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48화 (149/261)
  • #148화. 넘어야 할 벽

    놀란 나는 김이솔과 시나리오를 번갈아 쳐다봤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김이솔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대표님?”

    김이솔이 재차 내 이름을 묻고 나서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지금 김이솔은 그녀의 데뷔작인 사막의 후속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오아시스에 출연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도 오아시스의 감독인 고명수와 함께 말이다.

    “제가 이 시나리오를 이솔 배우님께 드린 적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김이솔의 옆에 앉아 있던 고명수가 김이솔 대신 대답했다.

    “제가 따로 연락해서 전달했습니다.”

    나는 고명수 감독을 바라봤다.

    지금 보니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자현이 사막을 찍으면서 봤던 오디션 현장에 고명수도 있었다.

    “고명수 감독님. 혹시 사막도 스태프로 참여하셨었나요?”

    “맞습니다. 그때는 조감독이었습니다.”

    “그럼, 저를 기억하시겠네요. 그때 여주인공 최종 후보에 올랐던 이자현 배우님과 함께 오디션장에서 고 감독님을 봤던 것 같습니다.”

    고명수는 살짝 웃으며 답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둘이 아는 사이라고 하니 김이솔은 안심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사실을 알고 나니 지금 이 상황을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토록 힘들어한 작품의 후속작을 정말로 하고 싶은 걸까?

    심지어 고명수는 사막의 조감독이었다.

    현장에서 김이솔이 김기하 감독에게 괴롭힘당하는 걸 다 지켜본 사람일 텐데.

    나는 그냥 직설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김이솔 배우님.”

    “예. 말씀하세요.”

    김이솔은 편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내가 한 질문을 듣고 이내 그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사막이란 작품은 이솔 배우님께 힘든 작품이 아니었나요?”

    “…….”

    “저는 배우님이 인정에 끌려 작품을 고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김이솔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당황한 고명수 감독을 보며 말했다.

    “촬영장 사고로 주연 배우 두 사람이 모두 다쳤다는 소식은 저도 기사로 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김이솔 배우님을 찾아오신 겁니까? 대체재로 말입니다.”

    내 말에 고명수 감독이 발끈하고 나섰다.

    “대체재라뇨. 저는 처음부터 이솔이를 생각하고 이 대본을 썼습니다. 이솔이가 이 역을 해 줬으면 하고 스타탄생에 대본도 보냈습니다. 당시에는 바뀐 이솔이의 연락처를 몰랐거든요.”

    “하지만 저는 이솔 배우님이 이 작품을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사막이 과연 이솔 배우님께 좋은 영화였는지 의문이 들거든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저는 사막이 왜 그렇게 대단한 영화로 칭송을 받았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감독님 앞에서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제 생각이 그렇습니다.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고명수 감독은 처음에는 내 비난에 당황했는지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눈빛이 가라앉았다.

    “사실 저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사막은 제가 시나리오를 썼던 처음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나왔습니다. 사막은 제 작품이 아니라 김기하 감독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막의 시나리오 작가가 고명수라고?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조용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김이솔이 가방 안에서 낡은 대본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원 대표님. 이게 고명수 감독님이 처음 쓰신 사막의 원래 시나리오예요.”

    “원래 시나리오라고요?”

    “저는 그 당시 이걸 보고 사막에 출연할 결심을 했습니다.”

    떨리는 내 눈빛이 탁자 위의 덩그러니 올려진 낡은 대본 위로 향했다.

    얼마나 많이 봤는지 대본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이자현과 나는 당시에 사막의 완전한 대본을 받지 못한 채 오디션을 봤었다.

    이자현이 주인공 최종 후보에 오르고 나서야 완전한 대본을 볼 수 있었고 나는 그걸 읽자마자 이자현에게 하지 말자고 건의했다.

    사막은 예술로 치장된 쓰레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미도 없는 베드신 남발에 주인공을 일부러 나락으로 떨어뜨려 역겨운 고행을 선사하는 토악질이 나오는 그런 영화였다.

    “대표님. 이게 원래 사막의 원시나리오예요. 김기하 감독님이 큰 줄기만 남기고 다 바꾸신 거예요.”

    김이솔은 사막과 오아시스를 바로 옆에 두며 말했다.

    “오아시스는 사막의 원래 시나리오에서 파생된 진짜 후속작입니다. 저는 이게 하고 싶어요.”

    “…….”

    두 작품을 모두 읽지 못했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김이솔은 한숨을 들이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이걸 해야 제대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러니까 하게 해 주세요. 대표님.”

    * * *

    필름더플랫 영화사에 김기하 감독이 출근했다.

    영화사에 출근한 김기하는 대표실을 먼저 찾았다.

    노크도 없이 대표실로 직행한 김기하는 전화 통화 중인 필름더플랫의 대표를 본체만체한 뒤에 소파에 앉아 신문을 뒤적거렸다.

    전화를 끊은 필름더플랫 송정현 대표가 소파로 걸어와 김기하 감독을 보며 말했다.

    “감독님.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신문을 뒤적거리던 김기하가 고개를 들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과음한 건지 눈 아래가 거무죽죽했다.

    “김 감독님 얼굴은 또 왜 그러세요? 어제도 술 드셨어요?”

    “영화진흥협회 이사들이랑 한잔했어.”

    “그 협회는 영화가 아니라 술 협회인 거 같네요. 만날 때마다 술만 마시고.”

    “송 대표가 몰라서 그래.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회의 끝나면 녹초가 돼서 술이라도 마셔야 몸이 풀린다고.”

    송정현은 변명을 늘어놓는 김기하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김기하가 영화진흥협회 이사라서 필름더플랫도 이득을 본 일이 적지 않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송정현을 힐끔 보던 김기하는 신문을 내려놓고 은근슬쩍 물었다.

    “송 대표. 오아시스 말이야.”

    오아시스라는 말에 송정현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또 그러십니까. 그건 고명수 감독 거라니까요. 이미 촬영도 시작했어요.”

    “사고 나서 촬영 접은 거 아니었나?”

    “배우 구해서 다시 할 겁니다.”

    송정현 대표의 말에 김기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송 대표도 알다시피. 한번 문제가 생긴 작품은 계속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야. 이게 다 오아시스가 원래 주인이 아닌 다른 감독이 해서 그런 거 아니겠어?”

    “영화에 원주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고명수 감독님이랑 친하시잖아요.”

    “친하긴. 내가 명수를 가르친 거나 다름없지. 명수가 요즘 잘나간다고 하지만. 나 아니었으면 지금의 고명수도 없는 거야.”

    얼굴을 굳힌 송정현이 딱 잘라 말했다.

    “김 감독님은 영화진흥협회 일로 바쁘시고, 지금 논의 중인 작품이 있으시잖아요. 그거 하셔야죠.”

    “나 그거 꼭 해야 하나? 마음에 안 들어.”

    “아니, 시나리오도 본인이 쓰셔 놓고 왜 마음에 안 드십니까?”

    “주인공이 걸려. 임준학을 꼭 써야겠어? 송 대표도 알다시피 나는 다른 배우를 원해.”

    “무슨 말씀이세요. 임준학이면 요즘 대작들에 이름 올리고 있는 핫한 배우예요.”

    김기하는 영 아니다 싶은지 미간을 찌푸렸다.

    독불장군처럼 자기 마음대로 다 휘두르고 싶은데 이번 작품은 그게 쉽지 않았다.

    임준학이라는 배우가 대형 투자자를 물고 왔기에 간섭이 많았다.

    “오랜만에 하는 작품이시잖아요. 성공하셔야죠. 지금 투자금도 다 모였고 프리프로덕션도 차근차근 진행 중인데 왜 다른 영화에 눈독을 들이세요? 우리 이 이야기는 그 정도만 합시다. 전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송정현 대표가 칼같이 못을 박자 김기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아시스가 잘될지 염려가 된다고. 명수는 아직 그 정도 깊이 있는 작품을 할 때가 아니야. 좀 더 실력을 길러야지.”

    “고 감독님이 들으시면 슬퍼하시겠네요.”

    “내가 사막에 애착이 많아서 그래. 그리고 명수도 이해할 거야.”

    끝까지 오아시스에 미련을 떨치지 못한 김기하가 대표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송정현 대표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 양반이 왜 저러실까? 한동안 흥행에 죽 쑤더니 과거의 영광에 매달리는 건가?”

    * * *

    사막의 원래 시나리오를 다 읽은 내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용이 엉망이라 한숨이 나온 것이 아니다.

    이렇게 좋은 시나리오가 전혀 다른 작품으로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 안타까워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 것이다.

    나는 곧 내가 실례했다는 것을 깨닫고 고명수 감독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좋은 작품이라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사막은 교통사고로 시작하는 이야기다.

    트럭 운전사의 졸음운전 사고가 발생한다.

    트럭 운전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트럭이 박은 차량에 탄 가족은 한 사람을 남기고 모두 죽는다.

    트럭 운전사의 딸인 윤지혜와 홀로 살아남은 오지혜가 사막의 두 주인공이다.

    두 사람 모두 가족을 모두 잃고 홀로 남았지만, 서로의 환경은 극과 극이다.

    윤지혜는 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빚에 시달리고, 오지혜는 죽은 가족들의 수십억대 사망 보험금을 받는다.

    환경이 다를 뿐 두 사람 모두 그날 이후로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간다.

    고명수 감독이 쓴 사막은 세상에 홀로 남겨진 두 사람이 오아시스를 찾아가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김기하가 만든 사막은 내용의 커다란 줄기만 가져온 채 완전히 다른 작품이었다.

    김기하는 지옥에서 살아가는 두 주인공의 인생이 나락으로 가는 여정으로 탈바꿈시켰다.

    쉴 곳을 찾아 헤매는 영혼의 여정이 꿈도 희망도 없는 지옥도로 변해 버린 것이다.

    사막의 원래 시나리오는 두 주인공이 희망을 보며 끝이 나는데, 김기하의 영화를 그렇지 않다.

    피폐해진 두 사람이 결국 옥상으로 올라간다.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고 눈물을 흘리며 영화가 끝난다.

    영화는 끝을 완전히 보여 주지 않았지만 아마도 두 사람은 그대로 꼭 껴안은 채 투신자살로 인생을 마무리했을 것이다.

    김기하가 그린 내용이 그랬고, 편집이 그랬다.

    나는 사막 옆에 있는 오아시스의 대본을 들었다.

    김기하가 그렇게 절망에서 죽음으로 끝내 버린 작품을 어떻게 살려 놨을까?

    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오아시스의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 * *

    아침부터 필름더플랫에 찾아온 김기하는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송 대표. 내 방 건들지 말라고 했잖아. 왜 건드렸어?”

    “그냥 청소하시는 분이 청소한 겁니다.”

    “무슨 청소야? 방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건들지 말라고.”

    송정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기하는 예민하고 쉽지 않은 성격이지만 이렇게까지 화를 낸 적은 없었다.

    “대체 그 방에 뭘 감추고 계시길래 그렇게 애지중지하시는 겁니까?”

    “감추긴 뭘 감춰. 아무것도 없어. 그냥 모르는 사람이 내 방에 들어와서 이것저것 만지는 게 싫어서 그래. 알잖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자기 공간을 침해받는 거 싫어하는 거.”

    송정현은 김기하가 왜 저렇게 까칠하게 나오는지 이해가 안 됐다.

    필름더플랫과 김기하가 본격적으로 함께 일하게 되면서 사무실에 있는 남는 방 하나를 김기하의 작업실로 줬다.

    그런데 김기하는 그 작업실에 남이 들어오는 걸 극도로 꺼렸다.

    십 분 후에 회의가 있어서 나가야 하는 송정현은 알았다며 김기하를 달랬다.

    “알았어요. 다시는, 그 누구도 감독님 방에는 못 들어가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됐죠?”

    “쓰레기통도 비우지 마.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알겠으니 알아서 하십시오.”

    송정현 대표는 말을 마치고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는 회의 때문에 먼저 갑니다.”

    “그러든지.”

    송정현이 대표실을 나서려는데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송정현은 서류를 옆구리에 끼고 전화를 받아 들었다.

    “고명수 감독님.”

    송정현의 입에서 고명수라는 이름이 흘러나오자 함께 나가려던 김기하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김기하는 걸음을 멈추고 송정현과 고명수의 전화 통화를 지켜봤다.

    “그래서요? 어떻게 됐나요? 하겠대요?”

    긴장한 송정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내 송정현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정말입니까? 정말로 출연하겠대요?”

    너무 놀란 송정현은 들고 있던 서류를 놓쳐 버렸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진짜 이런 경우도 다 있네요. 어떻게 일이 이렇게 풀리죠? 고명수 감독님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지금 회의가 있는데……. 아니다. 회의 취소하고 바로 스타탄생으로 갈게요. 스타탄생 주소 찍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따가 뵙죠.”

    전화를 끊은 송정현은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대충 테이블 위에 던져 놓고 재킷과 가방을 들었다.

    묘한 눈빛의 김기하가 송정현에게 물었다.

    “왜 그래? 송 대표. 명수한테 무슨 일 있어? 대타 배우 구했대?”

    대표실을 나가려던 송정현은 평소보다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타 정도가 아닙니다. 원래 고 감독님이 원하시던 캐스팅으로 가게 생겼어요.”

    “그래? 누군데 그래?”

    “김이솔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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