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개봉 준비
오랜만에 레전드 필름에 강진석 이사와 함께 방문했다.
구원의 밤 최종 편집 때문에 레전드 필름은 바빴고 드디어 오늘 새벽 최종 편집본이 완성됐다.
나는 밤을 새우고 바로 퇴근하려는 최병철 감독님과 레전드 필름 식구들과 함께 근처 식당으로 왔다.
아직 이른 오전 시간이었지만 24시간 뼈다귀탕 집이 있어서 그곳으로 갔다.
“이제 나도 너무 늙었어. 정말 못 해 먹겠군.”
최병철 감독이 허허 웃으며 술잔을 들이켰다.
“아직 정정하신데요. 일정이 너무 촉박해서 죄송합니다.”
“아냐. 진설 대표가 부탁해서 그런 거지. 나도 빨리 완성본을 보고 싶었고.”
“집에 들어가시면 푹 쉬세요. 감독님.”
“그래야지.”
최병철 감독이 내게 사이다를 따라 주며 물었다.
“김이솔 배우랑 계약했다면서?”
“어떻게 아셨습니까?”
“진설 대표한테 들었어. 김이솔 배우는 여전히 연기를 잘한다면서?”
“지금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고 있습니다. 평이 아주 좋아요. 쉬는 동안 가서 보실래요? 제가 표를 구해다 드릴까요?”
“첫 작품으로 너무 대박을 터트려서 어깨가 무거웠을 거야. 원 대표가 잘 챙겨 줘.”
“그래야죠. 그래서 계약한 거니까요.”
나와 최병철이 김이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옆에서 좀비처럼 뼈다귀를 뜯고 있던 윤서혁이 어느새 슬금슬금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윤서혁은 김이솔이 스타탄생과 계약했다는 소식에 웃기 시작했다.
두 손에 뼈다귀를 들고 얼굴은 시뻘게져서 광대를 씰룩이고 있는 그의 모습에 최병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윤 감독. 왜 그래? 잠을 못 잤더니 실성한 건가?”
스태프 한 명이 웃으며 말했다.
“윤 감독님이 피곤하신가 보네요.”
“나보다 한참 어린 감독이 겨우 하룻밤 샌 거로 피곤하면 쓰나?”
윤서혁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거리며 계속 웃고 있었다.
그때 뒷자리에 앉아 있는 레전드 필름 직원이 놀라 외쳤다.
“아! 나 미쳤나 봐. 경비로 안 돌려놓고 왔어요.”
“왜 그래?”
“아까 짐 들어오느라 경비 풀어 놓고 잠금도 다 풀어 놨거든요.”
“그랬어? 그럼, 지금 회사 문 열려 있는 거야?”
“예. 어떡하죠?”
직원이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지금 다녀올게요.”
“그거라도 다 먹고 가지.”
“안 돼요. 누가 들어 올 수도 있잖아요.”
직원이 신발을 신으려는데 박진숙이 그를 불러 세웠다.
“괜찮아. 가지 마.”
“예?”
“지금 회사 앞에 박상용이 와 있대. 문 열려 있다고 해서 내가 문 좀 닫고 가라고 했어.”
“박상용 실장님이요?”
“진설 대표님 생신이 이번 주 금요일이잖아. 그래서 화분 가져왔다고 하더라고.”
“쳇. 그때 그 기사 때문에 미안해서 그랬나 보네.”
“상용이 욕하지 말자. 걔도 TOP이 그렇게 저질로 언론 플레이를 할 줄 몰랐다잖아.”
“그럼, 저 안 가도 되죠?”
“응. 감독님들 모셔 드리고 천천히 들어가자.”
“알겠습니다.”
직원이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어제 밤을 새운 사람들은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강진석에게 최병철 감독님을 모셔다드려 달라고 부탁하고 직원들과 함께 레전드 필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레전드 필름이 있는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지하 주차장에서 차가 나와 신호등을 지나갔다.
“어? 저 차 옆자리에 있는 사람 박상용 실장님이죠?”
“그래?”
사람들의 말에 나도 고개를 돌렸다.
신호를 지나 사라지는 검은색 외제 차를 보자마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 차 같은데?
“그런데 박 실장님이 외제 차를 타고 다녀요?”
“상용이는 옆자리에 앉았던데?”
“그럼, 기사가 있는 거예요?”
“아냐. 걔가 몰고 다니는 차를 내가 아는데. 다른 사람 차를 얻어 타고 왔겠지. 어서 들어가자.”
“예. 팀장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레전드 필름 직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 * *
대한민국에는 사대 배급사가 존재한다.
멀티플렉스 극장을 소유한 UPC와 티켓박스가 투 톱이고 미라클픽쳐스와 데이드림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올봄에 천만 관객을 동원한 나비는 티켓박스에서 배급을 담당했고 구원의 밤도 티켓박스가 맡기로 했다.
배급사를 찾아온 나는 구원의 밤의 개봉과 홍보 일정을 논의했다.
개봉은 여름 텐트폴 영화가 개봉하는 7월.
티켓박스는 처음부터 구원의 밤을 이렇게 밀어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어두운 분위기의 19금 범죄 스릴러 영화지만 구원의 밤은 흥행성이 충분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나는 엔진의 박주오 대표의 힘을 빌려 티켓박스 최용진 대표와 만났고 그를 레전드 필름에 데리고 가서 완성된 구원의 밤을 보여 줬다.
최용진 대표를 위한 특별한 일인 시사회였다.
영화를 다 본 최용진 대표는 충격에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박찬영 감독이 작성한 시나리오를 천재 윤서혁이 다듬고, 메가폰은 거장 최병철이 맡았다.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레전드의 손에서 탄생한 구원의 밤은 배우들의 열연으로 정점을 찍었다.
최용진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내게 손을 내밀었었다.
“잘해 봅시다. 제가 제대로 밀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었다.
최용진 대표와 만났던 일을 떠올린 나는 티켓박스 홍보팀 본부장 앞에 기획서를 내밀었다.
본부장이 기획서를 읽고 있는 동안 내가 말했다.
“5월 둘째 주인 다음 주에 NGB에서 리얼리티가 방송될 겁니다. 그걸 시작으로 홍보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제작사에서 홍보에 힘을 실어 주시면 저희야 좋죠.”
티켓박스의 최용진 대표가 구원의 밤을 확실히 밀어주라고 몇 번이나 언급했기에 본부장도 최선을 다해 홍보 일정을 짤 생각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개봉하는 다른 영화들을 확인했다.
“UPC에서는 TOP 미디어의 첫 작품 멜랑꼴리를 대대적으로 밀어준다더군요. 배급 시사회 반응이 좋았다는 소문입니다.”
“한여름에 멜로로 승부를 본다니 작품이 정말 잘 빠졌나 보네요.”
나는 딱히 멜랑꼴리에 대한 경쟁심이 없었다.
멜랑꼴리와 구원의 밤은 경쟁 상대가 아니다.
관객층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다른 배급사의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UPC와 티켓박스가 의외의 선택을 한 거에 비해서 데이드림과 미라클픽쳐스는 여름에 딱 맞는 오락 영화를 골랐네요.”
“다 만만치 않을 겁니다. 소문으로는 블라인드 시사회 반응이 다 좋았다고 하네요.”
그럴 거다.
내가 본 미래에서도 미라클픽쳐스가 선택한 레디액션이라는 영화가 대박을 터트렸었다.
원래 레디액션은 티켓박스가 배급하는 거였는데 구원의 밤이 끼어들면서 내가 본 미래와 달라졌다.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졌다.
최용진 대표의 선택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 대표님. 블라인드 시사회는 고민하지 않고 계십니까?”
우리 작품은 완벽하다.
블라인드 시사회를 거쳐서 나온 반응을 보고 수정할 부분이 없어서 필요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관객들이 서이렌의 디테일한 연기를 알아볼 것인가 궁금했다.
초반에 서이렌의 연기는 철저하게 계산된 그림자 연기다.
강동철의 그림자인 그녀의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다가 서서히 그녀 자신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본부장을 보며 말했다.
“고민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시죠. 그럼, 일정이 나오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본부장과 악수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강남의 모 와인바에서 록 이사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팬파라치의 오 년 차 기자인 신주원이었다.
록 이사가 신주원을 알게 된 것은 천재용에게 로비를 하면서였다.
천재용이 후배라면서 신주원을 자주 데리고 왔었다.
록 이사가 있는 프라이빗룸에 들어온 신주원이 그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록 이사님.”
“천재용 빼고 우리 둘이 보는 건 처음이지?”
“예. 이사님.”
록 이사는 신주원이 앉자마자 와인을 따라 그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천재용이는 요즘 뭐 하고 지낸대? 소식 들은 거 있어?”
“아직 법정 싸움 중일 겁니다. 물려 있는 소송만 열 개가 넘어요.”
“어휴. 재판 그거 쉽게 볼 게 아닌데. 천 기자가 힘들겠어.”
“다 본인이 만든 업보죠. 누가 누굴 탓하겠습니까?”
록 이사의 눈이 신주원을 은근히 훑었다.
신주원은 천재용이 자신의 약점을 이용해 퇴사한 이후에도 좌지우지하려던 일을 떠올리며 이를 갈고 있었다.
“자 마셔. 기자 연봉으로는 마시기 힘든 와인이야.”
“감사합니다.”
록 이사와 신주원은 신변잡기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예열이 됐다고 생각했는지 록 이사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레전드 필름의 ‘구원의 밤’이라고 알아?”
“알죠. 대작이라고 소문이 자자하지 않습니까?”
“대작이긴 하지. 거장 최병철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시나리오는 박찬영 감독 작품이니까.”
신주원은 록 이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말이야. 그 엄청난 작품에 옥에 티가 있더라고.”
“옥에 티요?”
“서이렌 말이야. 걔가 옥에 티야.”
신주원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데뷔한 이후로 지금껏 승승장구해 온 서이렌이 옥의 티라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싶었다.
록 이사는 주머니에서 USB 하나를 꺼냈다.
“이게 뭡니까?”
“구원의 밤. 초반 삼십 분이 담긴 편집본.”
“예?”
신주원이 놀라 록 이사를 쳐다봤다.
“이걸 어디서 구하셨어요?”
“어디서 구한 게 문제가 아니지. 이걸 지금 신 기자가 손에 넣었다는 게 중요하지.”
신주원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록 이사는 지난날 레전드 필름에 갔을 때 이 USB를 손에 넣었다.
최병철이 진설에게 보여 주려고 촬영 중에 만들었던 일 차 편집본이다.
록 이사는 집에 가서 이 영상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구원의 밤은 거장이 많든 작품답게 초반 삼십 분만으로도 그 가치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거장이 많든 대작 속에서의 서이렌은 너무 부족했다.
삼십 분 내내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았고 시선 처리도 어색했다.
‘원세강. 드디어 네가 미끄러지는구나. 배우한테 연기력 논란이 얼마나 치명타인 줄 알아?’
록 이사는 신주원의 손에 USB를 쥐여 줬다.
“조만간 구원의 밤의 블라인드 시사회가 열린다더군.”
“그래서요?”
“거기에 맞춰서 시나리오 좀 짜 봐.”
“시나리오라고요?”
“천재용한테 안 배웠어? 난 벌써 헤드라인이 떠오르는데? ‘대작을 망친 서이렌’이라든가, ‘역대급 발연기를 보여 준 서이렌. 하락세 시작인가?’라든가 말이야.”
신주원은 잠시 고민하더니 손에 든 USB를 꽉 쥐었다.
록 이사 말대로 천재용이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거다.
천재용은 너무 멀리 가서 추락했지만, 자신은 줄을 잘 탈 자신이 있었다.
“뭘 원하시는지 알겠네요. 감사합니다. 록 이사님.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 신 기자는 천재용처럼 분수도 모르고 날뛸 거 같아 보이지는 않더라고. 우리 잘해 보자고.”
록 이사가 신주원에게 와인 잔을 내밀었다.
신주원은 목이 타서 그걸 단번에 마셔 버렸다.
* * *
스타탄생 소속 배우들의 팬들이 TV 앞에 모여들었다.
오늘은 기대하던 스타탄생의 예능 MT가 첫선을 보이는 날이다.
- ㅈㄴ떨린다.
- 기대 중 ㅠㅠㅠ
- ㅁㅊ 얼른 보고 싶다. ㅠㅠ
- 진짜 개떨려.
- 광고 좀 그만해. 나 토 나올 거 같아.
- 빨리.
- 이제 시작한다.
MT는 스타탄생 회사 앞에서부터 시작했다.
회사 앞에 버스가 서 있었고 그 버스에 스타탄생 식구들이 하나둘 올라탔다.
- 서이렌도 사람이구나. 아침이라고 얼굴 찐빵 됐네.
- 미친 개귀여워.
- 이락도 햄토리 같아.
- 저 사람은 매니저 참견 시점에 나오던 그 매니저 아니냐?
- 맞네. 몸 개그 쩔던 매니저 맞다. ㅋㅋㅋ
- 우 작가님도 차에 타셨다.
- 스님 오랜만에 본다.
- 원 대표님. 제발 방송에 많이 나와 주세요.
- 그냥 차에 타는 건데도 캐릭터가 다들 확고하다.
방송은 시작부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오늘 촬영이 없는 스타탄생 식구들도 회사에 모여 예능을 감상하고 있었다.
윤서혁이 만든 영상을 최욱환이 다시 한 시간짜리로 압축해서 편집하고 자막까지 달고나니 진짜 예능 프로그램 같았다.
한참 웃고 떠드는데 내 핸드폰으로 메일이 들어왔다.
[밤늦게 메일 드려 죄송합니다. 구원의 밤 블라인드 시사회 일정이 떠서 연락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