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54화 (155/261)

#154화. 몰락의 시작

기세등등하던 김기하가 당황한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아무래도 레전드 필름의 공동대표라는 내 직함이 먹혔나 보다.

“원 대표. 난 촬영을 방해하러 온 게 아니야.”

“감독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든 관심 없습니다. 여기서 나가 주시죠.”

“뭔가 오해하는 거 같군. 난 오아시스의 전작 감독으로서 도움을 주기 위해 온 거야. 알잖아. 사막이라는 작품이 있어서 오아시스도 있는 거라고. 설마, 사막을 모르는 건 아니지?”

“당연히 알죠.”

내가 사막을 봤다고 하자 김기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땠어?”

“제 감상이 궁금하신가요?”

“사막을 봤다면 내가 왜 지금 고 감독이 하는 오아시스의 연출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지 알 것 같은데?”

“딱히 그렇지는 않은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영화를 제대로 본 건 맞아?”

“그럼요. 꾸역꾸역 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뭐라고?”

“지적 교만과 예술 강박증엔 답이 없다고 느낀 영화였습니다. 고명수 감독님이 쓰셨던 최초 시나리오는 아이디어만 훔쳐 온 거고 본인이 하고 싶은 개소리를 마음껏 하셨더라고요.”

“뭐라고? 개소리……??”

김기하는 눈앞에서 독설을 쏟아 내는 나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이런 극악의 평가는 인터넷에서만 봤지, 실제 눈앞에서 들어 본 적은 없다.

“지금 장난하는 거야? 사막이 어디에서 상을 받았는지 알고도 그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자그마치 팔 년 전 이야기죠. 인터넷 안 하세요?”

“인터넷이라니?”

“감독님은 사막으로 그리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타셨죠. 그런데 말입니다. 최근 해외 유명 영화 웹진에서 이런 설문을 한 적 있습니다. 역대 최악의 잘못된 수상이요.”

“잘못된 수상이라고?”

“축하드립니다. 사막이 당당히 5위를 하셨더군요.”

“…….”

이런 설문을 했었다는 걸 몰랐던 김기하는 경악했다.

“사막의 수상이 당시, 그리스 영화제 심사위원장이던 알렉 스미스 감독의 입김이 거세게 들어갔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알렉 스미스 감독은 이십 년 전에나 유명했지, 지금은 지나치게 가학적이라며 사람들의 외면을 받고 있습니다. 아시겠어요?”

“그래서? 지금 내가 운이 좋아서 상을 탔다고 말하는 건가?”

“당연하죠. 제가 괴로울 정도로 보기 힘들었던 사막을 끝까지 볼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김이솔이라는 천재 배우가 아니었다면 저는 절대 끝까지 영화를 시청하지 못했어요. 그건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같은 생각일 겁니다.”

“…….”

나는 손까지 떠는 김기하를 보며 업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히는 기분일 거다.

김기하는 내 뒤에서 서 있는 서이렌을 돌아보며 말했다.

“서이렌 씨도 사막을 봤어요? 어땠어요?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평가에 동의해요?”

서이렌이 경쾌한 목소리로 외쳤다.

“동의해요. 영화가 쓰레기예요. 저도 이솔 배우님 아니었으면 끝까지 보지 못했을 겁니다.”

서이렌이 확인 사살까지 하자 김기하는 더는 싸울 의지를 잃었다.

그때 밴의 앞자리에서 장우재가 내렸다.

장우재는 우리 세 사람이 내뿜는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천천히 옆으로 다가왔다.

“저…… 서이렌 배우님 그리고 대표님.”

“예. 우재 씨.”

“이제 곧 리허설 시간이 다가와서요.”

“그렇군요. 가 봐야죠.”

나는 큰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못 하는 김기하를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

“그럼, 김기하 감독님. 안녕히 가시고 다시는 오지 마세요.”

* * *

촬영장에 와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김이솔이 먼저 와서 촬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김기하의 성격이라면 분명히 오늘도 촬영장에 다시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진석에게 부탁해서 김이솔은 따로 차를 타고 다른 입구로 출근을 하게 했다.

강진석은 김기하가 지독하다며 혀를 찼다.

“또 왔었다고? 진짜 대단한 놈이네.”

“이제는 안 올 겁니다. 아니 못 올 겁니다.”

“정말이야? 각서라도 쓴 거야?”

“이제부터 바빠질 거라서 오아시스는 안중에도 없을 겁니다.”

“갑자기?”

“예. 그렇게 될 겁니다.”

강진석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강아. 너 어디서 뭐라도 들은 거라도 있는 거냐? 그러고 보니 오늘 왜 이렇게 멋있게 차려입고 왔대? 어딜 다녀왔는데?”

“그냥 일로 좀 다녀왔어요.”

“뭐냐? 나한테도 말 안 해 주려고? 뭔데 그래?”

“다음에 해 드릴게요. 다 해결되고 나서 나중에.”

나는 궁금해하는 강진석을 뒤로하고 촬영장을 둘러봤다.

촬영이 시작된 지 오래지만, 김기하가 나타나지 않자 배우와 스태프들도 이제야 안심하는 것 같았다.

나는 오늘 아침 일찍 누군가를 만나고 왔다.

오늘부터 시작이다.

김기하 그 미친놈은 이제 이 바닥에서 다시는 발을 못 붙일 거다.

* * *

필름더플랫에 도착한 김기하는 차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촬영장에서 이곳까지 어떻게 운전하고 온 건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 봤다.

원세강이 했던 말들을 네티즌들이 똑같이 하고 있었다.

김기하는 자신의 평판이 이렇게 떨어진 줄 전혀 몰랐다.

실제로 만나는 영화계 인사들은 절대 그의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까.

영화진흥협회의 실세였기에 모두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하락세라 하더라도 임준학처럼 함께 프로젝트를 해 보자고 찾아오는 스타도 있다.

“고작 인터넷에서 읽은 몇 줄을 가지고 감히 나를 판단해?”

김기하는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아까는 너무 당황해서 원세강의 말에 반박을 못 했는데, 지금은 하고 싶은 말이 천지였다.

심지어 김이솔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지 않았던가?

“다시 가야겠어. 할 말은 해야지. 이솔이도 만나고.”

김기하의 차량이 필름더플랫이 있는 건물의 지하 주차장을 나서려는 그 순간, 정적을 깨고 그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김기하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에 찍힌 번호는 필름더플랫의 최 대리였다.

평소에 영화사 일이 아니면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 사이였기에 김기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무슨 일입니까?”

[김 감독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겁니까?”

[김 감독님 혹시 어제 방에서 담배 피우셨어요?]

“고작 그런 일로 전화를 한 겁니까? 이제 안 피울 겁니다. 어제 하루만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담배를 피운 거예요. 나가려고 보니까 너무 귀찮아서.”

[대체 왜 그러셨어요?]

“혹시 누가 내 방에 들어왔나요? 내가 내 방은 알아서 치울 테니 그냥 놔두라고 했잖아요.”

김기하는 그가 실수해 놓고 최 대리에게 되레 화를 냈다.

[빨리 영화사로 오세요. 김 감독님 방에서 담배 때문에 불이 났어요. 청소하시는 분들이 빨리 발견하고 불을 끄긴 했는데 안에 있던 집기랑 컴퓨터가 물에 다 젖었어요.]

“뭐라고요?”

[차기작 준비하시는 거 다 그 컴퓨터 안에 있죠? 지금 컴퓨터 수리하는 곳에서 컴퓨터와 방 안에 있던 전자 기기는 다 가져갔습니다.]

“아니, 어젯밤에 담배를 피운 건데, 왜 오늘 아침에 불이 난 겁니까?”

[그건 와서 확인해 보세요. 빨리 오세요.]

전화를 끊은 김기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김기하는 이를 악물고 엘리베이터로 내달렸다.

두 대의 엘리베이터가 모두 위층에 있었다.

김기하는 버튼 두 개를 모두 눌러놓고 입술을 깨물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는 김기하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제길. 분명히 어제 담배를 잘 끄고 갔는데 왜 불이 난 거지? 하. 컴퓨터 안에 수정하던 시나리오도 다 있는데. 큰일이네.”

드디어 지하로 내려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김기하는 빠르게 그걸 올라탄 후, 필름더플랫이 있는 십이 층을 눌렀다.

김기하가 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얼마 후, 지하 주차장에 또 다른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 세 명이 내렸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층층이 쌓아 올린 상자가 보였다.

그들은 물에 젖은 상자를 꺼내 밖으로 옮겼다.

검은 양복의 사내들은 일사불란하게 상자를 승합차에 실었다.

“재식아. 운전해.”

“어디로 모실까요, 보스?”

“소각장으로 가. 다 태워 버려야지.”

“예. 보스.”

최용팔은 운전석에 앉은 부하에게 소각장으로 가라고 명령하고 부하들이 가져온 상자를 살폈다.

“이게 다야?”

최용팔의 물음에 민수가 재빨리 답했다.

“원래는 작은 상자에 나눠서 담겨 있었는데 여기에 한데 몰아서 담았습니다.”

최용팔은 상자 안에 들어 있는 USB와 ENG 테이프를 들춰 봤다.

모든 USB와 ENG 테이프에 누군가의 이름이 라벨링되어 있었다.

봐도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유명한 사람도 있었다.

“민수야. 얘는 유명한 연예인 아니냐?”

“그럼요. 유명하죠. 진지혜라고. 미국으로 도망갔던 배우잖아요. 제가 한번 살펴봤는데, 대부분 모르는 사람이지만 몇몇은 유명 스타더라고요.”

최용팔은 배우들의 이름이 적힌 USB와 ENG 테이프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안에 무슨 영상이 담겼을지 궁금했지만, 원세강이 모두 파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최용팔은 들고 있던 USB를 내려놓고 상자를 닫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민수가 물었다.

“보스. 이거 그냥 태워 버리실 건가요?”

민수의 물음에 최용팔이 조용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민수는 닫힌 상자에 온통 시선을 빼앗긴 채였다.

“보스. 이 안에 든 영상을 한번 확인해 볼까요? 이름만 들어도 어마무시한 사람들이 많은데, 뭐가 들었는지 확인도 안 하고 이대로 태워 버리는 건 아깝잖아요.”

최용팔은 민수를 향해 손을 들었다.

최용팔이 손짓하자 민수가 허리를 당겨 최용팔의 곁에 바짝 붙었다.

“보스. 말씀하십시오.”

“소각장에 가면 너도 같이 들여보내는 수가 있다.”

“예?”

민수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뒤로 물러섰다.

“의뢰를 받았는데 중간에서 가로채려고 들어?”

“하지만 의뢰인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원세강이잖아요. 우리가 이걸 땅에 묻었는지 불 싸질렀는지 원세강이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잘 해결했다고 입만 털어 주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 새끼가, 돈만 된다면 나도 파묻을 놈이네.”

“어이쿠.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저는 보스의 영원한 개입니다.”

“그래. 이 개새끼야. 딴생각하지 말고 의뢰받은 대로 처리해. 이걸 가지고 장사라도 한다면 그걸 원세강이 모를 거 같아? 원세강이 알면 락이가 아는 것도 시간문제야. 락이랑 절연할 생각이냐? 락이가 촬영장에 데리고 갈 때는 누구보다 좋아했으면서.”

민수는 최용팔의 질책을 받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보스.”

“됐어. 인마. 넌 진짜 생각하는 꼬락서니가 네 가방끈만큼이나 짧더라. 다음 주에 희진이네 백반집에 갈 때 너는 빼놓고 간다.”

백반집에 안 데리고 간다는 말을 들은 민수의 얼굴이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었다.

민수는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닫고 곧바로 좁은 승합차에서 엎드려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보스. 잘못했습니다.”

“시끄러워. 입 닥쳐. 재식아. 차 세워라.”

“예. 보스.”

승합차가 한강 다리 한가운데에 섰다.

“넌 여기서 걸어서 집으로 와. 알았어?”

“보스?”

“얘들아. 끌어 내려.”

승합차에 탔던 나머지 두 명이 민수를 끌어 내렸고 민수는 다리 한복판에 남겨졌다.

“소각장으로 가.”

“알겠습니다. 보스.”

최용팔과 그의 수하들이 탄 승합차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민수는 좌절했다.

“아. 망했다. 버스비도 없는데.”

민수는 검은 양복을 빼입은 채 터덜터덜 한강 다리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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