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43화 (144/261)
  • #143화. 프랑스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빈선예는 김진희를 훑었다.

    평소에 화려하게 꾸미고 다니는 김진희는 오늘은 웬일인지 집에서 대충 입고 나온 것 같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잠도 못 잔 건지 눈 아래 다크서클이 시커멓게 내려와 있었다.

    “우선 여기 앉으세요.”

    빈선예는 불안해 보이는 김진희를 의자에 앉히고 직원에게 따뜻한 차를 달라고 부탁했다.

    “드세요.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선예 씨.”

    김진희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봉투를 유심히 살펴보던 빈선예는 쓴웃음을 삼켰다.

    원세강이 악플러를 고소할 거라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설마, 그것 때문인가?’

    빈선예는 차는 손도 못 대고 있는 김진희에게 물었다.

    “김 실장님. 혹시 우리 이렌 씨한테 악플 남기셨어요?”

    악플이란 말에 김진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선예 씨도 알고 있었어?”

    “하. 진짠가 보네.”

    빈선예는 김진희와 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녀가 고소장을 받을 만큼 심하게 악플을 달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체 왜 그러셨어요?”

    “미안해. 내가 그때는 갤러리스 백화점 모델 빼앗기고 정신이 나갔었나 봐.”

    “모델이 안 된 지수연이 화나야지. 왜 김 실장님이 화풀이를 하신 거죠? 이해가 안 되는데요?”

    “…….”

    김진희는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거 줘 보세요. 대체 뭐라고 악플을 단 겁니까?”

    “이걸 보여 달라고?”

    김진희는 들고 있던 봉투를 몸 뒤로 숨겼다.

    “어차피 시간 지나면 다 알게 될 테니. 그냥 보여 주세요.”

    고심하던 김진희는 결국 봉투를 빈선예에게 건넸다.

    고발장에는 김진희가 서이렌에게 남겼던 악성 루머와 악플이 모두 적혀 있었다.

    그걸 본 빈선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김진희는 긴장하며 빈선예의 눈치를 살폈다.

    “이 루머 유포자가 김 실장님이었어요?”

    곽이석뿐만 아니라 유한자동차 3세까지 엮어서 루머를 퍼트린 장본인이 김진희라니 빈선예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 VIP 파티에서 유한자동차 대표 아들이 서이렌 씨랑 사진 찍는 거 보고 오해했어. 미안해.”

    “지금 장난하세요? 그날 우리 이렌 씨가 같이 사진 찍어 준 사람만 한 트럭이에요.”

    “정말 미안해. 할 말이 없다.”

    “이건 제 손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네요. 너무 많은 사람이 엮였잖아요.”

    빈선예는 선을 딱 그었다.

    이 루머를 퍼트린 악플러가 잡혔다는 기사가 떠야 소문이 없어질 터였다.

    “선예 씨. 나 좀 한번 봐주라. 나 좀 살려 줘. 나 진짜 실수로 그런 거야.”

    “실수라니요? 어떻게 실수로 사람한테 이렇게 악독한 짓을 합니까? 그리고 루머 때문에 피해당한 사람이 이렌 씨인데. 왜 저를 찾아오셨나요? 이렌 씨를 찾아가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건 아시죠?”

    김진희는 할 말이 없었다.

    빈선예는 더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거 가져가세요.”

    “선예 씨.”

    “아까도 말했지만 제 선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아시죠? 이건 제 약혼자와도 얽힌 문제라는 걸요.”

    빈선예의 말대로 그녀의 약혼자 곽이석도 이 루머의 피해자였다.

    심지어 유한자동차 3세와 곽이석은 대학교 동문이기도 했다.

    빈선예에게 고소장을 건네받은 김진희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죄를 지었으면 그 벌을 받으세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것뿐입니다.”

    빈선예는 망연자실한 김진희를 그곳에 내버려 두고 빠져나왔다.

    * * *

    스타탄생이 악플러를 고소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인터넷이 들썩거렸다.

    - 와. 드디어 고소하는구나.

    - ㅎㅇㅌ

    - 민사 가자. 다 털어.

    - 짜란다.

    - 여기에도 잡혀가실 분 한 트럭일 듯. ㅋㅋㅋ

    - 사이다. ㅋㅋㅋ

    - ㅊㄱㅊㄱ

    - 고소는 언제나 환영!

    - 악플러들 그놈이 그놈이라던데. 절대 선처해 주지 말길.

    - 민사로 가면 악플러들 피 말리겠네. ㅋㅋㅋ

    - 절대 선처 노노.

    - 서이렌 스캔들 터지자마자 몰려와서 루머 퍼트리던 것들. 다 집어처넣어.

    - 여기도 아직 악플 다는 사람들 있던데. 스본에 PDF 보내야 할 듯.

    - 기사 뜨자마자 여기도 댓글이 실시간 사라지는 중. ㅋㅋㅋ 이미 늦었다. 악플러들아.

    - 끝까지 가 보자.

    서이렌의 팬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악플러 고소에 응원을 보냈다.

    고소장을 받은 수많은 악플러들은 밤잠을 설쳤고, 그중 몇몇은 스타탄생 사무실의 전화번호와 위치를 확인했다.

    선처해 달라고 전화를 걸었으나 스타탄생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결국 견디다 못한 악플러들이 스타탄생 사무실까지 찾아왔다.

    김진희도 스타탄생 건물 앞에 서성이며 안에 누가 없는지 확인했다.

    그때 누군가 김진희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고소장 받고 오신 건가요?”

    넥타이를 매고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는 그를 보며 김진희는 당황했다.

    “누구세요? 변호사신가요?”

    “아뇨. 저도 고소장 받은 사람입니다.”

    정장을 입은 남자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소장을 꺼내 김진희에게 보여 줬다.

    ‘멀쩡하게 생긴 이 사람이 악플러라고?’

    김진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자 근처에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잘 차려입은 삼십 대 직장인, 교복을 입고 온 학생까지.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멀쩡한 사람들이었다.

    김진희는 자신이 이런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사무실에 아무도 없나 봐요. 우리가 올 줄 알고 튀었나?”

    “진짜. 이러는 게 어디 있습니까? 그게 무슨 악플이라고. 연예인이면 그 정도 댓글은 다 받는 거잖아요. 유난 떨고 있어. 진짜.”

    “악플러도 팬인데. 우리한테 이렇게 심하게 하면 대중이 돌아설 겁니다. 서이렌 이미지에 득 될 거 하나 없는데. 참나.”

    “학원도 째고 왔는데. 완전 짱나.”

    김진희는 정신 승리하는 악플러들을 보며 속이 타들어 갔다.

    * * *

    악플러 고소 기사를 낸 후, 스타탄생 식구들은 프랑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배우와 직원 할 것 없이 모두 떠나는 여행이었다.

    레전드 필름에서도 두 사람이 따라왔다.

    박진숙 이사와 민정혜 팀장이었다.

    민정혜는 박진숙 이사가 그녀가 맡았던 팀장 자리를 넘겨주며 키우고 있는 직원이다.

    박진숙의 함께 앉은 나는 그녀와 함께 칼레 영화제 일정을 확인했다.

    “숙소는 칼레 해변 근처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묵을 겁니다. 레전드 필름이 칼레 영화제에 초청될 때마다 묶었던 곳이에요. 호텔보다 좋을 거예요. 해변에서도 가깝고 독채를 우리만 쓰는 거라서 프라이버시도 보장되거든요.”

    “다행이네요. 계약은 길게 하셨죠? 영화제가 끝나면 NGB에서 리얼리티 촬영 스태프들이 올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길게 예약했어요. 그런데 프랑스에 오신 김에 예능 촬영까지 하고 가시려는 거죠?”

    “겸사겸사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박진숙과 일정표를 확인하던 내가 앞자리의 강진석을 불렀다.

    “형님. 이것 좀 같이 봐 주세요.”

    “뭔데?”

    나는 필름마켓 일정을 가리켰다.

    “필름마켓에 형님도 같이 갑시다. 박진숙 이사님이랑 민정혜 팀장님이 알아서 다 하실 테지만, 우리도 마켓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걱정하지 마. 내가 이래 봬도 경영학과 나온 사람이야.”

    강진석이 웃으며 박진숙에게 물었다.

    “거기 프랑스어는 못해도 상관없죠? 영어만 할 줄 알아도 문제없겠죠?”

    “그럼요. 여기 있는 민 팀장이 프랑스어도 곧잘 합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오. 민 팀장이 프랑스어도 하시는군요. 역시 우리 박 이사님이 인재를 잘 골라서 데리고 오셨네.”

    강진석이 자리로 돌아가자 이제는 빈선예를 불렀다.

    “레드카펫 의상은 모두 준비된 거죠?”

    “그럼요. 심석현 배우님과 김건명, 박선호 배우님 코디와도 상의해서 드레스 코드도 맞췄어요. 누구 하나 너무 튀면 안 되니까요. 감독님 의상은 제가 픽했고요. 레드카펫 준비는 모두 끝났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고마워요. 비행기 타기 전날까지 밤새며 일하셨죠? 고생하셨습니다. 칼레에 도착하면 푹 쉬세요.”

    “알았어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대표님이야말로 그만하고 눈 좀 붙이세요. 비행기 안에서 무슨 일을 한다고 그러세요.”

    “이제 다 정리됐어요. 저도 쉴 겁니다.”

    빈선예가 자리로 돌아가고 나와 박진숙이 눈을 마주쳤다.

    “그럼, 이제 우리도 정리할까요?”

    “원 대표님. 저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봐요. 피곤하네요.”

    “이제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쉬세요.”

    노트북을 접은 박진숙이 먼저 안대를 하고 곯아떨어졌다.

    금세 잠에 빠져든 그녀를 보며 나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도 노트북을 내려놓고 편하게 의자에 기댔다.

    너무 떨려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머리를 의자에 대자마자 어느새 나도 잠에 빠져들었다.

    * * *

    레드카펫 입장 구역에 구원의 밤 식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빈선예는 마지막까지 배우와 감독의 의상을 체크했다.

    심석현, 김건명은 보타이에 딱 떨어지는 정장을 입고 중년의 중후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최병철 감독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베레모와 안경을 썼다.

    평소에는 모자를 쓰지 않는 그는 오로지 촬영장에서만 베레모를 착용한다.

    하지만 빈선예가 의견을 내서 오늘 레드카펫에 최병철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인 베레모를 쓰고 입장하기로 했다.

    기존에 최병철이 쓰던 우중충한 쥐색 베레모가 아닌 진한 체크의 트렌디한 모자를 픽했다.

    최병철 감독의 하얗게 센 흰머리와 베레모가 잘 어울렸다.

    오늘을 위해 그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도 리폼했다.

    휘황찬란하게 바꾼 건 아니고, 그저 지팡이에 도색을 새로 하고 바니쉬를 칠한 정도였다.

    최병철 감독은 빈선예가 꾸며 준 모습에 흡족해했다.

    “내가 제일 잘나 보이겠는걸. 배우들이 예쁘게 나와야 하는데 말이야.”

    “너무 멋지십니다. 감독님.”

    “구원의 밤을 만든 감독님이신데 이 정도는 입어 주셔야죠.”

    심석현과 김건명이 웃으며 말했다.

    박선호도 노장 감독의 멋들어진 변신에 엄지를 들어 보였다.

    드디어 레드카펫 입장 시간이 다가오고 근처에 빌린 피팅 룸에서 의상을 갈아입은 서이렌이 등장했다.

    검은색 양복으로 맞춘 남자들과 달리 서이렌은 고급스러운 에메랄드빛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서이렌의 등장에 레드카펫 대기실이 술렁거렸다.

    서이렌을 에스코트해서 함께 대기실에 들어간 나는 순식간에 몰리는 사람들의 시선에 당황했다.

    이런 관심을 매일 매시간 받고 살다니.

    스타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군.

    나는 그녀를 구원의 밤 식구들이 있는 곳에 데려다주고 뒤로 물러났다.

    근처에 있던 박진숙 이사를 만난 내가 물었다.

    “우리 통역사는 어디에 있죠?”

    “저기 오시네요.”

    박진숙이 가리킨 곳에 건강하고 밝아 보이는 젊은 여성이 보였다.

    그는 민정혜 팀장의 언니인 민영혜였다.

    프랑스에서 유학 중인 그녀가 특별히 통역사로 초청된 것이다.

    그때 영화제 스태프가 다가와 시간이 다 됐다고 알려 줬다.

    나는 구원의 밤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레드카펫을 밟아 볼까요?”

    * * *

    시리도록 푸르른 9월의 하늘 아래 새빨간 레드카펫이 길게 깔려 있다.

    플뢰르 극장까지 깔린 이백 미터가 넘는 레드카펫은 영화인들에게 선망의 장소다.

    구원의 밤 식구들이 레드카펫에 서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거장 최병철 감독이나 심석현, 김건명, 박선호를 알아보고 놀란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일부였다.

    사람들이 놀란 이유는 단 하나.

    서이렌 때문이었다.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그녀가 에메랄드빛 드레스를 휘날리며 레드카펫 위를 걸었다.

    작열하는 오후의 태양 빛과 바람은 마치 그녀를 위한 연출 같았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드레스 자락이 휘날렸고 드레스에 박힌 보석이 황홀하게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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