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39화 (140/261)

#139화. 열혈팬

내 옆에 바짝 붙은 서이렌이 속삭였다.

“사랑의 굴레에 나왔던 설미영 배우님이네요. 맞죠?”

설미영은 전성기 때보다 살이 많이 빠지고 검정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그녀의 전매특허인 서늘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그런 거 같아요. 이렌 씨.”

“가서 인사드릴까요?”

“아뇨. 잠시만요.”

나는 서이렌을 말렸다.

그녀는 지금 과거의 톱스타 설미영이 아닌 대광그룹의 숨겨진 실세로 이곳에 왔다.

그녀가 자신이 설미영임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데 우리가 먼저 나서서 아는 척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설미영과 함께 있던 젊은 남자가 우리 일행을 보고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내 옆에 서 있는 서이렌을 유심히 보더니, 설미영을 이끌고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그때 빈선예가 놀라 외쳤다.

“임지형?”

“빈 팀장님. 저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대광그룹 둘째 아들 임지형인데요? 고등학교 후배고 동아리 후배이기도 해요. 이런 곳에는 잘 안 오는 범생이가 웬일이래?”

그렇구나. 임준학 동생이구나.

임준학과 달리 임지형은 어머니를 많이 닮아 서늘한 분위기가 풍기는 미남이었다.

어쩌면 선 굶은 미남인 임준학보다 임지형이 배우로서는 더 매력 있는 얼굴이었다.

어느새 우리 앞으로 다가온 임지형이 서이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서이렌 씨. 저는 임지형이라고 합니다. 팬입니다. 정말 좋아합니다.”

임지형은 서이렌을 향해 수줍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서이렌은 예의 있는 미소를 보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서이렌입니다.”

임지형은 서이렌을 보며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서이렌의 모든 팬이 그렇듯 그도 열광하는 스타 앞에서는 재벌가 아들이 아닌, 그냥 한 사람의 팬일 뿐이었다.

서이렌은 여전히 자신의 손을 잡고 놓지 않는 임지형의 손을 매너 있게 빼서 그의 곁에 서 있는 설미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이렌에게 설미영을 아는 척하지 말라고 했던 내가 나섰다.

“안녕하세요. 저는 스타탄생 대표 원세강입니다. 이쪽은 대광그룹 둘째 아드님인 임지형 씨 맞죠?”

“어떻게 아셨나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함께 오신 분도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임지형 씨?”

여전히 서이렌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서 있는 임지형이 설미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은 저의 어머님이십니다.”

“그러셨군요. 너무 젊어 보이셔서 이렇게 장성한 아들이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스타탄생 대표 원세강입니다.”

설미영은 조용히 웃으며 내 인사를 받았으나 입은 열지 않았다.

설미영이 눈치를 주자 임지형은 울상인 얼굴로 서이렌을 보며 말했다.

“더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 제가 갈 곳이 있어서요.”

“아니에요. 일 보셔야죠.”

“다음 기회에 꼭 다시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예.”

서이렌이 어색하게 웃으며 ‘예’라고 대답했다.

설미영과 임지형이 사라지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빈선예였다.

“와. 우리는 안 보이나 봐요. 심지어 나는 선배인데. 나도 몰라보네.”

빈선예의 말에 함께 투명 인간이 됐던 윤이슬과 김이솔이 웃음을 터트렸다.

서이렌은 이런 팬은 자주 있었다며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이상하게 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뭐지 저놈은?

나는 설미영에게 끌려가면서도 계속 서이렌을 돌아보는 임지형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 * *

갤러리스 백화점의 VIP 행사가 끝나고 일주일 뒤, 나는 정식으로 모델 계약을 체결했다.

서이렌, 윤이슬, 김이솔.

세 사람을 모델로 기용한 갤러리스 백화점은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세 사람의 특징을 살려 광고 기획을 시작했다.

화려한 톱스타 그 자체인 서이렌.

강단 있고 카리스마 있는 윤이슬.

지적이고 조용한 매력의 김이솔.

함께 미팅을 진행한 광고 기획자는 좋은 기획안이 나올 것 같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계약 건을 마무리 짓고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데 강진석이 사무실로 왔다.

“형님. 이락 배우님은 잘 갔나요?”

“응. 우재한테 연락이 왔는데 방금 괌으로 가는 비행기에 탔다더라.”

이락은 나만의 마돈나가 끝나고 종방 여행을 떠났다.

나만의 마돈나는 상반기 전체 드라마에서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고 KBC에서 포상 휴가를 보내 준 것이다.

“이번에 우리 락이가 뜬 거보다 우 작가님이 훨씬 많이 떴다.”

“벌써 세 번째 홈런이니까요.”

“와. 생각해 보니 그동안 망한 작품이 하나도 없네?”

우연미는 시어머니의 남자, 마네킹 그리고 나만의 마돈나까지 3연타석 홈런을 기록 중이다.

내 생각으로는 우연미는 아직도 보여 줄 게 많았다.

막장극, 복수물, 로맨스까지 한계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세강아. 우 작가님은 포상 휴가에 안 따라가셨지?”

“글 쓰는데 너무 힘드셨다고 당분간 푹 쉬신대요.”

우연미는 남자 친구인 김지성과 단둘이 여행을 간다며 내게 찾지 말라고 당부의 말을 전하고 떠났다.

강진석과 한참 대화를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저 레전드의 박진숙입니다.]

“예. 박 이사님.”

레전드의 터줏대감 박진숙이었다.

그녀는 최근에 팀장에서 이사로 초고속 승진을 했다.

[영화제 출품을 모두 마쳤습니다.]

“시간이 촉박했을 텐데 고생하셨습니다.”

[칼레 영화제에서는 규정을 변경해 줄 테니 꼭 출품해 달라는 연락까지 했어요. 한동안 작품 활동이 없으셨던 최병철 감독님의 은퇴작이라니까 집행 위원장이 몸이 달았더군요.]

칼레는 세계 3대 영화제 중의 하나로 프랑스의 도시 항만 도시인 칼레에서 9월에 영화제가 열린다.

“제가 내일은 레전드로 출근할 겁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가서 듣겠습니다.”

[그러세요. 바쁘실 텐데 이만 전화 끊겠습니다.]

내가 전화를 끊자 강진석이 쪼르르 달려왔다.

“구원의 밤 출품했대?”

“예. 가능한 영화제에는 일단 모두 출품을 마친 상황입니다.”

“이거 우리 작품이라서가 아니라 진짜 기대되는데.”

“아무래도 그렇죠? 저도 이렇게까지 영화가 잘 나올 줄 몰랐거든요. 시작할 때는 일정이 너무 촉박해서 개봉 일정만 맞춰 보자. 이 생각뿐이었는데 영화가 잘 나오니까 흥행 기록 좀 세워 보자고 바뀌더니. 이제는 영화제에서 상도 탔으면 좋겠다고 바뀌었네요. 제가 아무래도 욕심쟁이가 된 거 같습니다.”

“야. 네가 무슨 욕심쟁이야? 네가 욕심쟁이면 세상 사람들은 다 스크루지에 놀부겠네.”

“하하. 그 정도는 아니죠.”

“뭐가 그 정도가 아니야? 너 이제 그 카니발 좀 그만 타고 다녀. 내가 새 차 뽑아 줄 테니까.”

“회삿돈으로요? 아니면 형님 돈으로요?”

“무슨 소리야? 회삿돈으로 사야지. 내가 돈이 어디 있어?”

“제가 형님 월급 주는 사람입니다. 지난달에 드린 보너스도 있잖아요?”

“안 돼. 그 돈 이미 없어. 대출금 갚았단 말이야.”

강진석이 찡찡대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양반이 저렇게 귀여운 짓도 할 줄 아셨네.

나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알았으니 그만 하세요. 꿈에 나올까 봐 두렵습니다.”

“그래? 그럼, 다음 보너스는 좀 더 주라. 나 대출금 아직 많이 남았어.”

강진석이 아까처럼 얼굴을 또 찡그리자 나는 식겁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는 할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 볼게요.”

나는 황급히 가방을 챙겨 들고 일 층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일 층이 꽃으로 꽉 차 있었다.

그냥 꽃바구니 하나가 아니라 꽃으로 길을 만들어도 될 정도로 많은 분량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이선아에게 다가갔다.

“선아 씨. 이게 무슨 일인가요?”

“저도 아침부터 깜짝 놀랐네요. 서이렌 씨 팬이 보낸 꽃입니다. 여기 카드가 있어요.”

이선아가 내게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가 담긴 봉투 겉면을 본 내 미간에 주름이 패었다.

[To. 나만의 마돈나 - 서이렌]

나는 당장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임지형입니다.

지난번 갤러리스 백화점에서 봤죠?

저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서이렌 씨를 처음 뵌 그 날 이후로 서이렌 씨 생각밖에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일 꽃을 봅니다.

그나마 꽃을 보고 있으면 이렌 씨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아 살 것 같습니다.

제가 보고 있는 꽃을 이렌 씨께도 보냅니다.

부디 다시 한번 만나 뵙기를 소망하며.

임지형 드림]

참으로 낭만적인 고백이었다.

당신이 그리워서 꽃을 매일 보고, 그 꽃을 보낸다고 쓰여 있는데.

보낸 꽃이 스타탄생 건물 일 층 전체를 반은 채울 양이다.

어느 누가 이 고백에 넘어가지 않겠는가?

카드를 읽지도 않은 이선아도 이미 반쯤은 넘어간 듯 보였다.

돈지랄이지.

이것도 다 돈이 많아서 가능한 이벤트다.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이선아에게 말했다.

“이걸 여기에 계속 둘 수는 없고. 기부합시다.”

“이걸 전부요?”

“걸리적거리잖아요. 어디든지 보내야죠.”

“그럼, 어디로 기부할까요?”

“스타탄생이 후원하는 보육원이 있지 않습니까? 마침 이번 주 금요일이 정기 후원 일이니까. 후원 날짜를 조금 당기고 이 꽃을 함께 보내죠.”

“예. 그렇게 할게요. 아이들도 좋아할 거예요. 그런데 다 보내실 건 아니죠?”

“당연히 다 보내야죠.”

이선아는 알았다고 말하며 입을 쭉 내밀었다.

나는 표 나게 서운해하는 이선아의 책상 위에 꽃바구니를 하나 올려놨다.

“이건 여기에 남겨 둡시다.”

이선아는 그제야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밖으로 나가려는데 이선아가 나를 잡았다.

“그런데 대표님. 서이렌 씨한테 온 꽃인데. 서이렌 씨께도 하나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사진이라도 찍어서 보내야 할 거 같은데요?”

사진은 무슨.

순간 이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내가 왜 이러지?

나는 핸드폰을 들고 카메라 앱을 켰다.

“내가 찍어서 보낼게요. 우선 보육원 쪽에 연락해 보실래요?”

“예. 대표님.”

이선아가 자리로 돌아간 사이 나는 핸드폰 카메라를 들어 꽃밭을 향했다.

카메라 앵글 사이로 보이는 꽃들이 그렇게 재수 없어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꽃다발 속에서 꽃 한 송이를 꺼내 손에 들고 그것을 카메라에 담았다.

허공에 뜬 빨간 장미 한 송이.

그제야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역시 한국은 여백의 미지.

이거야.

나는 그대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조금 흔들리고 초점이 안 맞은 거 같지만 상관없다.

나는 방금 찍은 사진을 서이렌에게 보냈다.

[이렌 씨. 사무실에 팬이 보낸 꽃이 도착했습니다. 사진 찍어서 보내요. 꽃은 치울 테니까 굳이 사무실에 올 필요는 없습니다.]

꽃 사진과 문자를 서이렌에게 보낸 나는 그제야 웃으며 사무실을 나섰다.

* * *

분노한 김진희 실장이 책상을 내리쳤다.

“이게 말이 돼?”

김진희 실장 앞에 고개 숙인 직원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갤러리스 모델이 날아갔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강하나 다음은 지수연이라고 했잖아. 이미 업계에서도 갤러리스 모델은 LOK 여배우가 계속하게 될 거라고 소문이 자자한데. 물 먹었다니. 이게 말이 돼? 헛소문 아니야?”

직원이 눈치를 보며 조용히 답했다.

“갤러리스 광고 만드는 회사에서 나온 소문입니다. 확실한 거 같아요.”

“그럼, 대체 우리 말고 누가 캐스팅된 건데?”

“저. 그게…….”

직원이 말을 못 하자 김진희가 다시 한번 책상을 내리쳤다.

“빨리 말해. 안 그럼, 내가 광고 대행사에 직접 전화할 테니까.”

“서이렌이요.”

“서이렌이라고?”

서이렌이라는 이름을 들은 김진희 실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직원은 거기서 끝내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윤이슬이랑.”

“윤이슬? 걔는 또 왜 나와?”

“마지막으로…….”

“또 누가 더 있어?”

“김이솔까지 총 세 명이요.”

“김이솔은 또 누구야?”

“이자현이랑 같이 데뷔했던 배우요. 기억 안 나세요? 그때 사막이란 영화로 전 세계 영화제에서 연기상을 탔던 천재 배우요.”

“하…….”

김진희 실장은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이미 책상을 두 번이나 내리쳐서 주먹은 새빨개져 있었다.

김진희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쪽수로 밀어붙였다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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