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22화 (123/261)
  • #122화. 패션 위크 v2(2)

    쇼장에 먼저 들어온 지수연은 자신의 자리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지수연이 김진희 실장을 보며 말했다.

    “서이렌 옆자리네요?”

    “프론트 로우잖아. 좋은 자리야. 아무나 받을 수 없는 자리라고.”

    “그럼, 서이렌도 아무나가 아닌 거잖아요.”

    김진희 실장은 눈앞의 물정 모르는 신예 스타를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강하나는 그래도 인기라도 있었지, 지수연은 서이렌은 고사하고 강하나만큼도 인기가 없으면서도 원하는 게 너무 많았다.

    ‘참자. 아버지가 KBC 지영록 국장이라 눈에 뵈는 게 없겠지.’

    김진희는 속으로 몇 번이나 꾹 참으며 화를 속으로 삼켰다.

    “지수연 배우님. 서이렌이랑 비교하는 기사가 많이 뜰 수도 있어요.”

    “알아요.”

    “표정이랑 포즈도 계속 신경 써야 합니다. 프론트 로우예요.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그만 좀 말하세요. 귀에 딱지가 앉겠어요.”

    ‘그럼, 잘하든가!’ 김진희는 지수연의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을 꾹 억누르고 바깥으로 나왔다.

    쇼장 밖에는 수많은 셀럽과 기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김진희는 군중들 사이에서 서이렌과 스타탄생 일원을 발견했다.

    서이렌은 멀리서도 눈에 확 띄었다.

    한쪽에 비켜선 김진희는 재빨리 핸드폰을 들어 패션 위크 상황을 검색했다.

    포털 사이트를 켜자마자 지수연과 서이렌의 이름이 보였다.

    [100억 여신. 지수연 뉴욕을 접수하다.]

    [서이렌, 이번에는 리폼으로 뉴욕을 런웨이.]

    ‘리폼?’ 서이렌의 기사 제목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한 김진희가 곧바로 기사를 클릭했다.

    한승준 포토그래퍼가 찍은 환상적인 서이렌의 사진이 화면에 가득 찼다.

    사진은 피사체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 나왔다.

    김진희는 빠르게 서이렌의 착장을 확인했다.

    뉴욕 거리를 거닐 때 입은 옷은 레오노라의 드레스였고, 쇼장에 들어오기 직전에 도나텔로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런데 레오노라든 도나텔로든 둘 다 김진희는 모르는 드레스였다.

    ‘저게 뭐지? 정말 레오노라가 맞는 거야?’

    그때 김진희가 속한 단톡방의 알람이 울렸다.

    업계에서 유명한 스타일리스트들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단톡방이었다.

    [서이렌이 입은 레오노라 드레스 봤어?]

    [노란색 드레스 말하는 거지? 기사 뜬 거 봤어. 그거 안톤 지아비니가 레오노라에 있을 때 만든 옷이잖아.]

    [30년도 더 된 드레스인데 어쩜 그렇게 관리를 잘한 거니?]

    [관리뿐이야? 과감하게 드레스 어깨 다 파내고 오프숄더로 만들어 버렸잖아. 인조 모피를 어깨에 두르고 있는데도 부내가 진동하더라.]

    [도나텔로는 더 미쳤어. 드레스 치마를 통이 넓은 바지로 만들었잖아. 완전 힙해.]

    [서이렌 스타일리스트가 누구지?]

    [김진희 실장이 데리고 있던 애라던데. 맞지, 김진희 실장??]

    김진희는 자신을 부르는 톡방 멤버들을 보자 기분이 확 상했다.

    핸드폰을 닫은 김진희가 고개를 들었다.

    서이렌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쇼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뒤이어 스타탄생 대표인 원세강과 그녀가 꼴도 보기 싫어하는 빈선예가 웃으며 쇼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실장인 나도 표를 못 받았는데, 쟤들은 왜 저렇게 당당하게 들어가는 거지?’

    김진희는 걸어가는 원세강과 빈선예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 * *

    한국에서는 서이렌과 지수연을 묶어 기사를 쏟아 내고 있었다.

    그때 어그로 만렙인 제목의 기사가 떴다.

    [100억 지수연 VS 0원 서이렌]

    커뮤니티에 해당 기사가 올라왔고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 지수연은 협찬으로만 백억이고 서이렌은 리폼해서 돈이 안 들었다는 거지?

    - 이걸 이렇게 기사로 내네.

    - 기레기가 뇌절하네.

    - 이거 완전 억지임. 해외 사이트에서는 서이렌 칭찬하고 난리도 아님.

    - 위 댓글 말대로 해외 유명 패션 포럼에선 서이렌 반응이 압승이야.

    - 왜? 구하기 어려운 옷 입고 와서?

    - 요즘 패스트 패션(fast fashion) 때문에 말이 많잖아. 유행에 맞는 옷 사서 한 계절 입고 버리는 거 때문에 환경 오염 심각하다고. 서이렌이면 지수연보다 훨씬 좋은 브랜드에서 협찬받을 수 있을 건데도 불구하고 가지고 있던 옷으로 리폼해서 왔다고 정말 잘한 일이라고 다들 칭찬한다고.

    - 와. 그러고 보니 그러네.

    - 서이렌 짱이다.

    - 이런 게 국위선양이지.

    - 작년에는 한복으로 패션 위크 조지고 올해는 리폼으로 조지네.

    - 서이렌 너무 멋져. ㅠㅠㅠㅠㅠ

    - 존예인데 사려 깊기까지. ㅠㅠㅠㅠ

    * * *

    이번 도나텔로 쇼는 마치 록스타의 콘서트에 온 기분이 들었다.

    백그라운드로 깔리는 두둥거리는 베이스 소리와 함께 모델들이 런웨이를 걸었다.

    패션에 대해 잘 모르는 나도 노래와 조명이 만들어 내는 분위기에 심취해 마치 공연을 관람하듯 패션쇼를 즐겼다.

    드디어 쇼가 끝나고 얀 필립이 여느 때와 같이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걸어 나왔다.

    “이번에도 우리 이렌 씨에게 손 키스를 할까요?”

    “글쎄요. 그건 나도 모르겠네요. 빈 팀장님.”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성을 받으며 손을 흔들던 얀이 뒤로 돌았다.

    무대를 걷던 얀은 자연스럽게 서이렌이 있는 왼쪽 사이드로 걸어갔다.

    서이렌은 슈퍼스타다운 존재감을 유지한 채 자신에게 걸어오는 얀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신 옆에 앉아 있는 지수연만 식겁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왜 나한테 걸어오는 거 같지?’

    지수연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얀 필립을 보며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자신에게 반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표정 관리가 안 됐다.

    그때 바로 앞에 다가온 얀이 무대 위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화들짝 놀란 지수연이 감격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고 고개를 들었다.

    “나의 뮤즈. 서이렌 님이 오셨군요.”

    얀의 손이 지수연을 지나 서이렌을 향해 다가왔다.

    두 눈이 커진 지수연은 그대로 얼음이 된 채 얀 필립이 서이렌에게 손 키스를 하는 것을 바로 앞자리에서 직관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사정없이 터지기 시작했다.

    앞이 보이지 않자 지수연은 창피함에 그만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 * *

    두 번째 패션 위크도 성공적이었다.

    서이렌은 어제 패션쇼가 끝나고 애프터 파티에서는 또 다른 리폼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이번에는 얀이 도나텔로의 수석 디자이너로 부임하고 처음으로 냈던 시즌의 드레스다.

    얀은 그것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트렌드를 선도하는 과감한 선택에 리폼한 옷도 센스가 넘쳤고, 마지막으로 파티에 초대한 호스트에 대한 존중이 엿보였다며 극찬을 했다.

    지난번에는 서이렌과 나만이 얀 필립과 직접 대면했는데 이번에는 빈선예도 함께였다.

    빈선예는 그녀의 우상인 얀을 만나 너무나도 즐거워했다.

    꿈같은 하루가 지났고 우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라탔다.

    “서울에 가면 이 리무진도 그리워질 거 같아요.”

    빈선예는 이번 일정이 마치 꿈같다며 두 손을 꼭 쥐고 말했다.

    “또 오실 거잖아요.”

    “당연하죠. 우리 이렌 씨의 촬영 스케줄만 겹치지 않으면 패션 위크에는 매번 참석할 생각이라고요.”

    빈선예는 말을 하며 나를 쳐다봤다.

    “알았어요. 일정 잡을 때 고려해 볼게요.”

    빈선예는 그제야 눈에 힘을 풀었다.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리무진을 보내고 안으로 들어왔다.

    수속을 마치고 라운지로 들어온 우리가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서이렌과 빈선예가 자리를 뜨지 않고 내 양옆에 꼭 붙어 앉아 나를 지켜보는 것이 아닌가?

    “두 분은 지금 뭘 하고 계신 겁니까?”

    “그냥 대표님을 지켜보고 있는 건데요.”

    “나도 이렌 씨 따라서 대표님을 지켜보고 있었죠.”

    “혹시 지난번처럼 내가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서요?”

    두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연초에 다 같이 건강 검진 했잖아요. 저 멀쩡합니다.”

    “조심해서 나쁜 거 없죠.”

    “이렌 씨 말이 백번 옳습니다.”

    나는 두 여자의 시선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딜 가시려고요?”

    “물을 마시려고…….”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서이렌이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서 내게 건넸다.

    “드세요.”

    “아. 예.”

    나는 서이렌의 손에서 생수를 받아 들었다.

    “빨리 드세요.”

    “예.”

    나는 두 여자가 보는 앞에서 긴장하며 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아이고. 그러게 천천히 드시지, 그랬어요. 미국이라 조롱박과 버들가지도 못 구해 오는데.”

    서이렌의 그 한마디가 나를 제대로 자극했다.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커컥. 컥.”

    “괜찮아요? 대표님?”

    “저 화장실에 좀 다녀올게요.”

    “예. 그러세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어느새 장우재가 따라붙었다.

    장우재는 나를 보며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빈 팀장님이 따라가서 지켜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놀란 눈으로 서이렌과 빈선예를 바라봤다.

    서이렌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말했다.

    “로드 장이 아니면 제가 따라갈까요?”

    됐다. 말을 말자.

    작년에 공항에서 쓰러졌던 내 업보다.

    나는 알겠다며 장우재를 달고 화장실로 향했다.

    장우재가 나를 보며 웃으며 말했다.

    “작년에 이 공항에서 쓰러지셨다면서요.”

    “예. 그렇게 됐네요.”

    “다들 대표님을 걱정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하세요. 이렇게 대표를 챙기는 소속 배우와 직원들을 어디서 만나나요.”

    “그렇긴 하죠.”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공항 면세점에 걸린 커다란 광고판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퓨어 뷰티. 에블론]

    세계적인 뷰티 브랜드 에블론사의 광고판이었다.

    아름다운 여자 모델이 들판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

    나는 광고판을 보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그녀다.

    세이렌 마네킹.

    그녀가 확실해.

    지난밤 호텔에서 봤던 게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눈앞에서 순수하게 웃는 그녀는 확실히 세이렌 마네킹이었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나는 그제야 장우재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갑시다.”

    나는 에블론이라는 회사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곳을 떠났다.

    * * *

    인천 공항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출국할 때는 아무도 없었는데 오늘은 어디서 소식을 듣고 온 건지 기자들이 쫙 깔렸다.

    서이렌과 지수연이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다는 소식을 들은 기자들이 이슈가 될 것을 눈치채고 모여든 것이다.

    기자들이 공항에 깔렸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는 서이렌의 의상을 체크했다.

    서이렌은 후드티에 긴 치마를 입고 누구보다 편한 복장으로 서 있었다.

    “빈 팀장님. 굳이 옷을 갈아입어야 하나요?”

    “공항 패션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집에서 입는 그대로 입을 수는 없죠.”

    “그래도 열 시간이 넘게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너무 꾸미고 오면 이상해 보이잖아요.”

    “그걸 이상하게 안 보이게 하는 게 우리가 하는 일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꾸민 듯 안 꾸민 것 같이 잘 해결해 볼게요.”

    나와 장우재는 먼저 짐을 챙기러 가고 서이렌과 빈선예는 화장실로 향했다.

    한편, 소식을 들은 지수연 일행은 먼저 준비를 마치고 입국장 입구에 섰다.

    비행기 안에서 이미 옷을 갈아입고 메이크업을 한 지수연은 완벽한 차림으로 서 있었다.

    “어때요? 실장님?”

    “수연 씨도 거울 봐서 알잖아요. 완벽해요.”

    지수연이 선글라스를 끼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입국장 문이 열리고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 * *

    - 지수연 공항 패션 뜬 거 봄?

    - 대체 협찬을 얼마나 받은 걸까? 명품으로 도배를 했던데?

    - 이번에도 백억 여신이냐?

    - 아무리 그래도 공항인데 너무 꾸미고 나와도 보기 싫더라.

    - 지수연은 항상 ‘적당히’를 모르더라.

    - 항상 과해.

    - 투머치.

    지수연이 공항을 빠져나가고 이내 서이렌이 등장했다.

    후드티는 비행기에서 입고 있던 것 그대로고 청바지에 러닝화로만 갈아입고 나타났다.

    묶고 있던 머리는 풀었는데 화장실에서 빈선예가 자연스럽게 고데기를 해 줘서 살짝 펌이 들어간 긴 생머리였다.

    등에 배낭을 메고 나타난 서이렌을 보며 사람들이 반응했다.

    - 서이렌 승.

    - 이미 얼굴이 압승임.

    - 저 여유로움 봐라. 타고난 슈스네.

    - 청바지 핏이 예술이다.

    - 지수연은 킬힐 신고 왔는데 러닝화 신은 서이렌보다 작아. ㅋㅋㅋ- 이런 게 공항 패션이지.

    - 잘 아는 거지. 안 꾸며도 나는 여신이라는걸.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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