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아우라가 사라지다
서이렌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약간은 부스스해 보이는 까만 머리에 은색 안경테를 쓰고 있었다.
얼굴은 톤 다운을 해서 약간 어두워 보였고 입술에도 생기가 없어 보였다.
서이렌의 맑고 청아한 회갈색 눈동자는 없고 렌즈를 끼어서 남들과 같은 까만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연기를 위해 미모를 죽인 적은 많지만 이렇게 극적으로 존재감 자체가 사라진 적은 처음이다.
나는 서이렌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렌 씨 맞아요?”
서이렌은 나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웃으니까 그제야 서이렌의 본래 모습이 조금 보이기도 했다.
모두가 서이렌의 변신에 놀라고 있었지만, 최병철은 미리 알고 있었는지 평온한 얼굴로 서이렌에게 다가갔다.
“왔어요?”
“안녕하세요. 감독님.”
“언제부터 나를 따라다닌 겁니까?”
“십 분 전부터요.”
“하하. 진 대표와의 합숙이 효과가 있었나 보네요.”
최병철이 호탕하게 웃자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은 서이렌이 진설과 합숙하며 연기 연습을 한 것을 모르고 있다.
그 사실을 알았던 나도 지금 서이렌의 모습에 놀랐으니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자. 그럼, 오늘 첫 촬영을 해 볼까요?”
최병철 감독의 말에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드디어 고대하던 구원의 밤의 첫 촬영이 시작된다.
* * *
첫 촬영은 파주 영화 촬영소에 만들어진 교도소 세트장에서 진행된다.
연쇄 살인마 강동철로 분한 심석현이 교도관들에게 붙들려 접견실로 들어왔다.
의자와 탁자만 달랑 있는 접견실에는 위태로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강동철을 잡아 그의 연쇄 살인을 끝낸 강력계 형사 박동한은 오늘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수화 통역사 최진이 함께였다.
강동철을 맡았던 첫 번째 수화 통역사는 지난주에 자살했고 그의 수제자였던 최진이 대타로 참석한 것이다.
교도소가 처음인 최진은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열 명이나 되는 사람을 잔혹하게 살해한 강동철과 눈이 마주치자 최진은 놀라 눈을 감았다.
그녀는 강동철뿐만 아니라 박동한과 교도관 모두가 두려웠다.
자리에 앉은 강동철의 몸은 여전히 구속된 상태였다.
교도관들은 안전을 위해 접견실에서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다.
위압적인 분위기 속에 박동한이 입을 열었다.
“열한 번째 실종자. 아직 살아 있지?”
박동한은 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돌려 최진을 바라봤다.
최진은 움찔하더니 손을 들었다.
아무런 액세서리도 착용하지 않았고 핸드크림도 바르지 않았는지 거친 그녀의 손이 허공에 떠서 글자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열한 번째 실종자. 아직 살아 있지?]
수화를 마친 최진이 손을 내리고 강동철의 손을 바라봤다.
강동철은 탁자 위로 손을 올렸다.
그의 손은 시퍼런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강동철이 시위하듯이 수갑이 채워진 손으로 탁자를 쳤다.
그 소리에 놀란 최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박동한은 옆에 있는 교도관들에게 말했다.
“수화로 대화를 해야 하니 수갑을 풀어 주시시죠.”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교도관들은 강동철이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양손에 한쪽씩 수갑을 채워 책상 아래 길게 늘어진 사슬에 달았다.
여전히 수갑을 차고 있었지만 두 손을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된 강동철의 손이 허공 위에 떴다.
최진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손을 노려봤다.
강동철의 손이 천천히 허공을 가르며 글자를 만들어 냈다.
[열한 번째 실종자라. 아직 그것밖에 못 찾았나?]
최진의 얼굴이 굳었다.
최진은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강동철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열 명이나 납치해 잔혹하게 살해했다.
피해자들은 납치된 이후로 짧게는 며칠부터 길게는 몇 달간 그가 숨겨놓은 은신처에서 살아 있다가 죽었다.
그의 은신처는 전국 각지에서 발견되었고 모두 인근에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나 폐공장이었다.
다행히 박동한의 고향 근처에 그의 은신처가 있었고 그가 어머니를 뵈러 그곳에 내려갔다가 강동철의 행적을 발견한 것이다.
강동철은 지금 재판 중이지만 그가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일어났던 실종사건이 강동철에 의한 것이라는 증거가 나왔고 박동한은 그를 추궁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최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박동한이 다그쳐 물었다.
“강동철이 뭐라고 합니까? 자기는 아니라고 발뺌하고 있나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말해 봐요. 뭐라고 했나요?”
최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그것밖에 못 찾았냐고 물어보고 있습니다.”
박동한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는 강동철을 노려보며 말했다.
“몇 명이나 더 있지? 너 우리를 가지고 노는 거 좋아하잖아. 그냥 다 털어놔. 우리가 미친놈들처럼 야산을 뒤지는 거 보고 싶지? 그럼, 다 말하라고. 이 개새끼야.”
박동한이 최진을 보며 말했다.
“통역해요. 내가 말한 거 하나도 빠짐없이 다.”
“그걸 다요?”
“예.”
최진은 두 손을 꽉 움켜쥐고 강동철에게 시선을 돌렸다.
입술을 꼭 깨문 그녀가 손을 움직였다.
[몇 명이나 더 납치했는지 말해 주세요. 경찰이 찾고 싶다고 합니다.]
강동철이 피식 웃으며 손을 움직였다.
[경찰이 그렇게 말했나? 내가 독순술을 익히진 않았지만 그렇게 신사적으로 물어봤을 리 없잖아.]
[의미는 같아요. 몇 명이나 납치한 건지 빨리 말해요.]
[경찰이 해야 할 일을 왜 내게 묻는지 모르겠군.]
박동한은 못 참겠는지 최진을 다그쳐 물었다.
“강동철이 뭐라고 합니까?”
“경찰이 할 일을 왜 자신에게 묻느냐고 하네요.”
최진의 통역을 들은 박동한이 의자를 박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개새끼가!”
* * *
첫 촬영이 끝나고 모니터로 배우들이 모여들었다.
강동철로 분한 심석현과 박동한으로 분한 김건명이 자신들의 연기를 먼저 확인했다.
이 모든 것을 게임으로 생각하고 있는 잔혹한 연쇄 살인마의 연기와 악인에 대한 분노가 가득 찬 형사의 연기 대결이 마치 불꽃과도 같았다.
“와우. 이건 진짜. 보는 것만으로도 후덜덜하네요.”
“연기가 미쳤는데요?”
옆에 있던 스태프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구석에 존재감 없이 서서 모니터를 지켜보던 서이렌의 입에도 미소가 걸렸다.
서이렌의 곁에서 함께 모니터를 보던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서이렌이 딱히 대사를 씹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연기했는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연기에 비해 아우라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강동철과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지만 존재감이 너무 미미했다.
모니터링을 하던 다른 배우들도 그것을 느낀 것인지 최병철 감독을 쳐다봤다.
한 번 더 촬영해야 하는지 감독의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최병철이 웃으며 말했다.
“좋아. 다음 촬영으로 갑시다.”
배우와 스태프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감독이 오케이 했기 때문에 토를 달지 못했다.
모두 석연치 않은 얼굴로 다음 촬영을 준비하는데 내가 서이렌 곁으로 붙었다.
“이렌 씨. 한 가지만 대답해 줘요.”
다음 촬영 장소로 이동하던 서이렌이 내 물음에 고개를 돌렸다.
“말씀하세요.”
“다 의도되고 계산된 연기죠?”
서이렌은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진설 대표님과 함께 논의해서 연기 방향을 잡은 겁니까?”
“예. 당분간은 저를 없앨 겁니다. 저는 그림자니까요.”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궁금증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어떻게 그렇게 단숨에 이렌 씨의 존재감을 없앤 거죠?”
“원래 내 정체를 잊었나요?”
서이렌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때 스태프가 서이렌을 불렀다.
“가 봐야겠네요.”
서이렌이 스태프와 함께 촬영장으로 걸어갔다.
홀로 남은 나는 걸어가는 서이렌의 뒷모습을 보며 홀로 나직이 속삭였다.
“마네킹. 그래요. 이렌 씨는 원래 마네킹이었죠.”
* * *
일주일 후, 파주 영화 촬영소에 촬영팀이 도착했다.
촬영팀이 가지고 있는 소품에 ‘멜랑꼴리’라고 쓰여 있었다.
주연인 김선우, 지수연이 촬영장을 둘러봤다.
록 이사까지 총출동해서 파주 촬영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김선우는 오랜만에 영화 촬영장에 오니 기분이 남달랐다.
드라마에서는 승승장구했지만, 찍는 영화마다 흥행에 참패했다.
“난 밴에 들어가서 대본 보고 있을게. 촬영 시작하면 불러.”
“예. 배우님.”
김선우가 쌩하니 사라졌고, 파주 촬영장이 처음인 지수연은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한편 록 이사는 촬영장에 와서야 반대편 세트장에서 구원의 밤을 찍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세강도 있나?”
“원 대표님은 못 봤는데 심석현과 서이렌은 봤습니다.”
“그래? 촬영 분위기는 어떤 거 같아? 최병철 감독 복귀작이잖아.”
“별다른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최 감독이 옛날 사람이라서 꼰대 아닌가 했는데. 그런 건 없나 봅니다. 분위기도 그냥 일반 촬영팀이랑 같고요.”
록 이사는 괜히 구원의 밤이 신경 쓰였다.
그쪽은 장르물이고 멜랑꼴리는 멜로라서 노선이 달랐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알았어.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으면 나한테 귀띔이나 해 줘.”
록 이사가 자리를 뜨려는데 스태프가 이상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말입니다.”
돌아서던 록 이사가 발걸음을 멈췄다.
“뭘 말이야?”
“재미있는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저쪽 촬영팀에서 들은 게 하나 있어서요.”
스태프의 말에 록 이사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뭔데 그래?”
스태프는 주위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후에 록 이사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서이렌 씨가 이번엔 되게 연기를 못했나 봐요.”
“서이렌이 연기를 망쳤대? 그쪽 영화 스태프가 그렇게 말해?”
“망친 것까지는 모르겠고요. 주연인 심석현이랑 김건명에 비해 존재감이 후달리나 봐요. 식사하는 곳이 겹쳐서 그쪽 스태프들이랑 자주 만나는데 그런 소릴 하더래요.”
록 이사는 코웃음을 쳤다.
“심석현이랑 김건명이야. 그런 베테랑 앞에 서니까 그제야 연기력이 들통이 나는 거겠지.”
“그런가요? 하지만 서이렌이 지금까지 연기를 잘해 왔던 걸로 알았는데요?”
“원래 다 잘할 수는 없어. 잘하는 연기가 있고, 못하는 연기가 있다고. 김선우를 봐. 장르물에서는 꾸준히 못 하잖아. 그나마 멜로에서 봐줄 만한 거지.”
록 이사의 입에서 김선우의 이름이 나오자 스태프는 조용히 주위를 살폈다.
“김선우 없어. 안심해.”
“예.”
스태프는 그제야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촬영장을 다 둘러본 록 이사가 박호중 감독에게 다가갔다.
“박 감독. 준비됐나요?”
“준비야 원래 되어 있었죠. 이제 시작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 지수연 씨는 패션 위크 때문에 뉴욕에 가야 하니까 힘들거나 어려운 촬영은 그 전에 시키지 마세요.”
“이미 매니저한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믿고 가 보겠습니다.”
록 이사는 박호중 감독에게 인사를 하고 촬영장에서 나왔다.
제2 세트장에서 나온 록 이사가 제3 세트장을 건너 주차장으로 이동하는데 옆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딱 봐도 제3 세트장에서 일하는 스태프 같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뒤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지나간 사람 중에 서이렌 있지 않았어?”
“무슨 소리야? 못 봤는데?”
“아냐. 방금 지나갔어.”
“말도 안 돼. 그냥 스태프인 줄 알았는데?”
“아무리 장르물이라지만 서이렌 진짜 못생기게 분장했나 보다. 어떻게 보는 사람들마다 서이렌 아닌 줄 알았다고 하지?”
“그러게. 너무 작정하고 연기 변신한 거 아니야?”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사라졌다.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록 이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가 이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