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레드카드(2)
LOK 한성제 대표는 TOP의 김승민 이사와 대화 중이었다.
록 이사가 대표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한성제와 김승민이 고개를 돌려 록 이사를 바라봤다.
록 이사는 한성제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뚜벅뚜벅 걸어왔다.
김승민 이사가 자리를 피하려고 일어서자 한성제가 그를 막았다.
“김 이사 그냥 앉지.”
“하지만 대표님.”
김승민이 눈치를 보자 한성제는 록 이사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취임식은 다음 달 첫째 주로 하지.”
“그렇게나 빨리요?”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어. 멜랑꼴리 분위기가 좋으니까 바로 취임식 하는 게 맞아.”
“그럼, 말씀하신 대로 일정을 잡아 보겠습니다.”
“지욱이가 LOK 대표가 되면 TOP은 자네가 맡아.”
“제가요?”
대표라는 말에 김승민의 눈이 커졌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록 이사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김승민은 한성제에게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록 이사가 바로 곁에 있기에 부담스러웠다.
한성제는 김승민 이사와 함께 보고 있던 서류를 정리하더니 그에게 말했다.
“그럼, 나가 보게. 김경록이 나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으니 말이야.”
“예. 대표님.”
김승민이 서류를 챙겨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승민이 록 이사를 보며 눈인사를 건넸지만, 록 이사는 무시하고 한성제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김승민이 나가고 한참 동안 한성제는 아무 말이 없었다.
참지 못한 록 이사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설명은 해 주셔야죠.”
한성제 대표가 싸늘한 눈빛으로 록 이사를 쳐다봤다.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 건가?”
“제가 언제 회사에 금전적 손실을 입혔나요?”
“막대한 손실을 입힐 뻔한 것도 같은 거야.”
“그러니까 제가 언제요? 제 이름인 김경록도 버리고 록 팀장, 록 실장, 록 이사라는 이름으로 여기까지 올라왔습니다. 멜랑꼴리도 엎어질 뻔한 걸 제가 여기까지 멱살 잡고 끌고 온 거란 말입니다.”
록 이사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추세로 보면 멜랑꼴리는 이미 성공한 영화다.
홍보를 뛰고 있는 배우들도 차기작에 대한 오퍼가 몰려들고 있는데 영화 개봉을 단 이틀을 앞두고, 해임이라니.
그동안 LOK와 TOP에 헌신했던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한성제는 싸늘한 어조로 록 이사에게 말했다.
“더러운 수를 썼잖아. 그런 게 지금 먹힐 거 같아?”
“무슨 더러운 수를 말씀하십니까?”
“구원의 밤 편집 영상에 손을 댔다며?”
구원의 밤 이야기가 나오자 록 이사는 흠칫 놀랐다.
록 이사가 당황하자 한성제는 헛웃음을 흘렸다.
“진설 배우와 레전드 필름이 영화계에서 어떤 존재인지 알아? 수많은 거장과 명배우들이 레전드 필름과 작품을 하고 싶어 한다고. 그런 영화계 거물의 작품을 건드려? 감히 너 따위가?”
록 이사는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머릿속이 원세강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찼다.
‘원세강. 이 개새끼가. 한성제 대표님께 그 일을 찔러?’
록 이사는 지난날 원세강이 가져온 CCTV 영상을 떠올렸다.
고작 지하 주차장을 들어서고 나오는 장면이 찍힌 CCTV.
눈빛을 번뜩인 록 이사가 항변했다.
“혹시 CCTV 영상을 보신 겁니까? 어떻게 그걸 보고, 제가 구원의 밤 편집 영상을 훔쳤다고 단정 지으시는 겁니까? 제 옆에 박상용 실장도 함께 탔었습니다. 미심쩍으시면 지금 당장 박상용 실장을 불러오겠습니다.”
한성제 대표는 아니라고 말하는 록 이사를 보며 어이가 없었다.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원세강이 CCTV 영상을 가져왔죠? 그거 아십니까? 그 새끼는 저를 미워합니다. 그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증거로 들이밀며 저를 음해하는 거고요.”
“원 대표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건 LOK 직원 전체가 다 알아.”
“…….”
“그리고 김경록. 네가 원세강을 견제하는 것도 LOK 직원들이 다 알지. 물론 나를 포함해서 말이야.”
한성제는 말을 마치고 탁자 위에 올려진 태블릿 PC를 들어서 록 이사의 앞으로 들이밀었다.
록 이사는 떨리는 손으로 태블릿 PC의 잠금을 해제했다.
“다운로드 폴더에 CCTV 영상이 있을 거야. 재생해 봐. 김경록. 자네가 직접 보고 확인하라고.”
록 이사는 떨리는 손으로 다운로드 폴더를 열었다.
폴더의 제일 위쪽에 CCTV 영상이 있었다.
록 이사는 심호흡하고 그것을 클릭했다.
태블릿 PC에 CCTV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은 록 이사가 본 레전드 필름 지하 주차장의 CCTV 영상이 아니었다.
영상을 본 록 이사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TOP 미디어에 설치한 CCTV 영상이야. 원세강 대표가 CCTV 영상을 두 개 가져왔더군. 하나는 레전드 필름에서 도망치듯 떠나는 김경록 네 차가 찍힌 영상이었고, 두 번째는 바로 이거야. 시간을 보라고 레전드 필름에서 나온 뒤, 바로 사무실로 돌아와서 영상을 확인했더군.”
한성제의 말대로 록 이사는 그날 편집본 USB 영상을 가지고 사무실로 돌아와 확인했다.
영상 속의 그는 사무실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텔레비전으로 USB의 영상을 확인하고 있었다.
텔레비전이 너무 커서 대충 봐도 그가 보고 있는 영상 속에 나오는 인물의 얼굴이 생생하게 보였다.
록 이사는 변명거리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레전드 필름에 갔다가 주운 겁니다. 그게 뭔지 몰라서 회사에 돌아와서 재생해 본 거고요.”
록 이사의 되지도 않는 변명에 한성제는 실소했다.
“됐어. 이미 끝났으니 가 봐. LOK에서 손해 배상을 청구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라고.”
“원세강 그 자식 말은 믿으시고 제 말은 안 믿으시는 겁니까?”
“경찰서로 가지 않고 나한테 곧바로 가져온 게 원 대표야. 원 대표가 너와 같은 급인 줄 알아?”
“혹시 이건 아십니까? 이자현도 원세강 짓입니다.”
“장난해? 이자현은 지금 엔진 소속이야.”
“원세강이 소개해 준 걸 겁니다. 엔진과 스타탄생이 사이가 어떤지 생각해 보십시오.”
“원 대표가 직접 채 갈 수도 있는데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다른 회사를 소개해 줬다는 생각은 못 하는 건가?”
“…….”
록 이사는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자신만 수렁에 빠져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끝난다고? 이제 시작인데? 이제 TOP 미디어의 대표가 될 일만 남았는데?’
록 이사는 믿을 수가 없었다.
십 년 넘게 LOK에 충성해 왔는데 이렇게 한 번의 실수로 나락으로 떨어지다니.
“어서 나가. 사람 부르기 전에. 다시는 이 바닥에서 얼굴 보지 말자고.”
“실수하시는 겁니다.”
“변명이 안 통할 거 같으니 이제는 악담을 하나?”
“한지욱이 대표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평온했던 한성제 대표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지금 뭐라고 했나?”
“한지욱을 LOK 대표로 올리고 은퇴하시려는 거죠? TOP은 김승민이 대표 자리에 올라가고요?”
록 이사는 말도 안 되는 인사라고 생각했다.
김승민이야 한지욱보다 잘할 테니 괜찮지만 LOK 대표로 한지욱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노릇이다.
“한지욱이 그나마 TOP를 잘 이끌어 간 게 다 누구 덕인데요? 저 때문입니다.”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군.”
“글쎄요. 과대평가에 사로잡힌 분은 모지리 아들에게 LOK를 넘겨주려는 한성제 대표님으로 보이는데요?”
한성제가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록 이사의 망발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당장 나가. 경비원을 호출하기 전에.”
“예. 나갑니다. 하지만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이 바닥에 제일 무서운 게 소문인 거 알지? 다시 일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럼, 이것도 아시겠네요. 연예계에서 승승장구란 없습니다. 한번 삐끗하면 쌓아 놓은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게 이 바닥 생리라고요.”
“…….”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겠습니다. 한지욱이 얼마나 잘할지 지켜볼 거란 말입니다.”
록 이사는 속에 있는 말을 모두 쏟아 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더는 이곳에 있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록 이사가 한성제 대표의 문을 나서자 근처에서 구경하던 LOK 직원들이 놀라 물러섰다.
록 이사는 사람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했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있는 듯이 쳐다보는 사람들과 그의 몰락을 비웃는 사람들의 눈빛을 보며 록 이사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레드카드라고? 웃기시네. 난 퇴장 같은 건 몰라. 다시 돌아올 거라고.’
이를 악문 록 이사는 그를 구경하려 몰려든 사람들을 밀치고 LOK에서 나갔다.
* * *
영화 개봉 전날 밤.
KBC에서는 멜랑꼴리 홍보의 대미를 장식할 ‘라이어 게임’이 방송을 시작했다.
같은 편이 된 김선우와 지수연은 초반부터 게임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 와. 저걸 어떻게 맞추지? 지수연 공부 잘했나 보네.
- 예고에서 피아노 전공했다던데. 대단하다.
- 김선우도 문제 잘 푼다. 두 사람이 다 잘해서 멜랑꼴리 팀이 단독 선두네.
- 와. 김선우한테 치임.
- ㄴㄷㄴㄷ
- 두 사람 케미도 좋다. 멜랑꼴리 궁금해지는데 함 볼까?
- 예매 고고. 내일 개봉한다.
거실에 나온 김경록이 텔레비전을 켰다.
어제 밤새 술을 마시고 쓰러져 자느라 지금 일어났다.
텔레비전을 켜자마자 라이어 게임에 출연 중인 김선우와 지수연이 보였다.
그걸 본 김경록의 입술이 비틀렸다.
게임의 마지막 단계에서 문제를 풀고 있는 패널들이 보였다.
화면에 나온 것은 고등학생 수학 문제.
알 수 없는 기호를 보고 패널들이 좌절했다.
그런데 김선우와 지수연은 빠르게 답을 썼고 손을 들었다.
[와. 이렇게나 빨리 답을 적어 주셨네요.]
[운이 좋았습니다. 수연이가 고등학교 졸업한 지 얼마 안 돼서요.]
[저는 식만 알려 준 거고 선우 오빠가 계산하셨어요.]
[팀워크가 환상이네요. 그럼, 답을 확인해 볼까요?]
이내 화면에 답이 떴고 김선우와 지수연이 내놓은 답이 정답이었다.
마지막 수학 문제까지 완벽하게 정답을 맞힌 멜랑꼴리 팀이 역대급 점수로 라이어 게임에서 일 위를 했다.
김경록은 그 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김선우 저 자식은 자기 계약금도 계산 못 하는 꼴통인데 어떻게 저걸 계산한다는 거야? 지금 장난해?”
열받은 김경록은 반응을 살피기 위해 인터넷 창을 켰다.
아니나 다를까 라이어 게임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였다.
- 두 사람 다 천재야.
- 급하게 멜랑꼴리 예매했다. 내일 보러 간다.
- 방송이 끝나고 멜랑꼴리의 예매율 32%에서 40%까지 치솟았다. 대박.
- 영화 시사회 반응도 무지 좋더라.
- 김선우 팬인데 오늘 존잘.
- 예매창 보니 구원의 밤이 1위네.
- 난 무거운 영화는 싫더라. 멜랑꼬리가 내 취향.
- 구원의 밤은 청불이야. 난 패스.
- 멜랑꼴리 예매율 계속 오른다. 막상 개봉하면 이게 구원의 밤 제치는 거 아님?
- 그럴 수도 있음. 평론가 평이 역대급이라 거름. 요즘 평론가 평 안 맞아. ㅋㅋ커뮤니티 댓글을 보던 김경록이 실소했다.
딱 봐도 알바가 단 것 같은 댓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부러 라이어 게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올린 거네.’
커뮤니티마다 비슷한 글이 동시다발적으로 올라와 있었다.
인터넷 창을 닫으려던 김경록의 손이 멈칫했다.
‘잠깐만! 라이어 게임. 이거 분명히 김선우가 나가기 싫다고 했던 프로인데.’
김선우는 자신이 무식하다는 것을 들키는 게 싫어서 이 예능의 출연을 줄곧 거부했다고 했다.
그가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지수연도 그렇게 똘똘한 편은 아니었다.
라이어 게임 기사에 뜬 KBC라는 단어를 본 김경록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거 구린 냄새가 나는데?’
* * *
다음 날 극장 앞에 김경록이 섰다.
김경록의 손에는 구원의 밤 티켓이 들려 있었다.
‘내가 직접 확인하겠어. 대체 뭐가 빌드업이고 뭐가 계산된 연기란 건지 내가 직접 확인하겠다고.’
김경록은 자신이 봤던 초반 삼십 분의 개판이던 서이렌의 연기가 모두 계산된 거라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평론가들도 하나같이 서이렌의 연기에 주목했다.
김경록은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김경록이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왼쪽 구석 앞에서 끝자리.
이것도 간신히 구한 자리다.
김경록은 불편한 듯 고개를 비틀며 시선을 위로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