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44화 (145/261)
  • #144화. 영화제 첫 공개

    새빨간 레드카펫 위에 에메랄드빛 드레스를 입은 서이렌이 서자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주위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기자들은 서이렌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여기저기 카메라 셔터 터지는 들렸고 레드카펫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영화제 참석 경험이 많은 최병철과 심석현도 이렇게 레드카펫에 사람들과 기자들이 몰린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감독님. 서이렌 씨 인기가 대단합니다.”

    “기자들이 우리 이렌 씨한테만 몰려드는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

    “그럴 리가요.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허허. 이러다 우리까지 레드카펫을 길게 걸어야 할 것 같군.”

    “제가 옆에서 감독님을 부축하겠습니다.”

    “됐어. 나 그렇게까지 늙은이는 아니네.”

    “하하하. 그럼요. 아직도 정정하시죠. 현장도 제일 일찍 오시고 제일 늦게 퇴근하셨잖습니까.”

    심석현은 말을 하며 은근히 최병철 감독의 옆얼굴을 훑었다.

    “심 배우는 나를 왜 그렇게 보나?”

    “아. 들켰습니까?”

    “왜 그렇게 보는 건가?”

    심석현이 웃으며 답했다.

    “감독님의 은퇴작에 출연하게 된 걸 영광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 같습니다.”

    “뭐가 아닌 거 같다는 말인가?”

    “은퇴하시기엔 아직 이릅니다.”

    최병철은 웃으며 레드카펫을 걷고 있었지만 생각이 많아 보였다.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느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감독님은 최병철 감독님이십니다.”

    “이거 너무 띄워 주는데?”

    “계속 현장에 있어 주십시오. 배우로서. 후배로서. 그리고 한 명의 관객으로서 바라는 일입니다.”

    “허허.”

    최병철은 웃으며 대답을 피했지만, 그의 눈빛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은퇴작을 찍기 위해 돌아왔지만. 그도 구원의 밤을 찍으면서 내내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낀 것이다.

    어느새 길고 긴 레드카펫이 끝나고 구원의 밤 식구들이 포토콜을 가졌다.

    가운데 최병철 감독이 서고 바로 양쪽에는 서이렌과 심석현이 섰다.

    심석현의 옆에는 김건명이, 서이렌의 옆에는 박선호가 섰다.

    구원의 밤 식구들이 나란히 서자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이어졌다.

    열띤 취재 경쟁에 배우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서이렌만이 슈퍼스타처럼 계속 자세와 위치를 변경해 가며 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했다.

    드디어 모든 포토콜 촬영이 끝나고 플뢰르 극장에 들어간 구원의 밤 식구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대급으로 힘든 레드카펫이었습니다. 감독님은 괜찮으세요?”

    “난 괜찮다니까. 다만 눈이 좀 시리네. 카메라 플래시 때문에 눈이 시려.”

    “하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최병철과 배우들이 웃고 떠드는데 나와 박진숙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칼레 영화제로부터 받든 스태프 카드 두 개를 목에 건 우리는 레드카펫을 지나온 그들에게 물을 건넸다.

    “고생하셨습니다. 레드카펫 라이브 영상으로 보니 모두 화면에 잘 나오셨어요.”

    “그래? 요즘은 그런 것도 라이브 방송으로 내보내나 보군. 좋은 세상이야.”

    최병철이 신기해하자 박진숙 이사가 웃으며 말했다.

    “최 감독님이 한창 활동하셨을 때랑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런 것 같아. 현장에서도 새로운 장비 익히는 데 힘들었네.”

    그때 옆에 있던 서이렌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이제 익숙해지셔야죠. 더 활동하셔야 하니까요.”

    갑작스러운 서이렌의 말에 최병철이 고개를 돌렸다.

    “내가 더 활동한다고?”

    서이렌은 인형 같은 눈을 깜박이며 답했다.

    “아까 레드카펫 걸어오면서 심석현 배우님과 대화하셨잖아요. ‘은퇴하지 말고 계속 활동해 주세요.’라고요.”

    서이렌의 말에 심석현과 최병철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서이렌 씨. 그걸 다 들었어요?”

    “예. 다 들었습니다.”

    “우리 거리가 조금 있지 않았나? 기자들과 구경꾼들이 시끄럽게 떠들어서 안 들렸을 텐데?”

    심석현도 의아해했다.

    “혹시 이렌 씨 소머즈예요? 그게 어떻게 들리지?”

    심석현의 말에 김건명이 웃으며 말했다.

    “형님. 서이렌 씨는 소머즈 같은 거 모릅니다.”

    “응? 왜 몰라? 멀리서도 잘 들으면 소머즈 아니야?”

    “역시 옛날 사람이시네요. 소머즈는 우리 세대 히어로라고요. 서이렌 씨 세대는 원더우먼이죠.”

    “아. 그런 거였어?”

    구원의 밤 식구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화기애애하게 웃었다.

    나는 시계를 확인하고 웃고 있는 그들 앞에 나섰다.

    “자자. 그만들 웃으시고 이제 들어가시죠. 개막식이 이제 곧 시작합니다.”

    칼레 영화제에 익숙한 박진숙 이사가 이곳이 처음인 배우들을 극장 안으로 이끌었다.

    나는 제일 끝에 선 서이렌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옆에 붙은 나는 그녀만 알아들을 수 있게 작게 속삭였다.

    “이렌 씨. 사실은 다 알죠?”

    “제가 뭘 아는데요?”

    “소머즈. 잘 알잖아요.”

    서이렌이 큰 눈을 똥그랗게 뜨며 말했다.

    “모르는데요?”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할 거예요?”

    “무슨 소리예요? 저는 정말 몰라요.”

    “원더우먼도 린다 카터가 나오는 원더우먼만 아는 거 아닙니까?”

    “대표님이 생사람을 잡으시네요.”

    서이렌은 절대 모른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깜박거렸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절로 나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구원의 밤 식구들은 이미 극장 안으로 모두 들어가고 아무도 없었다.

    “어서 가요. 우리만 뒤처졌네요.”

    내가 서이렌을 재촉하는데, 갑자기 그녀가 내 옆구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뭐 하는 겁니까?”

    “어차피 여기 한국 사람도 없고, 아무도 안 보니까 팔짱 좀 낍시다.”

    “열 걸음만 걸으면 극장 입구인데요?”

    “그러니까 그 열 걸음 동안 팔짱 좀 낍시다.”

    서이렌은 내 팔에 그녀의 팔을 걸치더니 나를 잡아끌었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는데 그녀의 말대로 극장 로비는 사람들로 분주했으나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빨리 가요. 이러다 정말 늦겠어요.”

    나는 서이렌에게 이끌려 극장 안에 들어갔다.

    고작 열 걸음이었을 뿐인데 그녀와 팔짱을 끼고 걸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설레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가슴이 터질 것같이 기뻤다.

    * * *

    칼레 영화제 개막식 기사와 함께 구원의 밤 레드카펫 사진과 영상이 한국에도 떴다.

    - 서이렌 개이쁘네.

    - 와. 배우들 존멋. 서이렌은 오늘도 미쳤네.

    - 박선호만 얼음이야. 귀엽다. ㅋㅋㅋ

    - 심석현 오늘 너무 멋지다.

    - 서이렌 사랑해.

    - 박선호 대박이네. 신인이 첫 영화로 칼레 영화제 입성. ㄷㄷㄷ- 최병철 감독님 오늘 엄청 멋지시다.

    - 최 감독님도 저렇게 입으시니 배우 같으시네.

    - 서이렌만 딴 세상 사람 같다.

    - 프랑스 사람들이 놀라는 거 아님? 구원의 밤 최진이랑 본체인 서이렌은 너무 다른 사람이잖아요. ㅋㅋㅋㅋ- 심석현이랑 김건명은 나이 들수록 더 멋져진다.

    - 와우. 서이렌 미모.

    - 박선호!!!!!!!

    - 배우들 다 멋지다.

    - 심석현은 여유가 느껴지네. 역시 영화제 단골.

    - 와. 이렇게 배우들 보니까 구원의 밤. 한 번 더 보고 싶다.

    - 난 구원의 밤 벌써 3차 찍었음.

    - ㄴㄷㄴㄷ

    - 구원의 밤 예매율 다시 올라가더라.

    - 칼레 영화제 버프 받고 다시 슬금슬금 박스오피스 기어오르고 있음. 이러다 진짜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 최초로 천만 찍는 거 아닌지 모르겠음. ㅋㅋㅋ- 그럴 수도 있음. ㅋㅋㅋㅋ- 그럼, 서이렌은 한 해에 천만 영화 두 편인 거냐? ㅅㅂ 개도랐네.

    - 나비가 작년 12월 말에 개봉했지만, 올봄에 천만 찍었으니 가능한 일이네. 서이렌은 진짜 독보적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어.

    - 구원의 밤은 언제 상영하나?

    - 일곱 번째 날인가? 그럴걸.

    - 날짜도 럭키 세븐이네.

    * * *

    구원의 밤 첫 공개를 앞두고 플뢰르 극장에 사람들 몰려들었다.

    칼레 영화제의 경쟁 부분은 일반인들이 티켓을 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사전에 영화인들에게 배정된 티켓만으로도 이미 만석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우리는 스태프 카드를 단 두 장만 배정받았고, 나와 박진숙이 구원의 밤, 첫 공개에 함께하기로 했다.

    레드카펫 때보다는 힘을 뺐지만, 여전히 세련된 옷을 입은 감독과 배우가 극장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우리는 극장의 앞쪽의 배정된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여기까지 왔구나.

    불 꺼진 새까만 화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몇 달만 지나면 시한부 선고를 받은 지 삼 년째가 된다.

    길어야 삼 년을 산다고 했다.

    언제 인생이 끝날지 알게 되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나도 그랬다.

    그 당시 내 머릿속에는 끝을 향해 달려가는 카운트다운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삼 년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일어섰고 지금 여기에 앉아 있다.

    일 년만 더 살게 해 달라고 빌던 게 엊그제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으로 간사하다.

    신약이 효과를 보이자 생각이 또 달라졌다.

    일 년은 너무 짧다.

    십 년은 너무한 거 같고, 오 년만 채웠으면 소원이 없겠다.

    나는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내 인생의 배우를 만났습니다.

    그 배우와 좀 더 함께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속으로 소원을 되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느새 극장 안에 불이 꺼지고 새카맣던 화면에 불빛이 들어와 있었다.

    극장은 만석이었으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드디어 음악이 흐르며 구원의 밤이 시작했다.

    * * *

    극장 안에 들어가지 못한 스타탄생 식구들은 근처 커피숍에 들어앉자 수다를 떨었다.

    이락이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왜 제가 떨리죠? 너무 떨리는데요?”

    윤이슬과 서유림 매니저도 이락의 말에 동의했다.

    “락아. 나도 떨려. 이상해.”

    빈선예가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있는 김이솔에게 물었다.

    “이솔 씨는 하나도 안 떨리죠?”

    “저요?”

    “이솔 씨는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되게 많이 받았잖아요. 혹시 칼레 영화제에서도 상 받았어요?”

    “칼레 영화제에서는 못 받았어요. 그리고 저도 사람인데 떨리죠. 그땐 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아무것도 모를 때라 그냥 여기저기 끌려다닌 거밖에 없어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거였는지 당시엔 몰랐고요.”

    “김이솔 배우님은 혜성처럼 나타난 천재 배우였잖아요. 그때 진짜 멋졌어요.”

    이락과 윤이슬도 동감했다.

    “이솔 누나. 정말 대단해요.”

    “저도 언니 영화 보고 많이 울었어요.”

    “아. 아닙니다.”

    김이솔은 자신을 향한 칭찬 세례가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끝자리에 앉은 윤서혁 감독이 그런 김이솔을 보며 함께 얼굴이 붉게 물든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침 에스프레소를 받아 온 강진석이 엄지손톱만 한 잔을 내려놓으며 불만을 터트렸다.

    “이걸 대체 누구 코에 붙이라는 건지.”

    우연미가 그런 강진석을 보며 말했다.

    “그 말씀 하시면서 벌써 석 잔째 드시고 계신 건 아시죠?”

    설탕 한 봉지를 에스프레소에 털어 넣은 강진석이 잔을 들었다.

    “간에 기별도 안 가잖아.”

    또다시 에스프레소를 원 샷 한 강진석의 입가에 만족이 묻어 나왔다.

    “저러다 오늘 밤새시겠네. 무슨 에스프레소를 물 마시듯 그렇게 드실까?”

    우연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나저나 이제 곧 영화 끝날 시간 아닌가요?”

    빈선예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우연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끝날 시간입니다. 칼레 영화제는 끝나면 기립 박수로 영화가 대박인지 쪽박인지 알 수 있다던데.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요.”

    “구원의 밤은 당연히 대박이죠. 심심한데 우리 내기나 해 볼까요?”

    “무슨 내기요?”

    “구원의 밤이 몇 분이나 기립 박수를 받는지 내기해요. 난 십 분!”

    우연미가 먼저 십 분을 지르자 모두 앞다퉈 시간을 말했다.

    “너무 긴 거 아닌가요? 그렇게 박수 치다가 손아귀 나가요. 그래서 난 팔 분이요.”

    “팔 분도 너무 긴데. 오 분은 어때요?”

    윤서혁의 시선이 김이솔을 향했다.

    김이솔은 사람들이 내기를 거는 모습을 지켜보며 웃고 있었다.

    윤서혁이 용기를 내서 김이솔에게 말을 걸었다.

    “이솔 씨.”

    “예?”

    “이솔 씨는 구원이 밤이 얼마나 오래 기립 박수받을 거 같아요?”

    “저요?”

    김이솔이 윤서혁을 쳐다보자 윤서혁은 순간 몸이 굳었다.

    김이솔은 윤서혁이 고장 난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조용히 말했다.

    “저는 이십 분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