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30화 (131/261)
  • #130화. 레드카드(1)

    나는 지금 화분을 사이에 두고 나와 록 이사가 대치 중이다.

    “무슨 일로 온 거지? 내가 여기에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았어?”

    “박상용 실장님께 전화했더니 록 이사님이 아직 사무실에 남아 계실 거라고 하시더군요. 지난번에 레전드 필름에 난 화분을 선물하셨더라고요. 선물을 받았으면 돌려 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내 말을 듣던 록 이사의 눈빛이 무섭게 변했다.

    “무슨 개수작이야? 왜 온 거야?”

    “보통은 록 이사님의 한 짓을 개수작이라고 하지 않을까요?”

    “뭐라고?”

    나는 핸드폰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뒀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지금부터 영상을 하나 재생할 겁니다. 그걸 보시면 제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아시게 될 겁니다.”

    나는 핸드폰에 카피해 둔 CCTV 영상을 재생했다.

    레전드 필름의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박상용과 록 이사 본인이 찍혀 있는 영상이었다.

    록 이사의 얼굴이 생생하게 찍힌 영상이 재생됐지만, 그는 그것을 보고 비웃음을 흘렸다.

    “이게 왜? 원세강 네 말대로 레전드 필름에 화분을 선물하러 갔을 때 영상이야. 겨우 이걸 보여 주려고 이 밤중에 나를 찾아온 거야?”

    나는 미동도 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는 록 이사를 보며 생각했다.

    그래. 저렇게 나와야 김경록이지.

    “베스트 무비에 올라왔던 그 블라인드 시사회 후기. 그거 록 이사님이 올린 거죠?”

    “무슨 소리야? 난 그런 적 없어.”

    “무슨 후기인지 묻지도 않고 아니라고 하시네요.”

    “뭐가 됐든. 난 아니니까, 괜한 시비 걸지 마.”

    “기억이 안 나실 수도 있으니 기억을 되살려 드리죠. 구원의 밤의 블라인드 시사회 당일. 베스트 무비에 이상한 글이 올라왔었습니다.”

    나는 록 이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천하의 김경록도 평소와 다른 나를 보며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때 올라온 후기의 내용을 아십니까?”

    “자꾸 물어보지 마. 나는 모르는 일이라니까.”

    “구원의 밤에 출연한 우리 서이렌 배우님의 연기를 비방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영화를 다 본 것도 아니고 고작 앞의 삼십 분만 보고 말이죠. 다음 날 짜고 친 것처럼 팬파라치에서 이니셜 기사도 났었지요.”

    록 이사가 내 말을 듣더니 코웃음을 쳤다.

    “초반에는 연기가 엉망이었나 보지. 원래 뒤늦게 로딩되는 배우도 있는 법이야. 서이렌도 그런 과인가 보지?”

    이죽거리는 록 이사를 보니 속이 울렁거렸다.

    “사이버 수사 의뢰를 넣어 놨습니다. 그 게시글을 적은 사람이 누구인지 조만간 밝혀질 겁니다.”

    “그러든지 말든지 난 관심 없어. 난 그런 사이트에 가입한 적도 없으니까 말이야.”

    록 이사는 뻔뻔한 게 아니라고 잡아뗐다.

    나는 처음부터 록 이사가 이렇게 나올 거라 예상했었다.

    “레드카드예요.”

    “뭐라고?”

    “록 이사님이 레드카드를 받으셨다고요.”

    “무슨 소리야? 지금 축구 해?”

    “록 이사님은 너무 멀리 가셨습니다. 저한테 뭐라고 하시는 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제 배우는 건드리지 마셨어야 했습니다.”

    록 이사는 내내 센 척했으나 긴장한 듯 손끝을 말아 쥐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하나 더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놨다.

    “이게 뭐야?”

    “기억 안 나세요? LOK에 계셨을 때 록 이사님도 많이 사용하셨을 텐데요.”

    나는 그가 보는 앞에서 핸드폰의 잠금을 풀었다.

    잠금 패턴을 본 록 이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LOK에서 사용하는 법인 핸드폰의 잠금 패턴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핸드폰을 열고 통화 기록을 열었다.

    통화 기록을 보던 록 이사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김경록이라 적힌 통화 기록을 클릭했다.

    이내 조용한 사무실에 김경록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형. 나야. 경진이.

    - 나 이제 회의 들어가야 해. 빨리 말해.

    - 형 말대로 이락 기사 뜨자마자 하진이 기사도 같이 풀었어.

    - 반응은 어때?

    - 넌씨눈이라고 욕을 먹긴 하지만 확실히 이슈는 되네.

    - 그것도 다 잠시다. 사람들 뇌리에는 이하진 금수저만 남게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마.

    - 형은 정말. 어디서 이런 소식을 얻어온 거야?

    - 내가 이정호 국장이랑 친해져야 한다고 했잖아. 넌 대체 거기 가서 뭘 한 거야?

    - 국장한테 나온 소스였어? 대박이네.

    야. 이만 끊어. 나중에 집에서 얘기해.

    - 알았어. 끊을게.

    녹음된 내용을 들으며 록 이사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급기야 록 이사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이 개새끼가.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야?”

    “지금 제가 협박하는 거로 보입니까?”

    “그럼, 왜 이걸 들고 나를 찾아온 건데?”

    록 이사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김경진이 이정호 국장의 로비 사건과 얽혀서 큰 곤욕을 치른 그다.

    록 이사는 친동생인 김경진과의 꼬리를 자르고 간신히 그 위기에서 벗어났었다.

    김경진은 그 사건으로 해고까지 당했다.

    ‘미친놈이 원세강한테 핸드폰을 빼앗긴 걸 왜 말하지 않은 거야? 나 지금 엿 먹이려고 작정한 거야?’

    록 이사는 핸드폰의 정체에 대해 말하지 않고 떠난 동생, 김경진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나는 흥분하는 록 이사를 보며 말했다.

    “제가 꼴 보기 싫다고 하셨죠? 혼자 착한 척. 배우를 위하는 척하는 꼴이 보기 싫다고 말입니다.”

    록 이사는 대답하지 않고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맞습니다. 저는 내 배우 앞에서는 가식이라고 욕먹어도 착한 척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게 내 배우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게 매니저의 소임이고요.”

    “뭘 원하는 건데? 원하는 걸 말해.”

    “록 이사님은 원래부터 배우 케어에는 관심이 없으셨죠. 록 이사님께는 인기가 있어야 배우고, 그렇지 않으면 거들떠 보지도 않으셨죠.”

    록 이사는 내가 말하는 틈을 타 탁자 위에 올려진 핸드폰을 낚아챘다.

    나는 그의 추잡한 행동을 보며 말했다.

    “복제폰입니다. 가져가세요. 원본은 따로 보관하고 있으니까요.”

    “이 새끼가. 나를 놀려?”

    록 이사는 잡아챈 핸드폰을 거칠게 바닥에 내리쳤다.

    핸드폰의 액정이 깨지고 부품이 떨어져 나갔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이미 록 이사님은 레드카드를 받으셨습니다. 전 성인군자가 아니라서 더는 록 이사님의 행패를 봐 드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록 이사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뭘 어쩌려고? 그걸 가지고 경찰서에라도 가려고? 이미 끝난 사건이야. 경진이도 죗값을 받았다고. 일사부재리 몰라? 그걸 다시 수면 위로 올려도 잠시 화제가 될 뿐. 대세에는 영향이 없어.”

    “잘 알고 계시네요.”

    “뭐?”

    “김경진 매니저는 이제 이쪽에서 일하는 사람도 아니고 건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무슨 소리야?”

    “말씀드렸잖습니까? 레드카드를 받은 사람은 록 이사님이십니다. 레드카드를 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록 이사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나는 그의 표정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마지막 말을 내뱉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록 이사님. 이제 퇴장하실 때입니다.”

    * * *

    예매율이 뜨기 시작하자 베스트 무비도 북적거렸다.

    - 구원의 밤 정말 대단하네요.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로는 최고 예매율 아닙니까?

    - 하도 역대급이라고 입소문이 퍼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 저도 빨리 다음 주가 왔으면 좋겠네요. 궁금해서 미치겠습니다.

    - 지난달에 블시로 본 사람입니다. 저도 예매했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한 달 동안 죽는 줄 알았네요. 빨리 베무 회원들과 영화 이야기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기도 하고요.

    - 그나저나 서이렌은 대단하네요. 나비로 올봄에 천만 영화 주인공 됐잖아요. 구원의 밤까지 잘되면 올해 영화 시상식은 서이렌이 휩쓰는 거 아닙니까?

    - 서이렌이 작품 보는 눈이 좋은 거 같아요.

    - 287일부터 보는 눈이 남달랐네요.

    - 그런데 멜랑꼴리는 먼저 개봉했나요? 극장에 왔는데 멜랑꼴리를 상영하고 있는데요??

    - 지금 유료 시사회라서 그럴 겁니다.

    - 또 변칙 개봉인가요?

    - 이럴 거면 그냥 일주일 일찍 개봉하지. 왜 저러는 걸까요?

    - 유료 시사회라는 이름으로 일찍 개봉하면 그만큼 이득이 크니까요. 언플하기도 좋고요.

    - 멜랑꼴리는 구원의 밤 다음으로 입소문이 좋아서 안 그래도 될 텐데.

    - UPC가 아주 돈독이 오른 거 같네요.

    - UPC 문제도 있는데 그 영화의 제작사가 TOP 미디어라고 신생이라서 역대급으로 푸쉬하고 있더군요.

    - 그러게요. 요즘 텔레비전만 틀면 멜랑꼴리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나오더군요. 홍보가 역대급이긴 합니다.

    - 특히 KBC에 엄청나게 나오던데. 김선우 배우님 차기작이 KBC인가 봐요. ㅋㅋ- 그럴 수도 있겠네요. 김선우 배우도 지금까진 영화 쪽에서는 영 힘을 못 썼는데 이번엔 잘될 거 같네요.

    - 네 작품 모두 잘돼서 올여름 극장이 터져 나갔으면 좋겠네요.

    * * *

    록 이사의 외제 차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록 이사는 영화 예매 사이트를 확인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구원의 밤이 여전히 일 위를 수성하고 있었지만 멜랑꼴리의 예매율도 바짝 뒤를 쫓고 있었다.

    “홍보 효과가 있군. 그럼, 그렇지. 19금이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록 이사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핸드폰을 닫았다.

    며칠 전 원세강이 다녀가서 퇴장이란 말을 하고 갔지만,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록 이사는 그동안 원세강이 어떻게 나와도 넘어갈 수 있도록 다 계획을 세워 놨다.

    콧노래를 부르며 사무실에 들어선 록 이사는 묘한 분위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멜랑꼴리의 홍보 반응도 좋고 예매율도 높은데 직원들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록 이사는 직원들이 건네는 어색한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재빨리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방 안에는 박호중 감독이 와 있었다.

    “박 감독님. 이른 아침에 무슨 일입니까?”

    박호중이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록 이사님.”

    “말씀하세요.”

    “록 이사님이 그만두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노트북의 전원을 켜던 록 이사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뭐요?”

    “어젯밤에 메일이 왔더라고요. 못 받으셨나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난 못 봤습니다.”

    록 이사는 말도 안 된다며 노트북을 열고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런데 어제까지 멀쩡하기만 했던 노트북이 열리지 않았다.

    당황한 록 이사는 재차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그러나 노트북은 잘못된 비밀번호를 입력했다는 에러 메시지만 뱉어냈다.

    당황한 록 이사는 핸드폰을 들고 메일함을 열었다.

    그런데 메일과 연동된 LOK 이메일 계정의 권한 실패 오류가 떴다.

    록 이사의 당황한 얼굴을 보는 박호중은 속으로 생각했다.

    ‘LOK에서 벌써 계정을 삭제했나? 대체 무슨 일이야? 해임 메일도 못 보게 해 버렸나 보네.’

    록 이사가 심각한 얼굴로 박호중에게 다가왔다.

    박호중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감독님. 메일 좀 봅시다.”

    “예?”

    “지금 내 계정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메일을 못 보니까. 감독님 메일 좀 보자고요.”

    “아. 그건…….”

    “그냥 무슨 메일이 왔는지만 보자는 겁니다.”

    살기 가득한 록 이사의 눈빛을 본 박호중은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의 메일함을 열어 그에게 보였다.

    * * *

    LOK에서는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팀장급 매니저들이 휴게실에 모여 떠들고 있었다.

    “록 이사 해임됐다는 소식 들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젯밤에 TOP 미디어 전 직원한테 매일 왔다던데?”

    “그게 정말이야?”

    “TOP 미디어로 간 마케팅팀 정 대리가 어제 메일 캡처해서 보내 줬어. 봐 봐.”

    보직 해임 통보문

    성명: 김경록

    직급: 이사

    1. 상기인에 대하여 금일 자로 보직 해임을 통지함.

    2. 보직 해임의 사유는 다음과 같으며, 본 해임 통지 수령과 동시에 회사의 지급품을 반납하고 인수인계를 착수할 것을 명함.

    해고 사유: 상기 근로자는 사규 제12조항을 위반하였기에 보직 해임을 통보함.

    메일을 본 매니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규 12조항이 뭔데 잘린 거야? 혹시 횡령이라도 했나?”

    “나도 궁금해서 12조항이 뭔지 찾아봤는데, 그냥 회사에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입힌 경우나 이미지에 해를 입힌 경우라던데?”

    “진짜 횡령인가? 록 이사가 TOP 미디어가 지 꺼라도 되는 양 행동했다던데?”

    “야. 조용히 해. 록 이사 들어 온다.”

    마침 LOK 사무실에 도착한 록 이사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곧바로 대표실로 직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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