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36화 (137/261)

#136화. VIP 파티(1)

나는 시나리오를 덮고 멀리 밀어 놨다.

오아시스은 내게는 애증의 작품이다.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사막의 감독인 김기하는 그 이후로도 잘나가고 있다.

만드는 영화마다 흥행은 별로였지만, 영화진흥협회 이사를 맡으며 영화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또한 한국에서의 흥행은 체면치레를 했을 뿐이었지만, 유럽의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었다.

그에 대한 기괴한 소문은 영화판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나 해외에서 대접받는 유명 감독에게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시나리오를 집어 들었지만, 갑자기 볼 마음이 싹 사라졌다.

나는 쌓아 놓은 시나리오를 밀어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서이렌은 전화벨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렸다.

식탁 위에 있는 빈선예의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빈 팀장님. 전화 왔어요.”

본인 방에 있던 빈선예가 달려 나와 울리는 핸드폰을 들었다.

핸드폰에 찍힌 번호를 본 빈선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 비서님이 무슨 일로 전화를 하신 거지?”

빈선예는 방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예. 접니다.”

[아가씨. 오랜만입니다.]

“그 아가씨라는 호칭 좀 그만 쓰세요. 오글거려요.”

[대표님께서 싫어하실 텐데요?]

“그럼, 우리 엄마 앞에서만 그러든가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김 비서님이 웬일로 전화를 다 주셨어요?”

[할 말이 있어서 전화했죠.]

“혹시 엄마한테 무슨 일 있어요?”

[없습니다. 대표님은 정정하십니다.]

“그럼, 왜요?”

[이번 주 금요일이 무슨 날인지 모르십니까?]

빈선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책상 위의 달력을 확인했다.

8월 18일 금요일.

달력을 확인한 빈선예가 놀라 외쳤다.

“와! 엄마 생신이네요. 이걸 까먹고 있었네. 김 비서님이 전화 안 주셨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역시 제가 전화하길 잘했죠?]

“예. 큰일 날 뻔했어요.”

[금요일에 갤러리스 백화점에서 VIP들을 초대해서 파티를 열 겁니다.]

“무슨 VIP 파티까지 해요?”

[여의도에 갤러리스 백화점이 새로 개점한 건 아시죠?]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기존 백화점의 틀을 깬 신선한 건물이더라고요? 타워형 구조에 전면 유리를 설치해서 바깥이 훤히 다 보이는.”

[갤러리스에 완전히 관심을 끊은 건 아니시군요. 그럼, 어디서 VIP 파티를 열지 그것도 아시겠네요?]

“아. 여의도 백화점 홍보 겸 생일 파티를 하시려는 거구나.”

[아셨으니 참석하실 거죠?]

“나 그런 번잡한 자리는 싫어하는 거 알잖아요.”

[그래도 와야 할걸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갤러리스 백화점 VIP 말고도 스타들도 초대를 할 겁니다. 톱스타들이 주로 초대되죠.]

스타를 초대한다는 말에 빈선예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제가 잘 아는 사람도 초대하셨나 보네요. 누군가요?”

[글쎄요? 누굴 초대했을까요?]

“제가 한번 맞춰 볼까요? 우선 구원의 밤으로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여신 오브 여신 서이렌. 그리고…….”

[또 있나요?]

“요즘 핫한 라이징 스타 이락과 윤이슬 그리고…….”

[더 있어요?]

“그럼요. 더 있죠. 유학을 마치고 화려하게 돌아온 김이솔.”

[김이솔? 몇 년 전에 외국에서 연기상 휩쓸었던 그 김이솔을 말하는 겁니까?]

“맞아요. 그 김이솔 배우님을 말하는 거예요.”

[김이솔도 스타탄생 배우였나요?]

“모르셨어요?”

[몰랐습니다. 귀국한 것도 몰랐습니다.]

“아티스트 노선이라서 서이렌 씨처럼 화려한 언론 플레이를 하지 않아서 그래요.”

[그럼, VIP 파티에 오려고 하겠습니까?]

“혼자는 좀 그런데 스타탄생 배우들이 총출동할 테니 괜찮을 거 같아요. 파티는 백화점 옥상에서 열 거죠? 보니까 돔이 반쯤 뒤덮은 옥상이던데요?”

[그런 것도 챙겨 봤나 보네요. 맞습니다. 야외에서 열 겁니다.]

“아까 내가 말한 스타탄생 배우들 모두 초대해 줘요. 그럼, 나도 갈게요.”

[안 해 주면요? 난 사실 서이렌이랑 이락, 원세강만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원 대표님도 초대하시려고요?”

[대표님이 좋아하십니다.]

“정말요? 엄마가 우리 원 대표님을 좋아한다고요?”

[스타메이커라는 예능의 열혈 시청자셨습니다. 대표님 성화에 못 이겨서 저도 문자 투표까지 했어요.]

“우리 엄마 너무 귀엽다. 오케이. 콜. 우리 대표님이 원래 그런 자리 싫어하시는데 내가 꼭 모시고 갈 테니 우리 다 불러 줘요. 물론 나도 갑니다.”

전화기 너머로 김 비서의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선예 씨가 원하는 대로 스타탄생 배우들한테 모두 초대장 보낼게요.]

“고마워요. 김 비서님.”

전화를 끊으려던 빈선예가 갑자기 멈칫했다.

“김 비서님?”

[왜요? 무슨 할 이야기 있어요?]

“지금 갤러리스 백화점 모델이 누구죠?”

[지금 모델은 강하나죠.]

“계약 언제 끝나요?”

[끝났습니다. 재계약 안 하고 다른 모델 알아보고 있어요.]

빈선예의 눈에 총기가 돌았다.

“그럼, 누굴 생각하고 계신 건데요?”

[이자현부터 지금까지 계속 LOK 배우들을 모델로 써 와서 이번에도 그러지 않을까요? LOK에서도 지수연을 밀고 있습니다.]

빈선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 지수연이에요? 예능에서 정답지 미리 구해서 본 거로 사람들한테 욕먹고 있잖아요.”

[그거 아니라고 이미 다 해명됐고, 보니까 소속사에서 금수저에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메이킹을 하는 거 같던데요? 우리한테 건넨 계약 조건도 좋고요.]

“김 비서님. 지수연은 아니에요. 갤러리스 백화점이 쌓아 올린 이미지가 있는데 무슨 지수연입니까? 우리 이렌 씨가 딱이죠.”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합니다.]

“그럼, 엄마한테 얘기해 보세요.”

[그런데 대표님이 선예 씨가 일하는 회사 배우는 절대 안 된다고 못 박으셨거든요.]

“언제요?”

[처음 선예 씨가 집 나갔을 때요.]

“참나. 그때 들어간 회사가 강하나랑 지수연이 있는 회사인 건 아시죠? 됐어요. 내가 가서 설득할게요.”

[그게 좋겠네요.]

“그럼, 초대장 보내 주세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빈선예가 방 밖으로 나갔다.

거실에는 서이렌이 나만의 마돈나 재방송을 보며 웃고 있었다.

수수하게 차려입고 텔레비전을 보며 웃고 있는 모습까지도 한 폭의 명화 같았다.

‘설득은 무슨. 그냥 우리 이렌 씨 얼굴만 보여 줘도 넘어가게 되어 있어. 우리 엄마가 나랑 똑같이 얼빠거든.’

빈선예가 서이렌을 보며 실실거리자 서이렌이 빈선예를 불렀다.

“빈 팀장님. 빨리 와서 보세요. 지금 너무 웃겨요.”

텔레비전 속에서는 톱스타 고하영과 매니저 이동하가 비밀 연애를 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와. 드디어 사귀는 거예요?”

“15화에서 고백했어요.”

“대단하다.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는 거로 15화 내내 채우고 연애는 딱 1화만 하고 끝난 거네요?”

“괜찮아요. 대신 16화 내내 폭격기 수준으로 달달해요.”

“그래요?”

빈선예가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톱스타 고하영은 오늘 함께 일하는 한류스타 남배우에게 고백을 받았다.

고하영을 24시간 뒤쫓아 다니는 이동하는 고하영이 남배우에게 고백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울분을 토한다.

꽃다발을 들고 밴에 들어간 고하영이 이동하를 힐끔 쳐다본다.

운전석에 있던 이동하는 화를 내지 않으려고 속으로 참을 인을 몇 번이나 되뇌고 있다.

고하영은 그런 그를 놀려 주고 싶었다.

“나 오늘 고백받았어.”

이동하는 고하영을 보지 않은 채 앞만 보며 말한다.

“알아요. 저도 봤어요.”

“정말 봤어?”

“바로 차 앞에서 꽃도 주고 난리 블루스를 췄는데 어떻게 그걸 못 봐요.”

“그랬구나. 봤구나.”

고하영은 목덜미와 귀까지 빨개진 이동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고하영의 손이 쑥 들어오더니 이동하에게 쪽지를 건넸다.

이동하는 어깨가 축 늘어진 채로 그 쪽지를 펼쳤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오로지 너뿐이야.

너만의 하영이가.]

쪽지를 본 이동하의 눈이 활처럼 휘었다.

이동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며 고개를 돌렸다.

‘찰칵.’

기다리고 있던 고하영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카메라로 이동하를 찍었다.

“뭐. 뭐 하는 겁니까?”

“뭐긴 사진 찍었지?”

“그러니까 나를 왜 찍냐고요?”

“네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찍고 싶었어.”

“쳇.”

이동하는 삐졌는지 입술을 쭉 내밀었다.

“또또. 입술을 또 그렇게 내민다. 누가 보면 뽀뽀해 달라는 줄 알겠어.”

“그런 거 아니…….”

이동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대로 뒷자리에서 넘어온 고하영이 이동하의 뺨에 입을 맞췄기 때문이다.

‘찰칵.’

놀란 이동하의 모습을 고하영은 다시 한번 카메라로 담았다.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어디 있긴. 내 맘이야.”

이동하는 말로는 화를 내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 피오르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서이렌이 안고 있던 쿠션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어떡해요. 나 못살아.”

빈선예는 로맨스 연기를 하는 텔레비전 속의 이락을 보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그런데 서이렌은 저걸 보고도 얼굴에 홍조까지 띠고 좋아하니 이 상황이 너무 웃겼다.

서이렌은 핸드폰을 열더니 메모 앱을 열어 뭔가를 기록했다.

빈선예는 그걸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드라마 보면서 뭘 그렇게 적어요?”

“이거요?”

서이렌이 핸드폰에 적은 메모를 빈선예에게 보여 줬다.

메모의 타이틀은 ‘고하영 선생님의 연애 레슨’이었다.

- 파파라치 따라온다며 거짓말하고 껴안기

- 백미러로 몰래 대화하기

- …….

서이렌은 드라마에서 나온 고하영과 이동하의 연애 방법을 몽땅 기록해 놨다.

방금 마지막에 추가된 건 ‘차 뒷자리에서 넘어와 기습 뽀뽀하기’였다.

빈선예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드디어 구원의 밤이 팔백만을 넘었다.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 중에서는 최고로 성공한 영화다.

천만까지는 못 가겠지만 지금 추이로는 구백만 근처에서 기록이 끝날 거 같았다.

다음 주에는 팔백만 성공 기념 프리허그 이벤트를 하기로 했다.

나는 오늘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팔백만이 넘었다는 소식을 들어서 기분이 좋았고 오늘 스타탄생 식구들과 함께 갤러리스 백화점 VIP 파티에 참가하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 화려한 곳에 가는 것이 좋은 게 아니라 김이솔도 참가한다고 해서 기분이 좋은 것이다.

서이렌, 빈선예, 이락, 윤이슬이 김이솔을 편하게 대해 준 것인지 그녀는 빠르게 낯가림을 해제하고 우리와 친해졌다.

김이솔에 대한 걱정도 한시름 덜었다.

오늘은 내가 직접 빈선예와 서이렌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이제는 배우들이 너무 많아서 숍도 나눠서 다니고 있다.

이락과 윤이슬, 김이솔은 강진석과 장우재가 데리고 파티장으로 오기로 했다.

나는 지금 숍의 지하 주차장에서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다.

아름답게 꾸민 빈선예와 서이렌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서이렌만 차에 타고 빈선예는 타지 않았다.

이윽고 빈선예의 앞으로 검은색 세단이 도착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차였다.

서이렌이 놀라는 나를 보며 설명했다.

“빈 팀장님은 집에서 차를 보내셨대요. 저거 타고 파티장에 오신다네요.”

“아. 그렇군요.”

오늘이 갤러리스 백화점 대표의 생일이라던데.

어머님이 보내셨나?

빈선예가 탄 차가 지하 주차장을 먼저 빠져나가고 드디어 내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렌 씨. 그럼, 우리도 이만 갈까…….”

핸들에 손을 올리던 나는 그대로 멈칫했다.

뒷자리에서 무언가 훅하고 넘어온 것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뒤로 고개를 돌렸다.

뒷자리에서 앞으로 넘어오려던 서이렌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나와 눈이 마주쳤다.

“뭐 하는 겁니까? 이렌 씨?”

“어. 안 되네. 왜 안 되지?”

“뭔데요? 대체 왜 그러는 건데요? 어디 아파요?”

서이렌은 거추장스러운 옷자락을 붙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힝. 이게 아닌데.”

서이렌은 어깨가 축 처져서 금세 울상을 지었다.

* * *

여의도 갤러리스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 LOK 밴이 도착했다.

밴에서 내린 지수연의 곁으로 김진희 실장이 딱 붙었다.

지수연은 오늘도 명품으로 도배를 하고 나타났다.

김진희 실장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오늘도 여신 같아요. 지수연 배우님.”

“그래요?”

“그럼요. 수연 배우님 별명처럼 백억 여신이죠.”

“너무 꾸미고 온 건 아닐까요?”

“내가 새로운 갤러리스 백화점 모델이라고 땅땅하는 자리예요. 이 정도는 입어 줘야죠.”

지수연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좋아요. 가요. 김 실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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