해한 것이다.
하지만 영상 속의 임준학은 어떻게든 김기하의 요구에 맞춰 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긴 침묵을 유지하던 박동식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걸 제게 가져오신 이유가 있을 텐데요.”
“맞습니다.”
“말씀하시죠.”
박동식은 무섭도록 차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 임준학 배우님이 김기하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지 못하도록 해 주세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차분하지만 꾹꾹 눌러 담아 말하는 걸 보니 그의 분노가 절실하게 느껴졌다.
“하실 말씀이 그것뿐입니까?”
“영상은 태워 버리세요. 세상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될 영상입니다.”
내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박동식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죠?”
“저는 원 대표님이 이 영상을 가지고 오신 게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신 거죠?”
“이런 영상이 있다는 건 김기하와 연기했던 다른 배우들도 같은 영상이 있다는 뜻이겠죠? 그래서 저를 찾아오신 거 아닙니까? 같이 김기하 감독을 고소하자고요.”
“아뇨.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죠?”
“그렇게 되면 배우들이 피해를 보게 됩니다. 김기하 감독과 작품을 했던 배우와 지금 준비 중인 배우, 심지어 오디션을 봤던 배우들까지 모두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겠지요. 배우에게 이런 구설수는 치명타입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죠.”
박동식은 굳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그럼, 이대로 김기하 감독을 피해 다니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는 건가요?”
“그것도 안 됩니다. 김기하는 배우들의 연기 지도와 오디션 영상을 모조리 소장하고 있습니다. 임준학 배우님이 영화를 그만두더라도 제2, 제3의 피해자가 계속 생길 겁니다.
사막의 후광으로 유명한 배우들을 캐스팅했던 과거에도 그 배우들을 상대로 연기 지도라는 명목하에 가스라이팅을 시도했던 감독입니다.
지금은 하락세라지만 임준학 배우님처럼 영화에 목마른 신인 배우들이 불나비처럼 달려드는 형국입니다. 영화진흥협회의 이사라는 것도 한몫하고요. 저는 김기하 감독이 다시는 영화판에 발붙일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소 말고 다른 방법이 있나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박동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응시했다.
그의 힘으로는 할 수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대광그룹의 힘으로는 김기하 감독 한 사람 정도는 충분히 매장하고도 남는다.
‘세상에 털어서 먼지가 안 나는 사람은 없어. 영화진흥협회 최연소 이사까지 한 사람이니 분명 뭐가 있을 거야. 대광이 나서면 되는데 원세강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박동식은 결국 참지 못하고 용건을 끝내고 일어서는 나를 잡았다.
“그냥 이렇게 가시려고요?”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도울 수 있을 겁니다. 대체 어떻게 김기하 감독을 혼자 처리하신다는 건가요?”
박동식이 간곡하게 나를 붙잡자 나는 결국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의심하는 그의 눈빛을 받으며 나는 입을 열었다.
“영화진흥협회에서 대규모 채용 비리가 있었습니다.”
내 말을 들은 박동식의 두 눈이 커졌다.
내가 봤던 미래가 바로 이거다.
문체부 산하의 공공기관인 영화진흥협회의 채용 비리가 곧 터진다.
협회에서 일하는 직원이 청와대 신문고에 글을 남기면서 곧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대부분은 국회의원의 일가친척들이 비리의 대상이었지만 내가 기억하기로는 김기하가 꽂아 넣은 고향 후배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람들은 국회의원에만 관심을 가졌고 김기하는 흐지부지 넘어가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제대로 터트려서 김기하까지 한 방에 보낼 생각이다.
물론 누군가 도와준다면 금상첨화다.
나는 충분히 그럴 힘을 가진 박동식을 보며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김기하 감독도 채용 비리에 얽혀 있더군요. 아마 이 사건이 터지면 자연스럽게 영화진흥협회 이사직도 박탈당할 겁니다.”
“그렇군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박동식은 김기하와 채용 비리에 대한 것들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인에게 들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걸 경찰에 고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알아서 처리하시겠다고 하신 거였군요.”
“저는 그냥 고발만 하는 거고 나머지는 경찰이 처리하시겠죠.”
“대단하시네요. 서이렌 씨는 김기하와 작품을 한 적이 없는데 왜 직접 나서는 겁니까? 원세강 대표님은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아니다. 상관있다.
이자현과 김이솔.
이건 내가 죽기 전에 해결하고 가야 한다.
나는 웃으며 박동식에게 말했다.
“요즘 사막의 후속작인 오아시스를 찍고 있는 걸 아시나요?”
“알고 있습니다.”
“오아시스에 사막에 출연했던 김이솔 배우님과 서이렌 씨가 캐스팅됐어요. 지금도 촬영 중일 겁니다.”
“그렇군요. 설마 오아시스 감독이 김기하인가요?”
“김기하는 아니지만, 영화를 좌지우지하려고 들어서요. 저희도 이대로 가다간 다시 피해자가 생길 거 같습니다.”
“이제 이해했습니다. 대단하세요. 다른 배우들이 피해를 보지 않게 배려해 주시는 것도 감동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원세강 대표님.”
박동식은 내가 말리는 데도 기어이 내게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 * *
회상을 끝낸 박동식이 쓴웃음을 삼키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비서실장님. 저 박동식입니다.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예. 임준학 배우님은 잘하고 계시니 염려 마세요.”
“다름이 아니라 사람을 한 명 조사해 주십시오. 이름은 김기하. 감독이자 영화진흥협회 이사입니다. 그리고 조만간 영화진흥협회 채용 비리가 터진다고 합니다. 진행 상황도 보고를 받고 싶습니다.”
“예.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대광그룹의 비서실장과 전화를 끊은 박동식은 또 다른 곳으로 전화를 했다.
“설기획의 박동식입니다. 김기하 감독에게 투자하기로 했던 투자금을 모두 회수해야겠습니다. 영화가 어떻게 되는 상관없습니다. 임준학 배우님은 출연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예. 부탁드립니다.”
박동식은 임준학의 연기 연습 영상이 담긴 USB를 빼내 망치로 내리쳤다.
USB가 깨지며 작은 파편이 사방에 튀었다.
산산조각이 난 USB를 쓰레기통에 버린 박동식의 표정이 무섭게 돌변했다.
“원세강 대표가 알아서 한다지만.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김기하. 너는 이제 끝이야. 먼지 한 톨이라도 모조리 다 털어 주겠어.”
* * *
모든 일을 처리한 나는 조용히 일이 터지기만을 기다렸다.
김기하 감독의 컬렉션은 이미 처리했고, 채용 비리가 터지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그리고 내겐 은밀한 조력자까지 있다.
박동식은 자신이 이용당하는 것을 모르겠지만 나는 대광그룹의 힘이 필요하다.
대광그룹의 힘을 빌려야 확실하게 김기하를 이 바닥에서 영원히 매장할 수 있다.
나는 오늘도 오아시스 촬영장에 왔다.
김기하가 찾아와 난동을 부리고 간 뒤로 매일 오아시스 촬영장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
“세강아. 너는 계속 여기로 출근할 거야?”
“예. 며칠만 더요.”
“이제 김기하도 안 오잖아.”
“또 언제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죠.”
“네가 변호사까지 대동하고 가서 계약 위반이라고 으름장을 놨는데 또 오겠니? 걱정하지 마.”
나는 김기하가 다시 촬영을 훼방을 놓으려고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그의 영화 인생 최대 역작인 사막을 비난했으니 자존심에 상처나 나서 오지 못할 거다.
사실은 그러라고 그날 그렇게 강하게 말했다.
다만 ‘일이 터지면 분풀이를 하기 위해 촬영장에 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당분간은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뿐이다.
“내일모레가 한울 영화상 시상식이죠?”
“응. 선예 씨는 본인 결혼 준비로도 바쁠 텐데. 이렌 씨랑 이솔 씨 의상 챙기느라 고생했다.”
“빈 팀장님이 꾸려 놓은 팀이 있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빈선예는 최근에 그녀가 아는 업계 지인들을 긁어모아 팀을 하나 꾸렸다.
업계 최고 대우를 약속했기에 빈선예가 컨택했던 모든 이들이 기꺼이 수락했고 지난주부터 함께 일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문선경 씨가 일을 진짜 잘하더라.”
“그분은 원래 업계에서 유명하신 분이셨습니다. LOK에서 실장으로 오라고 오퍼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선택해 주셨으니 저희도 잘해야죠.”
“그나저나 LOK 김진희는 대체 왜 그런 거래? 한성제 왕 대표님도 그 소식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고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