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25화 (126/261)

#125화. 리얼리티:MT

장장 한 시간 삼십 분간의 상영 시간 동안 회의장에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고참 PD와 신임 예능 국장도 사림인지라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는 없었다.

영상이 끝나고 윤서혁이 특별히 편집한 에필로그까지 모두 재생되자 나는 불을 켰다.

조금 전까지 킥킥대며 웃던 PD들이 불이 켜지자마자 근엄한 표정으로 돌변했다.

하지만 표정만 그럴 뿐 광대가 씰룩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최욱환은 그들이 물어보고 싶은 질문을 내게 직접 했다.

“윤서혁 감독님이 직접 찍고 편집까지 했다죠?”

“윤 감독님이 재능이 넘치십니다. 재미와 웃음에 대한 감도 있고요.”

“그러네요. 당장 예능국에 잡아 오고 싶을 정도로 센스가 있는데요.”

나와 최욱환의 대화를 들으며 고참 PD와 예능국장은 뭔가 자기들끼리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무슨 대화를 주고받는지 관심을 끄고 최욱환과 계속 대화를 진행했다.

“캐릭터가 정말 다양하네요. 이거 미리 계획하고 간 엠티인가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런 건 전혀 없었습니다. 사실 윤 감독님이 촬영하는 것도 우리끼린 논의된 바가 없었습니다.”

“그렇네요. 배우분들이 카메라 치우라고 화내는 장면도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조금 타이트하게 재편집 한 뒤, 한 시간짜리로 만들어서 파일럿으로 내보내면 좋을 거 같은데 어떠세요?”

최욱환이 고참 PD들은 제치고 예능국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말든 국장이 오케이 하면 그만이다.

국장은 탁자 위에 펜을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다.

이내 국장의 입이 열렸다.

“계약은 어떻게 되는 거죠?”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리얼리티:MT의 판권은 스타탄생이 가집니다. 이건 저희 기획이니까요. 파일럿이 잘되면 정식으로 NGB와 스타탄생이 손잡고 프로그램을 만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일 년에 한 번 방영인가요?”

“그렇겠죠. 일주일 정도 엠티를 다녀오면 한 달 치 분량은 뺄 수 있지 않을까 생각 중입니다.”

“흠.”

예능 국장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아무래도 프로그램의 판권을 스타탄생이 가지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들어 회의실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나만의 마돈나로 바쁜 이윤기 감독님을 찾아봬야 해서 여길 나서면 곧바로 KBC로 가야 한다.

최욱환이 내가 시계를 보자 물었다.

“왜 그러세요? 바쁘신가요?”

“예. 바로 KBC로 가야 합니다. 거기서 PD분을 뵙기로 했거든요.”

내가 KBC로 간다는 말에 국장을 포함한 고참 PD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모두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저 사람들이 갑자기 왜 저러지?

나는 사람들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곧바로 이유를 깨달았다.

내가 KBC와 NGB 둘 중 어디와 계약할지 간 보고 있다고 오해하는구나.

나는 굳이 저들의 착각을 바로 잡아 줄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약속 시간이 빠듯해서요.”

나는 달랑 한 장뿐인 PPT와 노트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국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잠깐만요. 원 대표님.”

국장은 고참 PD들과 눈을 맞추며 의견을 나누더니 이내 나를 쳐다봤다.

나는 NGB와 틀어지면 곧바로 KBC로 떠날 것 같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그를 바라봤다.

“합시다. MT 괜찮네요. 우리 NGB에서 하죠.”

“좋은 결정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 *

회의실에서 나온 나는 최욱환의 배웅을 받으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KBC에 가시면 이락 배우님께 안부 인사 좀 전해 주세요.”

“제가 나만의 마돈나 때문에 KBC에 가는 걸 이미 눈치채셨군요. 아까 보니 다른 분들은 오해하신 것 같던데요.”

“원 대표님이라면 이리저리 저울질하실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계약 안 하는 시나리오는 아예 생각을 안 하고 오신 것 같던데요?”

“말하기 부끄럽지만, 자신이 있었습니다. 저희도 원래 그 영상을 스타탄생 공계에 올려서 팬서비스용으로 공개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내부 시사회에서 방향을 틀었습니다. 너무 재미있어서요.”

“그럴 만하네요. 정말 오랜만에 날것의 웃음을 봤습니다. 제가 더 분발해야겠더라고요.”

“방금 하신 말씀을 윤서혁 감독님께 꼭 전해 드릴게요.”

최욱환과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탔다.

우리는 그들을 향해 눈인사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무테안경을 쓴 여자가 어디서 많이 본듯했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보며 외쳤다.

“어? 김이솔 배우님.”

그녀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혜성같이 나타나 그해 전 세계의 모든 신인상을 휩쓸고 사라진 천재 배우 김이솔이 맞다.

김이솔은 화장기 없는 얼굴에 무테안경을 쓰고 모자까지 쓰고 있어서 누가 자신을 알아볼 줄 몰랐던 것 같았다.

볼이 빨개진 김이솔을 보며 내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놀라서 제가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김이솔이 어색하게 웃었으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일 층에 도착하자 김이솔과 함께 탄 남자가 내렸다.

나는 지하에 차를 대 놔서 주차장으로 가야 한다.

엘리베이터가 닫히기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다음에 또 뵐게요. 저는 스타탄생 원세강입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사이로 불안한 듯 웃는 김이솔의 옆얼굴이 보였다.

* * *

오늘은 인천 연안 부두에서 촬영한다.

최진 역을 맡은 서이렌은 요즘 전국을 돌아다니며 촬영을 진행하고 있다.

오늘은 주인공인 심석현도 함께 왔다.

최진은 강동철의 과거 행적을 찾았고, 오늘 여기서 젊은 강동철과 조우하는 장면을 찍게 된다.

“와. 매일 앉아서 편하게 촬영하다가 오랜만에 바깥에 나와서 촬영하려니 죽겠네요. 감독님.”

“석현아. 지금 날 보고 그런 소리가 나오나?”

최병철 감독이 심석현과 대화를 나누며 웃었다.

나는 촬영을 준비 중인 윤서혁에게 다가갔다.

“윤 감독님. 뭐 물어볼 게 있는데요.”

“예. 말씀하세요.”

“윤 감독님이 한국예술대학교 졸업하셨죠?”

“학부는 다른데 나왔고요. 대학원만 거기서 졸업했어요. 왜 그러세요?”

“그럼, 김이솔 배우님도 잘 아시겠네요?”

내 입에서 김이솔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갑자기 윤서혁의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나는 새빨개진 윤서혁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김이솔 배우님이 후배시죠?”

“같은 공연영상창작학부지만 이솔 배우님은 연기 전공이고 저는 연출 전공이라서요.”

“그래도 학부가 같은데 한 몸이 아닌가요?”

“한 몸은 아니죠.”

“그래도 잘 아시는 거 아닌가요? 연출과에서 하는 연극에 연기과 학생들이 주로 참여하잖아요. 그래서 한국예술대학교 졸업생들은 자주 뭉친다고 들었는데요.”

윤서혁은 여전히 긴장한 채 물었다.

“그런데 이솔 배우님 이야기는 왜 하는 겁니까?”

“엊그제 NGB에서 김이솔 배우님을 봤어요.”

윤서혁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소리쳤다.

“예?”

촬영을 준비하던 스태프들이 모두 우리를 바라봤다.

윤서혁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내젓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왜 그러세요?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데요?”

“이솔 배우님을 봤어요? 어떻게요? NGB에는 왜 간 건데요?”

“NGB에 친동생이 일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모르셨어요? 동문들은 뭔가 알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보기에 김이솔 배우님이 이제 한국에 완전히 들어온 거 같던데요? 유학이 끝난 거 같았어요.”

“사실 저도 잘 몰라요. 이솔 배우님은 워낙에 학생 때부터 유명하신 분이셨고 저 같은 대학원생 나부랭이한테는 가까이 갈 수 없는 여신 같은 분이셨거든요.”

감독님이 왜 저러실까?

윤서혁은 어느새 두 손을 꼭 쥐고 뭔가를 회상하고 있었다.

회상을 마친 윤서혁이 나를 보며 외쳤다.

“혹시 원 대표님이 이솔 배우님께 관심이 있으신가요? 스타탄생에 영입하시려고요?”

영입이라.

그것까지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다만 진설의 후계자라 불리던 천재 배우가 계속 연기를 해 줬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

“윤 감독님. 이제 시작합니다.”

“네. 갈게요.”

자리에서 일어선 윤서혁은 세팅된 카메라로 걸어가다 말고 다시 내게 돌아왔다.

“김이솔 배우님이 스타탄생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

“서이렌. 윤이슬. 김이솔. 완전체라는 생각은 안 드시나요?”

“아니, 뭐. 딱히…….”

“대표님. 부탁합니다. 꼭 이솔 배우님을 영입해 주세요. 제 소원입니다.”

“…….”

윤서혁이 자기 할 말만 하고 뒤돌아섰다.

왜 저러지?

윤서혁이 김이솔 팬이었나?

대학원 다닐 때 김이솔을 캐스팅하고 싶었는데 못해서 한이 쌓였나?

아. 그건가 보다.

나는 그제야 김이솔을 꼭 영입해 달라는 윤서혁의 마음이 이해됐다.

그래. 감독이면 영감을 주는 뮤즈가 있겠지.

이해한다.

모든 걸 이해한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 * *

멜랑꼴리의 마지막 촬영 날이 밝았다.

오랜만에 촬영장에 찾아온 록 이사는 스파이 겸 촬영장에 심어 놨던 직원을 호출했다.

“록 이사님 오셨습니까?”

“잘 진행되고 있나?”

“그럼요. 일정에 차질 없이 오늘 촬영이 끝나잖습니까. 박호중 감독님이 드라마 판에서 오셔서 그런지 시간 조율을 되게 잘해서 효율적으로 찍으시더라고요.”

“그래. 그 양반이 워낙에 그쪽으로는 유명하지.”

멜랑꼴리에 대해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눈 록 이사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구원의 밤은 어때?”

“그쪽은 지난주에 파주 촬영 끝내고 지방 촬영 시작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방 촬영이면 이제 시작이네.”

“아뇨. 거기도 다음 주 초에 촬영이 끝난대요.”

“뭐? 그렇게 빨리?”

록 이사는 믿을 수가 없었다.

로맨스물인 멜랑꼴리도 두 달이란 촬영 기간이 절대 긴 편이 아니다.

그런데 범죄 스릴러물인 구원의 밤이 비슷한 일정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거긴 완전 일사천리예요. 레전드 필름 인력이 다들 베테랑이고 감독님도 워낙 연륜이 있으시고 배우들도 NG 한번을 안 냈다고 하네요.”

록 이사는 괜히 뒷맛이 씁쓸했다.

‘처음부터 레전드 필름과 합작해서 진행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서이렌은 어때? 아직도 헤매고 있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서이렌 씨는 초반 촬영에만 여기로 출근했고 주로 로케였다고 들었거든요. 차라리 잘된 거죠. 심석현 배우랑 한 프레임에 나와서 연기로 먹히느니 혼자 찍는 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오케이. 알았어. 이제 회사에서 보자고.”

“예. 이사님. 들어가십시오.”

* * *

서이렌은 지금 복사도에 가 있다.

드디어 구원의 밤의 마지막 주 촬영이 밝아 왔다.

두 달간의 짧은 여정이었으나 그동안 서이렌의 연기는 미친 듯이 성장했다.

현장에서 지켜보는 내가 다 소름이 돋을 정도니, 편집한 영상으로는 더 대단한 작품이 나올 거 같다.

나는 일부러 오늘 복사도 촬영에 따라가지 않았다.

내가 없어야 서이렌이 오롯이 연기에 집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복사도에서 서이렌이 보낸 문자를 보며 웃었다.

[또!또! 인생 연기 갱신!!! 연기 천재의 인생 연기를 1열에서 관람하지 못한 당신은 바보♥]

역시 안 따라가길 잘했다.

이 사람아. 딴생각하지 말고 연기나 하십시오.

이대로면 정말로 대작이 나올 거라고요.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나는 오늘 대학로에 찾아왔다.

익숙한 거리를 지나 극단 마루 앞에 선 나는 매표소 직원에게 말했다.

“그날 밤. 한 장이요. 팜플렛도 한 장 주세요.”

“여기 있습니다.”

티켓과 팸플릿을 받아든 나는 극장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핸드폰을 꺼 가방 안에 넣어 놓고 사 들고 온 팸플릿을 펼쳤다.

익숙한 얼굴의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한 사람의 사진을 확인했다.

[엘리자베스 - 김이솔]

돌아온 연기 천재

방금 연극을 마치고 분장을 지운 김이솔이 내 앞에 서 있다.

김영원은 우리 둘이 이야기하라고 잠시 자리를 비켜 줬다.

나는 김이솔의 앞으로 내 명함을 내밀었다.

김이솔은 스타탄생이라는 사명이 적혀 있는 명함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저는 스타탄생 대표 원세강입니다.”

내 얼굴을 보던 김이솔이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특유의 느릿느릿한 말투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김이솔입니다.”

방금 무대와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했던 천재 배우는 온데간데없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대로 배경에 흡수되어 버릴 것 같은 조용한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아마 평소에도 말이 많지 않을 거다.

나는 그런 그녀를 위해 긴말하지 않고 본론을 바로 꺼냈다.

“다시 연기를 하시려는 거죠? 저와 계약합시다.”

김이솔의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스타탄생에 식구를 들이는 일을 주저했었다.

시한부라는 내 상황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과거와는 달라졌다.

나는 여전히 시한부지만 시간을 꽤 벌었다.

하늘이 주신 기적의 시간이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다 하고 갈 생각이다.

김이솔은 내가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는 배우다.

그때 당시 김기하 감독은 사막에 이자현을 출연시키길 원했다.

나는 극렬히 반대했고 이자현은 사막 대신 가족에 출연했다.

이자현이 떠나고 김기하는 김이솔을 택했다.

모든 것은 김이솔을 괴롭힌 김기하 감독의 잘못이지만 나는 내 탓도 있다고 생각해서 그녀를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이 무거웠다.

오늘도 연극을 보면서 느꼈지만, 김이솔은 천재다.

저런 사람이 연기를 계속하지 못하는 건 절대 안 될 일이다.

오지랖이라 욕해도 좋다.

하지만 나는 김이솔의 우산이 되어 그녀를 지지하고 서포트하고 싶다.

그때 김이솔의 입이 열렸다.

“저는 아직…… 활동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연극은 활동이 아닌가요?”

“극단 마루에는 대학 선배님도 계시고, 김영원 단장님도 잘 아는 분이세요. 그래서 하겠다고 한 거였고요.”

“우리 회사에도 김이솔 배우님이 아는 분이 계십니다.”

“예?”

“윤서혁 감독님 아시죠? 한국예술대학교 선배님이실 텐데요.”

김이솔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답했다.

“알아요. 한 번도 작품을 같이해 본 적은 없지만, 학교에서 유명한 선배님이셨어요.”

“그래요? 잘해서 유명했던 건 아니었죠? 혹시 수다쟁이라 유명한 건 아니었나요?”

내내 긴장하고 있던 김이솔이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아니에요. 재기발랄한 분으로 유명하셨어요.”

“윤서혁 감독님이 유명 감독님이 된 건 아시죠? 우리 회사 소속입니다.”

“배우 소속사라고 생각했었는데요. 아닌가요?”

“배우도 있고 감독도 있고 작가도 있습니다.”

“특이하네요.”

“그리고 배우는 총 세 명인데 두 명이 여자예요. 김이솔 배우님과 말이 잘 통할 겁니다.”

김이솔은 나와 대화를 나누며 긴장이 풀렸는지 서서히 표정이 좋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거절의 답이 들렸다.

“관객들 앞에 서는 건 괜찮아요. 그런데 감독님과 스태프들 앞에서 연기하는 건 못 하겠어요. 런던에서 공부할 때도 연극 무대에만 올랐어요. 저는 아마 계속 연극만 할 것 같습니다. 대표님이 찾는 배우가 아니에요. 저는.”

“아뇨. 제가 찾는 배우는 김이솔 배우님이 맞습니다.”

김이솔은 나를 못 믿겠는지 스타탄생 명함을 내 쪽으로 밀었다.

김기하 감독과 영화를 찍으면 얼마나 괴로웠는지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만들기만 했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다른 명함을 꺼내 김이솔에게 건넸다.

[레전드 필름 - 원세강 대표]

명함을 본 김이솔의 두 눈이 커졌다.

“진설 선배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나요?”

“아뇨. 진설 대표님은 잘 계십니다. 저는 진설 대표님께서 직접 뽑은 새 대표입니다. 저는 못 믿으셔도 진설 대표님은 믿으시죠?”

김이솔은 그제야 나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그 명함을 바라보던 김이솔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흔들리는 김이솔의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계약서에 명시해 드릴게요. 스타탄생은 김이솔 배우님이 편히 일하실 수 있도록 지원만 해 드립니다. 작품 선택은 모두 배우님이 원하는 대로 해 드릴게요. 계약 기간도 없습니다. 언제든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시면 계약서를 찢고 떠나시면 됩니다.”

“그런 회사가 어디에 있나요? 말이 안 되잖아요.”

“혹시 진설 대표님을 잘 아십니까?”

“영화제에서 두 번 뵌 게 다예요.”

“고작 두 번 봤으면서 진설 대표님은 믿으시는 것 같네요. 맞죠?”

“당연하죠. 진설 선배님은 저희 배우들께 전설 같은 분입니다.”

이것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조심성 있는 김이솔을 설득하기 위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곧장 진설에게 전화를 걸어 스피커로 돌려놓고 탁자 위에 핸드폰을 올려놨다.

진설의 진중하지만 맑은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울려 퍼졌다.

[원 대표. 지금 전화한 걸 보니 설득 못 했나 보네.]

“아무래도 제가 믿음직스럽지 않나 봅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래. 반성해. 원 대표는 너무 잘생겨서 일 못 하게 생겼다고.]

김이솔은 내가 진솔과 격이 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놀란 눈치였다.

[이솔아. 거기 있니?]

“예. 선배님.”

[오랜만이다. 왜 그렇게 영국에 오래 있었어? 거기 밥맛도 형편없다는데.]

“선배님은 저를 기억하시나요?”

[당연하지. 우리 영화제에서만 두 번 마주쳤어. 그중에 한번은 뒤풀이까지 함께 갔잖아. 그리고 당시에 신문에 내 후계자가 너라고 얼마나 많이 떠들어 댔니. 기억나니?]

“기억납니다. 선배님.”

[너 계속 안 오길래 나 어쩔 수 없이 다른 후계자를 들였어.]

“예?”

[거기 있는 원 대표 소속 배우인데 이솔이 너랑 잘 맞을 거야. 그냥 내 말 믿고 계약서에 도장 찍어.]

김이솔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솔아. 너무 당혹스럽니?]

“예. 선배님.”

[그럼, 우선 그 계약서 반으로 접어 봐.]

“계약서를요?”

[하라면 해.]

“예. 선배님.”

김이솔은 진설이 하라는 대로 내가 내민 계약서를 반으로 접었다.

[한 번 더 접어서 네 가방 안에 집어넣어.]

김이솔은 이번에도 착한 학생처럼 진설이 시키는 대로 계약서를 접어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원 대표. 차 가지고 왔지?]

“예. 가지고 왔습니다.”

[당장 이솔이 태워서 내 집 앞에 내려줘. 원 대표는 기사 노릇이나 하고 들어오지 말고 그냥 모셔다드리기만 하고 돌아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따돌리는 거 아니야. 안 섭섭하지?]

“그럼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솔아. 이따 보자. 내가 계약서 잘 뜯어보고 조언해 줄게. 원 대표. 내 마음대로 계약서 고칠 수도 있어. 알아?]

“당연하죠.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역시 원 대표야. 이따 보자고.]

진설이 화통한 목소리가 사라지자 카페 안이 고요해졌다.

뒤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던 김영원이 웃으며 우리 쪽을 바라봤다.

나는 얼떨떨해하는 김이솔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 대표님 무서운 거 아시죠?”

“예?”

“가시죠. 저는 기사 노릇 해 드려야 해서요.”

“하지만 저는…….”

“궁금한 거 알고 싶은 거 모두 진설 대표님께 물어보세요.”

대선배가 오라는데 안 갈 수가 없었다.

김이솔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님.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가 볼게요. 다음에 봬요.”

“나도 바빠. 다음엔 연락하고 와.”

나는 김이솔을 데리고 카페를 빠져나갔다.

* * *

TOP 미디어에서는 한창 멜랑꼴리의 편집이 진행 중이었다.

편집실을 찾아온 록 이사는 완성된 일 차 편집본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명작은 아니었지만, 재미와 감동만큼은 꽉 잡은 수작이었다.

“박 감독님. 좋은데요?”

박호중도 편집하면서 대박을 느꼈는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김선우 배우도 빨리 편집본 보고 싶다고 안달이 났더군요. 본인도 찍으면서 안 거죠. 작품이 잘 나온 걸 말입니다.”

“기대했던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잘해 주셨네요. 대단합니다. 감독님.”

박호중은 록 이사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한지욱 대표님은 같이 안 오셨나요?”

한지욱이라는 말에 록 이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지욱은 요즘 자신이 아닌 김승민 이사와 자주 어울린다.

어떻게 보면 자신을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충신을 몰라보네. 다 같이 잘되자고 그런 건데 삐져서는.’

록 이사는 어차피 멜랑꼴리가 잘돼서 자신이 TOP 미디어 대표직에 오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는지 한지욱의 행동을 신경 쓰지 않았다.

“한지욱 대표님이야 바쁘시죠. 시사회 때 오실 겁니다.”

“그렇군요. 요즘 TOP도 바쁘게 돌아간다면서요?”

“TOP뿐만이겠습니까? 조만간 미디어에서 드라마도 제작하게 될 겁니다. 멜랑꼴리는 이제 일 차 편집을 완료했으니 최종 편집까지 빨리 끝내시고 드라마 제작에 들어갑시다.”

“드라마 제작이요?”

“KBC 창사 25주년 특집 드라마예요.”

“KBC 창사 특집극이요?”

박호중 감독의 눈빛이 달라졌다.

작가 논란 때문에 쫓겨나듯 나간 친정집에 창사 특집극으로 입성하는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진 것이다.

“박 감독님도 구미가 당기시죠?”

박호중은 신나는 상상을 뒤로하고 록 이사를 바라봤다.

“그럼요. 다른 것도 아니고 창사 특집극인데요.”

“멜랑꼴리는 여름 방학 시즌에 개봉하기로 했습니다.”

“벌써 개봉 날짜까지 정해졌나요?”

“UPC에서 관심이 대단합니다. 여름 텐트폴로 밀어주려고 하고 있어요. 이번에 대박 한번 터트려 봅시다.”

“그럼요. 당연하죠. 대박 터트려야죠. 하하하.”

박호중 감독의 호탕한 웃음이 편집실 가득 퍼졌다.

* * *

미디어에서 나오던 록 이사는 지하 주차장에서 박상용 실장을 만났다.

박상용 실장은 손에 꽃 화분을 들고 차 앞에 서 있었다.

“박 실장. 화분을 들고 어딜 가는 거야?”

박상용이 록 이사를 발견하고 인사를 했다.

“난데없이 무슨 화분이야?”

“진설 대표님 생신이라서 준비한 겁니다.”

“진설? 그럼, 지금 레전드 필름에 가나?”

“예. 그렇습니다.”

박상용은 적진이나 다름없는 레전드 필름에 간다고 말하고 록 이사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눈치 안 봐도 돼. 전 직장 상사이고, 이 바닥이 인맥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차에 안 타고 그러고 있어?”

“차가 퍼졌어요. 회사 차 타고 가려고 제 차를 안 가져왔는데 낭패네요.”

록 이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고 내 차를 타지 그래?”

“예?”

“내가 데려다줄게.”

“아. 그래 주시겠어요?”

“무겁지? 어서 타.”

“감사합니다. 록 이사님.”

* * *

레전드 필름 앞에 커다란 화분을 들고 있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록 이사는 오다가 꽃집에 들러 수백만 원이 넘는 난 화분을 사 왔다.

“진설 대표님께 지난번에 누를 끼쳤으니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지.”

“예. 그렇지요.”

박상용은 자신이 혹을 달고 온 거 같아서 안절부절못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레전드 필름 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박상용이 바닥에 화분을 내려놨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주?셀? 전화 좀 걸고 오겠습니다.”

박상용이 사라지자 록 이사가 레전드 필름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문에는 나무로 만든 현판에 레전드 필름이라고 음각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살짝 기대 보니 드르륵하고 문이 열렸다.

“어?”

놀란 록 이사는 그대로 레전드 필름 안에 들어갔다.

난 화분을 들고 레전드 필름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록 이사는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냥 중소기업 같네. 오래돼서 그런가? 집기도 다 낡았고.”

들고 온 화분을 두려고 회사 안을 이리저리 확인하던 록 이사의 두 눈이 커졌다.

회의실 바로 옆에 편집실이라는 글자가 보였기 때문이다.

록 이사는 난 화분을 들고 천천히 편집실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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