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50화 (151/261)
  • #150화. 촬영장의 독재자

    아샤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당당하게 레드카펫에 서 있었다.

    서이렌과 아샤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함께 있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졌다.

    나는 황급히 아샤의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봤다.

    지난번보다 훨씬 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모델 아샤는 장애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당당함으로 인기를 끌었고 요즘 미국에서 제일 핫한 모델 중 하나라고 했다.

    칼레 영화제 레드카펫에서도 아샤는 그녀의 의수를 옷으로 숨기지 않고 당당히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잡지의 앞장을 살폈다.

    구원의 밤의 첫 공개 당일, 플뢰르 극장에서 찍힌 사진을 펼쳤다.

    사진 속에는 수많은 영화인에게 기립 박수를 받는 구원의 밤 식구들이 보였다.

    나는 사진의 주인공이 아닌 배경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내 내 입에서 작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역시 야샤도 왔었구나.

    인파 속에서 한 사람의 얼굴이 확실히 보였다.

    영화계 관계자들도 표를 구하기 어렵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표를 구한 걸까?

    왜 하필 구원의 밤을 본 걸까?

    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긴 고민 끝에 나는 보고 있던 잡지를 접었다.

    지금은 촬영이 우선이다.

    오아시스의 촬영이 끝나면 서이렌에게 말해 줘야 할 것 같다.

    세이렌 마네킹이 세상에 나타났다고.

    그녀처럼 살아서 움직이는 세이렌 마네킹이라고.

    * * *

    경기도에 있는 영화 촬영장에 오아시스 촬영팀이 속속 모여들었다.

    한 달 만에 촬영을 재개하는 거라 그런지 스태프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역력했다.

    누구보다 먼저 촬영장에 도착한 고명수 감독은 스태프들과 함께 현장을 점검했다.

    얼마 후, 촬영장 주차장에 스타탄생 밴이 도착했다.

    밴에서 서이렌과 김이솔이 사이좋게 내렸다.

    그들과 함께 온 사람은 강진석이었다.

    “강 이사님. 오늘 대표님은 안 오세요?”

    서이렌의 물음에 강진석이 답했다.

    “오전에 레전드 필름에서 미팅이 있어서요. 회의 끝나면 온다고 했어요.”

    원세강이 온다는 말에 서이렌의 입가에 작게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배우들이 도착했다는 말에 고명수 감독이 주차장으로 달려왔다.

    고명수 감독은 먼저 김이솔을 챙겼다.

    “어제 잘 잤어요?”

    “새벽녘에야 간신히 잠들었어요.”

    “그런 거에 비해선 얼굴은 좋아 보이네요. 이솔 씨는 잘할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감사합니다. 감독님.”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서이렌이 고명수 감독을 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서이렌입니다.”

    “서이렌 씨도 왔군요. 오느라고 고생했어요. 촬영장이 멀죠?”

    “아뇨. 편하게 왔습니다. 대본 보면서 왔더니 금방 도착했어요.”

    “이제 곧 촬영입니다. 저쪽에 분장 트럭이 있어요. 대기하고 계시면 스태프가 연락할 겁니다.”

    고명수 감독은 강진석과도 인사를 하고 이내 주차장에서 떠났다.

    떠나면서 김이솔과 눈을 마주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강진석은 젠틀함이 몸에 밴 고명수 감독을 보며 감탄했다.

    “소문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보니 훨씬 더 괜찮은 감독이었네.”

    “이솔 언니가 그러는데 사막 촬영장에서도 오아시스 같은 분이셨대요.”

    “고 감독이?”

    “그렇죠. 이솔 언니?”

    김이솔은 서이렌의 물음에 그저 웃기만 했다.

    “자, 우린 가서 대기합시다. 내가 의상 꺼내 올게요. 우재야. 가자.”

    강진석이 장우재에게 다가가자 서이렌이 김이솔의 옆에 딱 붙었다.

    “언니. 가요.”

    김이솔은 팔 년 만에 돌아온 영화 촬영장에 첫걸음을 내디뎠다.

    * * *

    경기도 촬영장으로 오는 나는 윤서혁 감독과 함께였다.

    내가 미팅이 끝나고 오아시스 촬영장에 간다고 했더니 윤서혁이 자신도 가 보고 싶다고 해서 동행하게 됐다.

    내 손에는 윤서혁이 내놓은 영화 기획안과 시놉시스가 들려 있었다.

    나는 운전을 하는 윤서혁을 보며 말했다.

    “운전까지 직접 해 주시고 저만 편하게 가네요.”

    “제가 운전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차 좋은데요? 새로 뽑으셨어요?”

    “예. 지난달에 샀습니다. 스타탄생 법인 차량입니다.”

    나는 강진석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차를 샀다.

    대신 내 명의가 아니라 회사 법인 차로 샀다.

    내 몸이 언제 어떻게 나빠질지 모르니 내 명의로 할 수 없었다.

    잘 쓰다가 회사에 돌려주고 가면 된다.

    “제 차랑 비교도 안 되게 잘 나가네요. 운전할 맛이 나겠어요.”

    “윤서혁 감독님도 차가 있었어요? 대중교통만 이용하시길래 차가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있는데 똥차예요. 학교 선배한테 받은 중고차. 그래서 잘 안 끌고 다닙니다. 그리고 전 대중교통 이용하는 게 더 편하더라고요. 제가 주로 대중교통 안에서 아이디어를 정리하거든요. 하하하.”

    호탕하게 웃던 윤서혁의 이내 웃음소리가 곧 잦아들었다.

    “오늘 기획안은 어땠나요?”

    “음.”

    오늘 윤서혁은 영화 기획안을 두 개를 들고 왔다.

    둘 다 평범한 영화는 아니었다.

    하나는 좀비 영화였다.

    갑자기 나타난 좀비로 서울이 봉쇄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서울을 탈출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요즘 한국에서도 좀비 영화가 흔치 않게 나오고 있다지만 영화의 사이즈가 커서 고민이 많았다.

    두 번째 영화는 저승사자에 대한 판타지물이었다.

    인간세계로 쫓겨난 저승사자와 그 저승사자를 볼 수 있는 백수의 이야기였다.

    두 작품 모두 쉽게 도전할 만한 영화는 아니었기에 오늘 미팅도 꽤 길어졌다.

    “제작하기에 위험 부담이 너무 클까요?”

    “조금 더 고민해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역시 그렇겠죠?”

    “그런데 지금 갑자기 든 생각인데 저승사자는 드라마로 가도 좋을 거 같아요.”

    “드라마요?”

    “아무래도 저승사자와 함께 벌이는 일이 에피소드 형식으로 끊어지는 게 많을 거 같아서요.”

    “음…….”

    윤서혁은 한 번도 드라마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우선 좀 더 생각해 보죠.”

    “예. 대표님.”

    어느새 우리가 탄 차량이 영화 촬영장 근처에 도착했다.

    그때 내 핸드폰이 두두거리며 진동음을 냈다.

    전화를 꺼내 보니 강진석이었다.

    “형님. 저 지금 거의 다 왔어요.”

    [아. 세강아. 지금 촬영장 난리 났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촬영장이 왜요? 또 무슨 사고라도 난 건가요?”

    내 입에서 사고라는 단어가 나오자 윤서혁이 화들짝 놀랐다.

    그는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고 나를 쳐다봤다.

    “대체 왜 그러시는데요?”

    [김기하가 왔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김기하라면 사막을 찍은 김기하 감독이요?”

    [그 김기하 맞아.]

    “김기하가 왜 오아시스 촬영장에 온 거죠?”

    [나도 몰라. 갑자기 찾아와서 촬영장에서 감 놔라 배 놔라 하고 있어. 완전 미친놈이야. 지금 걔 때문에 촬영장 분위기 엉망이야. 아주 폭군이야. 고명수 감독이 오케이 사인 냈는데도 별로라고 다시 찍어야 한다고 그러고 있어.]

    순간 내 피가 얼음처럼 차게 식는 것 같았다.

    김이솔. 어떡하면 좋지…….

    내 머릿속에는 김이솔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강진석과 전화 통화를 끝내고 다급하게 외쳤다.

    “윤 감독님. 더 밟아요. 딱지 떼도 괜찮으니까 빨리 촬영장으로 갑시다.”

    윤서혁은 뭐가 어찌 된 상황인지 몰랐지만, 그도 빨리 촬영장에 가고 싶은 마음은 똑같았다.

    “꽉 붙잡으세요. 대표님.”

    윤서혁이 있는 힘껏 가속 페달을 밟았다.

    * * *

    강진석과 장우재는 스태프들과 섞여 촬영장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김기하 감독은 어느새 고명수 감독의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서 본인이 감독이라도 된 것처럼 현장을 지휘하고 있었다.

    “김기하 미친 거 아냐? 왜 저래? 고명수 감독은 또 왜 아무 말도 못 하고 끌려가는데?”

    강진석은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옆에 있던 분장팀 스태프가 강진석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고 감독님 대학교 선배가 김기하 감독님이세요.”

    “선배면 답니까? 이해가 안 가는데요?”

    “같은 동네에서 나고 자랐고 아마 중고등학교 다 선배일 거예요. 그리고 고 감독님이 원래 싫은 소리 못 하는 분이세요.”

    “그래도 이건 아니죠. 지가 감독도 아니면서 왜 촬영장을 좌지우지하는 건데요?”

    “필름더플랫 대표님께 전화했다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죠.”

    그때 촬영장에 ‘컷’ 사인이 떨어졌다.

    컷을 외친 사람은 다름 아닌 김기하였다.

    김기하의 외침에 연기를 하던 김이솔이 그대로 굳었다.

    고명수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김기하를 붙잡았다.

    “왜 또 그러세요.”

    “명수야. 저거 안 보이니?”

    “대체 뭐가 보이는데요?”

    “모니터를 봐 봐. 이솔이가 걸어오는데 바닥에 그림자가 지잖아.”

    오후의 태양을 등에 지고 서 있는 김이솔의 앞으로 그림자가 보였다.

    “각도가 어그러지잖아. 지혜의 내면이 그림자로 투영되는 건데. 디테일이 떨어진다고.”

    “그건 선배님 생각이시죠. 저는 이솔 씨의 감정 연기만으로 충분히 다 표현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내가 말했지. 1%라도 어긋나면 관객은 눈치채. 그리고 그 1%를 딱 들어맞게 끼워 맞추는 게 우리 일이야.”

    고명수는 자꾸만 간섭하는 김기하를 보며 어이가 없었다.

    가라고 해도 가지 않고 어느새 자시의 옆자리에 앉아 감독 행세를 하고 있었다.

    계속된 NG에 김이솔은 점점 더 위축됐다.

    고명수는 어쩔 수 없이 조감독을 불렀다.

    “철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 씬은 나중에 찍고 씬 8 먼저 찍자.”

    “씬 8이요?”

    조감독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씬 넘버 8은 서이렌이 혼자 찍는 장면이다.

    고명수는 경직된 김이솔을 잠시 쉬게 하려는 것이다.

    다른 신을 찍는다는 말에 김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수야. 잘 생각했어. 지금 NG가 너무 많이 나서 태양의 위치가 애매해. 이미 그림자가 너무 사선으로 꺾였잖아. 이건 내일 오후 두 시에 다시 찍어야 해. 그땐 NG 없이 한 번에 가야 한다. 그래야 완벽한 샷이 나와.”

    김기하의 말을 들은 고명수의 얼굴이 굳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강진석과 스태프들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김기하 감독님은 또 예술 병이 도지셨네요.”

    “원래 저런 사람이었습니까?”

    강진석이 묻자 스태프는 주위를 확인하고 조용히 속삭였다.

    “연기가 마음에 안 든다며 같은 장면 천 번씩 다시 찍게 하는 건 다반사고요. 한겨울에 바다에 빠지는 장면이었는데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장비 다 빼게 해서 진짜로 배우를 죽일 뻔했어요.”

    “그건 범죄잖아요.”

    “말도 마세요. 지금도 김기하 감독이 계속 촬영장에 나온다면 그만둘 스태프가 한둘이 아닐 겁니다.”

    스태프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카메라 앞에는 어느덧 서이렌 혼자 서 있었다.

    강진석은 홀로 남은 서이렌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원세강. 얘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 * *

    바비로 분한 서이렌이 지혜의 방에 찾아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장면을 찍는다.

    아무도 몰래 지혜의 방에 가기 위해 슬금슬금 계단을 오르는 바비.

    그녀가 계단의 끝까지 갔을 때 즈음, 김기하 감독의 컷 사인이 촬영장에 울려 퍼졌다.

    서이렌은 고개를 돌려 김기하를 쳐다봤다.

    김기하는 서이렌을 불렀고 그녀는 침착한 얼굴로 김기하의 앞에 섰다.

    “열일곱 번째 계단을 오를 때 나무 계단이 삐걱대는 소리가 들어가야 해.”

    서이렌은 고명수를 바라봤다.

    고명수는 아니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김기하는 자신의 말을 들으라며 서이렌에게 연기를 주문했다.

    다 들은 서이렌이 김기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감독님. 좀 더 정확히 디렉팅을 해 주실래요?”

    “뭐?”

    “감독님은 완벽함을 추구하는 스타일 같으신데, 맞죠?”

    “당연하지. 영화는 1%의 부족함을 채우는 여정이야.”

    “그럼, 좀 더 정확하고 자세한 디렉팅을 해 주세요. 그래야 제가 1%를 채우죠.”

    당돌한 서이렌의 말에 김기하가 헛웃음을 지었다.

    요즘 영화계의 떠오르는 대세라더니 눈에 뵈는 게 없는 걸까?

    김기하는 이내 야비한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그래? 서 배우가 내가 원하는 걸 완벽하게 해낼지 의심이 되는데?”

    “뭘 원하시는데요?”

    김기하는 스태프에게 종이와 펜을 달라고 하더니 그 자리에서 뭔가를 적었다.

    서이렌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내가 원하는 거야. 할 수 있겠어?”

    김기하가 건넨 종이에는 서이렌이 계단을 걷는 시퀀스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첫 번째 계단에서 45도로 까치발을 걷다가 서서히 각도가 내려가더니 열일곱 번째 계단에서는 안심하고 발바닥을 바닥에 모두 내려놨고 정확히 7초 후에 나무 계단이 삐걱댄다.

    45도라니. 장난하는 걸까?

    하지만 김기하는 그 각도를 실제로 요구할 지독한 사람이었다.

    서이렌은 웃는 얼굴로 종이를 김기하에게 건넸다.

    “별거 아니네요. 해 볼게요.”

    “정말 할 수 있겠어?”

    “그럼요. 완벽하게 연기해 낼 테니 지켜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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