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53화 (154/261)

#153화. 미친 감독의 미친 컬렉션

나는 오랜만에 대연동의 뒷골목을 찾아갔다.

최용팔이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이제 볼일 없다고 하지 않았나?”

최용팔은 나를 불편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지만, 예전에 왔을 때보다는 기세가 훨씬 누그러져 있었다.

좁은 방의 탁자에는 최용팔이 먹다 남은 배달 음식이 있었는데 나는 봉지 옆에 놓인 식당 쿠폰을 보며 웃었다.

[희진과 우석이네 백반]

식당이 가깝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여기까지 배달이 되는구나.

이락의 이모님 댁은 서울로 올라와 다시 식당을 오픈했다.

원래 가게 이름인 희진이네에서 이락의 본명인 우석까지 합친 ‘희진과 우석이네 백반’이다.

이락의 팬들에게도 알음알음 소문이 나서 가게는 언제나 손님으로 북적거린다고 들었다.

그런데 최용팔도 이곳에서 음식을 시켜 먹을 줄은 몰랐다.

역시 사람은 한번 보고 판단하는 게 아닌가 보다.

“락이한테 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 보니까 잘나가고 있는 거 같은데. 배우 순위 같은 것도 보면 상위권이고.”

“그런 것도 찾아보십니까?”

“뭘 찾아봐? 그냥 보이니까 보는 거지.”

나는 되레 성을 내는 최용팔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할 말 없으면 가든가.”

“일이 있어서 온 겁니다. 그런데 이락 배우님 일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누가 걱정을 했다는 거야? 대체 왜 온 건데?”

나는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려놨다.

최용팔은 USB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야?”

“저는 이제 당신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최용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믿든 말든 네 자유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의뢰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내 말을 들은 최용팔의 눈빛이 번뜩였다.

최용팔은 탁자 위에 놓인 USB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말했다.

“위험한 일이야? 락이는 정말 관련 없고?”

“이락 배우님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대신 이락 배우님의 동료 배우님과는 관계가 있는 일입니다.”

최용팔의 손이 USB를 집으려고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그의 손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우선 약속 먼저 해 주셔야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최용팔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고 골방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침묵을 깨트리는 톡 알람이 울렸다.

책상 위에 올려진 최용팔의 핸드폰 액정이 켜지며 톡 미리 보기가 떴다.

나는 그걸 보고 또다시 웃음을 흘렸다.

“뭐야. 웃지 마. 왜 웃는 거야?”

“이제는 이락 배우님과 연락도 하시나 보네요.”

“그냥 걔가 귀찮게 구는 거야. 오해하지 말라고.”

“오해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쥐고 있던 USB에서 천천히 내 손을 뗐다.

“저는 최용팔 당신을 믿을 생각입니다. 믿고 의뢰할 테니 부탁합니다.”

최용팔은 고개를 숙이는 나를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혹시 불법이야?”

“불법이라면 불법이죠. 하지만 우리가 하려는 일은 정의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무슨 일인데 정의까지 들먹여? 나 그런 거 모르는 사람이라고.”

나는 오늘 김기하의 방에서 나오면서 쌓여 있는 USB와 테이프 몇 개를 집어 왔다.

내가 방금 최용팔에게 건넨 USB는 그중 하나다.

최용팔이 노트북을 가져왔고 나는 탁자 위에 올려진 USB를 단자에 삽입했다.

이내 노트북 모니터에 USB 안에 들어 있는 영상의 목록이 떴다.

[연습영상_1차_09.12]

[연습영상_2차_09.18]

[연습영상_3차_09.27]

최용팔은 영상의 목록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제일 상단에 있는 연습 영상 1차를 클릭했다.

영상이 재생되자 최용팔이 놀란 눈으로 내게 물었다.

“그놈 아닌가? 우리 락이랑 라이벌이라고 기사에 나오는 놈?”

“예. 요즘 기사에서 그렇게 나오고 있죠.”

영상 속의 남자는 임준학이었다.

임준학이 김기하 감독의 영화를 찍는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영화 촬영도 전에 연기 연습을 시킬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렇게 모두 기록까지 하면서.

이자현 라벨이 붙은 ENG 테이프는 오면서 확인해 봤는데 사막의 오디션 영상이었다.

로드 매니저였던 나는 그 당시 오디션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영상 속의 김기하는 갓 스무살이 넘은 이자현에게 연기 오디션이 아니라 압박 면접 비슷한 것을 시도했다.

단 한 줄의 대사를 무려 삼십 분이나 넘게 반복해서 시키고 또 시켰다.

이자현은 그녀가 연기를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감정으로 삼십 분 넘게 연기를 계속해 오다 결국 대사를 읊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자현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자 김기하는 그제야 만족한 듯 오케이를 외쳤다.

나는 전혀 몰랐다.

오디션장에서 눈이 새빨간 채로 나오던 이자현을 보며 그저 눈물 연기를 했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지금 재생되고 있는 임준학의 연기 연습도 마찬가지다.

김기하는 임준학에게 영화 속의 주인공 캐릭터에 맞게 즉흥 연기를 요구했다.

여기서도 김기하는 말도 안 되는 연기를 주문하며 임준학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오늘 현장에서도 서이렌에게 45도 각도로 걸으라고 주문했다고 들었다.

대체 45도 각도로 걷는 것과 연기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영상을 보던 최용팔이 한마디를 던졌다.

“사람을 쥐잡듯 잡는구먼. 이 영상을 이짝 부모님이 보시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 차라리 한 대 때리고 말지. 대체 뭐 하는 짓거리야?”

최용팔도 더는 못 보겠다며 노트북을 닫아 버렸다.

나는 최용팔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런 영상이 많다면 어쩌시겠어요?”

“이런 게 많아?”

“모두 같은 감독이 찍은 거고요. 지난 십 년간 쌓이고 쌓인 겁니다.”

“참나. 감독이 맞긴 해? 정신병자는 아니고?”

“둘 다 맞습니다. 미친 감독이죠. 이런 영상을 컬렉션처럼 모으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이걸 나를 보여 주는 이유가 뭐야?”

최용팔은 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없애야죠.”

“뭘 없애? 그 컬렉션인지 뭔지를 없애자는 거야?”

“도와주십시오. 간단한 일은 아닐 겁니다. 절도니까요.”

최용팔이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런 건 그 짝이 걱정할 게 아니고. 없애기만 하면 된다는 거지?”

“저한테 가져오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폐기 처분해 주세요.”

“이거 어디에 있는데? 무슨 금고 같은 곳에 숨겨 둔 건가?”

“아뇨. 그냥 영화사에 있습니다.”

“영화사는 아무나 못 들어가지? 방문은 잠겨 있을 테고?.”

“영화사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고 문은 열려 있습니다.”

“그래? 그럼, 뭐가 문제야? 그냥 털어 버리면 되는 거잖아.”

나는 최용팔에게 내가 오늘 그곳에서 본 모든 것을 모두 말해 줬다.

최용팔은 내가 그린 그럼을 보며 미소 지었다.

“쉽네. 당장 내일 깡그리 다 없애 줄게.”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건 영업 비밀이니까 말해 줄 수는 없지.”

최용팔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웃었다.

“고맙습니다. 사례는 톡톡히 치르겠습니다.”

“됐어. 우리 락이나 잘 챙겨.”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노트북에 꽂힌 USB를 꺼내 들었다.

“그건 어떻게 할 거야? 지금 당장 태워 버릴까?”

“아뇨. 이건 쓸데가 있습니다.”

“그래. 그건 알아서 하고.”

대연동의 좁은 골목을 나온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간 건지 모르겠다.

나는 그동안 김기하에게 정신적 고통을 받았던 배우들을 떠올렸다.

이런 게 가스라이팅이라는 건가?

김기하가 하려는 것은 예술도 아니고 그저 변태 짓이다.

김기하를 이 바닥에서 매장하고 다시는 영화계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들어야 한다.

USB를 꽉 쥔 나는 그길로 대연동을 빠져나왔다.

* * *

다음 날, 오아시스의 촬영장에 모인 스태프들은 혹시 오늘도 김기하가 오는 것은 아닐지 염려하고 있었다.

촬영 시작 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스태프들이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어제는 좀 속이 후련하지 않았어?”

“서이렌이랑 김기하?”

“서이렌 진짜 대단하더라. 하나도 안 쫄아. 어떻게 그러지? 나는 김 감독이 그렇게 몰리는 거 처음 봤어.”

“그러게. 오래 활동해 온 남자 배우들도 김기하 앞에서는 순한 양이잖아.”

“영화 촬영장에서는 감독이 왕이니까. 근데 어제는 서이렌이 왕이더라.”

“근데 대체 어떻게 그 말도 안 되는 연기 주문을 한 방에 한 거지? 너 어제 촬영분 봤어?”

“봤지. 편집부 박 형이 보여 줘서 봤는데. 45도 각도에 소리 나는 초까지 다 계산해서 완벽하게 연기하더라. 난 보면서 소름까지 돋았잖아. 김기하는 얼마나 놀랐을 거야? 사실, 자기가 주문한 대로 완벽하게 연기했으면 좋아해야지. 김기하는 그 자리에서 왜 그렇게 짜증을 낸 거야? 암튼 이해 못 할 감독이야.”

“왜겠냐? 그 장면을 백 번은 넘게 찍고 배우가 기가 확 죽어야 그때부터 시작이잖아. 김기하가 영화 촬영하는 방식이 항상 그랬어. 그러니까 지금 배우들이 김기하 감독 영화는 시나리오도 안 보고 거르는 거지. 지만 몰라요.”

“근데 김기하 새 영화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어? 어제 왜 우리 촬영장에 온 거지?”

“그거 엎어질지도 모른대.”

“어? 진짜? 그거 드라마 쪽 라이징 스타를 캐스팅하고 오랫동안 준비해 온 걸로 알고 있는데. 대학 동기가 그 영화 소품팀으로 들어갔는데. 김기하 감독 작품이라 발 빼려고 한다고 했다고.”

“아. 씨발. 그럼, 오늘 또 오는 거 아니냐? 나 김기하 감독이랑은 일 못 해. 걔는 배우뿐만 아니라 스태프한테도 악몽이야. 촬영 시간 열 배, 백 배로 늘어난다고.”

“어떻게 오겠어. 어제 서이렌한테 그렇게 당했는데 올까? 나라면 쪽팔려서 못 온다.”

“그렇겠지? 천하의 김기하가 삼 년 차 배우한테 그렇게 개쪽을 당했는데 말이야. 크큭.”

* * *

오아시스 촬영장 주차장에 김기하의 외제 차가 들어왔다.

차에서 내린 김기하는 멀리 보이는 현장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그래도 명수가 내 제자나 다름없는데 내가 도와줘야지, 누가 도와주겠어. 서이렌은 모르지만, 이솔이는 달라. 걔는 내 말을 알아들을 거야.”

김기하는 서이렌이 연기할 때는 관심을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김이솔이라면 다르다.

사막을 촬영할 때도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던 김이솔이었다.

김이솔을 떠올리자 김기하는 마음이 평온해졌다.

당당한 표정의 김기하가 촬영장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때였다.

주차장으로 새하얀 밴이 들어왔다.

김기하는 차를 발견한 즉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누가 봐도 배우가 탄 차다.

오아시스에 이런 차를 타고 다닐 배우라면 서이렌 아니면 김이솔일 터.

김기하는 잘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방금 주차를 마친 밴으로 걸어갔다.

김기하가 차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육중한 밴의 문이 열리며 차에서 내리는 서이렌과 눈을 마주쳤다.

서이렌이 아름다운 얼굴로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오늘도 오셨네요.”

“……!”

김기하는 기분이 팍 상했지만, 서이렌과는 할 말이 없었다.

“오늘도 촬영 방해하러 오셨나요?”

“서이렌 씨.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감독님한테 말이 너무 심하네.”

“그건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거네요. 대체 우리 고명수 감독님한테 왜 그러세요? 고 감독님이 김 감독님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하수인인가요?”

김기하는 눈앞의 어린 배우를 보며 어이가 없었다.

속에서 열불이 난 김기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막말을 했다.

“인기가 좀 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건가?”

김기하가 위압적인 얼굴을 하고 서이렌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는데 밴의 앞문이 열리며 근사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린 나는 서이렌을 내 등 뒤로 보내고 김기하와 마주셨다.

“어제 제가 한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으신 건가요? 감독님이 또다시 오아시스 촬영장에 찾아온다면 당장 계약서를 파기하고 저희 배우를 모두 빼겠다고 했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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