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17화 (118/261)
  • #117화. 천재용의 몰락

    “죄송합니다. CF 촬영이 늦어져서 화장을 못 지우고 왔어요.”

    서이렌이 상큼하게 웃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회식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서이렌이 사과하자 서로 앞다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무슨 소리세요. 이렇게 와 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어휴. 촬영이 다 그렇죠. 원래 제시간에 맞게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이리 앉으세요. 주연 배우들끼리 같이 앉아야죠.”

    스태프들이 서이렌을 자리로 안내했다.

    나는 그 짧은 시간에 서이렌과 눈빛을 교환했다.

    서이렌이 다가오자 박선호가 옆자리로 비켜 줬다.

    “여기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서이렌은 박선호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박선호가 윤서혁에게 물었다.

    “복사도에 미리 사전 답사를 다녀오셨다면서요?”

    윤서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사전 답사요? 그거 어디서 들었어요?”

    “박진숙 팀장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나와 윤서혁이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뭐, 사전 답사긴 하죠. 촬영할 집도 가 보고 거기서 잠도 자고 복사도의 이곳저곳을 돌아봤으니까요.”

    윤서혁은 차마 놀러 갔었다고 말은 못 하고 대충 얼버무리며 미소를 흘렸다.

    나는 서이렌의 자리에 수저를 세팅해 주며 물었다.

    “박선호 씨와는 스타메이커 결승 때 봐서 알죠?”

    “그때 락이가 소개해 줘서 통성명은 했습니다.”

    서이렌이 숟가락의 종이를 벗겨 내며 박선호를 쳐다봤다.

    박선호는 요정같이 꾸민 서이렌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함께 연기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인사를 마치고 나니 할 말이 없어진 박선호가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세요. 제가 구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종업원이 와서 불판을 갈아 줬고 박선호는 곧바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무 어설퍼서 마치 어린아이가 소꿉장난하는 것 같았다.

    “가위랑 집게 주세요. 제가 할게요.”

    보다 못한 서이렌이 박선호에게 가위와 집게를 빼앗았다.

    서이렌이 직접 고기를 구워서 먹는 모습을 보며 박선호가 말했다.

    “가위 주세요.”

    “왜요?”

    “그렇게 예쁘게 입고 고기 굽다가 기름이라도 튀면 안 되잖아요. 제가 구울게요.”

    “아뇨. 제가 구울 건데요.”

    “왜요?”

    “내가 먹을 거니까요. 내가 좋아하는 최적의 굽기로 맛있게 구울 겁니다.”

    서이렌은 말을 마치고 현란한 가위질로 삼겹살을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잘랐다.

    고기 위로는 마늘을 길게 늘어놓고, 그 아래에는 김치가 노릇노릇 익어 가고 있었다.

    서이렌은 김치가 알맞게 익자 자리를 만들어 이제는 파무침을 올렸다.

    박선호의 불판만 보고도 목으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여기요. 밥 한 공기만 주세요.”

    서이렌이 밥을 시키자 박선호가 놀라 물었다.

    “벌써 밥을 드시려고요?”

    “저는 고기랑 밥을 같이 먹어야 맛있더라고요.”

    직원이 밥을 건네며 말했다.

    “방금 푼 밥이에요.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

    서이렌은 뜨거운 밥공기를 받아 들고 공기째로 야무지게 흔들었다.

    “안 뜨거워요?”

    “뜨거워요.”

    서이렌은 웃으며 뚜껑을 열었다.

    직원의 말대로 새하얀 쌀밥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왔다.

    서이렌은 커다란 쌈을 하나 들고 바닥에 밥을 얇게 깔고 그 위에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삼겹살을 올렸다.

    삼겹살 위에 잘 구워진 마늘과 김치, 파무침을 올리자 쌈을 말았다.

    도저히 입에 안 들어갈 것 같은 커다란 쌈이 완성되자 서이렌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것을 입에 밀어 넣었다.

    박선호 큼지막한 쌈을 먹는 서이렌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냥 쌈을 먹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떨렸다.

    맞은편에 앉은 나는 서이렌이 입에 쌈을 구겨 넣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암튼 먹는 데는 진심이라니까.

    윤서혁이 내게 술잔을 내밀었다.

    내가 사이다가 담긴 잔을 들자 윤서혁이 웃었다.

    “제가 화장실 다녀오다가 들었는데 저기 멀리 앉아 있는 레전드 필름 식구들이 원 대표님이 주당인 줄 알더라고요. 소주를 컵에 따라 드신다고요.”

    “이걸 소주로 잘못 봤나 보네요.”

    “대표님이 사이다를 소주처럼 드셔서 그래요. 무슨 탄산음료를 마시면서 그렇게 ‘캬!’를 연발하십니까?”

    “사이다가 얼마나 시원한데요? 삼겹살이랑도 딱입니다.”

    “하하하. 그건 그렇죠. 박선호 씨도 같이 한잔해요.”

    “예.”

    박선호가 놀라며 술잔을 들었다.

    박선호는 술을 잘못 마시는 건지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얼굴이 시뻘겠다.

    “선호 씨는 인제 그만 마셔야겠는데요? 술이 약한가 봐요.”

    “예. 그나마 맥주라서 먹는 거지 소주는 마시면 그대로 기절합니다.”

    “그럼, 조심해야겠네. 그것도 마시지 말아요.”

    “그래도 될까요?”

    “회식이 술 마시자고 모이는 것도 아니잖아요. 봐요. 나도 내내 사이다만 먹고 있는걸요.”

    “예. 대표님. 그럼, 저는 그만 마실게요.”

    박선호가 맥주잔을 내려놓고 환하게 웃었다.

    박선호는 웃는 모습이 참 선하다.

    남자인 내가 봐도 그의 선한 미소를 보면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온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사이다를 모두 마시고 빈 잔을 내려놨다.

    그때 내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깡기자에게 온 전화였다.

    “저는 잠시 전화 좀 받고 올게요.”

    * * *

    “예. 깡기자님. 저 원세강입니다.”

    [대표님. 지금 천재용 라이브 방송하고 있어요.]

    “라이브 방송이요?”

    [은퇴 방송이래요. 지금 방송에서 병나발 불면서 울고불고 진상을 부리고 있습니다.]

    은퇴라는 말에 나는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왜 갑자기 은퇴하나요?”

    [천재용이 최근에 임준학 미친 듯이 씹고 다녔었잖아요. 임준학이 진설의 숨겨진 아들이라고 루머 방송 내보내고 말이에요.]

    “예. 저희가 고소할 거라고 하니까 그 영상은 바로 내렸었죠.”

    [대표님은 말만 그렇게 하고 고소하지 않으셨는데 임준학을 필두로 그동안 천재용이 씹은 다른 연예인들 수십 명이 모여서 고소장 제출했나 봐요.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로펌을 통해서 거액의 손해 배상 소송을 했대요.

    천재용이 지금 라이브 방송에서 울면서 이제 방송 접을 테니 고소 취하해 달라고 쇼하고 있어요. 제가 캡처 사진 보내 드릴게요. 잠시만요.]

    깡기자는 곧바로 내 톡으로 사진 한 장을 보내 왔다.

    그녀의 말대로 눈물범벅인 채 깡소주를 마시는 천재용의 얼굴이 보였다.

    사진 속에는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조롱하며 비웃던 기레기 천재용은 없고 인생의 낙오자만 보였다.

    그의 입에서 여배우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워딩이 나왔을 때부터 이렇게 될 것이라 예상했던 바다.

    임준학과 그의 배경인 대광그룹에서는 비밀이 터지길 바라지 않을 거다.

    [천재용은 이제 완전히 끝난 거 같아요. 미튜버로 돌아왔을 때는 식겁했는데. 다른 기자들도 이제 천재용은 끝이라네요.]

    “그러게요. 이제는 정말 돌아올 수 없겠군요.”

    [주위가 시끄러운 거 보니까 회식하시나 봐요?]

    “예. 레전드 필름 식구들과 함께 회식하고 있습니다.”

    [그러시구나. 대표님은 점점 제 손이 닿기 어려운 곳으로 가시는 거 같아요. 조만간 LOK, 숲 엔터, 골드와 함께 대한민국 사대 기획사의 반열에 오르시는 거 아닌가요?]

    “농담이라도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농담 아닙니다. 정말 그렇게 될 거 같다고요.]

    “제가 깡기자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해야겠네요.”

    [하하하. 나중에 엄청나게 성공하셔도 저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럼요. 저 그렇게 배은망덕한 사람은 아닙니다.”

    [이제 들어가 보세요. 제가 대표님 시간을 너무 빼앗았네요.]

    깡기자와 전화를 끊은 나는 미튜브 앱을 컸다.

    독설피디 은퇴 방송이라는 타이틀로 천재용이 정말로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었다.

    천재용은 취한 채 얼토당토않은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제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저는 노력했다고 생각합니다.]

    클릭해 보니 실시간 댓글이 가관이었다.

    - 국민의 알권리?? 장난하냐?

    - 쟤 고소 몇 건 들어왔다고?

    - 자잘한 것까지 다 합치면 열 건 넘는다던데?

    - 그 정도면 저렇게 진상 부리는 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네. ㅋㅋㅋ

    - 정의구현. ㅋㅋㅋㅋ- 쌤통이다.

    - 잘가라. ㅋㅋㅋㅋ

    천재용이 울면서 사죄했지만, 민심은 싸늘했다.

    전방위적으로 씹고 다녀서 그런지 어느 판에서도 그를 옹호해 주는 사람이 하나 없었다.

    하다못해 독설피디를 구독하고 있는 육십만 구독자들까지도 욕을 해 댔다.

    이제 정말로 끝이구나.

    앓던 이가 빠지는 것처럼 속이 다 시원했다.

    나는 미튜브 앱을 끄고 잠시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갔다.

    * * *

    박진숙 팀장을 비롯한 레전드 필름 식구들이 술병을 들고 회식 장소를 순회하고 있었다.

    “어라? 원 대표님은 어딜 가셨지?”

    원세강, 윤서혁 그리고 박선호까지 세 명 모두 자리에 없었다.

    “뭐야? 원 대표님 혼자 컵에 소주를 마시고 있던 거야? 대단하시네.”

    “박 팀장님. 우리 저기 강진석 이사님 자리에 먼저 가요.”

    “그럴까?”

    “제가 가기 전에 원 대표님 술잔을 먼저 채워 넣겠습니다.”

    “에이. 나중에 내가 와서 채워야지.”

    “회식 자리 이탈한 벌로 주는 거죠. 벌주입니다. 한잔 마시라고 하세요.”

    “빨리 와. 강진석 이사 우리 보고 도망친다.”

    “예. 팀장님.”

    박진숙이 직원을 데리고 그곳을 빠져나가자 마침 화장실에 다녀온 박선호가 돌아왔다.

    박선호는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온 모양이다.

    머리를 예쁘게 까고 왔던 박선호의 앞머리가 물에 젖어서 이마를 가리고 있었다.

    레전드 필름 직원들은 물에 젖은 박선호를 보며 속으로 심쿵했다.

    그때 깡기자와 전화 통화를 마친 내가 자리에 돌아왔다.

    나와 박선호가 나란히 앉자 직원들이 서로 수군거렸다.

    “박선호 머리 내리니까 아이돌 같다.”

    “원 대표님 셔츠 단추 하나 푼 거 봐 봐. 엄청 섹시해.”

    “대표님이랑 박선호. 둘 다 너무 잘생겼어.”

    “여기가 천국이지. 크큭.”

    나는 앞자리의 직원들이 우리를 보며 떠드는 것도 모르고 박선호를 살폈다.

    “괜찮아요? 물이라도 한잔 마실래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괜찮습니다.”

    박선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내가 보기엔 힘들어 보였다.

    “정말 괜찮겠어요?”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요. 힘들면 말해요.”

    나는 갑자기 사이다가 땡겼다.

    천재용의 몰락 소식을 들으니 가슴 한쪽에 쌓아 올린 둑이 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 앞에 가득 채워진 사이다 잔을 들었다.

    내가 그걸 마시려는데 박선호가 말을 건넸다.

    “대표님.”

    “예?”

    나는 사이다 잔을 내려놓고 박선호를 쳐다봤다.

    박선호는 속이 타는 얼굴로 말했다.

    “저도 사이다 좀 주세요. 가슴이 답답해서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요. 여기 있어요.”

    주위를 둘러보니 빈 잔이 없었다.

    나는 내가 마시던 사이다 잔을 들어 그걸 박선호에게 건넸다.

    “내가 마시던 건데 이거라도 들어요.”

    “감사합니다.”

    박선호는 내가 건넨 잔을 들더니 그걸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박선호가 기침하며 잔을 내려놨다.

    그는 놀라서 마시던 사이다를 내뿜었다.

    “왜 그래요?”

    “이거……. 이거…….”

    박선호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화장실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나는 박선호가 내려놓은 사이다 잔을 들었다.

    잔을 가까이 대자 독한 소주 냄새가 내 코를 확 찔렀다.

    나는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 *

    화장실에 갔다가 나온 서이렌이 고깃집 복도를 걷고 있다.

    고깃집을 통째로 빌렸기에 일반 손님이 없어서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이렌은 바로 들어가지 않고 핸드폰을 들었다.

    갤러리 앱을 켜고 복사도에서 찍은 엠티 사진을 보던 서이렌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며 박선호가 시뻘게진 얼굴로 뛰쳐나왔다.

    서이렌은 박선호의 얼굴을 보고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박선호는 점점 눈빛이 흐려지더니 몇 걸음 못 가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박선호가 허수아비처럼 허물어지는데 서이렌의 달려가 그를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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