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각성
서이렌이 촬영장에 복귀하자 사람들이 우리를 반겼다.
“서이렌 씨 패션 위크 사진 봤어요. 대박이던데요?”
“어쩜 그렇게 옷발이 잘 받아요? 촬영장에서만 보다가 꾸민 모습 보니까 완전 다른 사람이더라고요.”
서이렌은 화려한 슈퍼스타가 아니라 평범한 수화 통역사 최진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렌 씨가 공항에서 입었던 후드티, 청바지, 러닝화. 모두 다 불티나게 팔린다면서요?”
패션 위크가 끝나고 처음으로 촬영장에 온 빈선예는 서이렌을 향한 칭찬이 마치 자신을 향한 것처럼 기뻐했다.
오늘 우리는 파주 촬영장이 아니라 경기도 서운산에 왔다.
강동철과의 문답에서 힌트를 얻는 최진이 그의 범행 장소를 찾아온 것이다.
최진은 강동철과의 수화를 통역하면서 경찰이 모르게 수많은 대화를 나눴다.
처음 시작은 강동철이 최진에게 몰래 말을 건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최진이 강동철에게 하는 질문이 더 많았다.
등산로를 벗어난 최진은 강동철이 말했던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곡을 지나면 바로 등산로에서 이탈해. 북동쪽으로 계속 가.]
[거기로 가면 뭐가 나오죠?]
[나는 그걸 구멍이라고 불러.]
[무슨 구멍이요?]
[지옥으로 향하는 구멍.]
아침에 산에 올랐는데 이미 해가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바위 위에 걸터앉은 최진은 실종자 윤모학에 대해 생각했다.
경찰 이정수를 통해 얻는 정보로 확인한 결과, 윤모학은 인간쓰레기였다.
폐타이어 공장을 운영하는 그는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직원으로 채용해 그들을 가혹하게 대하고 월급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법적인 처벌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세상은 돈 있는 자에게는 관대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만 가혹했다.
고발될 때마다 벌금형이나 집행 유예로 쉽게 풀려났고 그의 사업은 더욱 번창했다.
강동철이 납치해 죽인 이들은 모두 부유하며 사회적 지회가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춰 보면 평범한 사람들을 이용하고 착취해서 얻는 부와 명예였다.
최진은 윤모학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까 궁금했다.
강동철이 잡힌 지 두 달이나 지났고, 윤모학이 실종된 지는 석 달째다.
그는 아직 살아 있을까?
최진은 그녀가 보고자 하는 것이 살아남은 악인일지, 아니면 악인의 시체일지 궁금했다.
강동철이 가르쳐 준 대로 북동쪽으로 한참을 걸어가는데 가파른 경사가 있는 내리막길이 나왔다.
최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강동철이 말했던 그곳에 도착한 곳이다.
최진은 강동철이 말한 지옥 구멍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가져온 로프를 자신의 몸에 묶고 주위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그것을 칭칭 감았다.
준비를 마친 최진은 내리막길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등산로에서 한참을 떨어진 곳이기에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듣지 못할 거 같았다.
천천히 걷던 최진은 갑자기 땅이 훅 꺼지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로프로 몸을 묶지 않았다면 그대로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심장이 덜컥한 그녀는 심호흡하면서 몸을 낮췄다.
바닥에는 일부러 쌓아 놓은 듯한 나뭇가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최진은 그것을 천천히 옆으로 옮겼다.
나뭇가지들이 사라지자 깊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이 보였다.
최진은 고개를 내밀고 구멍 안을 내려다봤다.
삼 미터는 되어 보이는 깊은 구멍 안에서 뭔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최진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구멍 안에는 다해진 더러운 옷을 입고 머리는 산발한 괴인이 보였다.
‘윤모학이다.’
놀란 최진은 입을 막고 구멍 안을 훔쳐봤다.
갑자기 빛이 새어 들어오자 놀란 듯한 윤모학이 눈을 찌푸린 채 하늘을 응시했다.
윤모학의 주위에는 통조림 깡통이 굴러다녔다.
몇 개는 뜯지 않는 새 통조림이었으나 수십 개는 빈 깡통이었다.
빗물을 받아먹었는지 몇몇 통조림통에는 물이 담겨 있었다.
그의 양손과 양발은 굵은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
쇠사슬은 사람 허리만 한 커다란 돌덩이에 묶여 있었다.
땅에 깊이 묻혀 있던 돌덩이는 윤모학에 의해 밖으로 꺼내져 있었다.
윤모학은 살기 위해 땅을 팠고, 쇠사슬이 묶여 있는 돌덩이를 발견하고 좌절했을 거다.
“음. 음. 음.”
최진을 발견한 윤모학의 처절한 외침이 들렸다.
그는 살려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짐승처럼 울부짖을 뿐이었다.
최진은 강동철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일 먼저 혀를 잘랐어. 잡혀 오는 동안 놈들은 내가 알아듣지도 못 하는 말들을 늘어놨을 거야. 아마도 나를 죽이겠다 협박하거나 아니면 돈을 줄 테니 풀어 달라며 회유했겠지. 하지만 모두의 혀가 잘리고 나니 나처럼 되더군.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할 수 없는 병신 새끼 말이야.]
최진은 이미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윤모학을 보며 두 가지 감정이 들었다.
짐승 우리에 갇혀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인간을 보며 느끼는 측은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지옥에 떨어진 악인을 보는 통쾌함.
“음. 음.”
윤모학은 가시가 되어 버린 그의 작은 몸을 움직여 구멍 위로 올라오려고 몸부림쳤다.
윤모학과 눈이 마주친 최진은 잠시 멈칫했다.
‘악인이어도 사람다운 감정을 느낄 때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윤모학은 최진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살려 달라고 외쳤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그의 절규가 아무도 없는 산을 가득 채웠다.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오늘 비가 온다고 했었나?’
최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훤히 비추고 있던 태양이 어둠에 몸을 빼앗기고 있었다.
‘맞아. 개기일식이 있다고 했었어.’
최진은 오늘 태양이 달에 의해 몸을 숨기는 개기일식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다.
최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숲은 어둠에 휩싸였다.
태양이 완전히 달에 의해 삼켜졌을 때, 최진이 구멍 아래를 바라봤다.
윤모학은 살려 달라며 처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최진은 그제야 그가 인간이 아니라 악(惡)임을 알았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악으로 태어났다면 죽을 때까지 악이다.
최진은 옮겨 놓은 나뭇가지를 주워 들어 다시 구멍을 메우기 시작했다.
지난 석 달 동안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구멍이다.
아마도 영원토록 아무도 이곳을 발견하지 못할 거다.
최진이 구멍을 완전히 덮자 달에 의해 가려졌던 태양이 서서히 몸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최진은 고개를 들어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너무나도 밝은 태양 빛에 최진은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밝은 태양 아래 너희가 설 자리는 없어. 저 해가 방금 그렇게 정의 내렸거든.”
최진의 한마디가 빛이 스며드는 숲에 나직이 울려 퍼졌다.
* * *
“컷! 완벽해요. 서이렌 씨.”
최병철 감독의 컷 사인이 현장에 울려 퍼졌다.
현장에 있든 스태프들이 일제히 감탄사를 내뱉었다.
최병철의 옆을 지키던 윤서혁이 팔을 잡고 너스레를 떨었다.
“감독님. 저 방금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최병철도 깊은 숨을 내쉬었다 내뱉었다.
최병철은 윤서혁에게 현장을 맡겨 놓고 서이렌에게 걸어갔다.
방금 온 힘을 다해 연기했던 서이렌은 눈을 감고 있었다.
“서이렌 씨. 괜찮아?”
“최 감독님.”
서이렌이 고개를 들어 최병철 감독을 쳐다봤다.
불안하게 떨리던 서이렌의 눈동자가 점차 제자리를 찾았다.
“너무 몰입한 거 같던데. 움직일 수 있겠어?”
“그럼요. 저보다 저 아래 계신 배우분이 더 힘드실 겁니다. 저는 괜찮아요.”
서이렌이 방긋 웃었다.
최병철은 서이렌이 웃음을 되찾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이렌은 스태프들을 도와 윤모학 역을 한 배우를 끌어 올렸다.
* * *
산에서 내려온 구원의 밤 식구들이 촬영 차량에 탑승했다.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는 서이렌을 보고 반갑게 맞았다.
“미안해요. 나도 따라서 올라가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내 말에 서이렌이 웃으며 답했다.
“그 산에 열 명 이상 못 들어간다잖아요. 허가가 그렇게 떨어졌는데 어쩔 수 없죠. 그런데 그거 아세요?”
“뭐가 말입니까?”
“나 오늘 인생 연기한 거 같은데.”
“원래 이렌 씨 연기는 하루하루가 리즈고, 매번 인생 연기가 아니었나요?”
“오늘은 달라요. 연기가 끝나고 이런 감정을 느낀 건 처음이에요.”
서이렌은 아까의 감정이 떠오르는지 두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래요? 너무 궁금한데요.”
서이렌은 처음 봤을 때부터 완벽했다.
하지만 그녀는 완벽의 정의를 새로 내리며 나날이 진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뭐 보고 있었어요?”
나는 보고 있던 핸드폰을 황급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뭔데 그렇게 숨기는 겁니까?”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서이렌은 내가 아니라고 하자 눈을 치켜떴다.
나는 서이렌이 촬영하는 동안 뉴욕에서 본 세이렌 마네킹을 조사했다.
그녀는 요즘 핫한 모델로 활동을 시작한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의 이름은 아샤(Asha).
라틴어로 생명을 뜻한다.
그녀의 사진을 찾아보던 나는 확신했다.
그녀는 세이렌 마네킹이 확실하다.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왼팔이 없었다.
그런데 아샤 역시 왼팔이 의수라고 했다.
세이렌 마네킹과 똑같은 얼굴.
세상에 나타난 시기도 비슷하고 야사도 한쪽 팔이 없다.
“빨리 보여 줘요. 대체 뭘 보고 있던 건데요?”
우물거리며 변명거리를 찾던 내 눈이 번뜩였다.
“나만의 마돈나 티저 예고편이 떴어요.”
나만의 마돈나라는 말에 서이렌의 두 눈이 커졌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얼굴이 빨개진 건가요? 수상하네.”
서이렌은 차 안에 있는 태블릿 PC를 들어 나만의 마돈나 티저 예고편을 검색했다.
서이렌이 한창 촬영하고 있을 때 뜬 따끈따끈한 영상이었다.
[스타들의 스타. 고하영.
안하무인인 그녀 앞에 초짜 로드매니저가 나타났다.]
[풋내기 로드매니저 이동하.
모두가 좋아하는 착한 남자가 아무도 맡으려고 들지 않는 톱스타의 로드매니저가 된다.]
이자현은 톱스타 고하영으로 분해 자뻑이 심한 톱스타 역을 소화해 냈다.
나는 이미 한번 본 영상이지만 다시 봐도 이자현의 개그 연기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자현이 이렇게 개그에 소질이 있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이락도 순수하지만 순진하지는 않은 당찬 청춘을 제대로 표현했다.
로드매니저이지만 할 말을 하는 이동하와 자신을 신처럼 떠받들어 주지 않는 매니저를 처음 만난 고하영의 좌충우돌 코미디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서이렌의 손에 힘이 빡 들어갔다.
서이렌의 분위기가 돌변하자 나는 긴장했다.
마침 화면에서는 고하영의 고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왜 나는 안 되는데? 매니저랑 배우는 사귀면 안 돼?]
[안 됩니다.]
[누가 안 된대? 당장 데리고 와!]
[내가 그렇게 정했어요.]
[네까짓 게 뭔데, 그걸 네 맘대로 정해? 너 진짜로 날 거절하는 거야?]
[네.]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저길 보라고.]
고하영이 전광판을 손으로 가리켰다.
전광판에는 모두가 사랑하는 톱스타 고하영이 웃고 있었다.
고하영은 전광판을 넋을 놓고 바라보는 이동하의 얼굴을 그녀에게 돌렸다.
[다시 나를 봐.]
이동하는 고하영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마지막 기회야. 좋아? 싫어?]
[그건…….]
[변명은 필요 없어. 단 한 마디로 답해. 좋아? 싫어?]
고하영이 이동하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장면과 함께 나만의 마돈나의 일 차 티저 예고편이 끝났다.
서이렌은 잔뜩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분위기가 확 달라진 서이렌을 보며 긴장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데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예고편이 별로예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서이렌이 갑자기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서이렌이 옆으로 붙자 나는 긴장해서 몸을 뒤로 뺐다.
서이렌이 갑자기 내 허리에 손을 두르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순간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서이렌의 얼굴이 지척이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지자 나도 모르게 몸에서 열이 났다.
너무 놀란 내가 빠져나오려고 하자 서이렌은 더욱 세게 내 허리를 붙잡았다.
남자인 나도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때 서이렌의 손이 내 얼굴에 닿았다.
“뭐 하는 겁니까? 이거 놔줘요.”
“날 봐요.”
“보고 있잖아요. 놔줘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요?”
“단 한 마디로 답해 봐요. 내가 좋아? 싫어?”
서이렌은 예고편에 나왔던 고하영의 대사를 읊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내가 그녀에게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그녀는 더 세게 나를 껴안았다.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왔다.
“이렌 씨. 나 좋아하지 마요.”
“왜요?”
“나는 좋아하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알잖아요. 이렌 씨.
나도 내 앞날에 대한 확신이 없는데 지금 어떻게 누굴 만나겠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그게 되는데요? 방법이나 알려 주고 말해요.”
서이렌은 말을 마치자마자 내게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