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21화 (122/261)
  • #121화. 패션 위크 v2(1)

    서이렌 일행이 탄 리무진이 떠나자 지수연이 김진희 실장을 째려봤다.

    김진희는 빈선예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얼굴을 구긴 채 서 있었다.

    “김 실장님. 대체 이게 뭐예요?”

    김진희는 그제야 지수연을 보며 표정을 수습했다.

    “왜 우리는 리무진이 아닌 거죠? 특급 대우라면서요?”

    “내가 이 바닥 십 년 차인데 나도 저렇게 리무진이 배웅하러 온 거는 처음이에요.”

    “그럼, 서이렌이 최초라는 거잖아요?”

    “아. 그건…….”

    김진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지수연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됐어요. 빨리 가요. 가서 테라피를 받아야겠어요. 나 지금 열이 나는 거 같아요. 얼굴에 홍조가 생기겠어.”

    지수연은 화난 얼굴로 차에 먼저 탑승했다.

    김진희는 지수연이 화난 것보다 빈선예의 그 미소가 더 화가 났다.

    ‘참나. 내 시다바리나 하던 주제에 어디서 그렇게 재수 없게 웃어?’

    김진희는 이를 악물고 차에 올라탔다.

    * * *

    그랜드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그곳에서 한승준 포토그래퍼와 재회했다.

    한승준은 LA에 화보 촬영차 왔다가 패션 위크에 참석하려고 한국으로 가지 않고 바로 뉴욕으로 왔다고 했다.

    이락 대신 장우재가 따라온 것을 빼고는 작년의 패션 위크 사총사가 모두 모였다.

    한승준은 그랜드 호텔의 스위트 룸 객실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선예야. 이, 이 방 하루만 묵어도 비용이 상당하겠는데?”

    “괜찮아. 우리가 내는 거 아니야.”

    “그럼, 리무진 말고 이 호텔도 얀 필립이 해 준 거야?”

    “응. 비행기 표도 얀이 먼저 보내 줬어. 작년 SS 패션 위크에 우리 이렌 씨가 바빠서 초대장이 와도 못 갔거든. 그래서 이번에는 꼭 와 달라고 먼저 초대장과 비행기 표 그리고 호텔 숙박권까지 패키지로 보냈더라고.”

    “와. 미쳤다.”

    한승준이 빈선예를 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스위트 룸을 구경하던 한승준이 빈선예를 불렀다.

    객석 구석에 한국에서 가지고 온 네 개의 캐리어가 서 있었다.

    한승준은 그걸 보고 빈선예에게 물었다.

    “컨셉이 뭐야? 다들 이번에 서이렌 님이 뭘 입으실지 관심이 대단해. 작년에 한복 입어서 난리가 났었잖아. 이번에도 한복이야?”

    “글쎄. 뭘까? 궁금해?”

    “야. 빨리 말해라. 미리 컨셉을 말해 줘야 나도 어떻게 찍을지 각이 나오니까.”

    “알았어. 드레스룸으로 가자. 의상은 이미 다 걸어 놨어.”

    한승준은 빈선예와 함께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한편, 나는 서이렌과 함께 스위트 룸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랜드 호텔 스위트 룸은 약 구십 평의 공간에 총 세 개의 베드룸으로 구성된 럭셔리 객실이었다.

    방마다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고 베드룸마다 각자의 드레스룸이 있었다.

    룸에는 통창이 있어서 뉴욕의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이렌은 킹사이즈의 푸근한 침대에 뛰어들었다.

    “와. 좋다. 너무 좋아요. 대표님.”

    새하얀 침구 속에 파묻혀 있는 서이렌이 허우적거리며 수영하는 척을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통창을 통해 밖을 보니 뉴욕의 빌딩 숲 사이로 아침 햇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호텔 근처의 빌딩 외벽에는 광고판이 설치되어 있었고 영상 광고가 흐르고 있었다.

    “오전에 잠시 눈이라도 붙여요.”

    서이렌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려 바깥을 쳐다봤다.

    광고판에 아름다운 모델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에블론이라는 뷰티 브랜드의 광고였다.

    “왜 그래요? 대표님. 뭐라도 봤어요?”

    “아. 아뇨.”

    “뭘 봤는데 그렇게 놀란 얼굴이에요?”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밖이 보이지 않게 황급히 커튼을 치고 뒤돌아섰다.

    서이렌은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나갈게요. 쉬어요.”

    나는 황급히 방문을 닫고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방금 분명히 뭔가를 봤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내가 본 게 맞는 걸까?

    방금 나는 광고판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세이렌 마네킹의 얼굴을 봤다.

    작년에 뉴욕에 와서 봤던 팔이 하나 없는 그 마네킹 말이다.

    아냐. 잘못 본 걸 거야.

    세이렌 마네킹일 리가 없잖아.

    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밖으로 나왔다.

    * * *

    김진희 실장이 쇼장으로 가기 전 최종 점검을 진행했다.

    지수연은 레오노라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또 다른 명품 브랜드인 르삭의 백을 들었다.

    시계도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시계였고 액세서리는 에끌린 부띠끄에서 협찬받은 명품이었다.

    온몸을 명품으로 치장한 지수연은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이 만족스러운지 미소를 지었다.

    “날씨도 우리 편이에요. 우리가 준비한 의상의 색이 골드인데 날씨가 화창해서 거리에 서면 자연광에 의상이 더 빛날 거예요.”

    지수연은 김진희 실장의 말에 미소를 머금었다가 이내 물었다.

    “작년에 서이렌은 쇼장으로 가는 길에 입은 의상과 쇼장 안에서 입은 의상이 달랐잖아요. 우린 하나인가요?”

    “우리 서이렌처럼 거리를 걷지 않을 거예요. 쇼장 근처에 내려서 근처에서만 사진을 찍을 겁니다.”

    “그럼, 사진을 덜 찍히잖아요.”

    “오늘 수연 배우님이 신을 힐이 높아서 힘들어요. 뭣 하러 힘들게 거리를 활보해요? 그냥 쇼장 근처에서 찍어도 돼요.”

    “그래요?”

    “그럼요. 김준수 포토그래퍼가 친히 뉴욕까지 와 주셨어요. 멋진 사진을 찍어 주실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지수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한승준이 아니라 김준수요? 한승준이 더 유명하지 않아요?”

    지수연의 말에 김진희 실장은 살짝 짜증이 났다.

    “한승준은 이제 뜨기 시작한 라이징이고, 김준수 포토그래퍼는 지난 십 년간 업계 탑이었죠. 무슨 한승준이에요. 김준수 포토그래퍼가 훨씬 유명하니까 안심해요.”

    “난 한승준 사진이 더 좋던데.”

    지수연이 끝까지 토를 달자 김진희는 표정 관리를 못 했고 바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는 뒤돌아서 걸어가더니 화장대 위에 올려진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지수연의 앞으로 다가온 김진희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화려한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핑크 다이아몬드가 눈부신 백금으로 된 줄에 걸려 있는 보기만 해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목걸이였다.

    “에끌린 부띠끄에서 협찬받은 거예요. 자그마치 오십팔 캐럿. 가격만 오십억이 넘는 명품이죠.”

    내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있던 지수연은 목걸이를 보자마자 두 눈이 밝게 빛났다.

    “이런 예술품을 몸에 두르고 거리를 활보할 수는 없죠. 그런 건 서이렌이나 하라고 하세요.”

    김진희는 말을 마치고 목걸이를 상자에서 꺼내 지수연의 목에 걸어 줬다.

    금빛 드레스에 다이아몬드 목걸이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자. 이제 패션 위크를 뒤흔들러 가 볼까요?”

    김진희가 손을 내밀자 지수연은 마치 대관식에 나가는 여왕처럼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 * *

    서이렌은 작년과 동선이 같았다.

    뉴욕 패션 위크가 열리는 미드타운의 모니핸역(Moynihan Station) 근처에 도착해서 거리를 걸을 예정이다.

    길거리 런웨이가 끝나면 바로 옷을 갈아입고 쇼장에 들어갈 거다.

    기자들이 즐비한 도로 위로 걸어가는 서이렌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한승준이 카메라를 들고 서이렌의 바로 앞을 따라가며 사진을 찍고 있었고 빈선예는 한승준의 바로 옆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나와 장우재는 프레임에 걸리지 않게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와. 대단하네요. 대표님. 저기 기자들 몰려드는 것 좀 보세요.”

    나는 이미 일 년 전에 한번 겪어 본 일이지만 그때와는 느낌이 또 달랐다.

    “작년보다 기자들이 더 몰려들고 있네요.”

    “이제는 우리 이렌 님이 누군지 알고 그러는 거 같아요.”

    “그러게요. 세이렌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네요.”

    “외국에선 우리 이렌 님을 세이렌이라고 부른대요. 아무래도 이름이 비슷해서 그런 거겠죠?”

    장우재는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작년보다 인파가 몰려서 쇼장 앞까지 가는 데 더 오래 걸릴 거 같다.

    이런 일을 예상했기에 우리는 호텔에서 조금 더 일찍 나왔다.

    나는 막간을 이용해 핸드폰을 열고 기사가 뜬 게 없는지 확인했다.

    그런데 포털 사이트 메인에 큼지막하게 지수연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100억 여신. 지수연 뉴욕을 접수하다.]

    속물근성 가득한 기사 헤드라인에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기사를 클릭해 보니 명품으로 휘감고 나타난 지수연이 보기만 해도 눈이 멀 것 같은 휘황찬란한 보석을 목에 걸고 서 있었다.

    목에 건 목걸이만 오십억이 넘는다고 써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자현이 소속사를 나오지 않았다면 저 명품을 걸치고 뉴욕에 왔겠지.

    사진 속의 지수연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같이 꾸미고 있었지만 나는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패션을 모르는 일반인이라서 그런 걸까?

    나는 이자현이 저런 화려한 의상을 입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내 배우 서이렌을 떠올렸다.

    저렇게 꾸미고 나타났으니 분명 기자들이 서이렌과 지수연을 저울에 올려놓고 비교 기사를 쓸 게 분명하다.

    나는 그들의 뻔한 시나리오를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왠지 서이렌이 승리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클래식을 리폼해서 입고 온 서이렌이 더 진정성 있다고 생각한다.

    * * *

    지수연의 패션 위크 기사가 뜨자마자 사람들은 그녀가 입고 신고 걸친 착장을 찾아 나열했다.

    레오노라 드레스

    수키 하이힐

    르삭 빈티지 백

    디오플레나 시계

    에끌린 부띠끄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

    - 미친. 진짜 백억인가?

    - 와. 역대급 협찬이다.

    - 지수연이 저 정도 급이라고???

    - 이자현 나가고 LOK가 역대급으로 지수연 푸쉬해 주네.

    - 원래 강하나가 차세대 이자현 아니었나?

    - 강하나 팽당한 지 오래임. ㅋㅋㅋ

    - 예쁜지는 모르겠는데 눈뽕차긴 한다.

    - 지수연이 백억이면 서이렌은 천억 정도 두르고 나타나지 않을까?

    지수연의 게시글마다 서이렌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비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직 사진 한 장 올라오지 않는 서이렌과 지수연을 품평하며 즐기고 있었다.

    - 서이렌 사진도 떴어.

    - 와. 인간이 아니다. 존예.

    - 서이렌 미친 거 아님. 역대급 존예야 ㅠㅠㅠㅠ

    - 진짜 존나 예쁨.

    - 얼굴로 세계정복.

    사람들은 서이렌의 사진을 보며 우선 얼굴부터 감상했다.

    - 지수연이랑 비교가 안 됨. 여신과 인간인데 비교가 되겠냐?

    - 서이렌은 백억은커녕. 일억도 안 되겠는데???

    - 지수연이 돈으로는 압승이네.

    - 서이렌도 번쩍이는 목걸이나 반지 좀 차고 나오지. 너무 비교된다.

    어그로를 끌어 보려는 누리꾼들이 돈으로 두 사람을 비교하고 있는데 누군가 해외에 뜬 게시글을 퍼 날랐다.

    [서이렌 오늘 컨셉이 리폼이래]

    게시글의 내용은 미국의 유명한 커뮤니티의 패션 포럼에 올라온 서이렌의 오늘 착장에 대한 글이었다.

    누군가 빠르게 그 글을 한글로 번역해서 올린 것이다.

    [세이렌 오늘 입은 의상 40년 전 레오노라 드레스 리폼이다.]

    [레오노라의 황금기 때 나온 클래식한 디자인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놀랍군.]

    [구두도 레오노라 같은데? 관리를 참 잘했다.]

    [보그 편집장이 예전에 세이렌 의상 극찬했었다. 기억하나?]

    [편집장이 보그 본사에 있는 옷장을 세이렌한테만 공개했을지도 몰라.]

    [지금 보니 반지랑 귀걸이도 에끌린 부띠끄 초창기 제품이다.]

    [오늘 컨셉이 리폼이었군.]

    [리폼이 맞다. 방금 쇼장 올라가는 사진 떴는데 그것도 도나텔로 리폼 드레스에 가방이다.]

    [세이렌은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아. 언제나 뻔한 답이 아니라 신선한 답을 가져오지.]

    [그래서 세이렌 여신이잖아.]

    [한국은 여신을 가질 자격이 있어. 그곳은 아름다운 나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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