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구원의 밤
김경록은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핸드폰을 열어 영화 예매 사이트를 확인했다.
1위. 구원의 밤: 78%
2위. 멜랑꼴리: 64%
홍보의 영향인지 멜랑꼴리가 구원의 밤을 바짝 뒤쫓고 있었다.
김경록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지금 심정으로는 두 작품 모두 망해 버렸으면 했다.
어느새 극장 안은 사람들로 꽉 찼고 불이 꺼졌다.
김경록은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요즘 영화계에서 한창 뜨고 있는 주용현 음악 감독이 만든 신비로운 선율과 함께 오프닝이 시작됐다.
‘오프닝은 그럴듯하군.’
오프닝 영상을 처음 보는 김경록은 한없이 깊은 우물 안에서 시작되는 카메라 워크가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오프닝이 끝나고 드디어 영화가 시작됐다.
* * *
나는 이른 아침부터 레전드 필름으로 출근해서 극장 상황을 확인했다.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사전 예매율이 훨씬 높았기 때문에 직원들 모두 기대 반 걱정 반인 상태로 첫 상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흘렀죠? 박 팀장님?”
“수영아. 아직 시작한 지 삼십 분밖에 안 됐어.”
“왜 이렇게 떨릴까요? 팀장님.”
“나도 떨린다. 난 이번 영화가 내가 참여한 열 번째 작품인데도 떨린다. 지금까지 중에 제일 심해.”
박진숙 팀장이 나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원 대표님은 괜찮으세요?”
“시사회 반응도 좋았고 예매율도 예상치를 훨씬 웃돌잖아요. 좋은 결과가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내 말을 들은 박진숙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딜 가시려고요?”
“차에 뭘 두고 와서요. 잠깐 나갔다가 올게요.”
“첫 상영이 끝나기 전까지는 오실 거죠?”
“그럼요. 금방 다녀올게요.”
사무실에서 나온 나는 건물 일 층의 편의점에 가서 탄산음료를 샀다.
박진숙 앞에서는 대범하게 말했지만 나도 떨리는 건 매한가지였다.
구원에 밤에 대한 확신은 있었다.
다만, 건강이 좋지 못한 내가 벌인 판이기에 개봉이 다가올수록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탄산음료를 한입 마셨는데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렸다.
전화번호를 확인한 나는 반가운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진설 대표님. 원세강입니다.”
[밖이야? 주변이 시끄럽네? 지금 충무로에 있어?]
“예. 레전드 필름으로 출근했습니다.”
[원 대표가 고생한다.]
“진 대표님은 안 떨리세요?”
[떨릴 게 뭐가 있어. 영화도 잘 나왔겠다. 다 잘될 거야.]
강철 같은 진설의 목소리를 듣자 답답하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다른 게 아니라 엊그제 LOK 한성제 대표가 나를 찾아왔거든. 대체 무슨 일이야? 김경록이란 사람이 레전드 필름에 손해를 입혔다던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 해결됐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성제 대표 말을 들어 보니 김경록이란 직원을 해고한 거 같은데. 들었어?]
“들었습니다.”
[원 대표. 괜찮겠어? 그 김경록이란 사람이 원한 같은 건 품지 않겠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저한테 위해를 가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제 이 바닥에서 더는 일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래. 한성제 대표가 화가 많이 났더라. 알았어. 원 대표가 안심하라면 그런 거겠지. 그럼, 들어가 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하지 마. 나 바빠. 필요한 일 있으면 내가 전화할게.]
전화를 끊은 나는 들고 있는 탄산음료를 원샷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 * *
‘내가 본 거랑 똑같잖아. 완성본도 편집본이랑 그다지 달라진 게 없고.’
김경록은 자신이 봤던 편집본과 거의 똑같은 영화 초반을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이들이 영화를 보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서이렌은 일부러 저렇게 연기를 하는 건가? 왜 이렇게 뭔가 핀트가 안 맞는 거 같지?”
“그러게. 인터넷에 서이렌이 연기를 못했다는 글이 올라오긴 했는데. 시사회를 본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고 했거든.”
“호불호가 갈리는 연기를 한 건가?”
옆 사람의 대화를 들은 김경록의 입술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럼, 그렇지. 내가 예상한 대로야. 사람들 생각하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드디어 초반 삼십 분이 지나고, 영화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수화 통역사 최진이 연쇄 살인마 강동철과 동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최진이 변하자 영화의 질감이 달라졌다.
초반에는 연쇄 살인마와의 인터뷰가 많이 나와서 다큐멘터리 같은 분위기였는데 최진이 강동철에게 납치된 사람들의 행적을 뒤쫓기 시작하면서 극이 한 치 앞을 모르게 돌변했다.
최진은 경찰보다 한발 앞서 피해자가 납치된 곳을 하나하나 찾아갔고 사람들은 최진과 경찰의 줄다리기를 보며 손에 땀을 쥐었다.
그리고 드디어 최진이 처음으로 살아 있는 피해자를 만나는 장면이 시작됐다.
김경록은 긴장감에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꽉 쥐었다.
이내 개기일식이 시작되고 최진의 눈빛이 시시각각 변했다.
태양이 사라지는 개기일식과 최진의 심리 상태를 교차 편집한 화면을 보고 그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뭐. 이런 영화가 다 있어?’
개기일식이 극에 달해 온 세상이 어둠에 물들자 긴장감을 유발하던 음악이 뚝 그쳤다.
김경록은 자신이 마치 그 현장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극장 안에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모두 숨죽인 채 극장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검은 실루엣만이 보였다.
최진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드디어 달이 삼키고 있던 태양을 토해 냈다.
빛이 등장하며 실루엣만으로 보이던 최진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김경록은 최진을.
아니 최진을 연기하는 서이렌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그동안 강동철의 하수인이라도 된 듯 그의 뜻대로 납치된 피해자들의 생사를 확인하던 최진은 없었다.
악에 현혹되어 하수인 노릇을 하던 그녀는 사라지고 새롭게 태어난 그녀가 보였다.
이제 어둠은 완전히 사라지고 작열하는 태양 빛이 온 세상을 비추고 있다.
최진은 눈이 부셔 감히 쳐다볼 수 없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깊은 구덩이 안에는 피해자라 불리는 악인이 있었다.
최진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더니 이내 그녀의 입이 열렸다.
“밝은 태양 아래 너희가 설 자리는 없어. 저 해가 방금 그렇게 정의 내렸거든.”
최진의 한마디가 빛이 스며드는 숲에 나직이 울려 퍼졌다.
김경록은 자신이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배우의 연기를 보며 이렇게 소름이 돋았던 적이 있던가?
십 년이 넘게 이 바닥에서 일하며 명배우들의 연기를 심심치 않게 봐 왔지만 이런 연기는 처음이었다.
영화는 이 장면을 시작으로 주인공이 바뀌었다.
초반은 연쇄 살인마 강동철이 극을 이끌어 갔다면 후반은 최진이 주인공이었다.
최진은 납치됐던 마지막 피해자가 은신처를 탈출한 것을 발견한다.
그 사람 역시 피해자의 탈을 쓴 악마다.
악마는 자신을 그곳에 가둔 강동철을 잡기 위해 함정을 설치해 놨고 최진이 그곳에 갇히고 만다.
최진과 악마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지며 극은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김경록은 한 치도 긴장감을 풀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 몸서리쳤다.
연기도 연기지만 영화를 너무 잘 만들었다.
연출, 편집, 음악.
모든 것이 완벽한 작품이었다.
영화는 극으로 치닫고 결국 최진이 악마와의 싸움에서 이기게 된다.
그녀의 손에 처음으로 피를 묻힌 것이다.
‘이게 데뷔한 지, 고작 삼 년밖에 안 된 배우의 연기라고?’
김경록은 같은 시기에 데뷔한 지수연을 떠올렸다.
두 사람의 격차가 하늘과 땅만큼 크게 느껴졌다.
‘이자현도 이렇게까지 잘하지는 않았어. 말도 안 된다고.’
어느덧 극은 클라이맥스를 지나 최종장에 다다랐다.
최진은 섬으로 향했다.
악마가 탄생한 곳.
강동철이 나고 자란 섬으로 간 것이다.
최진은 그곳에서 강동철의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왔다.
다시 교도소에서 강동철과 재회한 최진.
그녀의 곁에는 박동한 경감이 아닌 형사 이정수가 함께였다.
최진을 좋아하는 이정수는 그녀를 위해 강동철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준 장본인이다.
최진의 손이 움직였다.
[복사도에 다녀왔어.]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던 강동철이 처음으로 묘한 반응을 보였다.
[복사도는 아름다운 섬이더군.]
[어떻게 찾았지?]
[어머니는 돌아가셨어.]
어머니라는 단어에 강동철의 손이 멈칫했다.
최진은 강동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도망간 당신을 찾겠다고 섬을 몰래 빠져나가려다 들켰대. 매일 그 남자에게 개처럼 맞고 살다가 결국엔 그자가 여인을 우물 속에 처박았다더군.]
최진은 담담한 얼굴로 손을 움직였다.
듣기 힘든 잔인한 이야기가 그녀의 새하얀 손끝에서 속삭이듯 흘러나왔다.
[믿지 않을 수가 없더군. 그 노인의 눈빛이 당신과 닮았거든. 당장이라도 나를 죽일 것만 같았어.]
[거짓말이야. 그놈이 살아 있을 리가 없어. 넌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그렇지?]
[그렇지 않아. 당신을 위해 어머니의 유품도 가져왔어.]
최진은 주머니에서 찢어진 치맛자락을 꺼냈다.
[우물 입구에 걸려 있더군. 그자는 여인을 죽이고 그 오랜 세월 동안 우물을 막아 놨더군. 내가 열어 보니 우물은 이미 말라 있었어.]
최진은 희미하게 빛이 바랜 옷 조각을 책상 위에 올려놨다.
우물 입구에 걸려 있던 것을 최진이 가져온 것이다.
강동철이 그것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양손에 수갑이 채워진 강동철의 손이 그곳까지 닿지 않았다.
강동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선물이야.]
말을 마친 최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의 대화를 잠자코 지켜보던 이정수가 따라 일어섰다.
“다 끝나셨어요?”
“끝났습니다. 가시죠. 형사님.”
최진과 이정수가 일어섰다.
어느덧 다가온 교도관들이 강동철을 일으켰다.
강동철은 교도관들을 거부하며 찢어진 옷자락을 가져가려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교도관들은 강동철이 또 시작했다며 그의 양팔을 잡았다.
접견실을 나오던 최진이 뒤를 돌아봤다.
강동철은 몸이 구속당해 움직일 수 없었고 입에는 재갈이 채워졌다.
교도관 한 명이 무심한 얼굴로 책상 위에 올려진 찢어진 옷자락을 주워서 그것을 접견실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강동철은 울부짖었지만, 그의 외침은 들리지 않았다.
일주일 뒤, 교도소에서 강동철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의 자살 소식을 들은 최진은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날 그녀의 집으로 이정수가 찾아왔다.
이정수는 강동철이 남긴 유품이라며 최진에게 그의 수첩을 건넸다.
알 수 없는 암호로 가득한 그의 수첩.
“당신이라면 해독할 수 있겠죠?”
“왜 그렇게 생각하죠?”
“그렇지 않다면 강동철이 이걸 당신에게 남기지 않았을 테니까.”
이정수의 예상대로 최진은 강동철이 남긴 수첩을 읽을 수 있었다.
점자를 변형해서 만들어진 문자로 쓴 것이었으니까.
뒤돌아서던 이정수가 물었다.
“복사도에 지금 꽃이 피었을까요?”
“…….”
최진은 이정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정수는 최진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언제 한번 나랑 같이 갈래요?”
“시간이 나면요.”
“내가 계속 진이 씨 옆에 있어도 될까요?”
“왜요?”
“내가 필요하잖아요. 너무 멀리 가지 말아요. 내가 볼 수 있는 곳에 있어요.”
이정수의 맑은 눈을 보는 최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어디 안 가요. 난 당신이 필요해요. 연락할게요.”
“고마워요.”
이정수가 떠나고 최진은 홀로 남아 수첩을 펼쳤다.
수첩을 살피던 최진은 볼펜을 들고 와서 수첩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수첩은 어느덧 최진이 그은 빨간펜으로 가득 찼다.
최진은 강동철이 생전에 만들어 놓은 악인들의 인명부를 확인하고 그 아래 밑줄을 그었다.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고 담담했다.
근처의 놀이터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렸고 베란다에 널어놓은 빨래가 바람이 날려 살랑거렸다.
카메라는 줌 아웃 됐고 그녀의 거실이 점점 멀어졌다.
창문을 지나 멀리서 바라보는 그녀의 집은 평화로웠다.
너무나도 평범하고 아름다운 화면이 갑자기 반전되더니 화면이 어두워졌다.
주용현이 작곡한 메인 테마가 흐르며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갔다.
엔딩 크레디트의 배경은 개기일식이었다.
영화가 끝났지만, 김경록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주위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김경록은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중얼거렸다.
‘졌어. 내가 졌어. 이건 절대 못 이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