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20화 (121/261)
  • #120화. 그림자 연기

    업무를 일찍 정리한 나는 레전드 필름으로 갔다.

    오늘은 그동안의 촬영분을 가지고 리뷰를 진행하기로 했다.

    도착해 보니 그곳에는 이미 최병철과 윤서혁 그리고 진설이 와 있었다.

    “제가 제일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아냐. 우리가 일찍 온 거지. 원 대표는 한창 바쁘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윤서혁 감독의 옆자리에 앉았다.

    진설이 최병철을 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최 감독님. 원래 영화 촬영 중에 이런 거 하질 않는데. 나 때문에 최 감독님이 마련해 주신 자리라면서요?”

    “난 진 대표가 그래도 촬영장에는 가끔이라도 들를 줄 알았지. 그렇게 코빼기도 안 비출지 알았나?”

    “내 후계자인 원 대표랑 서이렌이 가 있는데 무슨 상관이에요.”

    “이렌 씨도 진 대표의 후계자였어?”

    “그럼, 후계자도 아닌데 내가 괜히 합숙해서 연기를 가르쳤겠어요?”

    “하하. 그렇군.”

    최병철 감독이 호탕하게 웃었다.

    진설은 나를 보며 말했다.

    “원 대표가 내일 아침 일찍 뉴욕에 가야 한다고 하니 빨리 우리 할 일을 하죠.”

    “그러지.”

    눈치 빠른 윤서혁이 벌떡 일어나서 노트북을 켰다.

    구원의 밤 초반 촬영 컷들이 레전드 필름의 회의실에 있는 커다란 텔레비전에 미러링되어 재생됐다.

    극의 전체적인 색감은 회색과 코발트블루였다.

    시리도록 차갑고 냉정한 색감이 영화의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었다.

    최병철 감독은 롱 테이크를 선호했는데 주로 강동철과 대화를 나누며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롱 테이크 씬이 몰입감을 더해 줬다.

    그런데 나는 보는 내내 뭔가 어색했다.

    서이렌이 일부러 존재감을 죽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뭔가 서이렌이 나올 때만 핀트가 맞지 않아 보였다.

    내가 의아해하는데 진설이 바로 내 궁금증을 풀어 줬다.

    “이렌 씨가 상대 배우를 보고 있지 않네요. 내내 시선이 아래로 향해 있어요.”

    “진 대표가 의도한 거 아니었어?”

    “난 존재감을 줄이라고 했지. 시선까지 어떻게 하라고는 말해 주진 않았어요. 최 감독님.”

    “흠. 그럼, 서이렌 씨가 알아서 했다는 건데.”

    나는 진설과 최병철 감독의 대화를 들으며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극이 진행될수록 서이렌의 시선이 점차 위로 올라가더니 강동철의 눈을 조금씩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처음엔 나도 시선 처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일부러 강동철의 손만 본 거라고 하더군. 극이 진행될수록 강동철과 동화되며 서서히 그의 눈을 보게 된 거고 말이야. 보면 알겠지만, 강동철에 밀려서 내내 주눅이 들어 있던 최진의 존재감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

    윤서혁이 재빨리 촬영 초기와 지금의 서이렌을 동시에 두 화면에 띄워 놨다.

    최병철이 설명한 대로 서이렌은 똑같은 헤어스타일에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눈빛이나 아우라가 달라져 있었다.

    나는 놀라서 최병철과 진설을 쳐다봤다.

    진설은 그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서이렌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도 저 아이 나이 때에 저렇게 연기하지 못했어. 서이렌이 잘하는 거야.”

    진설의 칭찬에 최병철 감독이 말을 보탰다.

    “천재야. 타고났어.”

    두 레전드의 극찬에 내가 마치 그 당사자인 것처럼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번 연기는 서이렌이 누군가를 따라 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대로 연기한 첫 번째 극이다.

    내 배우가 대단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때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그림자…….”

    진설이 내 말을 알아듣고 놀라 물었다.

    “원 대표.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림자라니?”

    나는 고개를 들고 진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렌 씨가 첫 촬영 날 제게 그랬습니다. 자신은 지금 그림자라고.”

    진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는지 곧바로 얼굴에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 최진은 그림자야. 강동철에게 점점 동화되어 가며 그를 흉내 내는 그림자.”

    “서이렌 씨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는데 감독인 내가 분발해야겠어.”

    최병철은 특유의 너털웃음을 흘리며 웃었다.

    나는 내일 아침 비행시간 때문에 일찍 일어나야 했지만 지금 이 기분으로는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 * *

    아침 일찍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짐을 먼저 실어 보내고 공항 라운지로 이동했다.

    “다행히 지난번보다 캐리어가 늘지는 않았네요.”

    내 말에 빈선예가 가자미눈을 하고 나를 바라봤다.

    “일정이 짧잖아요. 사흘은 너무 짧은 거 아닌가요?”

    “영화 촬영 중이잖아요.”

    “아니까 참는 겁니다.”

    빈선예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내 웃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삼십 분은 이곳에서 기다려야 했다.

    나는 그동안 두문불출하며 서이렌의 패션 위크 의상을 준비한 빈선예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옷을 준비한 겁니까? 지난번처럼 세계를 진동시킬 옷을 준비하셨겠죠?”

    “어이구. 무섭게 갑자기 왜 그래요?”

    “한 달이 넘게 의상만 준비하셨잖아요. 대체 무슨 의상인데 그렇게 오랫동안 준비하신 겁니까?”

    빈선예가 갑자기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뭡니까? 그 눈빛은?”

    빈선예는 내게 가까이 오더니 말했다.

    “작년에는 대표님이 한복 입고 가자고 하셔서 대박 난 거였잖아요.”

    “얻어걸린 거긴 하지만 그랬죠.”

    “이번에도 대표님 아이디어예요.”

    “제가요?”

    “복사도로 엠티갔을 때 아이디어를 주셨잖아요.”

    “제가 그랬다고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빈선예를 쳐다봤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빈선예에게 패션 위크에서 뭘 입을지 말해 준 적이 없었다.

    “그때 대표님이 그러셨죠. 작년에 입은 한복이 인기가 많았으니까 똑같은 옷 입고 가면 안 되냐고요. 기억나세요?”

    “그럼요. 그 말 했다가 빈 팀장님께 혼만 났죠. 어떻게 똑같은 옷을 또 입고 가냐고.”

    “맞아요.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까 대표님 말씀이 맞더라고요. 왜 매번 새 옷을 입고 가야 할까? 그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 이번에도 한복을 입는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니고요.”

    빈선예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점점 미궁에 빠져들었다.

    빈선예는 내가 여전히 눈에 물음표를 달고 있자 그제야 정답을 말해 줬다.

    “리폼.”

    “……?”

    “기존에 있던 옷을 리폼해서 입을 겁니다. 그래서 협찬 제의도 다 거절했어요.”

    순간 내 머릿속에 트리플에이 시상식 때 서이렌이 입었던 삼십 년 전 드레스가 번뜩 떠올랐다.

    “기존에 있던 옷이라면……. 혹시?”

    “맞아요. 대한민국에서 제일 오래된 옷장. 우리 할머니 옷장을 이번에도 털었어요.”

    나도 모르게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리폼이라?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생각하면 할수록 대박이었다.

    명품 업체에서 협찬해 준 옷을 그냥 입는 것보다는 훨씬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빈선예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아직 일러요. 내가 리폼한 옷을 보고 나서 좋아해요.”

    “빈 팀장님이 손을 댄 옷 중에 실패작이 있었습니까? 전적으로 믿습니다.”

    빈선예는 내 칭찬에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음을 흘렸다.

    한참 우리끼리 웃고 떠드는데 한 무리가 라운지에 들어섰다.

    빈선예는 그들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지수연?”

    지수연과 그녀의 매니저 그리고 스태프가 들어오고 있었다.

    지수연은 명품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있었다.

    오랜 비행시간을 예상해서 편한 슬랙스와 후드티를 입고 온 서이렌과 대조적이었다.

    지수연의 명품을 눈으로 훑은 빈선예가 나직이 말했다.

    “우리가 협찬 거절했던 명품 업체 거네요. 지수연이 협찬받았나 봐요.”

    조용히 구원의 밤 대본을 읽던 서이렌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대본은 너무 많이 봐서 이미 너덜너덜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지수연이 아니라 이자현 선배님이 협찬받은 거예요.”

    “그래요? 이렌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이자현 선배한테 들었어요. 원래 패션 위크 초대받아서 가기로 했는데 소속사 옮긴 이후로 취소됐다고 하더라고요.”

    “진짜로 그런 일이 있었어요? LOK 대단하네. 이자현 배우 대신 지수연을 밀어주려는 거구나.”

    지수연을 싫어하는 빈선예는 그녀를 보며 눈을 흘겼다.

    한편, 지수연 측에서도 서이렌과 스타탄생 식구들을 발견했다.

    지수연이 그녀의 스타일리스트로 따라온 LOK 김진희 실장에게 물었다.

    “실장님. 서이렌 스타일리스트 알아요?”

    “빈선예 말하는 건가요? 걔가 원래 LOK에 있을 때는 막내 스타일리스트였어요.”

    “그래요? 그래도 지금까지 서이렌이 의상으로 주목받은 게 꽤 되지 않아요? 능력은 있나 보네요.”

    김진희 실장은 기분이 상하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번 패션 위크에는 우리 수연 씨가 주목받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생각해 봐요. 우리가 받은 협찬 목록을. 지금까지 톱스타 중에서도 이렇게 많은 협찬을 받은 적이 없었어요. 대단한 거라고요.”

    “잘 알죠. 저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때 서이렌과 스타탄생 식구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행기 시간 다 됐나 보네요. 우리도 가요. 실장님.”

    “그래요. 수연 씨.”

    지수연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녀의 풍성한 치마에 주름이 잡혔다.

    지수연이 그걸 보고 미간을 찌푸리자 김진희 실장이 말했다.

    “비행기 타면 편한 옷으로 갈아입을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역시 실장님이세요. 가요.”

    * * *

    열네 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이 끝나고 뉴욕 공항에 스타탄생 식구들이 도착했다.

    오랜 비행 때문에 모두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유일하게 서이렌만이 쌩쌩해 보였다.

    서이렌은 비행기에 타고 올 때 입고 온 편한 슬랙스와 후드티 차림으로 공항 밖으로 나갔다.

    마침 옷을 갈아입은 지수연 일행이 보란 듯이 서이렌을 스쳐 지나갔다.

    지수연은 온갖 명품으로 휘감고 나타나서 서이렌의 앞에 섰다.

    지수연이 새카만 선글라스를 벗으며 서이렌에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수연이라고 합니다. 그때 KBC 연기대상 축하 공연 연습에서 뵀었죠?”

    서이렌은 지수연을 따라 하며 그녀가 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지수연 배우님. 오랜만에 뵙네요.”

    지수연은 꾸미지 않고 편해 보이는 서이렌의 착장을 눈으로 훑었다.

    누가 봐도 자신이 승자였다.

    하지만 지수연의 시선이 서이렌의 얼굴로 향하자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화장기 하나 없는 그녀의 얼굴이 유리알처럼 맑게 빛나고 있던 것이다.

    지수연은 쌩얼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 그녀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기분이 상한 지수연이 입을 닫자 이번에는 김진희 실장이 나섰다.

    김진희가 빈선예를 보며 물었다.

    “오랜만이다.”

    “김 실장님. 잘 지내셨어요?”

    “그럼, 잘 지냈지. 너도 잘 지냈니?”

    “예. 저는 LOK에서 퇴사한 뒤에 너무 잘 지내고 있죠.”

    빈선예는 그녀를 괴롭혔던 전 직장 상사와 마주했지만 당당하게 굴었다.

    김진희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서이렌 씨는 어느 호텔에서 묵어? 우리는 그랜드 호텔이야.”

    “저희도 그랜드 호텔이에요.”

    “같은 곳이네. 그럼, 호텔에는 어떻게 가려고? 우리는 스폰서인 레노오라 측에서 차를 보내 주기로 했어.”

    “그러시구나. 편하게 가시겠네요.”

    “같이 타고 가면 좋을 텐데. 어쩌나. 우리 식구가 많아서. 우리만 해도 자리가 꽉 찰 거 같아.”

    “천만에요. 그렇게 말씀해 주신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김진희 실장은 빈선예가 대화하는 내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부러워하거나 시샘할 줄 알았는데 빈선예는 평온해 보였다.

    그때 매니저가 김진희 실장을 불렀다.

    “수연 배우님. 김 실장님. 저기 레오노라에서 보낸 차가 도착했네요. 가시죠.”

    지수연은 서이렌에게 짧은 눈인사를 하고 뒤돌아섰다.

    김진희도 빈선예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지수연의 스태프가 레오노라 측에서 보낸 세단에 짐을 싣고 있는데 주차장으로 새하얀 리무진이 들어왔다.

    영화에서만 보던 리무진이 그들을 스쳐 가자 지수연이 놀라 차를 쳐다봤다.

    우리 앞에 도착한 리무진에서 누군가 내렸다.

    “안녕하세요. 서이렌 씨 일행 되시죠?”

    “예. 맞습니다.”

    “얀 필립이 보내셔서 왔습니다. 타시죠. 저희가 안전하게 호텔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자가 리무진 문을 열고 서이렌을 에스코트했다.

    차에 타려던 빈선예가 뒤에 서 있는 지수연 일행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저희는 먼저 가 볼게요. 내일 쇼장에서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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