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46화 (147/261)
  • #146화. 영화제의 하이라이트

    한국의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는 발 빠르게 칼레 영화제 생방송의 방영권을 샀다.

    평일 새벽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은 칼레 영화제 생방송을 기대하고 있었다.

    시네 키즈들이 모인 베스트 무비에서는 폐막작이 상영하는 동안 좀 더 깊이 있는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 시청 앞 돈키호테도 유명한 작품인가요?

    - 프랑스 감독 대니 라모로의 두 번째 상업 영화예요. 프랑스에서는 이미 천재 감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저 작품이 꽤 문제작이었어요.

    - 무슨 내용인가요?

    - 다리가 불편한 옆집 할머니를 위해 돈 받고 시청 앞에서 1인 시위하는 남자가 주인공인데요. 주인공이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아르바이트로 1인 시위를 하다가 방송국에서 찍으러 오고,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추앙받으면서 자의식이 비대해지며 자신이 진짜 의식 있는 시민운동가라고 생각하면서 벌어지는 블랙 코미디입니다.

    - 와. 영화 평론가세요? 귀에 쏙쏙 들어오게 잘 설명해 주시네요.

    - 정말 관계자신가요? 저 영화는 오늘 폐막식에서 최초 공개하는 거잖아요.

    - 평론가는 아닙니다. 그냥 대니 라모로 감독 팬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감독의 두 번째 영화라서 양웹에서 미리 찾아본 거고 저도 캐스팅과 줄거리밖에 모릅니다. 지금 칼레 영화제에서 영화를 보고 있을 구원의 밤 감독님과 배우님들이 부러워 미치겠습니다.

    - 아하. 그러셨군요. 님이 생각하시기에 황금나무상은 누가 탈 거 같나요? 기사로 보니 경쟁 부분이 구원의 밤 빼고는 모두 예상했던 거보다 평이 별로라서 구원의 밤 vs 폐막작인 시청 앞 돈키호테 구도로 갈 거 같다고 하던데요?

    - 시청 앞 돈키호테랑 경쟁하는 건 맞습니다. 저 영화를 완성하고 나서 사회운동단체만 불러서 따로 시사회를 했거든요. 아무래도 사회운동에 관한 이야기가 베이스니까요. 그런데 반응이 아주 좋았다는 후문입니다. 감독의 전작을 생각하면 잘 만들었을 겁니다.

    - 너무 떨리네요. 제발 구원의 밤이 황금나무상을 탔으면 좋겠네요.

    - 저도요.

    - 이제는 탈 때가 됐습니다. 제발 제발.

    - 저는 대니 라모로 감독 팬이지만 구원의 밤이라면 탈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극장에서 두 번이나 봤습니다.

    - 그나저나 구원의 밤은 뒷심이 어마어마하네요. 930만 명이나 봤어요.

    - 황금나무상을 타면 진짜로 천만 넘는 거 아닙니까?

    - 930만 중에 10명은 접니다.

    - 5명도 접니다. ㅋㅋ

    - 다들 다회차 관람하셨네요. 물론 저도 3차 관람자입니다.

    - 아! 이제 방송 시작하려나 봅니다.

    - 이제 시작이네요.

    - 제가 다 떨리네요.

    * * *

    구원의 밤 식구들은 지금까지 폐막작의 여운에 빠져 있었다.

    나와 내 옆자리에 앉은 박진숙이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영화 좋은데요? 아니 그냥 좋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좋습니다.”

    “대표님도 그러셨어요?”

    시청 앞 돈키호테는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집에 틀어박힌 지 일 년째인 백수 자크의 심리 변화가 돋보이는 영화였다.

    단지 돈을 위해 시작했던 1인 시위가 사람들의 반응을 얻으며 자크는 일약 영웅이 된다.

    자크를 해고했던 회사에서 다시 연락이 오고, 방송국에서는 자크와 인터뷰하기 위해 혈안이 된다.

    영화는 자크라는 남자의 자아가 어떻게 비대해지며 비틀려 가는지 유머러스하게 표현했다.

    “강적이네요. 그렇죠? 박 이사님?”

    “영화가 잘 나왔다는 소문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진짜 좋은 영화네요.”

    나는 고개를 돌려 왼쪽 대각선 끝, 시청 앞 돈키호테 팀이 앉아 있는 자리를 바라봤다.

    제일 왼쪽에 앉아 있는 남자가 바로 혜성처럼 나타난 천재, 대니 라모로 감독이다.

    스물여덟 살밖에 안 된 신예 감독은 마치 영화배우처럼 준수한 외모를 가진 풋풋한 청년이었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우리 구원의 밤 식구들을 쳐다봤다.

    모두 긴장한 얼굴이었지만 최병철 감독과 서이렌만은 웃고 있었다.

    그들의 웃는 모습을 보니 떨리던 내 손끝도 갑자기 잦아들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영화제다.

    떤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겠어.

    즐기자.

    생각이 바뀌자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내 입가에도 서이렌처럼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카페에 모여 앉아 칼레 영화제 실시간 스트리밍 영상을 보고 있는 스타탄생 식구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우연미가 이락의 어깨를 흔들며 물었다.

    “영상에 깍두기가 너무 심한데? 좀 더 화질 좋은 거 없어?”

    “와이파이 신호가 안 좋아요. 안 끊기고 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지경입니다.”

    “아이고. 역시 인터넷은 한국이 짱이네. 한국은 북한산 정상에서도 미튜브 4K 영상을 볼 수 있는데.”

    “그만 좀 떠들고 보세요. 이제 주요 부문 시상할 차례라고요.”

    스타탄생 식구들의 눈이 작은 핸드폰 화면에 꽂혔다.

    “여우주연상이에요. 모두 조용조용!”

    카메라가 객석에 앉아 있는 서이렌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이렌 씨다! 너무 떨려요. 어떻게 해.”

    “이제 발표해요. 모두 조용히 해요.”

    이윽고 여우주연상 수상자가 발표됐고 스타탄생 식구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깝네요.”

    “아. 다른 사람이 탔어요. 이렌 씨는 그래도 환하게 웃네요.”

    “세 번째 영화로 이렇게 칼레 영화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잘한 거잖아요.”

    이락의 말에 모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 이렌 씨가 최고지. 최고야.”

    “맞습니다. 언니가 최고예요.”

    일사천리로 남우주연상 수상까지 끝나고 감독상이 호명됐다.

    “시청 앞 돈키호테 감독이 탔네요.”

    이락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금까지 구원의 밤은 촬영상, 미술상을 빼놓고는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아. 어떡하지. 이제 황금나무상 하나만 남은 건가요?”

    “응. 이제 끝이야.”

    모두 어두운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모두 말은 안 했지만 ‘이대로 아무 상도 못 타면 어쩌지?’라는 말이 얼굴에 쓰여 있었다.

    하지만 김이솔과 윤서혁만은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 *

    칼레 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인 케인 마르티네스가 심사위원석에서 일어섰다.

    그의 뒤에는 이번 영화의 심사를 한 아홉 명의 심사위원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 세계 영화계를 주름잡는 영화인들이었다.

    케인 마르티네스는 새빨간 봉투를 받아 들고는 그것을 펼쳤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케인 마르티네스의 입이 열렸고 황금나무상이 발표됐다.

    “Savage Night!”

    구원의 밤이 호명되자 플뢰르 극장에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최병철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흰머리를 휘날리며 지팡이를 짚고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갔다.

    극장 안에 모인 수많은 후배 영화인들이 노장 감독을 보며 박수를 보냈다.

    기립 박수였다.

    나와 구원의 밤 식구들도 함께 일어서서 최병철 감독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무대 위로 올라간 최병철은 케인 마르티네스가 건네는 황금나무상을 받았다.

    반짝이는 금빛 나무를 받아든 최병철 감독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최병철 감독은 쿨하게 황금나무상을 양복 주머니에 꽂아 넣고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쥐고 다른 손으로는 마이크를 들었다.

    “무겁네요.”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온 민영혜가 최병철 감독의 말을 통역했고 극장 안에 모인 사람들이 웃었다.

    “영화를 만드는 일은 언제나 저를 힘들게 합니다. 촬영장에 가는 일은 무거운 납덩이를 여러 개 차고 가는 기분이 들지요.”

    민영혜는 최병철 감독의 말을 통역했다.

    극장 안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최병철의 수상 소감을 경청했다.

    “하지만 그 무거움이 저를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합니다. 오랜만에 다시 메가폰을 잡으면서 알게 됐습니다. 저는 이 작품이 은퇴작이라 천명하고 작품을 시작했습니다. 다시는 못할 테니 마지막을 즐기고 싶었지요. 하지만 영화를 다 찍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나는 현장을 못 떠나겠구나. 이대로 집에 돌아갈 수는 없겠다고 말입니다.”

    민영혜 통역사는 최병철이 한 모든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통역하기 위해 애를 썼고 최병철 감독의 진심을 들은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은퇴 번복을 들은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특히 최병철 감독의 오랜 팬이었던 케인 마르티네스 감독은 뛸 듯이 기뻐했다.

    “이제 집에 갑시다. 배가 고프네요.”

    집에 가자는 것으로 최병철 감독의 수상 소감이 끝났다.

    열렬한 박수와 환호성이 플뢰르 극장을 가득 메웠다.

    * * *

    [속보. 최병철 ‘구원의 밤’ 칼레 영화제 황금나무상 수상, 韓영화 최초]

    [韓영화 최고의 기록, 칼레 영화제 황금나무상. 거장 최병철 감독]

    [구원의 밤: 최병철 감독 칼레 영화제 최고상을 수상]

    구원의 밤의 황금나무상 소식이 전해지자 인터넷이 들썩거렸다.

    - 와 대박! 축하합니다 ㅠㅠㅠㅠ

    - 와 ㅊㅋㅊㅋ

    - 진짜 받았네.

    - 대단해!!!

    - 자랑스럽다.ㅠㅠㅠㅠ

    - 쩐다.

    - 세상에.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와 대박이다 !!!!!!!!!!! 감독님 축하드려요!!!!!!!!!!!!!!!!!!!!

    - 와 미쳤다 대박. 이건 진짜. ㅋㅋㅋ

    베스트 무비에서도 유저들의 축하 인사가 오갔다.

    - 대니 라모로가 감독상을 탔을 때 느꼈습니다. 구원의 밤이 황금나무상이구나.

    - 미치겠네요. 베스트 무비 십 년 차 고인물 유저입니다. 우리나라 영화가 드디어 황금나무상을 타네요.

    - 그러게요. 감독상, 연기상은 탄 적이 있는데 그랑프리인 황금나무상은 처음이네요.

    - 구원의 밤 대단합니다.

    - 최병철 감독님. 은퇴 번복 축하드립니다. 요즘은 백세시대인데 은퇴라니요.

    - 하하하. 그렇네요. 아직 정정하시니 좀 더 현장에서 활동하시는 어른으로 남아 주셨으면 합니다.

    - 다들 최병철 감독님에게 시선이 가 있지만 저는 레전드 필름이 더 대단한 거 같습니다.

    - 그러게요. 레전드 필름도 완벽하게 부활했네요. 몇 년간 작품을 하나도 못 내더니 말입니다.

    - 배우 소속사 대표가 레전드 대표로 이름을 올렸을 때 이거 망하는 거 아닌가? 했는데 말입니다.

    - 그 기사가 처음 떴을 때 여기도 우려의 목소리가 컸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랬고요.

    - 그러게요. 서이렌이 주인공이라는 말에 끼워팔기냐며 욕도 많이 했는데 아니었네요.

    - 오늘 너무 기분이 좋네요. 구원의 밤을 한 번 더 봐야겠습니다.

    - 벌써 예매율이 치솟고 있네요. 1위 찍었어요.

    - 대박이네요. 진짜 천만 가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 황금나무상 탔습니다. 이건 백 프로 천만 갑니다. 안 가면 제 손에 장을 지지겠습니다.

    * * *

    칼레 영화제 폐막식이 성대하게 막을 내렸다.

    최병철 감독은 배가 고프다며 집에 가고 싶다고 했지만, 집에 갈 수는 없었다.

    애프터 파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박진숙도 구원의 밤 스태프 자격으로 애프터 파티에 참석했다.

    이 주일간의 긴 영화제 일정이 끝나고 모두의 얼굴에서 만족감이 묻어났다.

    최병철 감독은 케인 마르티네스를 비롯한 수많은 영화계 인사들에 둘러싸여 축하 인사를 받고 있었다.

    민정혜 팀장과 민영혜 통역사가 각자 영어와 프랑스어 통역을 해 주느라 그의 옆에 꼭 붙어 있었다.

    우리는 한가롭게 파티장에 모여 샴페인을 마시며 최 감독님의 팬 사인회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훤칠하게 생긴 외국인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는 시청 앞 돈키호테의 감독인 대니 라모로였다.

    “잠깐 앉아도 될까요?”

    그는 영어를 잘 못하는 건지 어색한 발음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그러자 서이렌이 자신 옆의 의자를 내주며 입을 열었다.

    “그럼요. 감독님. 여기 앉으세요.”

    그녀의 입에서 유창한 불어가 나오자 대니 라모로 감독의 눈이 커졌다.

    우리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이렌 씨가 불어도 할 줄 알았어요?”

    모두가 놀라는 와중에 나는 지난 이 주간 민영혜 통역사와 내내 붙어 다닌 서이렌을 떠올렸다.

    그새 불어까지 마스터한 건가?

    그때 내 눈에 의자에 앉은 대니 라모로 감독의 얼굴이 보였다.

    대니 라모로 감독의 눈이 오직 한 사람, 서이렌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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