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18화 (119/261)
  • #118화. 합숙 훈련

    키가 꽤 큰 박선호를 가볍게 받아 낸 서이렌이 다리에 힘이 풀린 그를 붙잡았다.

    박선호는 눈이 풀린 상태로 자신을 잡아 준 사람을 확인했다.

    “서이렌 씨…….”

    “정신 좀 차려 봐요. 박선호 씨.”

    박선호는 바보같이 웃으며 말했다.

    “와. 말하는 서이렌이다. 너무 예뻐.”

    “뭐라는 거야? 이봐요. 박선호 씨.”

    박선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칭얼대며 바닥에 허물어졌다.

    서이렌은 이대로 두면 박선호가 큰일 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를 번쩍 안아 들었다.

    백팔십이 넘는 박선호를 가볍게 공주 안기로 든 서이렌이 천천히 걸었다.

    마침 고깃집에서 달려 나온 나는 서이렌과 박선호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이렌 씨!”

    나는 정신을 못 차리는 박선호를 먼저 붙잡았다.

    “내가 잡을게요. 이렌 씨는 그만 놔요.”

    “안 돼요.”

    “왜요?”

    “무거워요. 대표님이 무거운 거 드는 거 싫어요.”

    “그게 말이 됩니까? 어서 내려놓으세요. 내가 잡을 테니까.”

    “싫어요. 힘은 내가 더 세잖아요.”

    “박선호 배우님이 불편해할 거예요. 어서 주세요.”

    “아닌데요? 편해 보이는데요?”

    내 시선이 박선호의 얼굴로 향했다.

    박선호는 뭐가 좋은지 볼에 홍조가 가득한 얼굴로 서이렌에게 얼굴을 파묻고 웃고 있었다.

    순간 뒷목에서 열이 확 올랐다.

    나도 모르게 서이렌의 손에서 박선호를 떼어 내 내게 기대게 했다.

    마침 밖으로 나왔던 윤서혁과 스태프들이 이 모습을 보고 놀라 달려왔다.

    “원 대표님. 무슨 일 있어요?”

    “어라? 박선호 씨가 왜 저러고 있어요?”

    그들은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박선호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선호 씨는 무슨 술을 이렇게 마신 거예요?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더니.”

    “사이다인 줄 알고 소주가 가득 든 잔을 마셨다가 탈이 난 겁니다.”

    내 말을 들은 레전드 필름 직원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거 박진숙 팀장님이 원 대표님 드리려고 따라 놓은 소주였는데. 그걸 박선호 씨가 마셨어요?”

    “그런 거 같아요. 어쩌죠? 몸을 전혀 못 가누는데요?”

    내가 걱정하며 말하자 윤서혁이 나섰다.

    “제가 업을게요. 저한테 업혀 주세요.”

    “그럼, 부탁합니다. 저는 박선호 씨 매니저에게 연락할게요.”

    나는 힘들게 안고 있던 박선호를 윤서혁에게 넘겼다.

    마침 소식을 들은 박선호 매니저 윤호상이 놀라서 뛰어왔다.

    서이렌이 먼저 가서 소식을 전한 것이다.

    윤호상이 윤서혁과 함께 박선호를 데리고 사라지자 그제야 소동이 끝났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아까 왜 그랬지?

    방금 나는 서이렌과 박선호를 보며 감정적으로 굴었다.

    그래. 내 배우가 힘들까 봐 그런 거야.

    맞아. 서이렌 씨도 여잔데 그렇게 키 큰 남자를 안고 있으면 얼마나 힘들겠어?

    내가 잘한 거라고.

    * * *

    나와 윤호상 매니저가 술에 취한 박선호를 침대에 눕혔다.

    “감사합니다. 원 대표님. 대표님이 안 계셨으면 선호를 데리고 올라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박선호가 엘리베이터가 없는 연립주택에 산다는 말을 듣고 나는 윤호상을 따라 이곳에 왔다.

    박선호가 사는 연립주택은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깔끔했다.

    그를 침대에 눕혀 놓고 거실로 나온 우리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셨다.

    평소에도 밥을 해 먹고 사는 건지 냉장고 안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박선호 배우님이 독립한 지 오래됐나 보네요?”

    “어떻게 아셨어요?”

    “저도 혼자 살고 있어서 압니다. 살림에 소질이 있으시네요.”

    “선호가 원래 이것저것 다 잘하고 재미있어해요. 유일하게 못 하는 게 술이죠. 술은 아무리 마셔도 안 늘더라고요.”

    “술이야 못할 수도 있죠. 괜찮습니다. 박선호 배우님은 연기를 잘하시잖아요.”

    “하하. 사실 주책이라고 할 거 같아서 말은 안 했지만, 저도 우리 선호가 연기를 참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디션에서도 군계일학이었다면서요?”

    “맞습니다. 박선호 배우가 연기하자마자 다들 이 사람이다 싶었을 거예요. 저도 그랬고요.”

    “원 대표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기분이 좋네요. 사실은 저는 선호가 다른 작품 하길 바랐거든요. 그런데 선호가 반드시 이걸 해야 한다면서 저를 설득했습니다.”

    “그렇군요.”

    나에게는 잘된 일이다.

    박선호는 연기도 잘하고 신선한 인물이어서 구원의 밤의 이정수 역에 적임자다.

    물잔을 가져다 놓으려고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거실 한쪽에 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는 요즘 보기 어려운 기계식 타자기가 놓여 있었다.

    “이런 게 집에 있네요. 요즘은 인테리어 소품으로 카페에 주로 있던데.”

    그런데 타자기에 종이도 꽂혀 있고 주위에 그 타자기로 쓴 것 같은 쓴 종이도 보였다.

    “그거 진짜로 사용하는 겁니다. 선호가 취미로 글을 쓰거든요.”

    “그래요?”

    흥미롭다고 생각한 나는 책상 위에 쌓인 원고지에 시선을 돌렸다.

    깔끔한 박선호의 성격답게 원고지도 칼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럼, 대표님 나가실까요? 저도 술 깨는 약 사야 하거든요.”

    원고지를 보고 있던 나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예. 그래요. 나갑시다.”

    * * *

    드디어 구원의 밤 촬영이 시작되었다.

    프리프로덕션이 이미 진행된 상태였고, 박찬영 감독의 건강이 언제 안 좋아질지 모르기 때문에 일정이 촉박했다.

    촬영장을 가는 차 안에서 강진석이 내게 물었다.

    “나비가 지난 주말에 팔백만 관객을 돌파했어. 이 기세면 2월 중순에는 천만 관객을 돌파할 거야.”

    “추이는 어때요?”

    “아주 좋아. 지금은 상승세가 꺾이고 관객 수가 하락하고 있는데. 아주 완만한 하락세야. 보니까 이미 본 관객들의 재관람 비율이 높은 거 같다네.”

    “엔진의 박주오 대표가 좋아하시겠네요.”

    “그 양반이 제일 좋아하지. 윤명현 감독도 해외에서 러브콜이 상당한가 봐. 엔진은 이번에 완전 대박 났지.”

    강진석이 은근슬쩍 나를 보더니 말했다.

    “사실 우리도 엔진 못지않게 대박이긴 하지. 하하. 스타탄생에서 나비에 얼마를 투자한 거지?”

    “많이 하진 못했어요. 그것보다는 이렌 씨가 러닝 개런티로 계약한 게 클 겁니다.”

    “러닝 개런티로 계약한 게 선견지명이었네.”

    강진석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데 해피 스릴러와 나만의 마돈나는 어떻게 돼 가고 있나요?”

    “해피 스릴러는 이제 촬영의 삼십 퍼센트 끝냈어. 사전 제작이라서 나만의 마돈나랑 같은 시기에 첫 방송을 할 거야.”

    나만의 마돈나는 월화 드라마이고 해피 스릴러는 금토 드라마다.

    같은 시기에 두 작품이 시작한다면 홍보 일정을 잘 짜야 한다.

    “세강아. 그런데 패션 위크도 꼭 가야 하는 거냐? 그거 촬영 중에 스케줄 빼야 하는 거던데?”

    “괜찮아요. 일정이 사흘밖에 안 돼요. 그땐 심석현 배우님 촬영을 몰아서 하면 됩니다.”

    “빈 팀장한테 들었는데 작년에 거기에 한복 입었던 거 말이야. 그거 네 아이디어였다면서?”

    나는 아무 감흥 없이 그렇다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강진석은 몹시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와. 너 진짜 난놈이다. 그거 작년에 난리 났었잖아.”

    “그러게요. 그 정도까지 반응이 클 줄을 몰랐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참나. 겸손한 척하기는. 하긴 네가 원래 그런 놈이긴 하지만. 암튼 그것 때문에 지금 빈 팀장이 집에 틀어박혀서 두문불출 중이다. 얼굴 못 본 지 한 달이 다 돼 가. 엠티 때 본 게 마지막이란 말이야.”

    강진석의 말대로 빈선예는 지금 패션 위크에서 입을 옷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보내고 있다.

    작년 가을에 두 여자 촬영 때문에 SS 패션 위크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한이라며 이번에는 뉴욕을 끝장내 버리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빈 팀장님도 고민이 많을 겁니다.”

    “왜? 온갖 명품 업체에서 협찬하겠다며 달려든다며?”

    “작년에 한복을 입고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이번엔 명품으로 휘감고 가는 게 싫다네요.”

    “그럼, 이번에도 한복 입는 건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엔 네가 아이디어 안 줬어?”

    “지난번에도 얻어걸린 겁니다. 이번에는 저도 아무런 조언도 안 했어요. 빈 팀장님이 오롯이 홀로 준비하시는 겁니다.”

    “빈 팀장이 부담이 많이 되겠네.”

    “아무래도 그렇죠.”

    핸드폰으로 스케줄을 확인하던 강진석이 갑자기 소리쳤다.

    “아. 맞다. 세강아.”

    “예. 말씀하세요.”

    “TOP 미디어 소식 들었냐?”

    “인어 공주 말씀이시죠?”

    “맞아. 그거 결국엔 지수연으로 캐스팅 바꾸고 촬영 들어간다면서?”

    강진석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이자현 대타로 지수연이라고요?”

    LOK와 TOP에 이자현만큼의 톱스타는 아니지만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이 많다.

    그런 스타들을 모두 제치고 선택한 사람이 지수연이라니 놀라웠다.

    “대본을 싹 갈아엎었다는 소문이 돌더라. 그거 원래 여주가 1롤이었잖아. 그런데 남주 위주로 바꾸고 여주는 지수연으로 캐스팅한 거래.”

    “그럼, 인어 공주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제목도 바꿨어. 멜랑꼴리.”

    나는 너무 놀라서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록 이사가 짠 판이라는 소문이 돌던데. 록 이사는 이제 TOP 이사도 아니야. TOP 미디어로 자리를 옮겼대.”

    “좌천인가요?”

    “그런 건 아닌 거 같고. 김경록이가 자기가 반드시 영화를 띄우겠다고 큰소리쳤다는 소식만 들었어.”

    김선우는 드라마 판에서는 톱이지만 영화로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실적을 올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 LOK는 최근에 강하나 대신 지수연을 밀어주기 시작했다.

    지수연은 차세대 이자현으로 불리며 승승장구 중이다.

    멜랑꼴리가 잘되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잘하면 구원의 밤과 같은 시기에 개봉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진석과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덧 촬영장에 도착했다.

    서이렌은 진설의 집에서 촬영장으로 바로 온다고 했다.

    지금 서이렌은 진설의 집에서 묵으며 연기 공부 중이다.

    이른바 합숙 훈련.

    진설이 나를 따라 할 거면 제대로 따라 해 보라면서 직접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진설을 좋아하는 서이렌은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고 곧바로 짐을 싸서 진설의 집에 들어갔다.

    나도 오랜만에 서이렌을 보는 거다.

    * * *

    진설의 차가 촬영장에 도착했다.

    차 안에는 그동안 진설과 합숙하며 특훈을 마친 서이렌이 타고 있었다.

    바쁜 빈선예를 대신해 서이렌의 영화 스타일링과 의상을 진설이 모두 준비해 줬다.

    서이렌이 진설을 돌아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진설은 마치 엄격한 선생님과 같은 눈빛으로 서이렌을 바라봤다.

    “나는 이만 갈 거야. 촬영 잘해.”

    “저 연기하는 거 안 보고 가시나요?”

    “나 바쁜 거 알잖아. 가야 해.”

    서이렌은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두 손을 꽉 쥐고 말했다.

    “안 보셔도 됩니다. 완성본으로 보세요. 연습한 대로 완벽하게 해내 보일게요.”

    진설은 열의를 불태우는 서이렌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우리 이렌이라면 잘할 거야. 어서 가 봐.”

    “감사합니다. 선배님. 촬영 끝나면 전화할게요.”

    촬영장으로 혼자 걸어가는 서이렌을 진설이 차 안에서 계속 지켜봤다.

    엄격했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어머니와 같은 푸근한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한편, 촬영장에 먼저 도착한 최병철과 윤서혁 감독은 현장 점검을 마쳤다.

    “윤 감독. 서이렌 씨는 언제 온다고 했지?”

    “진설 대표님 말씀으로는 촬영장에 도착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 언제?”

    “삼십 분 전에요.”

    “그런데 왜 안 보이지? 원 대표한테 전화 좀 걸어 봐.”

    마침 걸어오던 우리는 최병철 감독 일행과 만났다.

    “왜들 그러세요?”

    “서이렌 씨를 찾고 있어요. 촬영장에 왔다고 하는데 안 보여서요.”

    그때 최병철과 윤서혁의 뒤를 따라다니며 촬영장을 체크하던 스태프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어? 누구?”

    최병철과 윤서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놀란 내가 소리쳤다.

    “이렌 씨?”

    그는 스태프가 아니라 바로 서이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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