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29화 (130/261)
  • #129화. 홍보 전쟁

    TOP 미디어에서는 멜랑꼴리의 블라인드 시사회 결과가 기대보다 좋자 일찍 샴페인을 터트렸다.

    반응에 만족한 록 이사는 곧바로 UPC를 찾아갔다.

    “그러니까 록 이사님 말씀은 대규모 관객 시사회를 하자는 말씀이시죠?”

    “맞습니다. 관객 시사회로 미리 입소문을 퍼트리자는 거죠. 마지막 주에는 유료 시사회로 전환해서 다른 영화보다 일찍 개봉하는 겁니다.”

    “유료 시사회요? 그건 변칙 개봉 아닙니까?”

    “이미 많은 영화가 유료 시사회를 하고 있는데 변칙은 아니죠. 마케팅이라고 합시다.”

    UPC 마케팅팀 박 팀장은 고민에 빠졌다.

    네 개의 배급사가 같은 날 줄줄이 대작을 내놓을 예정이다.

    그중에는 거장 최병철 감독의 은퇴작도 있고 거대 자본이 투자된 한국형 블록버스터도 있다.

    멜로 장르인 멜랑꼴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입소문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좋습니다. 시사회 일정을 잡아 보도록 하죠. 그건 그렇고 배우분들의 지원도 중요합니다. 할 수 있는 인터뷰와 예능 스케줄은 다 잡아 볼 생각입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선우 배우님과 지수연 배우님도 홍보 스케줄이 있을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군요.”

    홍보에 대해 논의를 마치고 박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록 이사가 물었다.

    “혹시 어제 충무로에서 진행했다는 시사회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구원의 밤을 말씀하시나요?”

    “예. 맞습니다. 그건 어떻다고 하나요?”

    록 이사는 박 팀장의 눈치를 살폈다.

    어젯밤 신주원 기자가 불호 글을 올린 이후 베스트 무비에 접속한 록 이사는 난장판이 된 자유 게시판을 보고 흡족해했었다.

    그 후에는 현장에서 멜랑꼴리의 시사회 반응을 확인하느라 더는 베스트 무비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런데 박 팀장의 입에서 예상과 다른 이야기나 나왔다.

    “이미 한 달 전부터 대단한 영화가 나왔다는 소문이 업계에서 돌았습니다.”

    “대단한 영화라고요?”

    록 이사는 자신이 본 초반 삼십 분을 떠올렸다.

    확실히 연출과 미장센이 모두 훌륭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작품이 대단할수록 엉망인 서이렌의 연기가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거장 최병철 감독 작품이니까 그렇겠죠. 그래도 연기에 대해서는 소문이 별로 좋지 않을 텐데요?”

    “연기 이야기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런데 어제 블시 후기는 엄청 좋다고 알고 있습니다. 베스트 무비 사이트가 들썩였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베스트 무비가요?”

    “구원의 밤 블시를 본 유저들이 엄청난 작품이 나왔다고 후기를 올린 모양입니다. 사실 말이 블라인드 시사회지. 사람들이 구원의 밤인 줄 다 알더군요. 우리 멜랑꼴리도 똑같지만 말입니다.”

    록 이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다 된 작품에 서이렌이 코 빠트린 격이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록 이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박 팀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박 팀장님. 구원의 밤이 우리 경쟁작 아닙니까? 함께 개봉하는 작품이 그렇게 평가가 좋다는데 걱정도 안 되십니까?”

    록 이사의 걱정 가득한 반응에 박 팀장이 웃었다.

    “구원의 밤과 우리는 관객층이 다릅니다. 19금 범죄 스릴러와 멜로 영화예요. 같은 날에 개봉하지만 서로 관객을 뺏는 사이는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구원의 밤보다는 다른 두 영화가 우리 경쟁 상대죠.”

    박 팀장은 걱정하지 말라며 록 이사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록 이사는 뒷맛이 씁쓸했다.

    ‘분명 서이렌의 연기가 구렸는데. 이상하단 말이야.’

    회의를 마치고 UPC에서 나온 록 이사는 곧바로 베스트 무비에 접속했다.

    베스트 무비의 HIT 메뉴를 클릭한 록 이사는 조회 수와 댓글 수가 많은 게시글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 * *

    나와 강진석이 티켓박스에 도착했다.

    오늘은 구원의 밤의 홍보에 대해 논의하려고 모였다.

    티켓박스가 건넨 일정표에는 영화 매거진을 비롯한 각종 매체의 인터뷰 스케줄이 보였다.

    “인터뷰만 있네요.”

    “심석현 배우님이 예능 출연은 꺼리십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예능에 나온 적이 없으십니다.”

    “흠.”

    이렇게 예능 출연 없이 영화를 홍보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구원의 밤이 19금 범죄 스릴러 장르이기 때문에 굳이 예능에 출연해서 영화의 이미지와 다른 홍보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체 홍보에 손 놓고 있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심석현이 힘들다면 서이렌과 박선호가 있다.

    나는 홍보팀 김 팀장을 보며 말했다.

    “혹시 SBC의 ‘미해결 사건 파일’이라고 아시나요?”

    “그거야 당연히 알죠. 이십 년이 넘는 장수 프로그램이 아닙니까?”

    “아시다시피 미해결 사건 파일은 장기 미해결 사건을 모큐멘터리(Mockumentary)로 보여 주고 패널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입니다.”

    김 팀장은 내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강진석이 곧바로 내 의도를 알아챘다.

    “혹시 미해결 사건 파일에 출연하려고?”

    나는 강진석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패널이 반은 전문가고 나머지 반은 일반인이잖습니까? 구원의 밤이 범죄를 다룬 영화이기 때문에 홍보로 출연하기에 괜찮은 거 같은데요? 어떠세요?”

    “그건 그렇지. 지난 이십 년 동안 그 프로의 엠씨를 맡아 온 사람도 배우고 말이야.”

    나는 김 팀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떠신가요? 심석현 배우님이 출연을 꺼리신다면 서이렌 배우님과 박선호 배우님. 단둘만 나가도 될 것 같습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닌데요? 저희가 출연할 수 있는 프로 중에는 제일 좋은 안 같아요.”

    김 팀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미해결 사건 파일은 예능은 아니지만, 시청률이 10%가 넘는 유명 프로그램이다.

    서이렌과 박선호가 출연한다면 단 한 번의 출연으로도 큰 홍보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SBC에는 어떻게 연락해야 할까요? 우리가 먼저 섭외해 달라고 요청해야 할 텐데. 예능국이 아니라 시사보도국으로 연락을 해야 하나?”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원 대표님이 어떻게요?”

    “제가 SBC 출신의 피디 한 분을 잘 알고 있거든요.”

    내 말을 들은 강진석이 속으로 웃었다.

    ‘최욱환 피디를 말하는 거구나. 그렇지. 그 양반이 우리 부탁이라면 반드시 들어주려고 하겠지.’

    강진석은 걱정하지 말라며 조만간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겠다며 김 팀장에게 말했다.

    홍보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중, 운전하던 강진석이 내게 말했다.

    “UPC에서 배급하는 멜랑꼴리 이야기는 들었어?”

    “그게 왜요?”

    “이번 주부터 대규모로 관객 시사회를 한다더라. 시사회 반응이 나쁘지 않았나 봐.”

    “그래요?”

    “그리고 우리보다 일주일이나 먼저 개봉하는 거 알아?”

    “같은 날 개봉하는 거 아니었나요?”

    “유료 시사회를 한대. 말이 시사회지. 푯값을 다 받을 거면서. 그게 정식 개봉이지 뭐냐.”

    “그렇죠. 그거 다 말장난이긴 하죠.”

    “첫 영화 흥행시키려고 TOP이 사활을 걸었어. 요즘 텔레비전만 틀면 김선우랑 지수연이 나와서 영화 홍보를 하더라.”

    “그래도 구원의 밤이 더 잘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나도 알아. 우리는 작품이 되잖아.”

    * * *

    록 이사는 멜랑꼴리로 도배된 포털 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홍보만큼 중요한 게 없어.’

    록 이사는 포털 창을 닫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래. 나야. 녹화는 잘 끝냈어?”

    지수연의 아버지인 지영록 국장을 등에 업고 김선우와 지수연은 KBC의 내놓으라는 유명 예능을 순회하고 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라이어 게임’이라는 프로에 출연한다.

    각계각층에서 활동하는 열 명의 사람들을 초대해 벌이는 두뇌 게임으로 이 프로로 스타가 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예. 방금 끝났습니다.]

    “잘한 거 같아? 그거 두뇌 게임이라서 김선우가 나가기 싫다고 한 거 억지로 밀어 넣은 거거든.”

    [장난 아닙니다. 김선우, 지수연 배우님이 우승했습니다.]

    매니저의 말에 록 이사의 얼굴이 밝아졌다.

    “우승했어? 정말로?”

    [연예인이 우승한 건 반년만이래요. 지금 김선우 배우님이랑 지수연 배우님도 되게 좋아하세요.]

    “잘됐다. 그거 시청률 잘 나오는 프로라서 홍보 효과 좀 있을 거다.”

    [이사님. 저는 이만 끊겠습니다. 배우님들 의상 다 갈아입으셨어요.]

    “그래. 운전 조심하고.”

    전화를 끊은 록 이사는 간만에 기분 좋은 얼굴로 웃었다.

    사무실에서 나와 집에 도착한 록 이사는 씻고 밖으로 나왔다.

    맥주 한 잔을 꺼내고 텔레비전을 틀어 보니 SBC에서 미해결 사건 파일이 하고 있었다.

    그런데 패널로 참석한 사람이 눈에 확 띄었다.

    록 이사는 영화 홍보를 위해 패널로 출연한 서이렌과 박선호를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생각해 보니 미해결 사건 파일은 구원의 밤 홍보로 괜찮은 시도였다.

    록 이사는 서이렌과 박선호가 얼마나 잘하는지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미해결 사건 파일의 오랜 엠씨였던 김해종의 인사를 시작으로 서이렌이 큐카드를 들었다.

    서이렌이 마치 아나운서 같은 안정적인 발성으로 오늘 이야기를 나눌 미해결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오늘 1987년 12월 발생한 유영환 실종 사건을 소개하겠습니다. 유영환은 당시 주목받는 톱모델이었으며…….”

    텔레비전을 보던 록 이사가 의자를 고쳐 앉았다.

    “뭐야? 쟤는 왜 저렇게 잘해?”

    서이렌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담담했으며 패널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전문가로 참가한 프로파일러가 당황할 정도였다.

    “서이렌 씨는 공부를 꽤 해 오셨나 보네요. 맞습니다. 서이렌 씨가 말씀해 주신 것처럼 그 당시에는 그런 작은 증거들을 다 놓치고 말았죠.”

    한참 동안 텔레비전을 지켜보던 록 이사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원세강. 이제는 부러움을 넘어서 짜증이 난다. 쟤는 대체 전생에 무슨 일을 했길래 찾는 배우들마다 다 저렇게 잘하는 걸까?”

    록 이사는 열받아서 더는 못 보겠는지 텔레비전을 끄고 침실로 들어갔다.

    * * *

    드디어 7월의 텐트폴 영화의 예매가 시작됐다.

    구원의 밤을 기다렸던 수많은 사람이 예매 사이트에 접속했다.

    구원의 밤은 그날의 블라인드 시사회를 빼놓고는 단 한 번도 시사회를 한 적이 없었다.

    블라인드 시사회 결과를 본 내가 티켓박스와 상의해서 내린 결정이다.

    아침부터 TOP 미디어에서도 예매율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김선우와 지수연이 방송국을 순회하며 영화를 홍보한 덕으로 분위기는 좋았다.

    록 이사는 긴장된 얼굴을 하고 홀로 그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드디어 실시간 예매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위. 구원의 밤. 예매율 43%

    2위. 멜랑꼴리. 예매율 22%

    3위. 레디액션. 예매율 12%

    4위. 내가 법이다. 예매율 8%

    예상대로 구원의 밤이 일 위로 치고 올라왔다.

    구원의 밤 앞에 붙은 43이란 숫자를 본 록 이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멜랑꼴리가 이 위이긴 하지만 일 위와 격차가 너무 심했다.

    “됐어. 이제 시작이야. 홍보 방송 나올 것도 아직 많이 대기 중이라고.”

    록 이사는 정신 승리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매율을 보고 퇴근하려고 늦게까지 기다리느라 TOP 미디어 직원들은 모두 퇴근한 후였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을 둘러보던 록 이사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러니까 예매율이 그따위지. 영화 개봉이 코앞인데 지금 일찍 퇴근할 때야? 내가 대표 되기만 해 봐. 회사 분위기부터 손 봐야겠어.”

    록 이사는 사무실 불을 끄고 문으로 다가갔다.

    사방이 어두웠고 복도의 간접 등에서 쏟아지는 불빛만이 이곳을 밝히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엘리베이터 쪽이 환해졌다.

    록 이사는 의아하게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다.

    사 층에는 TOP 미디어밖에 없다.

    엘리베이터 쪽의 등이 켜졌다면 누군가 왔다는 이야기다.

    사무실 문밖으로 나선 록 이사는 걸어오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록 이사가 그토록 싫어하는 원세강이 난 화분을 들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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