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칼레의 마지막 밤
대니 라모로 감독은 눈앞에서 움직이는 서이렌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움직이는 그녀의 긴 속눈썹.
말을 할 때마다 드러나는 눈썹뼈.
우아한 발음으로 불어를 내뱉는 앙증맞은 서이렌의 입술.
서이렌은 마치 맑은 오아시스에 떨어뜨려 놓은 꽃잎 같은 존재였다.
“저기 최병철 감독님이 오시네요. 제가 자리를 비켜 드릴게요.”
서이렌이 웃으며 일어서자 대니 라모로도 따라 일어섰다.
영화인들의 축하 인사를 받고 돌아온 최병철에게 자리를 양보한 서이렌이 내 옆자리로 돌아왔다.
대니 라모로는 눈앞에 그가 찾던 최병철 감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은 서이렌의 뒤쫓고 있었다.
나는 서이렌을 내 옆자리에 앉히고 나도 모르게 의자를 뒤로 돌려 그의 시야를 막았다.
서이렌은 내가 의자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할 말 있어요?”
“…….”
나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할 말이 있었던 거 같은데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 구세주처럼 박진숙 이사가 나타났다.
“이렌 씨. 불어가 능숙하네요. 어떻게 된 거예요? 지난주에 공항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인사말밖에 못 했잖아요. 그동안 감쪽같이 숨긴 거예요?”
“여기서 배웠습니다. 저기 계신 민영혜 통역사님께요.”
박진숙은 그것이 농담인 줄 알았는지 웃으며 말했다.
“한국에서 미리 배워 왔나 보네요. 얼마나 배운 겁니까? 발음이 정말 좋던데요?”
“얼마 안 배웠습니다.”
“원래도 언어 감각이 좋은가 보네요. 난 그런 사람들이 참 부럽더라. 외국어 빨리 배우는 사람.”
“예. 제가 그런 편이에요.”
능청스럽게 답하는 서이렌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그때 누군가 서이렌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최병철 감독과 대화를 마친 대니 라모로였다.
그는 자신의 자리로 가기 전에 다시 서이렌을 보러 온 것이다.
서이렌은 인사를 하려고 다가온 대니 라모로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비쥬를 했다.
하지만……. 저게 비쥬라고?
비쥬는 서로의 볼을 마주치며 자연스럽게 인사하는 것이 아니었나?
눈앞의 대니 라모로는 서이렌과 너무나도 가까웠고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짚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빡 들어갔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서이렌과 대니 라모로를 쳐다봤다.
무슨 비쥬를 이렇게 오랫동안 하는 거지?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쯤, 드디어 대니 라모로의 얼굴이 서이렌에게서 떨어졌다.
대니 라모로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불어로 몇 마디 대화를 더 주고받았다.
서이렌과 대화를 나누며 환하게 웃고 있는 대니 라모로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우습지도 않았다.
뭐라는 거야?
영어 모르나?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았어?
옆자리에 앉은 박진숙이 내 어깨를 톡톡 쳤다.
“대표님. 원 대표님?”
“예?”
나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박진숙이 웃으며 네게 말했다.
“최병철 감독님이 찾으세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시는 겁니까?”
“제가 잠깐 딴생각을 했었나 봅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최병철 감독에게 다가갔다.
걸으며 슬쩍 뒤를 돌아보니 서이렌과 대니 라모로는 그제야 긴 인사를 마치고 헤어지는 듯 보였다.
* * *
칼레 영화제가 끝나고 이틀 후 저녁, 최병철 감독님과 다른 구원의 밤 배우들 그리고 박진숙과 민정혜 팀장이 먼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공항까지 마중 나간 우리는 그들을 보내자마자 한국에서 날아온 NGB 촬영 스태프와 만났다 오랜만에 보는 최욱환이 공항에서 우리를 발견하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뭐야? 최 피디가 직접 왔어?”
“그럼요. 제가 직접 와야지 누가 오겠습니까?”
최욱환과 강진석이 웃으며 인사를 했다.
나도 다가가 최욱환 피디에게 인사를 했다.
“장거리 비행이라 힘드셨죠?”
“아닙니다. 간만에 휴가 떠나온 기분입니다. 그나저나 황금나무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한국에서는 난리가 났어요. 텔레비전을 틀면 어디에서나 구원의 밤 이야기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최병철 감독님께 최 피디님의 축하 인사를 꼭 전해 드릴게요.”
최욱환 감독이 은근한 미소를 짓더니 내게 말했다.
“대표님 주가도 구원의 밤과 함께 하늘 높이 뛰고 있다는 건 알고 계신 거죠?”
“제가요?”
“예. 최병철 감독님이 KBC 뉴스쇼와 생방송 인터뷰하셨잖아요.”
최욱환의 말대로 최병철 감독님은 어제 KBC 뉴스쇼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최 감독님께서 인터뷰 내내 원 대표님 말씀을 엄청 하셨잖습니까? 제가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봤는데 원 대표님과 스타탄생 이야기가 단독 기사로 뜰 정도라니까요.”
“솔직히 부끄럽네요.”
“이제 즐기셔야죠. 대한민국 연예계의 탑 소속사 대표님이시잖아요.”
최욱환이 나를 띄워 주자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내가 얼굴을 붉히는데 강진석이 공항이 떠나가도록 호탕하게 웃었다.
“당연하지. 우리 스타탄생이 최고야. 하하하.”
우리는 NBG 스태프를 데리고 숙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틀 뒤, 항만도시 칼레에서 스타탄생 예능 프로그램 엠티의 두 번째 촬영을 시작했다.
* * *
TOP의 김승민 대표는 쓴웃음을 삼켰다.
“한성제 대표님께서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박상용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 외국 영화제도 아니고 한국 영화제에도 출품도 하지 말라니. 이런 건 들어 보지도 못했네요. 박호중 감독은 좀 어떤가요?”
박상용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신인 감독상은 못 타도 후보에는 오를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나 봅니다. 아예 후보 등록도 안 한다는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벌써 이틀째 연락이 안 됩니다.”
“당연히 의욕이 떨어졌겠지요. 드라마 판에서 영화 판으로 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첫 영화를 성공해 놓고도 그런 대우를 받으니 화가 날 만합니다.”
박상용이 얼굴을 굳힌 채 물었다.
“설마, 배우들 논란 때문에 그런 겁니까?”
“그것밖에 무슨 이유가 더 있겠습니까?”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동안 언플을 쏟아부어서 간신히 논란을 잠재운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제야 잠잠해졌는데 영화제에서 멜랑꼴리라는 이름이 오르내리는 게 싫은 거겠죠.”
박상용은 분노에 입술을 깨물었다.
레전드 필름에서 잘 다니고 있다가 억대 연봉 조건에 혹해서 이직했는데, 이렇게 되면 TOP 미디어로 이직한 게 독이 된 기분이었다.
몇 년째 신작을 못 내던 레전드 필름은 구원의 밤으로 최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자신은 열심히 만든 영화도 빛을 못 보고 있다.
왜 이렇게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만 나가 봐요. 내일 시나리오 미팅하는 거 잊지 마시고요.”
“그런데 대표님. 대체 한지욱 대표는 뭘 하는 겁니까? TOP 미디어의 대표는 한지욱이잖아요. 왜 김승민 대표님이 미디어 일을 모두 처리하시는 거죠?”
박상용의 물음에 김승민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내일 미팅 때 봅시다.”
박상용은 씁쓸했다.
내일 미팅도 LOK 배우인 김선우를 위한 작품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아무리 봐도 아니야. 탈출해야겠어. 여긴 아니야.’
대표실을 나가는 박상용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 * *
리얼리티 촬영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오니 처리할 일이 산더미였다.
제일 급한 건 악플러 고소 건이었다.
우리가 프랑스에 간 동안, 악플러들이 반성문을 들고 스타탄생에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기사를 냈다.
선처 없이 법대로 처벌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변호사와 함께 고르고 고른 악플러 명단이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내가 LOK에 다녔을 때, 한번 선처해 줬던 악플러도 있었다.
악플을 다는 것도 마약과도 같은 것인가 보다.
그렇게 혼이 나고서도 못 끊는 걸 보니 말이다.
결국 우리가 넘긴 악플러는 모두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형사 처벌이 끝났으니 이제는 민사 소송을 진행할 차례다.
악플로 고소장을 받아도 벌금만 내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저렇게 막 나가는 거다.
악플러들을 향해 민사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이 퍼지자 서이렌을 괴롭혔던 악플이 기적처럼 사라졌다.
서이렌뿐만 아니라 이락과 윤이슬의 악플도 함께 사라지는 기현상을 나았다.
사람들은 스타탄생의 악플러 고소 소식에 사이다라며 좋아했다.
- 스본 짜란다.
- 고소 화이팅!!!!
- 내 돌도 저렇게 단호박으로 악플러 고소했으면 좋겠다. 부러워. ㅠㅠㅠㅠ- 서이렌한테 악플 달 게 있던가??? 신기하네.
- 오전부터 이런 행복한 글을 보다니. ㅋㅋㅋ
- 선처 안 해 줘야 함. 굿굿.
- 악플러들 다 이놈이 그놈이고 저놈이 그놈임. 나 다니는 게시판도 민사로 처넣는다는 소식 뜨고 ㅇㄱㄹ 사라지고 조용해졌어.
- 악플러들한테 민사 소송이 제일 골치 아플 거야.
- 노선처! ㅇㅈ
- 악플러들은 용서하면 안 됨.
- 완전 사이다다.
인터넷 반응을 확인한 나는 포털에 접속했다.
포털에 뜬 고소 기사도 ‘좋아요’가 ‘싫어요’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나도 속이 후련했다.
나는 포털 창을 닫으려고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런데 그때.
내 눈에 포털 창 한가운데 뜬 기사가 보였다.
[촬영이 무기한 연기된 영화, 오아시스]
나는 홀린 듯 그 기사를 클릭했다.
역시 내가 아는 그 영화, 오아시스가 맞았다.
[사막의 두 번째 이야기인 오아시스는 촬영 일주일째 되는 날 주연 배우들이 탄 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
중략…….
배우들은 전치 12주의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 중이며…….]
사고가 났었구나. 전혀 몰랐다.
오아시스가 촬영을 시작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이내 궁금증을 치워 버리고 포털을 닫았다.
알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일을 다 끝낸 내 시선이 책상 위에 쌓아 둔 대본 더미로 향했다.
다른 건 사람들에게 맡겨도 이 일만큼은 내가 직접 한다.
배우들의 차기작을 고르는 일.
이제 내가 봤던 삼 년의 미래는 유통 기한이 거의 다 됐다.
들어온 대본을 봐도 태반이 모르는 거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이자현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망작을 골라 본 적이 없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늦은 오후였다.
대본 보는 시간을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으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을 거다.
나는 편하게 앉아 제일 위에 있는 대본을 하나 펼쳐 들었다.
내가 대본의 첫 장도 못 읽었을 그때, 이 층으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했을 텐데.
이선아 씨가 왜 그냥 통과시켜 줬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읽던 대본을 덮어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휴식을 방해한 사람은 다름 아닌 김이솔이었다.
* * *
나는 어색한 얼굴로 김이솔과 그녀가 데려온 남자를 마주 보고 있었다.
“차 드세요.”
“예. 대표님.”
김이솔이 차를 옆자리의 남자에게 밀었다.
그는 선해 보이는 인상을 지닌 나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였다.
내가 그를 궁금해하자 김이솔이 입을 열었다.
“고명수 감독님이세요. 대표님은 처음 보시죠?”
“고명수 감독님…….”
그의 이름을 되뇌던 내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혹시 오아시스의 감독님이십니까?”
고명수는 되레 놀란 채 나를 바라봤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방금 기사를 봤습니다. 촬영이 중단됐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걸 보셨군요.”
고명수 감독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이 사람이 왜 나를 찾아온 걸까?
그것도 김이솔과 함께?
내 시선이 김이솔을 향했다.
이제는 그녀가 대답해 줄 차례다.
김이솔은 가방 안에서 시나리오를 꺼내 내게 건넸다.
그것을 본 내 눈이 커졌다.
[오아시스.
작가: 고명수]
김이솔은 그녀 특유의 얇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대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