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24화 (125/261)

#124화. 대표님의 프레젠테이션

나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을 뜨자 서이렌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나를 꼭 껴안고 있던 그녀의 팔에 힘이 풀렸다.

나는 이제 그녀에게 벗어날 수 있었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아니 벗어나기 싫었다.

이런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나는 윤조와 아픈 사랑을 한 이후로는 내 배우와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심지어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한부다.

만약 내 몸이 아프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나는 내 철칙을 깨고 나만을 사랑해 주는 서이렌의 마음을 받아들였을까?

입맞춤이 끝난 찰나의 순간.

내 머릿속은 여러 생각들로 가득 찼다.

갑자기 그녀를 향한 미안한 감정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서이렌이 눈을 떴다.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에 내가 비쳐 보였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스타탄생 대표 원세강이 아닌, 사랑을 할 수 없는 시한부 환자만이 보였다.

“이제 직진입니다.”

“이렌 씨는 언제나 직진이었잖아요.”

“맞아요. 하지만 이젠 브레이크가 없어요.”

“브레이크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건 사고잖아요.”

“나 서이렌이에요. 사고는 없어요.”

진지한 서이렌을 보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대표님. 잊지 마세요. 저는 이제 진짜로 직진할 거예요.”

“하지만…….”

“사람들에게 안 들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만 믿고 따라와요.”

서이렌은 걱정스러운 얼굴의 나를 뒤로하고 맞은편 자리로 이동했다.

마치 드라마처럼 밴의 문이 열리고 빈선예와 장우재가 들어왔다.

서이렌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빈선예와 장우재를 맞이했다.

빈선예가 서이렌을 보자마자 외쳤다.

“이렌 씨. 오늘 인생 연기했다면서요?”

서이렌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저 오늘 진짜 멋있었어요.”

“촬영장에 소문 다 났어요. 산에 올라갔던 스태프들이 오늘 촬영한 거 빨리 다시 보고 싶다고. 찍으면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대요.”

“와. 우리 서 배우님이 여우주연상이라도 타시는 거 아닙니까?”

장우재까지 말을 보태며 서이렌을 추켜세웠다.

서이렌은 기분이 좋은지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너무 열심히 연기했더니 배가 고프네요. 빨리 갑시다.”

“이 근처에 유명한 유황 오리집이 있더라고요. 오랜만에 몸보신 좀 합시다.”

“빈 팀장님. 제가 이미 내비게이션에 가게 이름 등록해 놨습니다.”

장우재가 웃으며 밴에 시동을 걸었다.

나는 빈선예와 웃고 떠드는 서이렌을 힐끔 쳐다봤다.

방금 그녀와 입을 맞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서이렌의 말대로 ‘그녀에게 좀 더 다가가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이기적이었던 없던 나지만 이번 한 번만은 내 생각만 해도 되지 않을까?

* * *

나만의 마돈나 티저 예고편이 뜨자 인터넷 커뮤니티가 들썩였다.

- 이자현 진짜 잘 어울린い빱빱빱빱빱빱?

- 재밌겠다ㅋㅋㅋㅋㅋ 이자현 겁나 잘 어울리네. ㅋㅋㅋ

- 쩐다. 이자현 비주얼 볼 맛 난다.

- 이락이랑 케미 미친듯 ㅠㅠㅠ

- 미친 비주얼 좀 봐. 이자현 존예다.

- 이락 진짜 잘생겼다아아아.

- 와씨 존나 잘생김. 이락 갑자기 엄청 잘생겨짐.

- 존잘존예의 만남.

- 우연미 미쳤나 봐. 누가 보면 로코만 십 년 쓴 줄 알겠다. ㅋㅋㅋㅋ- 대사빨 미쳤음. ㅋㅋ- 단 한 마디로 답해. 좋아? 싫어?

└ 좋아.

└ 좋아.

└ 좋아.

└ 좋아.

└ 좋아.

사람들은 안하무인, 푼수데기 톱스타로 변신한 이자현에 대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 이자현이 이런 연기도 잘할 줄이야.

- 울 언니 매력 터짐. ㅋㅋㅋㅋ

- 이자현 존나 귀엽다고.ㅋㅋㅋ

- 저 정도 생기면 싸가지 좀 없을 수도 있지. 암 그렇고말고.

- 스타일링도 개존예임. 톱스타 역 사랑해.

- 이자현 진짜 저런 성격인가? 왜 이렇게 잘해? ㅋㅋㅋㅋ- 목소리랑 발성 다 바꿔서 나왔어. 대박.

- 작년에 두 여자로 연기대상 받은 언니 맞음? 몇 달 만에 귀요미로 변신 성공.

- 연기 변신 실패한 거 같은데??? 개싸가지 톱스타 역인데 하나도 안 얄미워. ㅋㅋㅋ- 로코로 대상 또 가나요???

* * *

나만의 마돈나 촬영장에 서 있는 밴으로 오늘 촬영을 마친 이자현이 걸어왔다.

현미가 그녀의 옆에 붙자마자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티저 예고편 떴어요. 언니.”

예고라는 말에 이자현이 멈칫했다.

“반응 어때? 안 어울린다는 말은 없어?”

이자현의 물음에 현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버한다는 말은 없고?”

“없어요.”

“이락 배우랑 나이 차이 크게 나 보인다는 얘기는 없고?”

“없어요. 물어보지 말고 그냥 인터넷 반응을 직접 확인해 보시는 건 어때요?”

현미는 태블릿 PC를 이자현의 코앞까지 밀었다.

이자현은 떨리는 손으로 태블릿 PC를 받아 들었다.

“어떻게 된 게 첫 드라마 때보다 더 떨린다.”

“언니. 안 떨어도 돼요. 멘탈 개복치인 저도 웃으면서 봤어요.”

“하하. 어쩜 말을 그렇게 하니?”

현미의 농담에 이자현이 그제야 미소를 보였다.

밴에 올라탄 이자현이 조심스럽게 태블릿 PC에 시선을 옮겼다.

웹 브라우저를 띄워 보니 현미가 보고 있던 커뮤니티가 보였다.

이자현은 커뮤니티에 올라온 나만의 마돈나 예고편 게시글을 클릭했다.

이미 수백 개가 쌓여 있는 댓글에는 나쁜 말이 하나도 없었다.

“현미야. 어쩜 좋아. 반응이 너무 좋은데?”

“제가 그렇다고 했잖아요. 다른 사이트도 다 반응이 역대급이에요.”

“현미야.”

TOP에서 탈출하며 심하게 마음고생을 했던 이자현은 지금 이 순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현미야. 너무 좋다.”

“저도 좋아요. 언니. 우리 이제 꽃길만 걸어요.”

* * *

나만의 마돈나 예고편이 뜬 다음 날, 윤이슬이 찍고 있는 해피 스릴러의 일 차 예고편도 떴다.

‘웃으며 안녕’이라는 유명한 발라드곡과 함께 시작된 예고편은 초반에는 흔한 범죄 스릴러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내 분위기가 반전되더니 중요하고 진지한 장면에서 계속 웃는 남자 주인공이 부각되며 웃음을 유발했다.

약방의 감초처럼 윤이슬이 중간중간 등장했고 삼 분간의 예고편이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마지막으로 타이틀이 떴다.

[웃으며 검거 - 해피 스릴러]

신박하고 재미있는 예고편에 사람들이 반응했다.

- 존잼삘. ㅋㅋ

- 재밌겠다. ㅋㅋㅋㅋ

- 꺄 기대돼.

- 주인공 스펙 엄청난데 계속 쳐 웃으니까 완전 쪼렙 같아 보임. ㅋㅋㅋ- 왜 이렇게 계속 웃는 거임??

└앞에 나오잖아. 어릴 때 범죄자한테 붙잡혀서 도망치다가 뇌를 다침.

- 윤이슬이 남주 지켜 주는 알파걸이네. ㅋㅋㅋ

- 이거 기대된다.

- 윤이슬은 고새 연기가 더 늘었다.

- 러브 라인은 김소리 쪽인가? 윤이슬은 그냥 같이 일하는 동료지?

- 김소리도 그냥 일이나 하라고 해. 장르물에 연애는 무슨. ㅋㅋㅋ

- 근데 윤태호가 계속 웃고 있잖아. 내 남친이 24시간 저러고 웃고 있으면 개짜증 날 거 같음.

└ ㄴㄷㄴㄷ

└ ㅇㄱㄹㅇ

└ 그래서 범죄자들도 죽을라고 함. ㅋㅋㅋ

해피 스릴러의 첫 번째 예고편도 기대 이상으로 터졌다.

나만의 마돈나와 해피 스릴러 두 개의 예고편을 모두 본 나는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해피 스릴러는 내가 봤던 미래보다 훨씬 재미있게 극이 나왔다.

원래는 분량이 작던 윤이슬 역의 비중이 커지면서 극본이 달라진 거 같은데 그게 훨씬 드라마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원래도 대박이 나는 작품이지만 더 잘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의 마돈나는 내가 본 미래에 없던 작품이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믿고 보는 감독과 작가, 배우가 모인 작품이다.

여기에 인생 연기를 갱신한 구원의 밤의 서이렌까지.

나는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서이렌은 지난주에 밴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거론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이는 예전 같지 않다.

서이렌은 과거와 달리 좀 더 진지하게 내게 다가왔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움직였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를 제자리로 돌리는 건 바로 눈앞의 약봉지다.

하루 세 번 약을 먹을 때마다 흔들리는 나를 질책하며 마음을 되돌린다.

허탈하게 웃으며 약을 털어 넣은 나는 곧바로 스타탄생 식구들이 모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층에 모인 강진석과 빈선예 그리고 구원의 밤 때문에 지방에서 촬영 중인 윤서혁이 영상회의로 접속한 상태에서 회의가 시작되었다.

오늘의 안건은 스타탄생 엠티 시사회다.

윤서혁은 바쁜 와중에서도 짬짬이 우리의 제1회 스타탄생 엠티 영상을 편집했고 드디어 결과가 나왔다.

“세강아. 그러니까 이걸 스타탄생 공계에 올리고 대중의 반응을 봐서 리얼리티로 만들자는 거지?”

“NGB의 최욱환 PD님한테 운은 띄워 놓은 상황입니다.”

“거기선 뭐래?”

“당연히 관심 있어 하죠. 지금 한창 주가가 오르고 있는 배우들이 총출동하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그런데 공계에 올려서 반응이 미비하면 말짱 도루묵 아냐?”

강진석이 염려하자 윤서혁이 치고 들어왔다.

“에이. 강 이사님. 저 윤서혁입니다.”

“누가 뭐래?”

“저 웃기는 놈이라고 대학 다닐 때 유명했어요.”

“말 많은 놈이 아니라?”

“말 많은데 웃기는 놈으로요.”

윤서혁의 너스레에 모인 사람들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됐고. 시사회라고 하니까 우선 보자. 얼마나 웃기는지.”

강진석은 모니터의 영상을 재생했다.

벽에 있는 대형 텔레비전으로 영상이 미러링 돼서 보였고 영상회의 중인 윤서혁에게도 화면이 보였다.

윤서혁이 편집한 영상은 장장 한 시간 반짜리였다.

새벽에 스타탄생 앞에서 모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다음 날 저녁에 스타탄생에서 흩어지는 것까지 1박 2일 동안의 엠티가 다채롭게 편집되어 지나갔다.

한 시간 반이 지나고 우리는 입이 떡 벌어진 채로 윤서혁을 돌아봤다.

무려 한 시간 반 동안 한 번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영화감독인 윤서혁에게 예능 PD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괜찮죠? 저는 편집하는 내내 웃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윤서혁의 말에 강진석이 고래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윤 감독. 우리 전직하자. 내가 예능 외주 업체 차릴 테니 윤 감독이 PD로 들어와. 우리 대박 나겠는데?”

강 이사의 농담에 모인 사람들이 한바탕 웃고 지나갔다.

그런데 농담이라고 하기엔 너무 맞는 말이다.

윤서혁은 마치 영화를 찍듯 우리의 엠티에도 기승전결을 심어 놨다.

나는 윤서혁의 재능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 재미있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만요. 그만 웃고 제 이야기 좀 들어 보세요.”

순간 모인 이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나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이건 스타탄생 공계에 올리기엔 아까운 영상 같습니다. 그냥 바로 온 에어 하시죠.”

“어떻게?”

“제가 최욱환 PD님과 상의해 보겠습니다. 정식으로 편성받아서 방송합시다.”

내 말에 사람들의 두 눈이 똥그래졌다.

그러나 당황했던 모두의 눈이 점차 긍정적인 빛으로 물들어 갔다.

강진석이 웃으며 말했다.

“방송 시기는 아마도 나만의 마돈나와 해피 스릴러 그리고 구원의 밤이 개봉할 때겠지?”

“당연하죠. 방송 시기는 5월입니다.”

“와. 이거 잘하면 NGB에서 KBC랑 ZTV 드라마 광고하겠네.”

“다행히 NGB는 드라마가 주력이 아니죠. 문제없이 협상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자신감이 있었다.

톱스타들이 많이 나오고도 망하는 예능이 많다.

하지만 이건 이미 다 찍어 놨고 한 시간 반 동안 배꼽 잡고 웃을 수 있다.

이걸로 우리 리얼리티 예능의 첫 삽을 뜨고 앞으로 계속 후속편을 내놓으면 된다.

물론 후속편은 우리 배우들의 차기작이 시작할 때가 될 거다.

* * *

NGB 예능국 회의실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리얼리티:MT’의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게 됐다.

사실 말이 프레젠테이션이지 나는 오늘 윤서혁이 편집한 한 시간 반짜리 영상을 죄다 보여 주고 올 생각이다.

“안녕하세요. 스타탄생 대표 원세강입니다.”

내가 인사를 하자 예능국의 고참 PD들이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최욱환 PD가 귀띔해 줬는데 이정호가 옷을 벗으면서 나에 대한 악담을 늘어놨다고 했다.

이정호는 차마 자신의 치부는 밝히고 싶지 않았는지 그냥 대충 내가 싸가지가 없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했다.

나는 마치 적진에 홀로 있는 기분으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제목은 ‘리얼리티:MT’입니다. 말 그대로 멤버십 트레이닝. 조직의 구성원이 친목을 위해 짧게 다녀오는 여행을 말합니다.”

내가 설명하는데도 고참 PD와 새로 부임한 예능국장은 떨떠름한 표정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자기네 소속사 배우들 홍보하려는 거잖습니까?”

“사실 방송에 나오는 모든 일이 홍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럼, 홍보가 아니다?”

“홍보죠. 방송에 나오면 이득을 볼 테니까요. 하지만 예능이라는 전제는 여전합니다.”

“그게 뭔데요?”

“재미죠. 보시면 아시겠지만 홍보하러 나왔다는 생각이 안 드실 겁니다. 정말로 우리는 MT에 다녀온 거니까요.”

“흠…….”

예능국장과 고참 PD들은 내 말에 혹하면서도 의심쩍은 눈빛은 여전했다.

나는 바로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준비해 온 한 장짜리 PPT를 치워 버리고 바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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