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51화 (152/261)
  • #151화. 촬영장의 슈퍼컴퓨터

    김기하는 자신만만해하는 서이렌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배우는 자만하면 안 돼. 연기하는 사람은 큰 그림을 볼 수 없거든. 그래서 감독이 필요한 거라고.’

    김기하는 눈앞의 어린 배우가 하룻강아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에게 연기란 무엇인지 오늘 제대로 가르쳐 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대본도 고쳐야겠어. 바비라는 캐릭터는 너무 환상에 빠져서 살고 있어. 환상은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처절함이 없지. 저 그린 듯한 얼굴에서 피눈물이 흘러야 그게 진짜 아름다움이야.’

    김기하는 입술을 비틀며 웃더니 서이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니 기대가 되네요. 얼마나 잘할지 두고 봅시다.”

    “오아시스의 진짜 감독님은 아니시지만, 오늘 제대로 훈수를 두러 오신 거 같은데, 잘 지켜보셔야죠.”

    서이렌의 말에 촬영장이 잠시 술렁거렸다.

    스태프들은 서이렌의 센 발언에 놀라면서도 통쾌해했다.

    김기하는 계단으로 걸어가는 서이렌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요즘 잘나간다고 기고만장해져 있군. 배우로서는 전혀 득이 될 게 없어. 역시 내가 오늘 현장에 오길 잘했군. 명수는 저런 오만한 배우를 핸들링하지 못해.’

    고명수는 서이렌을 보는 김기하의 예리한 눈빛을 보며 큰일 났다 싶었다.

    ‘막아야 해. 배우들 괴롭히기 전에 나오는 눈빛이잖아.’

    고명수가 김기하를 저지하려고 하는 찰나, 김기하가 큰소리로 외쳤다.

    “레디 액션!”

    바비는 어깨를 움츠린 채 걷기 시작했다.

    뒤꿈치를 떼고 슬금슬금 걷던 그녀가 계단 앞에 도착했다.

    지어진 지 오래된 요양원의 나무 계단이다.

    바비는 지혜가 있는 위층을 슬쩍 보더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김기하의 주문대로 그녀는 발뒤꿈치를 들고 슬금슬금 걷기 시작했다.

    세상 그 누구도 그녀가 밖으로 나온 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그녀의 움직임은 신중했다.

    어느덧 김기하가 말한 열일곱 번째 계단 앞에 도착했고.

    바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으며 한 발짝을 뗐다.

    그녀의 다리가 자신감 있게 열일곱 번째 계단을 밟았고 뒤이어 나무 바닥이 뒤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바비는 놀란 눈으로 자신의 발을 쳐다봤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지금은 요양원의 모든 이들이 낮잠을 자는 시간이다.

    간호사들도 이 꿀맛 같은 휴식 시간을 즐기고 있을 터였다.

    스태프들은 긴장한 눈으로 서이렌의 연기를 지켜봤다.

    주위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녀는 잠시 계단 위에 서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김기하를 말리려던 고명수도 어느덧 서이렌의 연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단지 계단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서이렌은 끊어질 듯 말 듯 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잠시 주위 상황을 지켜보던 바비의 발이 다시 움직였다.

    바비의 발뒤꿈치는 처음처럼 살짝 올라간 상태였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계단을 올랐고 어느새 계단 꼭대기에 섰다.

    ‘이제 됐다.’

    고명수가 환한 얼굴로 오케이 사인을 내리려는데 김기하의 외침이 들렸다.

    “컷!”

    고명수와 스태프들이 놀란 눈으로 김기하를 돌아봤다.

    컷이라고?

    완벽하게 한 큐에 갔는데?

    모두의 눈에 불신이 가득 담겨 있었다.

    김기하는 그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컷 사인을 외쳤다.

    “컷! 다시 합시다.”

    서이렌은 조용히 계단을 내려오더니 김기하에게 걸어왔다.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본 김기하는 생각했다.

    ‘아직은 여유가 있구나. 한 오십 번은 다시 찍어야 눈물을 흘리며 죄송하다고 하겠지.’

    서이렌은 아까 김기하가 말했던 요구 사항이 적힌 종이를 쳐다봤다.

    서이렌의 시선을 느낀 김기하의 고개도 돌아갔다.

    서이렌은 그 종이를 들더니 고명수에게 다가갔다.

    “고명수 감독님. 제가 여기 적힌 대로 완벽하게 연기한 것 같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고명수는 잠시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서이렌의 의도를 파악했다.

    서이렌은 김기하가 아닌 오아시스의 감독인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고명수는 웃으며 답했다.

    “서이렌 씨는 완벽하셨어요. 저는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서이렌이 고개를 들어 김기하를 바라봤다.

    김기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서이렌을 훑었다.

    “이봐요. 서이렌 씨. 자신의 연기를 너무 자신하는 거 아닙니까?”

    “저는 요구하신 대로 완벽하게 소화했습니다.”

    “어디가 완벽하다는 겁니까?”

    “모니터로 다시 확인해 보실래요? 완벽했어요. 제가 완벽한 게 아니라면 김 감독님이 직접 말씀하신 요구 사항을 까먹으신 거겠죠.”

    “뭐라고요?”

    김기하의 눈빛이 번뜩였다.

    지금껏 현장에서 배우에게 이런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명수야. 촬영된 거 돌려 봐.”

    “준비됐어요. 보세요. 형님.”

    서이렌과 김기하의 신경전이 시작된 사이, 고명수는 이미 촬영분을 확인한 상태였다.

    고명수는 자신 있다는 얼굴로 김기하 감독을 불렀다.

    김기하의 시선이 모니터로 향했다.

    그 사이 고명수에게 다가온 서이렌이 말했다.

    “감독님. 여기서 직접 노트북으로 편집 툴을 돌려 볼 수 있겠죠?”

    “그럼요. 당연하죠.”

    고명수는 방금 찍은 영상을 편집용 노트북의 모니터에 띄웠다.

    이렇게 현장에서 찍은 영상을 실시간으로 편집해서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모니터로 촬영분을 확인한 김기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이봐요. 서이렌 씨. 여기 좀 봐요.”

    “말씀하세요.”

    “내가 분명히 45도 각도로 뒤꿈치를 들고 걸으라고 했죠. 하지만 서이렌 씨는 너무 발을 세웠어요. 너무 위태로워 보인다고요. 알겠어요?”

    “그럴 리가요? 저는 딱 45도 각도로 뒤꿈치를 들었어요.”

    “뭐라고요?”

    “한번 보실래요?”

    서이렌은 고명수와 편집 기사가 세팅해 놓은 노트북으로 김기하를 잡아끌었다.

    “확인 해 보세요. 완벽한 45도죠?”

    모니터에는 서이렌이 처음 계단을 오르는 장면이 떠 있었다.

    편집 툴로 45도 각도의 삼각형을 만들어서 붙이니 정확히 서이렌의 뒤꿈치에 쏙 들어갔다.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놀란 고명수와 김기하는 서로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김 감독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바비가 계단을 오르면서 천천히 발뒤꿈치가 내려간다고요. 직접 보시죠.”

    서이렌이 편집 기사를 보며 눈짓을 보냈다.

    편집 기사는 깜짝 놀라더니 이내 툴을 조작해 영상을 확인했다.

    서이렌의 말대로 처음에는 45도이던 각도가 걸으면 걸을수록 천천히 내려가더니 결국 열일곱 번째 계단에서 뒤꿈치가 바닥에 닿았다.

    김기하는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요구한 것이 완벽하다 못해 마치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린 것 같이 재현되었다.

    마지막으로 요구했던 열일곱 번째 계단에서 나무 바닥이 뒤틀리는 소리가 나는 것까지 완벽했다.

    “보셨죠? 저는 감독님이 요구하신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연기했습니다. 아까 뒤꿈치가 너무 위로 올라간 거 같다고 하셨는데요. 사실 저도 걸으면서 같은 생각을 했어요. 누가 이렇게 힘들게 걷지? 감독님이 보셔도 그렇죠? 너무 어색하죠?”

    “어색하긴 하지만…….”

    “설마 대충 되는 대로 45도라고 말씀하신 건가요? 그건 너무 하신데요? 제가 이렇게 눈으로 확인시켜 드리지 않았다면 수십, 수백 번도 더 시키면서 각도를 계속 수정하셨겠네요?”

    김기하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까지 현장에서 그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배우는 없었다.

    오히려 김기하가 배우들을 몰아붙였지. 그 반대의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입술을 꽉 깨문 김기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거 내가 실수했다고 쳐요.”

    “실수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치는 게 아니라.”

    “말꼬리 붙잡고 늘어지지 맙시다.”

    “제가요? 저는 그런 적이 없는데요.”

    “하. 진짜.”

    김기하는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서이렌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화가 난 김기하가 말했다.

    “열일곱 번째 계단에서 소리 나는 거.”

    “예. 그것도 완벽했죠.”

    “아냐. 완벽하지 않았어.”

    “어째서요?”

    “난 분명히 칠 초 후에 나무판자가 비틀리는 소리가 난다고 했어.”

    “그러셨죠. 그래서 났잖아요.”

    “너무 빨리 났잖아. 그럼, 긴장감이 안 산다고.”

    “감독님이 인제 보니 한 입으로 두말하는 재주가 있으셨네요. 다시 돌려 볼까요? 그게 칠 초인지 아니면 더 빨리 난 건지?”

    서이렌이 직접 노트북으로 다가가더니 편집 기사를 옆으로 밀어내고 그녀가 직접 툴을 조작해 그 장면을 찾아 재생했다.

    편집 기사는 서이렌이 전문가용 툴을 자유자재로 만지는 것을 보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

    “보세요. 정확히 칠 초 맞죠?”

    “…….”

    김기하는 화면에 찍힌 시간을 보며 할 말이 없었다.

    분명히 너무 빨리 난 것 같았는데 자신이 요구한 대로 칠 초 만에 삐걱 소리가 났다.

    “이제 됐죠. 확인까지 시켜 드렸으니 더는 할 말이 없으시죠?”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야?”

    “아뇨. 그럴 리가요. 혹시 제 말이 맞아서 말을 돌리시는 건가요?”

    “…….”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려던 김기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서이렌에게 뭐라고 하고 싶지만,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이 그 자리에서 반박돼서 돌아올 것만 같았다.

    잠시 두 사람의 말싸움을 지켜보던 고명수가 그제야 환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송정현 대표님!”

    김기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필름더플랫의 송정현 대표가 다급한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원세강과 윤서혁도 함께였다.

    * * *

    “김기하 이 새끼. 완전히 정신병자야!”

    “그렇게 난리였습니까? 제가 도착했을 때는 분위기가 그렇지 않았는데요?”

    “그거야 다 우리 이렌 씨 덕분이지. 천하의 개또라이 김기하도 우리 이렌 씨한테는 안 되더라.”

    나는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김기하가 촬영장의 독재자라는 소문이 영화계에 파다하게 났었잖아.”

    “그렇죠. 최근엔 흥행작도 없고 스태프와 배우들이 김기하 작품은 꺼린다는 소문까지 났었죠.”

    “촬영장의 독재자가 그보다 더한 사람을 만났어. 우리 이렌 씨가 김기하 천적인 거 같다.”

    강진석은 아까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김기하가 쳐들어오더니 자신이 감독이라도 되는 듯 배우들의 연기와 연출에 관여했다고 한다.

    결국 김이솔 촬영을 접고 서이렌이 대신 나섰다는 것까지 빠르게 설명했다.

    “김기하 감독이 그 정도로 막 나가는 사람이었군요.”

    “그렇다니까. 고명수 감독이 말려도 듣지를 않더라고. 그런데 독재자 김기하도 이렌 씨한테는 안 되더라. 연기로 다 발라 버리는데 김기하가 뭐라고 하겠어.”

    김기하는 말도 안 되는 걸 연기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서이렌이 그걸 완벽하게 연기했다고 했다.

    심지어 김기하가 말을 바꾸자 그걸 가지고 또박또박 따지고 들었다고 했다.

    “말도 마라. 우리가 스태프들 사이에 끼어서 그걸 다 지켜봤는데. 스태프들이 너무 좋아하더라. 완전 사이다라고.”

    “김기하는 가만히 있고요?”

    “뭐라고 할 거야? 본인이 요구한 걸 백 프로 완벽하게 연기해 줬는데. 김기하가 예전에 찍던 영화에서 종이 날아가는 장면이 마음에 안 든다고 천 번이나 더 찍게 하다 결국엔 촬영분은 몽땅 날려 버리고 CG를 썼다고 들었거든. 보니까, 아주 즉흥적이야. 우선 이렇게 하라고 해 놓고. 배우가 지칠 때까지 다시 찍다가 얻어걸린 컷 쓰는 거 같아. 미친놈이지.”

    강진석은 김기하 욕을 하며 열변을 토했다.

    마침 서이렌과 김이솔이 대기 중인 밴에 들렀다 온 윤서혁이 차로 돌아왔다.

    “오늘 촬영은 이만 접는다고 하네요. 스태프들도 정리하고 있어요.”

    “윤 감독님. 이솔 씨는 어떤가요?”

    “괜찮아 보이던데요? 이렌 씨가 옆에 있으니 자기는 괜찮다고, 가 보라고 해서 왔습니다.”

    김이솔이 괜찮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럼, 강 이사님이 배우들과 윤 감독님을 모시고 서울로 가 주세요.”

    “넌 어디 가려고?”

    “저는 필름더플랫에 가 봐야겠습니다.”

    나는 강진석에게 김이솔과 서이렌을 맡기고 뒤돌아섰다.

    서이렌이 촬영장에서 김기하를 막았다면 이제는 내 차례다.

    김기하 이 새끼를 어떻게 조져 버리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