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38화 (139/261)

#138화. 아가씨를 부탁해

내가 대표실에서 나오자 김원필 비서가 따라붙었다.

김원필은 내 옆에 서더니 웃으며 말했다.

“사업 수완이 좋으시네요.”

“모델 계약 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단 오 분간의 프레젠테이션으로 문 대표님의 마음을 움직이셨네요. 세 명 모두를 모델로 계약하게 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과찬이십니다. 사실 까놓고 말해서 문 대표님의 저에 대한 호감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쉽게 성사시키지 못했겠죠.”

김원필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까지 계산하고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 오신 게 아니었나요? 가방 가지고 대표실에 들어오셨을 때부터 이상하다 했습니다.”

나는 작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너무 속 보이는 행동이었을까요? 갤러리스 백화점의 대표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귀한 자리라서 그냥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 귀한 자리라면 충분히 만드실 수 있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이시죠?”

“모른 척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진짜로 모르는 겁니까?”

김원필이 나를 보며 팔짱을 끼었다.

나는 그의 눈빛을 보며 속으로 아차 싶었다.

“빈 팀장님께는 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역시 이럴 줄 알았습니다. 선예가 갤러리스 백화점의 유일한 상속녀인 거 다 알고 계셨던 거죠?”

“예.”

“언제부터인가요?”

“처음부터 알았습니다. 스타탄생에서 같이 일할 때부터요.”

내가 솔직하게 답하자 김원필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선예가 그 일을 계속하는 게 원 대표 때문이었나?’

내가 솔직하게 말하자 김원필도 속에 있는 말을 꺼냈다.

“선예가 연예계에 환상을 품고 다니던 회사도 때려치우고 LOK에 입사했을 때까지만 해도 날이 갈수록 표정이 나빠졌습니다. 그래서 한때의 외도가 곧 끝이 나겠다고 생각했었죠.”

김원필의 말이 맞다.

내가 본 미래에서도 빈선예는 LOK에서 오래 일하지 못하고 퇴사하고 바로 어머니의 사업을 물려받았다.

아마도 나와 서이렌을 만나고 그녀의 인생이 지금처럼 바뀌었으리라.

나는 김원필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서 빈선예를 위하는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빈 팀장님이 계속 일하고 싶다고 하면 저는 말릴 수가 없습니다. 누구보다 빈 팀장님이 필요한 건 저니까요. 대신 일하는 동안에는 빈 팀장님이 행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빈 팀장님뿐만 아니라 스타탄생의 모든 직원과 배우들이 행복한 것이 제 삶의 낙입니다. 믿어 주세요.”

김원필의 입꼬리가 잠시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는 미소를 지우고 이내 평소처럼 딱딱한 얼굴로 돌아왔다.

“믿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지켜본 원 대표님은 그런 분이시니까요.”

김원필이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김원필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우리 선예를 잘 부탁합니다.”

김원필 비서와 이야기를 잘 끝낸 나는 그와 함께 옥상 정원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나간 빈선예가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혼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함께였다.

* * *

김원필 비서가 빈선예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아가씨. 여기 계셨습니까?”

빈선예가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김원필은 아무 생각 없이 빈선예에게 다가섰다.

나는 앞으로 나서는 김원필의 팔을 잡아챘다.

놀란 김원필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김원필을 보며 빈선예 옆에 서 있는 김진희 실장을 슬쩍 쳐다봤다.

김원필은 그제야 놀란 얼굴로 입을 닫았다.

김진희는 갑자기 빈선예를 아가씨라며 부르며 나타난 남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21세기에 무슨 아가씨야? 그런데 저 사람 어디에서 봤더라? 비서실 팀장인 거 같은데…….’

김원필을 보던 김진희는 그제야 옆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눈이 가늘어졌다.

김진희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스타탄생 원세강 대표님이시네요. 오랜만에 봬요.”

“LOK 김진희 실장님도 오셨군요.”

나는 일부러 그녀의 소속을 밝혀 김원필에게 알려 줬다.

김원필은 LOK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대표님. 스타탄생은 대체 초대장을 몇 장이나 받은 건가요?”

“그게 왜 궁금하시죠?”

“LOK도 초대장을 두 장밖에 못 받았는데. 스타탄생은 대표뿐만 아니라 일개 팀장까지 이곳에 온 게 이상해서요.”

김진희는 일부러 빈선예를 노려보며 ‘일개 팀장’이라는 단어를 힘줘 말했다.

김진희는 이런 곳에서 빈선예를 만난 것이 반갑지 않아 보였다.

내가 LOK에서 일할 때부터 김진희는 이런 사람이었다.

한국 패션을 이끌어 가는 유명인사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그것을 권력으로 사용하는 사람.

하지만 그녀가 유명인사들과 친분을 쌓게 된 건 그녀의 힘이 아니라 그녀가 케어하는 LOK의 톱스타들 때문이란 걸 왜 모를까.

나는 김진희 실장에게 무시당하는 빈선예를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선예는 자신이 누구라고 끝까지 밝힐 생각이 없어 보였고, 김진희는 사석에서 빈선예를 만나면 계속 이런 식으로 힘들게 할 사람이다.

결정을 내린 나는 빈선예를 가리키며 김원필 비서에게 말했다.

“김 비서님. 이분이 바로 김 비서님이 찾으시던 RVIP이십니다.”

김원필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예?”

Royal Very Important Person.

VIP, VVIP보다 높은 개념이다.

갤러리스 백화점이 VIP의 레벨을 나눠서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김원필은 그제야 내 말을 알아듣고 빈선예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회원님. 저희가 RVIP 회원님들은 따로 모시고 있어서요. 함께 가시지요.”

“예. 뭐, 그러죠.”

빈선예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는 김진희 실장을 살피며 김원필의 앞으로 다가갔다.

김진희는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몰라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빈선예가 갤러리스 RVIP라고? 그게 말이 돼? RVIP는 돈을 많이 쓴다고 아무나 올려 주는 게 아닌데. 이상하네. 말도 안 돼.’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상황 파악이 모두 끝난 빈선예는 김원필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엊그제 도나텔로의 얀 필립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여의도 갤러리스 백화점에 입점하는 일 때문에요.”

“맞습니다. 회원님께서는 디자이너 얀 필립과 전화 통화도 하시는 사이군요.”

“지난번 패션 위크에 갔을 때 친해졌어요.”

빈선예가 방금 한 말은 거짓이 없는 진실이다.

빈선예는 얀 필립과 만난 이후로 그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갤러리스 백화점의 입점 문제까지 논의하는 사이인지는 나도 처음 알았다.

김진희는 빈선예와 김원필의 대화를 들으며 손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얀 필립이랑 친하다고? 그래서 RVIP가 된 거야?’

나는 온몸을 부르르 떠는 김진희를 놔두고 빈선예와 김원필에게 말했다.

“이제 곧 행사 시작입니다. 빨리 올라가 보죠.”

우리는 에스컬레이터 앞으로 다가섰다.

빈선예가 김진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파티 잘 즐기다 가세요. 다음에 또 봬요. 실장님.”

“……”

김진희는 얼굴이 굳은 채 빈선예의 인사에 답을 못했다.

* * *

옥상 정원에 도착하자 김원필이 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모델 계약 건은 이번 주 내에 다시 만나서 이야기하는 걸로 합시다.”

“예.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김원필은 빈선예와 눈을 마주치더니 백화점 임원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와 빈선예는 스타탄생 직원들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빈선예는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계속 주저했다.

아까의 일로 내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음을 깨닫게 된 거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괜히 화제를 돌렸다.

“모델 계약은 잘될 거 같아요. 문영란 대표님이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렇죠. 우리 이렌 씨뿐만 아니라 윤이슬, 김이솔 배우님까지 합세했잖아요. 그런데 이솔 씨를 어떻게 설득하신 거예요?”

“설득이요?”

“이솔 씨는 아티스트 노선이 아닌가요? 백화점 모델을 한다고 할 것 같지 않아서요.”

“김이솔 배우님은 자신이 아티스트 노선이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요? 난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김이솔의 유일한 필모그래피가 사막이다.

대학생 때 찍은 저예산 영화가 있긴 하지만 상업 영화는 사막뿐이다.

사막이 예술성이 있는 영화라고 해서 그녀가 그런 영화만 찍는 아티스트 노선이라는 것은 어폐가 있다.

“난 이솔 씨가 말수도 적고 차분해서 그런 스타일인 줄 알았죠.”

“아닙니다. 제가 이솔 배우님과 앞으로의 활동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어요. 이솔 배우님은 밝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더라고요. 첫 작품이 사막이라서 사람들이 그 이미지에 이솔 배우님을 가둔 거 같았어요. 그래서 차기작은 사람들의 편견을 깨는 작품을 선택할 겁니다. 그 시작이 갤러리스 백화점 모델 일이 될 겁니다.”

빈선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미 생각하고 계신 게 다 있으시네요.”

“제가 함께하자고 붙잡았는데 스타탄생과 계약하길 잘했다는 소리는 들어야죠.”

“역시 우리 대표님이야.”

빈선예가 웃으며 내 옆구리를 쳤다.

“왜 이렇게 손이 맵습니까?”

내가 옆구리를 붙잡자 빈선예가 눈을 크게 뜨고 놀라 외쳤다.

“많이 아파요? 병원에 안 가 봐도 되겠어요?”

나는 얼굴까지 빨개져서 당황해하는 빈선예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농담한 거예요. 저 괜찮습니다.”

“아. 진짜. 왜 사람을 놀리고 그래요? 간 떨어질 뻔했다고요.”

빈선예는 손버릇인지 그 말을 하며 내 가슴을 때렸다.

아. 이번엔 진짜 아픈데.

나는 쓰린 가슴을 매만지며 빈선예에게 말했다.

“어서 갑시다. 다들 우리만 기다리고 있네요.”

* * *

갤러리스 주체 VIP 파티는 꽤 다채로웠다.

VIP들이 모인 파티라고 해서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던 고상하고 척하는 분위기를 예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일이 있어서 먼저 떠난 강진석에게 미안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

테이블에 빙 둘러앉은 스타탄생 식구들은 저녁 식사를 하며 여름밤의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나는 시원해진 밤공기에 양복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고 셔츠 소매를 걷었다.

그때 서이렌의 손이 쓱 하고 들어오더니 내 팔목을 잡았다.

“???”

깜짝 놀란 내가 서이렌을 바라봤다.

서이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와. 정말 몸이 차갑네요.”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빈선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렌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대표님이 몸이 차가워서 어릴 때 별명이 냉장고였대요. 그런데 진짜로 차가워요.”

“그래요?”

빈선예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내게 다가와 내 팔목을 붙잡았다.

“어머. 진짜네. 대표님 이런 사람이었어요? 따뜻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차가운 남자였네.”

나는 두 여자에게 팔목을 붙잡힌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느새 다가온 윤이슬도 슬며시 손을 내밀더니 남은 부위를 잡았다.

“뭐 하는 겁니까? 사람들이 보고 웃겠네요.”

내가 다시 옷을 입으려고 하자 바로 옆자리에 앉은 김이솔의 손이 은근슬쩍 옆구리를 파고들어 왔다.

나는 놀란 눈으로 김이솔을 쳐다봤다.

설마? 아니죠?

김이솔 배우님은 이런 유치한 짓 하지 않으실 거죠?

하지만 내 예상이 무참히 무너져내렸다.

눈을 똥그랗게 뜬 김이솔이 정중하게 물었다.

“저도 한 번만 만져 봐도 될까요?”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냥 내 팔을 내밀었다.

김이솔은 내 팔목을 슬쩍 만지더니 재빨리 손을 떼고 서이렌과 두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누굴 탓하겠는가?

내 별명이 냉장고였다는 걸 서이렌에게 말한 내 탓이다.

양복 재킷을 챙겨 입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내 옆에 서이렌과 빈선예가 따라붙었다.

“왜들 따라오는 겁니까?”

“대표님은 어디 가시는데요?”

“소화도 할 겸 정원이나 한 바퀴 돌아보려고요.”

“그럼, 나도 산책할래요.”

“나는 이렌 씨 따라서 산책하러 가요. 대표님 따라가는 게 아니라요.”

어느새 윤이슬과 김이솔도 일어서서 뒤에 붙었다.

갑자기 내가 여자들을 뒤에 주렁주렁 매달고 옥상을 돌아다니는 꼴이 되고 말았다.

“대충 봤으니 그만 갈까요?”

내가 고개를 돌리자 중년의 여인과 젊은 남자 일행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나이가 있어 보였지만 아직도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인과 그녀와 함께 온 이십 대 중반의 깔끔하게 생긴 남자였다.

남자는 처음 보지만 여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과거의 스타, 설미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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