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52화 (153/261)

#152화. 마이턴

필름더플랫에 도착한 나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대표실로 향했다.

그런데 대표실 근처에서 고성이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안내하던 직원은 놀랐는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나는 당황한 직원에게 혼자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그만 가 보십시오. 저는 여기 서서 기다렸다가 잠잠해지면 들어가 보겠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대표님께 전화라도 드릴까요?”

“아닙니다. 송 대표님과 김 감독님 두 분이 할 말이 있으시겠죠. 기다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여기 있어야 하는데. 외부에서 손님이 오셔서요.”

“저는 괜찮으니까 어서 가 보세요.”

직원이 거듭 사과를 하며 떠났고 나 혼자 복도에 남겨졌다.

대표실 근처에는 회의실과 김기하의 명패가 붙어 있는 방이 있었다.

나는 대표실 바로 앞으로 다가갔다.

아까처럼 큰 소리는 아니지만, 안에서 격앙된 대화 소리가 들렸다.

* * *

김기하와 마주 선 송정현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아무리 대화를 나눠도 여전히 도돌이표였다.

“명수가 제대로 된 내 후배라면 오아시스 시나리오를 나한테 줬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이 나야. 내가 끝을 맺어야지.”

“김 감독님. 지금 계속 같은 말씀을 하시는 거 아시죠?”

“나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어. 그런데 오늘 촬영장에 가 보니 엉망이더군.”

송정현 대표는 진지한 김기하의 눈빛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한편, 대표실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띄엄띄엄 듣고 있던 나는 생각했다.

‘송정현 대표도 김기하를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구나.’

김기하 감독에게 사막은 그의 영화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던 시절을 가리키고 있다.

영화진흥협회 이사로 명예와 권력은 얻었지만, 그는 이미 감독으로서 하락세를 탔다.

그러니 사막의 후속작이라 할 수 있는 오아시스에 집착하는 게 이해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망상은 그쯤에서 멈춰야 한다.

김기하가 오아시스 감독이었다면 나는 서이렌과 김이솔이 이 작품에 출연하지 못 하게 했을 거다.

대표실에 고성이 잦아들 때쯤, 드디어 나는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김기하 감독님. 얼굴 좀 펴세요. 원세강 대표가 왔습니다.”

“누구라고?”

“스타탄생 대표 원세강이요. 김이솔과 서이렌 소속 회사예요.”

“그걸 못 참고 회사 대표가 찾아와? 웃기지도 않는군.”

김기하는 소속사 대표가 찾아온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내가 들어가자 김기하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벼르고 있던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대표님. 우리가 쓴 계약서에는 영화 촬영으로 인해 배우에게 큰 피해가 발생한다면 아무 조건 없이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내가 계약 파기까지 거론하자 송정현 대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원 대표. 계약 파기라뇨.”

“이미 이곳으로 오면서 변호사와 이야기를 모두 마쳤습니다. 오늘 있었던 일도 충분히 계약 파기의 사유가 된다더군요. 계약서와 다르잖습니까? 감독이 바뀌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감독이 바뀌다니요. 아닙니다. 김기하 감독님 무슨 말씀이라도 해 보세요.”

내가 강수를 들자 송정현은 놀랐지만, 김기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원세강 대표라고 했나요?”

“예. 스타탄생 대표 원세강입니다.”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난 오늘 명수를 도와주러 간 거였어요.”

“그래요?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그게 아닌 거 같던데요.”

“원 대표는 현장에 있지도 않았는데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죠?”

“저도 귀가 있어서요. 들은 게 있거든요.”

“원 대표. 이봐요. 영화는 디테일한 예술입니다. 일 밀리라도 어긋난 조각이 있으면 관객은 그걸 느끼고 불편해해요. 난 내 후배이자 제자인 명수를 위해 도움을 주러 간 거였어요.”

“그래서 도움을 주셨나요?”

“지금 나를 의심하는 겁니까? 내가 누군지 몰라요?”

“사막을 만든 김기하 감독님이시죠. 잘 압니다. 하지만 오늘 현장에서 있던 일은 제가 들은 것과 다른데요?”

“뭐라고요?”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상세히 듣고 왔다.

서이렌이 김기하를 제대로 눌러 줬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내 속이 다 후련했다.

서이렌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촬영장의 독재자라 불리는 김기하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준비도 안 된 즉흥적인 연기 주문으로 배우들을 힘들게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도움이 아니라 패악질이 아닌가요?”

김기하는 내 말을 듣고 얼굴이 달아올랐으나 이내 나를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봤다.

“말이 너무 심하네요. 고작 배우 매니저 주제에.”

“오히려 감독님이 말씀을 심하게 하시는군요. 저는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서이렌 회사 대표라고 했어요? 참나. 배우나 대표나 결이 같네.”

“저희가 원래 천생연분입니다.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될까요?”

내가 세게 나오자 김기하는 당황한 듯 보였다.

옆에서 우리 두 사람의 대치를 지켜보던 송정현 대표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제 뜻은 확실하게 전달했습니다. 오늘 이후에 김기하 감독이 또다시 오아시스 촬영장에 찾아온다면 당장 계약서를 파기하고 저희 배우를 모두 빼겠습니다.”

“원 대표. 지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나 김기하입니다. 원 대표가 배우 매니저라서 나를 제대로 모르는 거 같군요.”

송정현이 폭주하는 김기하를 붙잡았다.

“김 감독님. 조용히 하세요.”

“송 대표. 이거 놔.”

나는 송정현을 보며 다시 한번 내 뜻을 전했다.

“송 대표님. 저희는 이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아시죠?”

“그럼요. 우리 계약서에 도장 찍으면서 했던 말을 다 기억합니다.”

“우리 영화만 생각합시다. 아시겠죠?”

“압니다. 알죠.”

송정현은 할 말이 없는지 얼굴을 붉혔다.

김기하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나도 그를 한번 째려봐 주고는 그대로 대표실을 빠져나왔다.

내가 사라진 대표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송정현 대표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 감독님은 지금 준비하시는 영화나 신경 쓰세요. 임준학 소속사에서 엊그제도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대체 영화 촬영도 전에 스크린 테스트 샷은 왜 그렇게 많이 찍는 겁니까?”

김기하는 송정현 대표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이해할 수가 없군. 영화의 ‘영’자도 모르는 회사 대표가 이렇게 감독에게 뭐라고 하는 경우가 어디에 있나? 요즘은 스타가 갑이라고 하더니. 내가 그 꼴을 보게 될 줄 몰랐군.”

“김기하 감독님. 아니, 형님.”

“왜 그래?”

“원세강 대표가 그냥 배우 소속사 대표는 아닙니다.”

“소속사 대표가 다 똑같지. 뭐가 달라?”

“그 정도가 아닙니다.”

“대체 뭔데? 혹시 영화과라도 나왔어?”

“레전드 필름이요.”

레전드라는 말에 김기하의 눈이 커졌다.

김기하는 놀란 눈으로 송정현을 쳐다봤다.

대한민국에서 영화 일을 하는 사람 중에 레전드 필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레전드 필름이랑 원세강이 무슨 관계인데 그래?”

“영화진흥협회 이사님이 맞긴 한 겁니까? 영화계 상반기 최고 이슈도 모르세요?”

“뭔데 그래?”

“원세강 대표가 레전드 필름의 공동 대표라고요. 진설 배우님, 박찬영 감독님과 함께 레전드 필름을 이끌어 가는 차세대 수장이요. 원세강 대표가 합류하고 만든 첫 작품이 구원의 밤입니다. 아시겠어요?”

김기하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구원의 밤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쳤다.

“다시는 오아시스 촬영장에 가지 마세요. 고 감독도 화가 단단히 난 모양입니다. 고 감독이 순해 보여도 화나면 무섭습니다. 다시는 형님을 보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

송정현은 충격에 빠진 김기하 감독을 빤히 바라봤다.

‘대체 저 양반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 * *

대표실을 빠져나온 나는 깊은숨을 몰아 내쉬었다.

내가 진짜로 화가 나긴 했나 보다.

이렇게까지 화가 머리끝까지 난건 지난날 윤조의 스캔들 사건 이후로 처음이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나는 잠시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대표실에서는 내가 밖에 서 있는지도 모르고 날이 선 대화들이 오고 갔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이것만은 똑똑히 들었다.

‘레전드 필름이 대수야? 내가 영화진흥협회 이사야. 까짓 레전드고 뭐고 다 날려 버리는 수가 있다고!’

흥분한 김기하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오아시스가 문제가 아니다.

영화계의 암적인 존재인 김기하 감독을 날려 버려야 한다.

나는 어떻게 하면 김기하를 영화계에서 쫓아낼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벽에서 몸을 뗐다.

내가 한 걸음 내딛자 핸드폰 알람 소리가 들렸다.

굳은 표정으로 알람을 확인했는데 서이렌이었다.

[대표님. 이솔 언니랑 같이 집으로 왔어요. 오늘 밤은 같이 자기로 하고 내일 함께 촬영장으로 갈 겁니다. 염려하지 마시고, 김기하 감독이나 조져 버리고 오세요.]

문자에서 서이렌의 강단 있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는 다시 한번 서이렌이 내 배우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오늘 일은 그녀라서 아무 일도 없었던 거다.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을 때쯤 이제는 강진석에게 문자가 들어왔다.

[세강아. 네 말대로 법률사무소에 계약서 파기할 수 있는지 문의해 놨어. 변호사 말이 약관을 자세히 적어 놔서 문제없을 거래.]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지르긴 했지만, 계약 파기가 가능할지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약 파기는 최후의 보루로 남겨 둬야 한다.

오아시스까지 이렇게 되면 김이솔이 입을 타격이 크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걸음을 옮겼다.

방금 생각난 건데 내가 본 미래의 끝자락에 영화진흥협회의 비리 사건이 터졌었다.

그때는 기억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건이었을 뿐이지만, 지금은 다르다.

분명 김기하도 그 비리와 얽혀 있었던 것 같다.

‘그 사건이 뭐였지? 채용 비리였던 건 기억이 나는데.’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나는 기억나지 않는 사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건물을 청소하시는 분들이 삼삼오오 걸어오시는 모습이 보였다.

그분들은 수다를 떨며 이쪽으로 오고 계셨다.

“대표실이랑 회의실 쓰레기통 먼저 비워.”

“저 방은 어떻게 하고요?”

“저긴 들어가지 마. 지난번에 들어갔다가 혼쭐이 났어. 절대 아무도 들어가지 말래.”

“그래요? 지난번에 보니까 방이 더럽던데.”

“들어가지 말라는데 그럼, 어떻게 하나. 우리야 시키는 대로 해야지.”

“틈틈이 청소해 놓지 않으면 나중에 고생한다고요. 지난번에 보니까 테이프가 잔뜩 쌓인 상자가 열 개가 넘었다고요. 상자도 다 더럽고 먼지도 풀풀 났는데.”

청소 업체 직원은 그 말을 하며 김기하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엘리베이터 바로 옆에 있는 김기하의 방문이 열리자 나는 관심 없는 척을 하며 열린 문틈을 힐끔 쳐다봤다.

“됐어. 그만 말하고 우리 일이나 하자고.”

다른 청소 업체 직원이 김기하의 방문을 닫더니 회의실로 함께 들어갔다.

다시 복도에 홀로 남은 나는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청소 업체 직원이 열었던 김기하의 방 안은 그의 말대로 낡고 더러워진 상자가 잔뜩 쌓여 있었다.

문 앞에 있던 상자는 반쯤 열려 있었고 USB와 ENG 카메라의 테이프가 보였다.

나는 그것 중에서 ‘이자현’이라는 라벨이 달린 테이프를 발견했다.

‘이자현이 대체 왜?’

그때 대표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몸을 돌려 복도 끝으로 몸을 숨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