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든든한 지원군
김기하 감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전화 통화를 마친 송정현을 붙들고 물었다.
“무슨 소리야? 정말로 김이솔이 한대? 내가 아는 그 김이솔 맞아?”
“우리나라에 김이솔이란 이름을 가진 배우가 여럿인가요? 감독님이 알고 계신 그 김이솔 맞습니다.”
송정현은 얼마나 신이 났는지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그에 반해 김기하의 표정은 어두웠다.
“감독님. 왜 그렇게 화가 나셨어요? 사막이 오아시스 후속편이니까 김이솔 배우가 하는 게 이상하지는 않죠.”
“김이솔은 내가 잘 알아. 이솔이 평소 성격이 얼마나 해맑은지 송 대표는 모를 거야.”
“갑자기 김이솔 배우의 성격 이야기는 왜 나오는 겁니까?”
“사막을 할 때도 내가 그런 이솔이의 밝은 기운을 많이 죽여 놓고 촬영을 했어. 영화 분위기에 맞게 배우를 이끌어 줘야 하거든. 근데 명수가 그게 될까?”
송정현은 진지하게 고민하는 김기하를 보며 얼굴이 굳었다.
김기하의 사막에 대한 집착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송정현은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김기하에게 말했다.
“저는 지금 나가 봐야 합니다. 감독님 말씀은 나중에 들어 드릴게요. 그럼, 먼저 갑니다.”
송정현은 김기하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쌩하니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대표실에 홀로 남은 김기하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이내 고개를 든 김기하가 나직이 읊조렸다.
“아무리 봐도 오아시스는 내가 찍어야 해. 명수로서는 역부족일 거야. 이솔이도 내가 필요할 거야.”
* * *
스타탄생 사무실에 도착한 송정현은 이 층으로 안내를 받았다.
이 층에 올라온 송정현은 중앙 테이블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찾았다.
고명수 감독과 그 옆에 앉아 있는 김이솔의 얼굴이 먼저 보였다.
그들은 누군가와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송정현은 반가운 마음에 고명수에게 손을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송정현과 눈이 마주친 고명수가 일어서자 김이솔도 따라 일어섰다.
테이블로 이동한 송정현은 고명수와 눈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나와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내 옆에 서 있는 서이렌을 발견한 고명수의 두 눈이 커졌다.
놀란 송정현의 외마디 비명이 흘러나왔다.
“어? 어!”
나는 그런 송정현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필름더플랫의 송정현 대표님이시죠? 저는 스타탄생 대표 원세강이라고 합니다.”
송정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예. 저는 플름더플랫 송정현입니다.”
나는 송정현과 악수를 하고 손을 내밀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갑자기 연락드려서 회의도 취소하고 오시는 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깟 회의가 대수인가요?”
자리에 앉은 송정현은 내 옆자리의 서이렌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나는 웃으며 송정현에게 서이렌을 소개했다.
“이쪽은 스타탄생 배우인 서이렌 배우님이세요.”
“안녕하세요. 송정현 대표님. 서이렌입니다.”
“서이렌 씨.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필름더플랫 대표 송정현입니다.”
마치 선 자리에 처음 나와본 사람처럼 송정현이 어색하게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뒤이어 김이솔을 그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김이솔 씨는 이미 알고 계신다고 들었는데요.”
“이솔이는 잘 알죠. 영국으로 가기 전에는 자주 봤었습니다.”
송정현과 김이솔은 오랜만에 본다며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대화를 마친 송정현의 입이 굳게 닫혔다.
송정현은 서이렌을 힐끔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이 자리에 서이렌 씨는 왜 나와 계신 거죠?”
나는 그에 대한 답을 하는 대신 테이블 위에 올려진 오아시스의 대본을 가리켰다.
“오아시스 대본을 봤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작품이더군요.”
“예. 맞습니다. 저도 처음 읽었을 때 한동안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따뜻함도 동시에 느꼈습니다. 지혜가 상처를 딛고 치유하는 과정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서정적이더군요.”
내 극찬에 기분이 좋았던지 송정현이 고명수의 얼굴을 쳐다보며 웃었다.
“윤지혜 역은 사막과 마찬가지로 김이솔 배우님이 맡을 겁니다. 그리고 바비 역은 여기 계신 이렌 씨가 했으면 합니다.”
“서이렌 씨가 바비 역을 하신다고요?”
송정현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서이렌과 오아시스의 대본을 번갈아 쳐다봤다.
오아시스는 두 여자가 자살을 기도한 한강에서 시작된다.
김이솔이 분했던 윤지혜는 자살에 실패하고 구조되지만, 오지혜는 죽고 만다.
윤지혜는 그날 이후 정신병동에 수용된다.
그녀는 자신이 자살을 기도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그녀의 이름도 윤지혜가 아닌 오지혜라고 여기고 있다.
‘인격 경계 혼란 장애’라는 병명을 진단받은 윤지혜는 일 년 뒤, 요양원으로 옮겨진다.
여전히 자신이 오지혜라고 여기는 그녀는 오 년이 넘게 요양원 생활을 하는 또 다른 환자, 바비를 만난다.
자신을 바비라 부르는 그녀는 요양원에서도 가장 후미진 끝 방에 살며 산책하는 시간 외에는 밖으로 나오지 않고 방에 갇혀 산다.
오지혜와 바비는 서로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되고 요양원을 탈출하는 기행도 벌인다.
사람들이 미쳤다고 여기는 두 사람이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 바로 오아시스다.
그리고 서이렌이 하려는 역이 바로 바비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송정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세강 대표님. 그리고 서이렌 씨.”
“예. 말씀하시죠.”
“오아시스 대본을 다 보시고 선택하신 건 맞죠?”
“그럼요. 방금 좋은 대본이라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그럼, 바비는 주연을 받쳐 주는 조연이라는 것도 아시겠네요.”
“알고 있습니다.”
담담히 답하는 나를 보며 송정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올 한해 상반기에는 원톱 영화 나비로 천만을 달성하고, 지금 상영 중인 구원의 밤은 칼레 영화제 수상 소식으로 이번 주나 다음 주에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 사상 최초로 천만을 달성할 거다.
두 작품 모두 주연으로 천만을 달성한 영화계의 톱스타가 흥행이 보장되지 않는 작은 영화에 그것도 조연으로 출연하겠다니.
송정현은 서이렌의 선택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송정현 대표를 보니 나는 웃음이 나왔다.
서이렌이라면 쌍수 들고 환영하지만 그래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거다.
서이렌은 이제 확고부동한 톱스타다.
드라마, 영화 모든 분야에서 이 정도 입지를 가진 배우는 드물 거다.
그렇기에 지금은 잠시 쉬어 갈 때라고 생각했다.
‘차기작은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라 연극을 할까?’라고 생각해 본 적도 있다.
그런 고민 중에 찾아온 게 바로 오아시스다.
김이솔이 주연을 맡고 서이렌이 그녀를 받쳐 주는 역을 한다고 해서 서이렌의 입지가 떨어지는 일은 없다.
이미 서이렌은 그 단계를 넘어섰다.
난 오히려 두 사람이 함께 연기하면 어떨까? 그게 더 궁금했다.
전혀 다른 스타일로 연기하는 두 천재 배우의 연기를 같은 화면에서 보고 싶었다.
내내 아무 말이 없던 고명수 감독이 입을 열었다.
“송 대표님. 저도 처음에 원 대표님이 서이렌 씨를 거론하셔서 놀랐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케미가 중요한 영화예요. 저는 서이렌 씨가 해 주신다면 너무 좋을 거 같습니다.”
서이렌이 고명수를 보며 웃으며 화답했다.
“저는 하고 싶어요. 이솔 언니와 함께 연기해 보고 싶었어요.”
김이솔과 서이렌은 이미 결정을 끝낸 듯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송정현 대표의 입가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합시다. 모두가 원한다는데 당연히 해야죠. 하하하.”
“그럼, 촬영 일정을 논의해 볼까요? 촬영을 중단한 지 얼마나 지났죠?”
“이제 이 주일이 지났습니다. 촬영 허가를 받아 놓은 게 있어서 빨리 촬영에 들어가야 합니다.”
나는 고명수가 꺼낸 일정표를 확인했다.
확실히 밀린 일정까지 소화하려면 당장 내일부터 촬영을 시작해야 할 지경이었다.
“다행히 김이솔, 서이렌 배우님 모두 지금은 휴식기입니다. 다음 달에 열릴 한울영화상만 피해서 촬영 일정을 다시 잡아 보죠.”
고명수와 송정현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좋습니다. 당장 촬영 재계 일정을 짜 오겠습니다.”
나는 김이솔과 서이렌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우리도 준비하러 갈까요?”
두 여자가 환한 미소로 내게 화답했다.
“예. 대표님.”
“좋아요. 대표님.”
* * *
사고로 중단됐던 오아시스 촬영 일자가 정해졌다.
바로 내일 경기도의 오래된 요양소에서 촬영이 시작된다.
촬영 하루를 앞두고 캐스팅 소식이 기사로 떴다.
[영화 ‘오아시스’ 전격 캐스팅…… 천재 배우, 사막의 김이솔 귀환]
[충무로 대세 ‘서이렌’ 김이솔과 함께 오아시스 출연 결정]
[사고로 중단된 영화 ‘오아시스’ 서이렌, 김이솔과 함께 날아오르다]
[김이솔과 서이렌 동시 캐스팅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신작 ‘오아시스’는 무슨 영화인가?]
- 미친 건가?
- 캐스팅 무슨 일이냐??? ㄷ
- 김이솔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나와. ㅋㅋㅋㅋ- 오오!!
- 그만두신 배우님들께는 미안하지만 난 지금 캐스팅이 너무 좋다.
?ㄴㄷㄴㄷ
?비교 불가.
?나도 죄송하긴 한데 지금이 베스트.
- 너무 괜찮은데???
-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영화인데 벌써 끌린다.
- 이거 사막 후속작이라고 소문났던데. 그럼, 김이솔이 하는 게 맞지. 그나저나 서이렌은 놀랍네.
- 나도 김이솔은 그러려니 하는데 서이렌이 진짜 갑툭튀 캐스팅임.
- 이거 전에 뜬 기사 보면 1롤이 김이솔이고 서이렌은 2롤임.
- 서이렌 서브로 떨어짐?
?장난해?
?미쳤냐?
- 드라마는 몰라도 영화는 이렇게 주연급이 조연으로도 자주 나옴.
- 서이렌이 진짜 대단한 듯. 정말 작품만 보고 출연하는 거 같아.
- 크. 서이렌 뽕에 취한다.
- 서이렌쯤 되니까 저런 선택도 하는 거지. 연기 되지. 인기 되지. 딸리는 게 하나도 없음.
?ㅁㅈㅁㅈ
?ㅇㅈ
- 내가 감독이라면 김이솔, 서이렌 업고 다니겠다.
- 원래 이름도 모르는 영화였는데 캐스팅 기사 하나로 내년 최고 기대작으로 떠오름. ㅋㅋㅋ내일 촬영 전에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았던 나는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오전에는 레전드 필름에 다녀왔고, 오후에는 스타탄생에서 업무를 봤다.
레전드 필름은 윤서혁 감독의 신작 때문에 다시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윤서혁은 287일 때문에 제작도 관여한 적이 있었기에 내가 관여할 일이 많지 않았다.
퇴근하기 전에 인터넷에 반응을 모니터링하던 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내 예상대로 캐스팅 반응이 좋았다.
아니, 좋은 정도가 아니라 영화에 대한 기대감까지 상승시키는 역대급 캐스팅이라며 사람들이 흥분했다.
오아시스 기사를 확인한 나는 칼레 영화제 기사가 실린 영화 잡지를 들었다.
잡지사에서 직접 보내 준 거다.
무려 이십 페이지에 걸쳐 구원의 밤 팀의 칼레 영화제 일정과 반응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었다.
구원의 밤 말고도 칼레 영화제의 이모저모를 무려 다섯 페이지에 걸쳐서 소개하고 있었다.
영화 잡지 전체가 칼레 영화제로 도배됐다고나 할까?
나는 그중에서도 칼레 영화제 레드카펫 사진에 시선을 빼앗겼다.
내 눈에 콩깍지가 쓰인 것인지 영화제에 참석한 수많은 배우 중에서도 서이렌이 압도적으로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단지 외모가 아니라 서이렌이 가진 당당함, 여유로움. 자신감.
모든 것이 그녀의 분위기를 독특하게 만들었다.
미소를 지으며 잡지를 넘기던 내 손이 순간 멈칫했다.
[세계적인 뷰티 브랜드 에블론의 후원으로 칼레 영화제의 레드카펫을 밟은 모델, 아샤.]
칼레 영화제는 배우가 아니더라도 영화제 후원사를 통해 레드카펫에 설 수 있다.
그래서 모델이 레드카펫에 서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레드카펫을 밟고 손을 흔드는 그녀를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또 다른 세이렌 마네킹.
아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