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27화 (128/261)

#127화. 블라인드 시사회

메일에는 6월 첫째 주에 블라인드 시사회를 할 거라고 적혀 있었다.

극장은 충무로에 있는 티켓박스가 운영하는 멀티플렉스 극장이다.

블라인드 시사회는 영화 전문 커뮤니티인 베스트 무비에서 기존에 하던 대로 추첨을 통해 진행된다고 적혀 있었다.

영화에 자신이 있었지만 그래도 대중에게 공개되는 첫 번째 자리이기 때문에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곧바로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서이렌은 옆자리에 앉아 있는 김이솔을 챙겼다.

“언니. 이것 좀 드실래요?”

“고마워요. 서이렌 씨.”

김이솔이 서이렌이 건네는 감자 과자를 받으며 웃었다.

“언니 편하게 말씀하세요.”

“어떻게 그래요. 오늘 처음 봤잖아요.”

그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윤이슬이 끼어들었다.

“이솔 언니. 저도 이렌이랑 만난 그날 바로 말 텄어요. 그냥 편하게 하세요.”

윤이슬까지 편하게 대해 주자 김이솔이 그제야 미소를 보였다.

윤이슬은 김이솔에게 오징어 다리를 건넸다.

“언니. 이게 더 맛있어요. 이거 드세요.”

“고마워요. 이슬 씨.”

“이슬이요.”

“그래. 이슬아.”

MT를 보며 한창 웃고 떠드는데 방금 촬영을 마친 이락이 서유림 매니저와 함께 들어왔다.

“어. 벌써 시작했네요. 어때요? 재미있어요?”

“락아. 빨리 와서 앉아. 너 우물가에 갔다가 미끄러지는 장면 나올 거야.”

“에? 그거 편집 안 했어요? 윤 감독님. 어떻게 된 거예요? 그거 편집해 주셨어야죠.”

이락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윤서혁을 쳐다봤다.

윤서혁은 얼굴이 발그레해진 채로 꼿꼿이 앉아서 텔레비전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락이 빈선예의 곁에 앉더니 물었다.

“윤 감독님은 왜 저러고 있어요? 술 많이 드셨어요?”

“몰라. 자기가 찍은 거 예능으로 방송해서 긴장했나 봐. 오늘 통 말씀이 없으시네.”

“흠.”

이락은 탁자 위에 펼쳐진 야식을 보더니, 맥주캔에 손을 댔다.

그러자 서유림이 다가와 조용히 이락의 손에서 맥주캔을 빼앗았다.

“누나.”

“내일 아침에 촬영 있어요. 안 돼요.”

“누나. 한 모금만 마실게요.”

“이 배우님은 아침에 많이 붓는 타입이잖아요. 절대 안 돼요. 내일 중요한 씬 찍잖아요.”

이락은 포기 못 하겠는지 서유림에게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이. 누나. 한 모금도 안 돼요? 진짜 딱 한 모금만 마실 거란 말이에요.”

이락의 애교에도 서유림은 절대 넘어가지 않았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김이솔이 서이렌에게 물었다.

“이렌 씨.”

“이렌이요. 편하게 부르세요.”

“응. 이렌아.”

“왜요? 언니?”

“여긴 되게 자유로운 분위기다.”

“우리요?”

“응. 매니저들도 다들 친절하고. 배우들도 서로 친하게 지내고.”

“맞아요. 우리 대표님이 인덕이 있으셔서 다 좋은 사람들만 모였거든요.”

서이렌이 말을 마치며 강진석과 블라인드 시사회에 관해 대화 중인 나를 쳐다봤다.

김이솔은 진설의 설득에 못 이겨 스타탄생과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언제든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둔다는 파격적인 조건의 계약서였기 때문에 그녀로서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도 연기를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무대에 오르는 것도 좋지만 영화는 다른 매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김이솔은 오늘 긴장하며 스타탄생에 찾아왔지만, 왠지 좋은 느낌이 들었다.

이 일을 시작하고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다시 학생 때로 돌아간 거 같아서 흥분되기 시작했다.

* * *

- MT 개존잼. ㅋㅋㅋㅋ

- 개미처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스본 배우들이랑 씨지팀 진?ㅋㅋㅋㅋㅋㅋ

- 존나웃김.ㅋㅋㅋㅋ

- 서이렌 못하는 게 없음. 다 잘해.

- 윤이슬은 할 줄 아는 건 없는데 힘이 쎄. 미친. 존나 멋있어.

- 이락이랑 강진석은 둘만 나오면 갑자기 개그프로 됨.

- 서로 몸 개그 배틀 하고 있다고 ㅋㅋㅋ

- 초반에 개그 물로 갔다가 밤에 담력 테스트하면서 공포물로 전환됐다가 마지막에는 로코로 바뀜.

- 로코는 언제 나왔냐? 나 왜 못 봤지?

- 우연미가 아이디어 떠올랐는데 종이 없다고 원세강 등에 뭐 적었잖아.

- 아하. 그거.

- 나만 그 부분에서 설렌 줄 알았네. ㅋㅋㅋ

- 예고 떴을 때부터 엄청 기대했는데. 기대 이상 ㅋㅋㅋㅋㅋㅋ 드립 미쳤어! 다들 ㅋㅋㅋㅋㅋㅋ- 이게 파일럿이고 1회밖에 없다니. 이건 말이 안 된다.

- 존잼인데 2화가 없어. ㅅㅂ

- 얘들아. 다음 주에 개웃긴 이락이 나오는 나만의 마돈나랑 존멋인 윤이슬 나오는 해피 스릴러 첫 방송임. 그거라도 봐라.

- 윗댓 말이 맞아. 드라마 시작하면 스본에서 비하인드 영상 많이 찍어 줄 것임. 스본 비하인드도 존나 웃김.

- 그러고 보니 태초에 스본 비하인드가 있었다. 소속사에서 찍은 비하인드가 왜 웃기나 했더니 오늘을 위한 큰 그림이었어.

MT가 끝나자 SNS에 수많은 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알티와 하트수가 역대급으로 폭발하더니 기어이 실시간 트렌드를 MT가 장악해 버렸다.

방송이 끝나고 자리를 정리하던 나는 최욱환 PD로부터 온 문자를 받고 미소를 지었다.

강진석이 웃는 나를 보며 옆으로 다가왔다.

“왜 그렇게 웃어. 세강아?”

“형님. 이것 좀 보세요.”

나는 강진석에게 최욱환 PD가 보낸 문자를 보여 줬다.

영원히 함께하자는 최욱환의 문자를 본 강진석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최 PD는 스타탄생 만난 게 진짜 행운이지. 암. 그렇고말고.”

우리는 배우, 직원 할 것 없이 다 같이 도와서 자리를 정리했다.

어느덧 밤 열한 시가 훌쩍 지났다.

“자, 인제 그만 갑시다. 매니저분들은 한 분도 술을 안 드셨으니까 배우님들 안전히 모셔다드리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특급으로 모셔다드릴 테니 염려 마세요.”

배우들이 떠나고 시끌벅적했던 회사가 조용해졌다.

나는 강진석과 함께 문을 닫고 회사에서 나왔다.

“형님. 갑시다.”

“그래. 짜식아. 내가 운전해 줄게. 빨리 타.”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강진석의 곁으로 달려갔다.

내가 운전석 옆에 앉자 내 핸드폰으로 문자가 들어왔다.

[대표님. 잘 자요. 오늘 밤에 내 꿈 꾸는 거 잊지 말고요.]

서이렌은 그날 이후로, 마치 연인처럼 매일 밤 내게 문자를 보내 준다.

나는 한 번도 답장을 보낸 적이 없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센치해지는 밤이다.

나는 서이렌의 문자에 처음으로 답장을 했다.

[이렌 씨도 잘 자요.]

* * *

영화 커뮤니티 베스트 무비에 두 개의 블라인드 시사회가 떴다.

커뮤니티 이용자들이 앞다퉈 블라인드 시사회를 신청했다.

게시글이 뜬지 오 분도 채 되지 않아 시사회가 마감됐다.

- 이번에는 좀 재미있는 영화였으면 좋겠네요.

- 올여름 텐트폴 영화 중의 하나이지 않을까요?

- 그러면 좋겠네요.

- 이거 된 건지 언제 알려 주나요?

- 내일이면 바로 결과 뜰 겁니다.

- 뜨자마자 신청했는데 되겠죠?

- 선착순이 아니라 신청한 사람 중 랜덤하게 고르는 거라서 운이 필요해요.

- 이번에는 제발 됐으면 좋겠네요.

* * *

TOP 미디어에서는 내일 있을 블라인드 시사회 준비에 한창이었다.

영화에 대한 관객의 직접적인 평을 들을 수 있기에 중요한 시사회였다.

개봉이 한 달이 조금 넘게 남았기에 재촬영은 못 하지만 편집에 시사회에서 나온 의견을 반영할 수는 있었다.

록 이사는 사내 일 층에 있는 카페로 가서 커피를 시켰다.

커피를 들고 구석 창가에 앉아 모닝커피를 즐기고 있는데 TOP 직원들이 카페로 들어와 커피를 시켰다.

“어제 해피 스릴러 시청률 뜬 거 봤어?”

“엄청 잘 나왔더라. 밤 열한 시에 하는 장르물인데 첫 방이 5% 나왔어.”

“야. 나만의 마돈나는 첫 방송이 무려 10%였어.”

“그건 이자현이 나오잖아. 암튼 두 작품 다 대박 나서 원세강은 좋겠다.”

“원세강이야말로 난놈이지. 드라마 방영 전주에 예능으로 터트렸잖아. 예능 시청률이 9%였어. 제기랄. 다들 그거 보고 드라마 찾아본 거 같다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원세강이랑 좀 친하게 지낼걸.”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원세강이랑 친하게 지냈으면 강진석이처럼 이직했을 거잖아? 강진석은 팀장에서 이사로 초고속 승진하고 인센티브만 몇억씩 받는다더라.”

“와. 사람 인생 순식간이네. 강진석이 그 정도 받으면 대체 원세강은 얼마나 번다는 거냐?”

“아오. 아침부터 속이 다 쓰리다.”

“그건 우리가 빈속에 커피를 마셔서 그런 거고.”

“쳇. 너도 속이 쓰리긴 한가 보다.”

“당연하지. 원세강이 재능은 있어도 사내 정치는 영 꽝이라 내가 먼저 승진했는데. 아. 생각만 해도 짜증 난다.”

두 직원이 사라지자 창가에 앉아 있던 록 이사가 일어섰다.

록 이사는 걸어가는 직원들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때 록 이사의 핸드폰에 문자가 들어왔다.

팬파라치 기자 신주원이 보낸 문자였다.

[지금 베스트 무비에 양념 좀 치고 있습니다. 기사는 블라인드 시사회 후에 올라갑니다.]

록 이사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제 시작이야. 구원의 밤. 그까짓 거 성공하든 말든 상관없어. 하지만 서이렌이 잘되는 꼴은 못 보겠다. 원세강, 이게 다 네 탓이라는 것만 알아줘.’

록 이사는 핸드폰을 닫고 평화로운 얼굴로 유유자적하게 카페를 떠났다.

* * *

베스트 무비의 자유 게시판은 오늘도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 오늘 충무로 블시가 티켓박스 구원의 밤이라는 소리가 있는데 사실인가요?

- 에? 정말요?

- 충무로 되신 분들 대박이네요. 지금 한창 상영 중이겠죠?

- 초딩 때 최병철 감독님의 영화 만종 보고 감동한 사람입니다. 감독님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 저도 구원의 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용산 블라인드 시사회는 멜랑꼴리라는 말이 있네요.

- 오늘 두 시사회가 다 대박이네요.

베스트 무비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린 시네키즈들은 시사회 이야기를 하며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시사회가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안 돼 누군가 이상한 글을 썼다.

[불호 후기: 오늘 충무로에 갔던 사람입니다.

스포가 될 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오로지 제가 느낀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영화 망할 거 같습니다.

영화보다가 삼십 분만에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모 여배우가 영화에 똥을 뿌렸어요.

그 여배우가 연기하는 걸 도저히 못 봐주겠네요.

보다가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왔네요.

대체 어떻게 이 대작에 캐스팅된 걸까요?

소속사 끼워팔기의 폐해네요.

이 게시글도 신고당해서 조만간 잘리겠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불호 후기라고 제목에 썼지만, 내용이 너무 심했다.

베스트 무비 유저들은 게시글을 보며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 충무로면 구원의 밤이고 여배우면 서이렌인 거 같은데. 이렇게 악플을 다시면 어떡합니까?

- 블라인드 시사회인데. 후기 어쩔.

- 서이렌이 그렇게 못하는 배우가 아닌데요? 이상하네???

- 남주가 심석현, 조연이 김건명이잖아요. 넘사벽이랑 붙으면 원래 실력이 안 나올 수도 있죠.

- 아. 구원의 밤. 기대했는데. ㅠㅠㅠㅠ

- 이거 믿어도 되는 글인가요? 아직 시사회도 안 끝났는데.

- 영화를 다 보고 후기를 남겨야지. 달랑 삼십 분보고 남긴 후기?? 그것도 더러운 단어 써 가면서 욕하는 후기라니. 10년 차 베스트 무비 유저로서 환멸이 나네요. 신고로 잘리기 전에 알아서 글 내리세요.

- 윗분 말씀처럼 저도 이건 아니라고 봅니다.

- 서이렌 팬들 몰려왔네. ㅋㅋㅋ

- 저분들 베스트 무비 터줏대감들이잖아요. 무슨 서이렌 팬입니까?

- 아이고 난리 났네. 저는 시사회 끝나고 들어올게요. 그만들 싸워요.

록 이사는 순식간에 댓글이 백 개가 넘게 달린 불호 후기를 보며 크게 웃었다.

댓글은 총성 없는 전쟁이 펼쳐져 있었다.

베스트 무비는 기본적으로 존댓말을 사용하게 되어 있는데 유저들은 말만 존대지 글에는 창칼이 박혀 있었다.

얼마 후, 불호 후기 게시글이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다른 글을 올리며 또 싸우고 있었다.

한 시간 동안 베스트 무비가 전쟁터로 변했고 드디어 두 작품의 시사회가 끝날 시각이 됐다.

용산에 있던 록 이사는 블라인드 시사회를 보고 나올 관객들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모니터링 중이던 인터넷 창을 닫았다.

이윽고 블라인드 시사회를 관람한 진짜 유저의 관람평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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